*탐방구간: 개군레포츠공원입구- 양평교-아신역
*탐방일자: 2026. 2. 15일(일)
*탐방코스: 개군레포츠공원입구-양덕리지석묘-현덕교-갈산공원-양평교-양강섬
-양근성지-덕구실보도육교-아신역
*탐방시간: 11시47분-17시50분(6시간3분)
*동행 : 나 홀로

인류가 한반도에 살기 시작한 것은 구석기시대부터입니다. 인류가 먹거리를 찾아 산과 들로 떠돌아다니다 자리 잡은 곳은 강변의 동굴이었는데, 남한강변 단양의 금굴 동굴 유적이 바로 그것입니다. 금굴 동굴유적 외에도 공주의 금강변에서 나온 석장리 유적과 연천의 한탄강변에서 나온 전곡리 유적 등은 강변에서 고기를 잡아먹으면서 막집을 짓고 살았음을 말해주는 것이라고 오순제 한국고대사연구소장은 그의 논고 「강과 한국역사문명」에서 말했습니다.
한강이 꽃피운 문명은 구석기시대의 동굴 유적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신석기시대에 이르러 사람들은 한강변인 서울의 암사동 유적에서처럼 강변의 모래사장에 움막을 짓고 살았습니다. 강에서 고기를 잡아먹고 산에서 열매를 채집하여 먹고 살면서 점토로 만든 토기에 도토리 등 남은 음식을 저장했다고 합니다.
청동기시대에는 사람들이 강변에 살았던 신석기시대와는 달리 강변의 높은 구릉지대로 옮겨 살았습니다. 밭을 일구고 얕은 곳은 빗물이나 강물을 이용하여 논을 만들어 농사를 짓기 시작한 것이 바로 이 시대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살기 좋은 강변에 모여 부락을 이루고 살았기에, 거석문화를 상징하는 지석묘(支石墓)가 이 시대의 대표적인 유적이 되었을 것입니다.
청동기시대의 대표적인 무덤 양식인 지석묘는 당시 지배층의 권위를 상징하는 거석기념물로, 고인돌이라고도 합니다. 한강 변에서 거석문화의 상징인 지석묘가 단양, 충주, 여주, 양평, 파주 등 도처에서 발견되었다는 것은 한강이 많은 사람들이 모여 살기에 그만큼 좋았다는 것을 뜻한다 하겠습니다.
이번에 한강을 따라 걷는 길에 들른 곳은 양덕리지석묘입니다. 양평군개군면양덕리의 남한강변 강안사구의 사질 충적대지 내에서 발견된 지석묘는 총 5기로, 연세대에서 발굴한 1기는 연세대 박물관으로 옮겨졌고, 양덕리지석묘 4기는 단국대에서 발굴한 것을 2003년 현 위치로 옮겨 복원한 것이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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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본 집을 출발해 전철로 경의중앙선의 양평역까지 이동하는데 2시산20분가량 걸렸습니다. 양평역에서 개군면하자포리의 개군레포츠공원 입구까지는 택시로 이동했습니다.
오전11시47분 개군레포츠공원입구를 출발했습니다. 향리천 건너로 축구장이 자리한 개군레포츠공원의 입구에서 구미양수장까지는 한강 우안의 강변을 따라 걸었습니다. 강변에서 벗어나 나지막한 고개를 넘어 다다른 양덕리 버스정류장 앞 삼거리에서 왼쪽으로 꺾어 양덕리 지석묘를 들렀습니다.
안내판의 소개글에 따르면 양평군 향토유적 제39호로 지정된 양덕리지석묘는 대체로 상면이 편평한 개석 이래에 자갈돌로 부분적인 받침을 한 형태로 출토되었습니다. 지석묘가 다량으로 출토된 이 지역은 “주변 앙덕리 선사유적유물산포지와 연계할 경우 유물 분포상 유물 산포범위가 넓고, 퇴적 상황을 고려할 경우 지하에 유구가 매장되어 있을 가능성이 매우 높은 지역”으로 “유적 및 유물의 시기 또한 신석기시대부터 원삼국시대에 이르는 등 매우 넓은 시간 폭을 가졌으나, 그간 앙덕리 일대의 잦은 홍수 범람에 의해 층위(層位)의 교란이 심하여 유구와 유물이 많이 소실된 것으로 보인다.”고 합니다. 1998년 마지막 발굴 후 앙덕리마을회관 앞에 방치되어 있던 고인돌을 주민 편의와 여가 활동을 위한 양덕리소공원 조성계획에 의거 2003년 현 위치로 이동 복원해 놓았기에 편하게 볼 수 있었습니다.
