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 속 돌봄과 배움을 통한 성장지원
꿈터학교 대표 배영길
■ 도시형 대안학교 작은 것이 아름답다.
도시에 있는 대부분 대안학교는 지역사회 내에서 ‘작은 학교’를 지향한다. 작은 학교를 지향하는 이유는 재정적인 어려움과 경험 부족으로 작게 운영하는 것이 아니라 교육철학, 교육이념을 가장 잘 펼칠 수 있는 효과적인 교육방식으로서 작은 학교를 전략적으로 선택하고 있다.
지역사회 내에서 가정적인 요인, 사회적·정서적인 요인, 학업적인 요인으로 방황하는 학교 밖 청소년을 대상으로 미시적인 접근 방법을 통해 여러 가지 문제와 위험에 노출된 청소년을 위험으로부터 보호해주고 다양한 프로젝트 수업을 통해 도전과 성취를 지원하면서 쌓은 경험을 바탕으로 공교육이 담아내지 못하는 아이들을 대상으로 차별화된 교육을 하고 싶어 2004년에 도시 속 기숙학교를 설립하여 학교 밖 청소년들의 성장을 지원하고 있다. 그동안 꿈터학교가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으며 지역사회 내 작은 대안학교로 자리매김하고 어떻게 성장했는지 함께 나누고 싶다.
■ 준석이와의 만남
초등학교 4학년 때 아버지의 사업실패로 인하여 어머니는 두 아들을 두고 집을 나갔다. 아버지는 항상 술에 의지하며 하루하루를 생활했고 그로 인하여 남동생과 끼니를 거르는 일이 많아졌다. 이런 환경에서 자란 준석이는 초등학교 졸업할 때 결석이 465일이었다고 한다. 학교를 가지 않고 가방을 들고 학교 가는 척 하면서 집에서 컴퓨터 게임만 하며 지냈고 그러지 않으면 PC방이나 비슷한 처지에 있는 또래 아이들과 공원에서 놀면서 지냈다고 한다. 가까스로 중학교에 입학했으나 초등학교 때부터 흥미를 잃은 준석이는 학교 가기가 싫어 하루 종일 장롱에 숨어 있었던 적도 있었다고 한다. 학교를 안 가면 아버지한테 혼날까봐 무서워서 아버지가 출근하기만 기다렸지만 그날따라 아버지가 일을 나가지 않아 꼼짝없이 장롱에 갇혀 있었다고 한다.
이 대목에서 아무래도 내 이야기를 좀 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나는 청소년기관에 청소년담당자로 공동체의식과 협조적인 사회성을 길러주는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진행하는 평범한 청소년지도사였다. 주말에는 청소년단체를 창단하여 체험활동을 진행하고 평일에는 초․중․고 학생들을 대상으로 책가방 없는 날, 청소년 수련활동을 만들어 청소년들의 성장을 촉진시키는 일을 했다. 무엇보다 소외된 청소년들을 위한 프로그램을 만드는데 관심이 있었기 때문에 캠프를 가더라도 주로 문제아라고 낙인찍힌 아이들과 함께하는 것이 좋았다. 그 아이들을 위해 캠프를 진행하려면 먼저 아서라. 며 손사래를 치는 그 학교 교사들부터 설득해야 했다.
그런 아이들과 나는 죽이 잘 맞는 편이였다. 그래서 소위 ‘노는 아이들’과 ‘노는 일’에는 자신이 있었다. 무언가 통하는 구석이 있다고나 할까? 이런 식으로 몇 년 동안 청소년기관에서 아이들을 만나면서 그 아이들을 위해 뭔가 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청소년기관에서 아이들을 직접 만나고 부딪치면서 현실의 한계와 자신의 한계를 보게 되었고, 기관 내에서 아이들의 삶에 개입하는데도 분명 한계가 많았다. 물론 다양한 프로그램을 통하여 아이들과 접촉할 수 있고 일시적인 보호와 쉼터역할을 할 수 있지만 개개인의 삶에 깊숙하게 개입하고 그들의 진정한 필요와 요구를 채워주는 것은 불가능했다. 용기를 갖고 청소년기관을 그만두기로 결단을 내렸다. 소신껏 일할 수 있는 아니, 그 아이들과 함께하기 위한 선택을 한 것이다.
지역교육 차원의 아이들의 대리부모 역할을 하려고 거리로 나섰다. 그렇게 지역 구석구석을 이 잡듯이 뒤지며 아이들을 찾아 나섰고 학교 밖 청소년들과 자연스럽게 연결고리가 형성이 되었다. 아이들의 동선, 아지트 등이 파악이 되었고 아이들 관계에 대한 지도도 그려졌다.
