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 세잔의 "풍경"

Paul Cezanne, House and Trees (Maison et arbres),1890-1894
우리가 다룰수 있는 그림이나 조각의 수가 제한되어 있기 때문에, 나는 애초에 한 작가의 작품을 두 개씩 다루지 않겠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세잔은 예외일 수 밖에 없었다. 개인적으로 세잔을 좋아하긴 하지만, 꼭 그 이유에서만이 아니라 피츠 월리엄 박물관의 전시실 벽에 마침 세잔의 후기 작품도 걸려 있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앞서 소개한 초기의 작품이 더 감동적으로 다가왔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혼란스럽고 열정적인 감정들을 정돈하지 못하고 처절하게 고통을 겪어야만 했던 젊은 시절 세잔의 화풍이 후기에 이르러서는 근대미술사에서 가장 질서있고 밝은 화풍으로 성숙함을 더하게 된 것이다. 그는 어둠으로 소용돌이치던 가슴을 지혜와 아름다움으로 승화시켰다고 할 수 있으며, 이러한 변화는 예술적으로 매우 독창적인 것이었다.
이 작품은 그의 후기 작품의 전형적인 예라고 할 수는 없지만, 바로 그 평범함 때문에 매우 중요하다. 오랫동안 진지한 경외감을 가지고 세상에 대해 숙고했던 세잔은 비로소 세계의 복잡함, 그 본질적인 무정형성을 포착할 수 있었고, 그것을 놀랄 만큼 차분하고 질서 있게 화폭에 담아냈다. 그가 이해했던 것은, 실재란 우리가 보고 그릴 수 있는 그런 뚜렷한 외형을 가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현실은 항상 유동적인 상태로 존재하는 것으로 매 순간 빛이 바뀌고, 우리가 몸을 조금만 움직여도 세계가 달라지는 것처럼 우리는 절대로 실재하는 현실로부터 거리를 두고 관찰하는 입장이 될 수가 없다. 우리 자신은 우리가 보는 것, 우리가 그리는 것의 한 부분일뿐이다.
이 풍경화의 밝음, 명확함, 그리고 아름다움은 대상의 존재를 대하는 예술가의 겸손함에서 나오는 것이다. 나무와하늘, 풀과그림자, 이 모든것들이 실체 그대로 묘사돼 있다. 세잔은 세계에 솔직하게 동참하고 있을뿐이다. 그는 자연 속에, 산과 정물 속에, 그리고 인간의 몸과 물질적인 존재 속에 뚜렷한 선을 긋지 않고 있는 그대로 작품을 그렸다. 그리고 물질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 사이에 아무런 경계도 두지않았으며, 인간성 속에 내재된 그둘이 섞여 있는것으로 보았다. 위대한화가인 세잔을 설명하기 위해 많은 말이 필요한 것은 아니리라. 이 작품은 단순한 동시에 심오하며 아름다워서, 애정 어린 시선으로만 포착될 수 있는 그런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