바로 옆 한강변의 전망쉼터로 옮겨 다시 만난 한강을 조망한 후 가로수 벚나무가 도열해 있는 한강 우안의 제방길로 들어섰습니다. 길지 않은 이 제방길은 저와 연배가 비슷한 주민 한 분과 같이 걸었습니다. 가평군에서 이주한 이분의 말씀에 따르면 벚꽃이 피어 화사한 날은 며칠 되지 않는데 꽃이 지고 나면 그간 몰려든 벌레들을 구제(驅除)하느라 많이 힘들다고 합니다.
13시28분 흑천 위에 놓인 현덕교에 다다랐습니다. 제방ㅇ 길을 걸은 이분과 헤어지고 현덕교를 건너면서 꽁꽁 얼어붙은 흑천과 한강의 합류점을 카메라에 옮겨 담았습니다.
흑천은 한강기맥이 지나는 금물산 자락에서 발원해 여기 현덕교 아래 합류점에서 한강으로 흘러드는 한강의 제1지류입니다. 꽁꽁 얼어붙은 흑천은 하천폭이 꽤 넓게 보여 하천길이가 꽤 길다고 생각했는데, 확인해 본즉 약37Km에 불과했습니다. 하천길이가 짧은데도 하천 폭이 넓다는 것이 유역이 특별히 넓어서일 텐데 정말 그런 것인지는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현덕교를 건너 양평읍으로 발을 들이자 강 건너로 외양이 호화유람선을 닮은 코바코(KOBACO)연수원건물이 선명하게 보였습니다. 한강하구전방 107Km지점을 지나며 눈여겨본 늪지대의 작은 섬을 둘러싼 파란 빙판에서 겨울의 마지막 몸부림을 읽었습니다.
제가 걷고 있는 길이 가무내길이라는 것은 표지판을 보고 알았습니다. 이 표지판이 제공하는 “경기옛길, 제5길, 가무네길, 평해길, 양평4.4Km, 흑천0.8Km, 제6길17.7Km, 양평역-5.2Km-현위치-흑천-5.0km-원덕역-7.5km –용문역, 경기도, 구리시, 남양주시, 양평군, 경기역사문화유산원” 등의 정보들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관련 자료를 찾아보아야 정확히 알 것 같습니다. 이 길의 이름 ‘가무내’가 흑천이라는 것은 한참 후에야 생각났습니다.
강변을 지키고 있는 앙상한 가지들의 버드나무들을 보노라면 “겨울이 오면 봄도 멀지 않으리”라는 셀리의 시 「서풍부」가 떠오릅니다. 입춘이 지난 지 며칠 되었는데도 봄기운이 느껴지지 않는 것은 여전히 냉랭한 강바람이 불어 그러할 것입니다. 창대2배수펌프장을 지나 왼쪽 아래 수변공원으로 내려서 갈대밭 사이에 낸 흙길로 들어섰습니다. 강변의 암석이 얼핏 보아 양덕리에서 본 지석묘를 많이 닮았다 했는데 암면에 세월의 때가 끼지 않은 것으로 보아 지석묘가 아닌 것이 분명한 것 같습니다. 오(伍)와 열(列)이 갖춰진 버드나무 숲(?)을 지나 다시 제방 길로 올라서 갈산공원에 자리한 호국무공수훈자공적비, 6.25참전기념비, 월남참전기념비와 양평독립유공자공적비를 찾아가 참배했습니다.