아이들이 있는 곳이라면 무조건 찾아가서 말을 걸고, 같이 운동하고, 함께 밥을 먹었다. “나 너희들하고 친해지고 싶고 만나고 싶어서 왔어. 재밌게 생활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싶은데 니들 사이에 내가 좀 끼면 안 되겠니? 그렇게 아이들과 2년 가까이 만난 것 같다. 돌이켜보면 “선생님 스토커 아니예요?” 소리까지 들었지만 서두르지 않고 아이들의 속도에 보조를 맞추고 재촉하지 않고 기다렸던 내 태도로 인하여 아이들은 마음의 벽을 허물어 주었고 자연스럽게 친밀감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상처받은 아이들에게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아이들에게 하나하나 가르침을 받고 내가 아이들에 의해 다듬어진다는 느낌이 들었다. 특히 준석이 같은 처지에 있는 아이들은 지역사회 내에서 보물 찾듯이 적극적으로 찾아 나서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들이 학교를 스스로 찾아오기를 기다린다는 것은 정말 어리석은 일이기 때문이다.
■ 학교 밖 아이들에게는 도시 속 튼튼한 울타리가 필요하다.
어릴 적 내가 살던 동네에서는 부모님뿐만 아니라 동네 어른 모두가 부모였다. 학교가 끝나고 친구들과 어울려 놀고 있으면 해 떨어지기 전에 어서 집에 가라고 한마디씩 해주는 동네 어른이 계셨고 배고프면 밥을 주시던 넉넉하고 정이 넘치는 대리부모, 형, 누나들이 많았다. 그게 바로 진정한 공동체이고 돌봄이었다. 내 아이 네 아이 할 것 없이 모두의 아이로 관심을 가지고 키워주는 마을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떠한가? 지역사회 안에서 우리 가정 밖 청소년과 학교 밖 청소년을 대하는 어른들은 관심 밖 아이들, 골칫덩어리 아이들로 외면하고 있었다. 그런 아이들을 대상으로 도시형 대안학교를 열었다. 당시에 일반학교보다 조금 늦은 9시부터 수업을 시작해서 4시에 수업을 마치는 등·하교를 하는 대안학교였다. 그런데 아이들은 등교 시간인 9시까지 오지 못했고 매일같이 아이들을 깨우러 집으로 가는 일이 많아졌다.
생활이 무너진 아이들에게 지금처럼의 운영 방식으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러 가지 문제에 노출된 아이들에게는 배움보다는 돌봄이 더 중요했다. 아니 돌봄이 없는데 어떻게 배움이 이루어 질 수 있겠는가? 그 아이들에게는 따뜻한 돌봄이 즉 배움이었다. 실질적으로 아이들의 행동변화를 위해서는 환경을 바꿔주고 야간에 적절한 돌봄이 필요하기에 도시 속 기숙학교로 전환하기로 결심했다.
가정집과 같은 단독주택을 얻기 위해 부동산을 찾았을 때 '대안학교=문제아 집합소'라고 생각하는 지역 주민들 때문에 아이들이 생활할 공간을 마련하는 게 어려웠다. 현 위치에 입주할 때도 지역 주민들의 반발이 거셌고, 주민 대표와 아이들을 만나게 해서 편견을 잠재운 뒤에야 입주가 가능했다.
불규칙적인 생활에 젖어 있던 아이들에게 아침 6시 30분에 일어나 아침운동, 담당 구역을 청소하고 밥을 짓고 설거지를 하는 등 스스로 찾아서 해야 할 일들이 많은 공동체생활은 역부족인 듯 했다. 몇몇 아이들은 견디지 못하고 가출하고 말았다.
계단 청소한다고 대걸레 들고 나갔다가 대걸레 던져 놓고 그대로 줄행랑을 쳐버린 아이, 몰래 짐을 챙겨 놓았다가 내가 잠든 새벽을 틈타 나가버린 아이, 체험활동으로 수락산 갔을 때 잠시 쉬는 사이에 집으로 가버린 녀석, 특기교육을 위해 요리 교실에 보냈는데 돌아오지 않는 녀석... 정말 말하자면 끝이 없다.
그런 상황에서 아이들은 농담조로 물어본다. “선생님, 며칠 만에 체포할 수 있어요?” 또 다시 숨바꼭질의 시작인 것이다. 하지만 길게 가지는 않는다. 대개 3일이면 아이들의 소재를 파악할 수 있다. 이제 나에게 아이들의 동선을 파악하는 건 어렵지 않은 일이기 때문이다. 가출해서 지낼 만한 아지트를 찾아내 다시 학교로 복귀시키기를 여러 차례 한 아이도 있다. 물론 스스로 배고픔을 견디지 못해 다시 돌아오는 아이도 있다.
