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글을 보시기 앞서 엄청 긴글이니 임산부나 노약자는 정독을 피하시고..(이게 아니군.. ^^;) 그냥 대충 출력해서 보시는게 편하실겁니다.
그리고 고바야시는 데자키를 논하려면 이사람도 같이 설명하는게 좋을거라 생각되서 같이 올립니다.
근데 올리면 모하나.. -.-
PS:데쓰카도 언제 올려보죠..(반응이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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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자키 오사무 감독은,<도전자 허리케인>과<베르사이유의 장미>,그리고 <디어 브라더> 등으로 국내에도 이미 잘 알려져 있다.
이들 작품들 외에도 데자키 오사무 감독이 연출한 만화영화들은, 비디오물에서부터 극장용 장편 만화영화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모습으로 변천되어 왔다. (아톰의 아버지 데츠카 오사무와는 다른 사람입니다. ^^)
1943년 도쿄에서 출생한 데자키 오사무는 어려서부터 만화와 영화에 높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인물이었다. 하지만 그가 만화도 영화도 아닌, 만화영화를 자신의 직업으로 선택하게 된 계기는 바로 일본 최초의 TV 시리즈 만화영화 <철완아톰>에큰 자극을 받았기 때문 이라고 한다.
결국 이 <철완 아톰>으로 말미암아 데자키 오사무는 무시 프로덕션에 문을 두드리게 되었고 이때부터 그는 동화와 원화를 거쳐마침내 <철완 아톰> 112화 '샘슨의 긴 머리'편 부터는 직접 연출까지 담당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후 데자키 오사무는 린타로, 스기이 기사부로, 토미노 요시유키 등과 같은 명감독들과 함께 호흡을 맞추며 초창기 무시 프로덕션이 제작한 TV 만화영화들에 핵심 제작진으로 참가하게 된다.
그중에서도 1967년 일본 후지 TV를 통해 방영된 <오공의 대모험>은 역시 데즈카 오사무의 원작 만화를 스기이 기사부로가 총감독을 맡고 데자키 오사무가 각화 연출을 맡았던 작품으로, 데자키 오사무의 초기 연출 스타일을 다소나마 느껴볼 수 있는 작품 이었다
특히 데자키 오사무는, 데뷔 초기 시절부터 콘티 작업을 주로 했었던 린타로와는 달리 동화와 원화 과정을 거친 작화 출신 연출자였기 때문에 자신이 참가한 작품들에 알게 모르게 자신만의 그림체를 조금씩 담아 나가게 되었다.
무협 만화영화 <도루루>의 경우도 데즈카 오사무의 원작 만화를 만화영화화 시킨 작품 이었지만, 함께 이 작품의 각화 연출을 맡았던 토미노 요시유키나 다카하시 료스케가 연출한 편들과 달리 데자키 오사무가 연출한 에피소드들은 데자키 오사무 만의 화풍이 은근히 베어 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60년대 무시 프로덕션의 TV 만화영화들에서 기량을 발휘했던 데자키 오사무는,1969년 처음으로 극장용 대작 만화영화의 제작에 참가 했다. 일본판 <아라비안 나이트>의 스탭으로 기용된 것이었다.
이 작품은 일본의 대표적 영화 메이져 헤럴드 영화사의 거대 자본에 의해서 만들어진 대작 만화영화로서 데즈카 오사무의 총제작 지휘하에 데자키 오사무를 비롯하여 스기이 기사브로, 히라타 토시오, 무라노 마사미,스기노 아키오 등과 같은 당시 무시 프로덕션의 최정예 TV 시리즈 감독들이 원화를 그린 작품 이었다.
특히 데즈카 오사무는 이 작품의 스케일감을 더욱 부각 시키기 위해서 배경의 일부를 미니어쳐로 제작하여 특수 촬영 효과를 사용 하는 등여러 부문에 거쳐 심혈을 기울인 흔적을 찾아 볼 수 있다.
하지만 아쉽게도 이 작품은 흥행에 참패하고 말았다. 최근의 디즈니 만화영화를 보는 것 같은 방대한 스케일과 세련된 색감 등 작품 자체로는 나무랄데 없는 이 작품은 그러나 관객들의 외면을 받고 말았던 것. 이런 이유로 제작사였던 무시 프러덕션이 도산 위기에 몰릴 정도였다.
그러나 이것은 후에 데자키 오사무의 감독 인생에 또 다른 계기가 되어주기도 한다.
하지만 무시 프로덕션에 닥친 위기는 오히려 데자키 오사무에게 전화위복의 계기를 마련해 주게 되었다. <내일의 죠>의 TV 시리즈를 연출할 수 있는 기회가 그에게 찾아 왔기 때문 이었다.
1968년부터 고단샤의 주력 소년 만화지 '소년 매거진'에 연재되고 있었던 치바 데쓰야 원작의 <내일의 죠>는, 당시 무시 프로덕션이 만성적인 적자에서 벗어나기 위해만화영화의 제작을 수주 받은,그리고 데즈카 오사무의 원작 만화가 아닌, 외부 작가의 원작 만화를 만화영화화 시킨 이례적인 작품 이었다.