6.25전쟁에 참전한 16개 우방국의 국기가 게양된 것은 여러 곳에서 보았지만, 월남전에 참전한 부대의 명칭과 마크가 새겨진 부조물(?)은 이번에 처음 보았습니다. 부조물에서 확인한 부대는 주월한국군사령부를 위시하여 청룡부대, 맹호부대, 백마부대, 십자성성부대, 비둘기부대, 은마부대, 백구부대 등입니다. 이를 보자 고등학교 1학년 때인 1965년 가을에 모래사장을 걸어 월남에 파병되는 맹호부대 장병들의 무운을 비는 여의도 환송회에 참가한 일이 생각났습니다.
15시8분 양평교에 다다랐습니다. 참전비를 둘러보고 해발 62.9m의 갈산 자락에 낸 강변 길을 걸으며 앙증맞은 등대의 조형물을 보았습니다. 이 등대는 일몰 후 22시(겨울에는 21시)까지 30분 간격으로 등대조명을 연출한다고 합니다. 바다가 아닌 내수면에 설치되어 작동 중인 등대로 제가 직접 본 것은 멍수등대라고도 불리는 영산강의 몽탄진등표입니다. 등대조형물을 지나 다다른 양평교를 아래로 지나며 양근나루터를 알리는 표지석을 보았습니다. 알고 보니 마포에서 소금과 새우젓을 실은 장삿배가 여기 양근나루에 물건을 부려 놓으면 행상인들이 우마차에 싣고 양평의 내륙지방이나 원주, 횡성, 홍천으로 가서 판매를 했을 만큼 양근나루는 물류기지로서 한 역할을 맡았던 곳이었습니다.
양근나루터를 지나 들어선 한강 우안의 강변길에서는 강 건너 수변공원이 잘 보였는데, 시내 쪽은 오른쪽에 제방이 높게 세워져 전혀 보이지 않았습니다. 양평초등학교를 지나 ‘양평 적대세력 및 부역 혐의 사건 희생지’를 알리는 안내판의 소개글을 읽고서 의아해한 것은 “삼가 희생자의 명복을 빕니다 ”라는 글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명복을 비는 대상이 무고하게 희생된 부역자 뿐만 아니라 적대세력도 포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양근천 위에 놓인 양근교를 건너 양감섬을 들렀습니다. 하중도인 양강섬에서 눈길을 끈 것은 천주교양근성지에서 양평의 순교자를 기억하기 위해 세운 조각물 ‘영원으로 가는 사다리’였습니다. 순교자의 이름과 세례명은 얼마 후 양근성지를 찾아가 확인했습니다.
양평도서관을 지나 다시 한강에서 벗어나 양근로의 자전거도로를 따라 걸었습니다. 외관이 특이해 보이는 3층 건물의 스타벅스를 지나 다다른 곳은 김종환의 노래비가 세워진 물안개공원입구입니다. 모두가 힘들었던 IMF 시절 가수 김종환이 지친 몸을 이끌고 양평을 지나다 강가에 차를 세우고 잠이 들었다가 깨서 물안개가 가득 피어 있는 것을 보았다고 합니다. 아름다운 수변 풍경에 감명받은 김종환은 즉석에서 노래를 만들었는데, 그 노래가 바로 국민애창곡이 된 ‘사랑을 위하여’ 라고 안내글은 전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물안개 공원은 둘러보지 못하고 바로 자전거길을 따라 걸어 덕평천 위에 놓인 오빈교를 건넜습니다
16시32분 양근성지를 들렀습니다. 오빈교를 건너 왼쪽 아래 덕평천으로 내려가 우안길을 걷다가 하천 건너로 양근성지가 가까이 보여 들렀습니다. 마침 문을 닫는 시간이 되어 신부님의 허락을 받고 문 안으로 들어가 천주교양근성지순교자기념성당 건물과 홍익만 안토니오 등 9분의 순교복자 얼굴 그림을 카메라에 담아왔습니다. 양근성지는 천진암에서 강학회를 주도한 궐철신과 한국천주교의 창립주역인 권일신이 태어난 곳입니다. 이승훈이 궐철신과 권일신에게 교리를 배운 충청도의 이존창과 전라도의 유항검에게 세례를 준 곳이 바로 양근입니다. 양근천과 남한강이 만나는 오밋다리 부근, 즉 양근대교 밑은 하느님과 진리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초개처럼 버린 순교지로, 윤유오, 윤점혜, 권상문, 김일호, 유한숙 교우들이 이;곳에서 순교했다고 안내문이 적고 있습니다.