이렇게 하루에도 몇 번씩 사건들이 끊이지 않고 일어났다. 기다림의 교육 끝에 학교 운영 체계가 잡히고 아이들의 긍정적인 상호작용과 아이들의 성장으로 학교는 안정감을 찾고 발전할 수 있었다. 아이들이 중심이 되어 합리적인 의사소통 구조를 만들어 신입생 선발과 시간표 편성까지 아이들과 함께 만드는 등 자발적이고 자율적인 학교로 바뀌었다. 또한 자립심을 길러주기 위해 역할분담을 통한 학교 청소, 요리, 설거지, 학교 이사와 고장난 부분이나 도배 등 스스로 하도록 하고 있다. 일상의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 속에서 성취감과 즐거움을 느끼도록 하는 것이 가장 실질적인 교육이라고 생각해서다. 또한 경험이 많고 잘 하는 학생이 부족한 학생을 돕고 이끌면서 공동체 전체의 발전을 위해 역할을 하는 건강한 꿈터학교 교육공동체가 되었다.
꿈터학교 1기 졸업생 준석이가 쓴 편지 글 중 일부를 발췌
항상 저희들이 가출하고 방황할 때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손잡아 주시고 올바른 길로 이끌어 주셔서 참으로 감사합니다. 항상 우리가 실패해도 항상 옆에서 위로해주면서 좋은 말씀으로 우리에게 자신감을 주시고 항상 넌 할 수 있다고 하시는 그 한마디가 저에게 큰 힘이 되었습니다. 만약에 제가 선생님을 만나지 못했더라면 저는 물론 저희 가족은 절망 속에서 생활했을 것입니다. |
꿈터학교 12기 졸업생 노영서의 자서전 중 일부를 발췌
꿈터학교는 제가 누구인지 가르쳐준 학교입니다. 내가 무엇을 좋아하고 잘하는 게 무엇인지 저조차 저를 알지 못하고 방황하고 있을 때 꿈터를 만나 저에 대해 고민할 수 있었고 저를 부끄럽지 않게 드러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사람은 사람들 사이에서 성장하며 사람에게 상처받은 것 또한 사람을 통해서 치유된다는 걸 알았습니다. 저의 7년이라는 시간을 아깝지 않게 해 준 꿈터에 감사합니다. |
꿈터학교 졸업생에서 꿈터학교 교사까지.
저는 15살 때 학교를 나왔습니다. 집에 있는 시간이 대부분이었고 외출이라고 해봐야 PC방에 가는 것밖에 없었던, 대인기피증에 우울증을 가진 소년이었습니다. 하루에 한 끼 먹기가 힘들었습니다. 따뜻한 방에서 지내본 적도, 따뜻한 물로 씻어본 적도 손에 꼽았습니다. 아무런 배움도 가지지 못했습니다. 누군가 아프면 같이 마음이 아플 수 있다는 것도, 사람과 대화하는 법도 몰랐습니다. 그런 저를 누구하나 신경 써주는 사람 없었고, 또 나 스스로도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많은 것을 모르고 살았습니다. 25살이 된 저는 교사가 되었습니다. 음악을 가르치고 어두운 표정의 아이들에게 먼저 다가가 곁에 있어줄 수 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집에 있기보다는 밖을 돌아다니고, 음악적인 활동을 하고, 사람을 만나는 것이 행복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내 삶에 꿈터가 없었더라면.. 하고 가끔 생각해봅니다. 나는 어떻게 되었을까? 꿈터를 만나지 못해서 뜨거운 국을 먹을 땐 천장을 데지 않게 조심해야 한다는 것도 모르고, 음악을 배우지 못하고, 사람과 만나 어울리는 즐거움을 깨닫지 못하고, 내 안에 아픔이 있다는 것도, 그것을 치료하기 위해선 나를 보여주어야 한다는 것도 몰랐다면 나는 어떻게 되었을까 하고 생각해봅니다. 꿈터는 제게 두 번째 가족이 되어주었습니다. 나를 보살펴주시는 부모님 같은 선생님들, 형제자매처럼 장난치고, 혼나며 또 혼내고 울고 울었던 선배, 후배들. 함께 했던 그 기억들이 지금의 저를 있게 했습니다. 아직도 배워야 할 것이 많아 때로는 학생으로, 때로는 형으로 아이들과 교학상장 중입니다. |
□ 콩나물시루에 물 붓기
어떤 사람들은 학교 밖 청소년들과 함께하는 것은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라고 말하지만 나는 그것이 밑 빠진 독이 아니라 콩나물시루라고 확신한다. 물을 붓는 대로 쫙쫙 아래로 빠져 나가지만 붓고 또 부으면 그 물을 먹고 어느새 콩나물이 쑥쑥 자라나는 콩나물시루 말이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이 콩나물시루를 껴안고 내 생애의 가장 행복한 시간들을 보내고 있다.