바로 이 <내일의 죠>의 첫 번째 TV 시리즈를 통해서 마침내 감독 데뷔를 하게된 데자키 오사무는, 이 작품을 무시 프로덕션이 청탁 받은 단순 부업거리로 생각하지 않고 원작의 분위기를 잘 살려내어 방영 당시 엄청난 시청률을 기록했다.
물론 이것은 <내일의 죠>의 원작 만화가 지니고 있는 지명도가 크게 일조한것이기도 했지만, 데자키 오사무라는 이름을 일본 만화영화계에 각인 시켜 놓기에는 충분한 결과물 이었다.
애당초 데츠가 오사무라는 당대의 거장이 세웠으며 또한 그의 작품들을 중심으로 제작해온 무시 프러덕션에서 만화영화 인생을 시작한 데자키 오사무에게 그 무대는 커다른 힘이 되어주기도 했지만 반면 그가 자신의 독자적인 세계를 만들어가는데 오히려 방해가 되었는지도 모른다.
<천일야화>의 실패가 그의 보호막이면서 동시에 걸림돌이었던 데츠카 오사무 그리고 무시 프러덕션과 조금 거리를 두고 자신의 세계를 만들어갈 수 있는 계기가 된 것이다.
<내일의 죠>가 기대 이상의 호평을 얻게 되자 이때부터 데자키 오사무는 주변 제작사들로부터 많은 작품의 감독 제의를 받게 된다.
그중에서도 도에이 동화와 타쓰노코 프로덕션, 니폰 애니메이션사 등과 함께일본 TV 만화영화 시장의 대표 주자로 군림해온 도쿄 무비 신사는 데자키 오사무의 영입에 가장 적극성을 보인 제작사였다.
데자키 오사무는 일본 최고의 개그,명랑 만화가 아카즈카 후지오 원작의 <천재 바카본>을 시작으로 도쿄뮤비신사와 인연을 맺게 된다.
그를 처음 만화영화감독으로 이끈 무시 프러덕션으로부터 벗어나 이제 도쿄뮤비신사에서의 시기가 시작된 것이다
<천재 바카본>을 만든 같은 해 데자키 오사무는, 도쿄 무비 신사의 간판 만화영화였던 <루팡 3세>의 총 콘티를 맡아 다양한 화면 구성과 커트 배분 능력을 보여 주게 된다. 다만, 당시까지는 데자키 오사무와 무시 프로덕션과의 계약 관계가 남아 있었기 때문에'사키 마쿠라'라는 가명을 써서 비밀리에 작업을 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여기에다 이 작품은 데자키 오사무가 당시 이 시리즈의 감독을 맡고 있었던 미야자키 하야오와 함께 제작에 참가했던 유일한 작품이었다.
미야자키 하야호가 데츠카 오사무 이후 일본 만화영화를 이끈 또 한명의 주역이었고 보면 본격적으로 새로운 제작사와 함께 작업을 시작한 이 시기가 그의 폭넓은 작품세계를 일구는데 중요한 계기가 되었던 때라고 보아도 좋을 것 같다. 또한 앞으로 데자키 오사무가 도쿄 무비 신사를 통해 선보이게 될 걸작 TV 만화영화들의 탄생을 알리는 예행 연습이기도 했다.
데자키 오사무는 고교 재학 시절, 만화영화 감독이 아닌 만화가 지망생 이었다.
하지만 자신의 꿈이 이루어지지 않아서 사회에 진출하여, 한동안은 샐러리맨 생활을 하기도 했는데, 1962년, 데즈카 오사무가 자신의 만화를 만화영화화시키기 위해 설립했던 무시 프로덕션의 제 3기 동화맨으로 발탁되었다. 그리고 이것이 계기가 되어 되어 이때부터 만화영화를 천직 삼아 동화와 원화 과정을 착실히 배워 기본기를 닦아 나갔던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그만의 탁월한 작품 해석 능력이 더해져, 오늘날 데자키 오사무는 일본 최고의 각색 능력을 지닌 만화영화 감독으로 평가 받고 있다.
그는 이미 익히 알려져 있었던 만화나 소설을 어떤 모습으로 재구성해냈을까.
1973년, 마이니치 TV를 통해 방영 개시된 <에이스를 노려라!>는 데자키 오사무 감독이 도쿄 무비 신사와 정식 계약을 맺고 제작한 그의 실질적인 감독 데뷔작이다.
이 작품은 슈에이샤의 소녀 만화지 '마가렛트'에 연재되고 있었던 야마모토 스미카 원작의 만화를 데자키 오사무 감독이 직접 재각색하여 만든 TV 만화영화이다. 주인공 '오카 히로미'와 '류자키'를 중심으로 한 라이벌 구도의 대립 이외에도 코치와 선수간의 갈등을 매우 드라마틱하게 묘사하여 성인층에게 까지 많은 호평을 받은 작품 이었다.
이 작품은 지난 1988년 안노 히데아키 감독이 <톱을 노려라>라는 제목으로 패러디 만화영화를 만들었을 정도로 일본의 만화영화 팬들에게는 지금까지도 역대 최고의 스포츠 순정 만화영화로 기억되고 있는 작품이다.