양근성지를 출발해 아신역으로 향했습니다. 덕평천을 건너 한강 우안의 강변길로 들어서자 한국의 마터호른이라 불리는 백운봉이 선명하게 보였습니다. 해발 941m의 백운봉이 알프스산맥에 자리한 해발 4,478m의 마터호른으로 불리는 것은 깎아지른 듯한 삼각뿔의 외관이 닮아서입니다. 이 봉우리는 이미 두 번 오른 바 있어 멀리서도 눈에 잘 띈 것 같습니다. 한강 하구100Km전방지점과 쌍용수상레저를 차례로 지나 덕구실보도육교를 건넜습니다.
17시50분 아신역에 도착해 27번째 한강탐방을 마쳤습니다. 덕구실보도육교를 건너 왼쪽으로 이어지는 자전거도로로 들어섰습니다. 길 건너로 LPG충전소가 보이는 한강하구99Km전방 지점을 지나 옥천냉면황해식당에 이르자 언제인가 한번 들러 냉면을 먹었던 일이 생각났습니다. 사탄천 위에 놓인 고읍교를 건너 카카오맵을 보고 길을 찾아 아산역에 이르자 일몰 전에 하루 일과를 마쳤다 싶어 안도했습니다. 18시14분에 출발하는 경의중앙선 전철을 타고 가 이촌역에서 환승, 산본 집에 도착한 것은 20시30분이 다 되어서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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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평처럼 산수가 빼어난 곳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시를 지어 남긴 분은 조선 중기의 문인인 삼연(三淵) 김창흡(金昌翕, 1653~1722)입니다. 서울 출신으로 본관은 안동(安東)인 김창흡은 병자호란 때 주전파를 대표한 좌의정 김상헌(金尙憲)의 증손자이자, 영의정 김수항(金壽恒)의 아들로, 영의정을 지낸 김창집(金昌集)과 예조판서와 지돈녕부사 등을 지낸 김창협(金昌協)의 실제(實弟)이기도 합니다. 김창흡은 기사 환국으로 아버지가 사사되자 설악산에 은거하면서 수많은 문학작품을 남겨 설악산을 세상에 널리 알렸습니다. 설악산에서 포천의 영시로 옮겨 은일생활을 하다가 신임사화로 절도에 유배된 형 김창집이 사사되자 지병이 악화되어 유명을 달리했다고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소개하고 있습니다. 형들과는 달리 관직에 나가지 않고 초야에서 성리학과 문학에 매진한 김창흡이 남긴 한시는 「과갈산풍일심미(過葛山風日甚美)」입니다.
<過葛山風日甚美(과갈산풍일심미)>
(갈산을 지나는데 풍광이 몹시 아름다웠다)
水滑琉璃漾玉沙 (수활유리양옥사) 유리처럼 맑은 강물이 하얀 모래에 넘실대고
鳧鷺晞日踏輕霞 (부예희일답경하) 오리와 갈매기는 햇빛을 쬐다가 옅은 노을로 날아가네
中流聞歇篙師手 (중류간헐고사수) 강 가운데서 뱃사공은 잠시 손을 멈추고
笑指龍門塔影斜 (소지용문탑영사) 웃으면서 용문산을 가리키는데 탑 그림자 비키어 있네
양평에서 가장 낮은 해발 63m의 갈산을 지나며 이 시를 지은 김창흡이 양평에서 가장 높은 해발1,157m의 용문산을 모를 리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누구 못지않게 유산기(遊山記)를 많이 남겼으며 설악산에서 오래 은거했을 만큼 산을 사랑한 분이었기 때문입니다. 김창연은 용문산을 이미 알고 있으면서도 한강의 풍광에 취해 잊고 있다가 뱃사공이 가리키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 탑그림자를 본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비문에는 ‘鳧鷺(부예)’를 오리와 갈매기로 번역되어 있는데 바다 위를 나는 갈매기를 양평의 한강에서 만나본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기에 갈매기는 다른 새로 바꾸어야 할 것 같습니다.