독일에도 ‘하임’이라고 하는 가정형 대안학교가 있다.
독일에서는 가정형 대안학교를 어떻게 생각할까?
“독일 정부는 하임에 살고 있는 청소년 1인당 연간 4만7440∼5만4750유로(한화 약 8000∼9200만원)를 지불합니다. 만만치 않은 비용 때문에 사회적 논란이 있지만 하임이 없을 때 발생할 비용보다는 매우 저렴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임 연구의 권위자로 알려진 도르트문트대학교(FACHHOCHSCHULE Dortmund)의 리하르트 귄더 교수는 ‘충분한 지원과 시간적 여유’를 위기 청소년 지원 정책의 핵심으로 꼽았다.
귄더 교수는 “막대한 지출 탓에 의회에서 반대 토론이 있었지만 손을 놓을 수는 없는 일”이라며 “위기 청소년들을 방치했을 때 생겨날 실업, 정신질환 등의 사회적 비용을 감안한다면 꼭 필요한 부분”이라고 강조했다.
현재 하임에 살고 있는 아이들은 8만여명으로 독일 20세 이하 인구의 0.5%를 차지한다. 청소년 200명 중 1명이 집 대신 하임에서 살고 있는 셈이다. 형편이 나은 가정에선 비용을 부담하기도 하지만 대부분 국가가 책임진다. 이를 위해 독일 정부는 연간 6조4000∼7조4000억원 정도를 하임에 쏟아 붓고 있다. 이는 올해 한국의 교육과학기술부 연간 예산(41조5800억여원)의 6분의 1 정도를 차지하는 규모다.
오늘날 독일의 하임은 위기 청소년들을 위한 소규모 전문 치료·교육 시설로 자리매김하고 있지만 처음에는 대규모 보육시설로 출발했다. 중세 교회가 전쟁과 전염병으로 부모를 잃은 아이들을 위해 세운 고아원이 시발점이었다. 그러다 1950년대 전쟁고아들을 위해 만들어진 하임은 열악한 경제여건 탓에 대규모로 지어졌고 보육교사 1명이 20∼25명의 아이들을 담당했다고 한다. 대규모 시설은 교육보다 수용에 초점이 맞춰져 인권문제 등 부작용을 양산했다. 상당수의 퇴역 군인들이 보육교사를 맡아 엄격한 규율을 강조했다.
91년 아동·청소년지원법이 개정되면서 하임 제도가 법으로 확립됐다. 대규모 시설의 실패를 바탕으로 하임은 소규모의 전문화된 ‘두 번째 가정’으로 변모했다. 8명 정도의 아이들을 4명의 지도교사가 담당하는 형태가 가장 전형적인 하임의 모습이다.
귄더 교수는 “어떤 교육과 치료도 강제적으로 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말했다. 독일의 하임이 짧게는 2년, 길게는 성인이 될 때까지 청소년들을 보살피는 것도 아이들의 자발적인 협력을 이끌어내기 위해서라고 한다.
한국인 부인과 살면서 해마다 한 번씩 한국을 다녀가는 그는 한국의 위기 학생 지원 제도 도입에 대해 “반갑다.”면서도 “실패로 끝난 과거 독일의 대규모 시설운영 사례를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고 충고했다.
“이 세상에서 문제 청소년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문제 사회, 문제 가정, 문제 학교만이 존재한다.”
(영국의 자유교육 실천가 니일)
필란드에서는 학생 탓을 하지 않고 가정, 사회와 학교 그리고 교사의 탓이라고 확신하며 온갖 노력과 시도를 통해 배움의 기회를 제공하기 위해 분발한다고 한다.
자신의 미래를 개척하기 위해 열심히 준비하고 노력해야 할 학교 밖 청소년들이 어떤 이유로든 좌절하고 자포자기를 한다면 이것은 매우 심각한 국가적 손실이며 사회적 비용이 드는 엄청난 일이다. 이 아이들을 외면하지 말고 한 사람도 낙오자가 생겨나지 않도록 국가나 지방자치 단체에서 성장을 지원해주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