<탐방사진>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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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앵베실 작성시간 26.06.24 2년 전에는 한강다리 33개(지금은 34개 - 구리호평대교 가설로)에 대해서도.
https://m.cafe.daum.net/ggtrail/8XTQ/7577?svc=cafeapp -
작성자앵베실 작성시간 26.06.24 갈산(葛山)공원의 '갈산'은 楊平邑 지역의 옛 이름으로서 '칡이 많았다'하여 '칡미'라고도 부른다고 합니다.
2021년 어느날 경기옛길 平海길 제5길{물끝길(楊根나루길) 14.2㎞(신원역~양평역)와 양평 물소리길 제2코스(터널이 있는 기차길) 8.6㎞(신원역~아신역) + 제3코스(강변이야기길) 11.4㎞(아신역~양평역) = 20.0㎞여서 왜 같은 구간인데 두 개의 길이 5.8㎞나 차이가 날까 두 개의 길 코스별 따라가기 지도를 펼쳐놓고 對比해 본 제 글을 소환해 봅니다.
https://cafe.daum.net/ggtrail/Uxqt/12이미지 확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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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앵베실 작성시간 26.06.24 그리고 한강 따라걷기 27편 말미에 소환해 주신 楊平의 三淵 김창흡(金昌翕, 1653~1722)의 "과갈산풍일심미" 漢詩도 즐감하고 갑니다. 그 삼형제가 아래와 같다는데
첫째 金昌集(1648~1722)
둘째 金昌協(1651~1708)
셋째 金昌翕(1653~1722). 막내 김창흡의 멋진 칠언절귀 漢詩 2연에 등장하는 그 부예(鳧鷖)에 대한 시인마뇽님의 말씀에 일리가 있어 보입니다. 오리 부(鳧)는 예전 유명한 <사랑방> TV 프로그램에서 감초 역할하였던 故 전택부 선생을 왜 '오리'라고 하는지 몰랐는데 이제보니 성함의 끝자가 바로 이 오리 鳧였던 듯. 그리고 평화누리길 제8코스(반구정길)는 려말선초에 7王을 모셨다는 천하의 黃喜 정승이 말년에 갈매기(鷗)와 노닐었다는 임진강 변 반구정(伴鷗亭)도 臨津江 강변인데 웬 (바다)갈매기와 노닐었다는 것인지 선뜻 이해가지 않지만 西海 바닷물이 그곳까지 오히려 훨씬 더 북쪽인 평화누리길 제10코스(고랑포길)의 高浪浦까지 올라왔었다는 이야기도 있더군요.
황희 선생의 반구정 유적지 위치가 파주시 문산읍 사목리(砂鶩里)인데 이 鶩도 해오라기 혹은 집오리 '목'자라고 합니다. 암튼 갈매기(seagull)를 뜻하는 漢字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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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앵베실 작성시간 26.06.24 위 鷖(예)와 파주 반구정의 鷗(구)도 있고 또 경기옛길 慶興길 제6길(만세교길) 포천시 永中面에 있는 백로주(白鷺洲)의 鷺는 해오라기 '로' 인데 갈매기 예(鷖)와 비슷한 글자로 보입니다. 파주시 文山邑 사목리의 鶩까지 포함해서 네 글자 모두 세 鳥가 들어가기에.
요즘같은 여름철새 해오라기(black-crowned night heron)는 백로과(白鷺科)에 속한다고는 하지만. -
작성자시인마뇽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26.06.24 갈산이 양평의 옛이름이라는 것은 이제껏 몰랐습니다. 김창흡의 시에 나오는 부예(鳧鷖)는 오리와 재갈매기 같습니다. 3주 후 옥수역 근처인 중량천과 청계천이 만나는 합류점 인근에서 떼로 앉아 있는 재갈매기를 본적이 있습니다. 재갈매기는 갈매기와 비슷하게 생겼는데 강에서 볼 수 있는 철새라 합니다. 제가 양평을 지날 때 한강변에서도 옥수역 근처에서 본 재갈매기를 본 적이 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