결국 이 <에이스를 노려라!>로 데자키 오사무는 단숨에 일본에서 주목 받는 감독의 대열에 올라서게 되었다.
그런데 <에이스를 노려라!>로 동년배의 감독들 보다 훨씬 빨리 인기 감독이 된 데자키 오사무는 다음 작품으로 돌연 세계 명작 동화 <집없는 아이>를 선보였다.
당시 일본 만화영화계의 흐름이 대부분 인기 원작 만화의 후광에 의해 이끌려 가고 있는 상황이었지만, 오히려 데자키 오사무는 익히 알려져 있는 세계 명작 동화를 선택하여, 원작자의 간섭이 개입되지 않는 감독 스스로의 시각으로 자유롭게 그리고 새롭게 그 작품을 해석하고 재창조하고 싶었던 것이다.
때문에 데자키 오사무의 <집없는 아이>에는 원작에서는 느껴볼 수 없었던, 그만의 내용 구조와 새롭게 정리된 대사들이 매우 감동적으로 스며 있다. 또한 데자키 오사무는 이 작품을 일본 최초의 입체 TV 만화영화로 제작하여 방영 당시 큰 화제가 되기도 했다. 만화영화감독으로서 그의 탁월한 재능은 개성이 넘치는 연출력이기도 했지만 또한 원작에 대한 독특하면서도 예민한 각색능력 역시 놓치지 말아야 할 대목이다.
이처럼 그는 언제나 새로운 제작 기법을 실제 작품 제작에 적용 시키는 것을 좋아했던 인물이었으며 결국 여기에 자신 만의 독창적인 작품 해석 능력과 무시 프로덕션 시절부터 명콤비를 이루어 왔던 작화 감독 스기노 아키오의 정감 있는 그림체가 더해져셔 데자키 오사무가 만든 세계 명작 만화영화들은 니폰 애니메이션사의 세계 명작 만화영화들과 분명한 차별성을 보여주게 되었다.
이미 유명해져 있고 많은 팬들을 가진 지명도 있는 원작으로부터 그는 늘 새로운 작품을 재창조해냈다. <내일의 죠>나 <에이스를 노려라>에서 '원작보다 낫다'라는 쉽지 않은 평가를 이끌어냈던 그는 이제 TV시리즈 시장의 매우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던 '세계명작만화'에서도 그만의 각색능력을 선보인 것이다. 그리고 <보물섬>에서 그 정점을 본다.
데자키 오사무가 일본 TV 만화영화계에 남겨 놓은 최고의 걸작은 단연 <보물섬>이다.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 원작의 <보물섬>은 이미 세계 각지에서 영화로, 연극으로, 또 만화영화로 만들어진 바 있지만, 그중에서도 이 데자키 오사무의 <보물섬>을 최고의 작품으로 평가하고 있는 이유 역시 그의 탁월한 작품 해석 능력 때문 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데자키 오사무는 이 작품에서 문제의 외다리 해적 죤 실버에 대한 해석을 이전까지의 <보물섬>에서 비춰진 이미지들과 달리 하고 있다.
악역이지만 카리스마가 살아 있고 해적이지만 정감이 느껴지는 이중적인 모습의 인물로 재창조해 냈던 것이다. 이것은 당시까지 일본 TV 만화영화 시장에 팽배해 있었던 어린이 주인공 위주의 성격 배분 판도를 뒤집어 (주인공 짐 호킨스가 동경할 수 있을 만큼의)분명한 성격이 부여된 어른상을 보여준 것이었다.
흔히 극장판 만화영화에 비해 대개 무난한 그야말로 '아동용'으로 여겨지는 TV시리즈 애니메이션으로서 이만큼 존재감있는 캐릭터들을 볼 수 있는 작품이 또 있을까. 국내에서도 방영되었던 이 작품은, 결정적인 장면엣 화면 자체가 하나의 정지된 일러스트로 표현되는 그의 특유한 '하모니'기법의 사용으로도 인상적이다
<보물섬>을 통해 작가 의식이 반영된 TV 만화영화를 선보였던 데자키 오사무는 이듬해 다시 인기 원작 만화의 만화영화화 작업에 착수했다. 역대 최고의 인기 순정 만화 <베르사이유의 장미>를 감독하게 된 것이다.
프랑스 혁명을 배경으로 그려진 <베르사이유의 장미>는 아마도 <캔디 캔디>와 함께 국내에 최초의 일본만화 붐을 몰고온 작품으로 기억될 수 있다.
또 오스칼이라는 중성적인 매력의 캐릭터는 여전히 많은 사람들에게 기억된다. 이 애니메이션으로서의 <베르사이유의 장미> 역시 기술적으로 쉽지 않은 '순정만화의 애니메이션화'에서 매우 성공적인 사례로 꼽힌다.
다만 이 작품은 원작자인 이케다 리요코의 요청에 따라 데자키 오사무의 명콤비인 스기노 아키오가 아닌, 일본 최고의 미형 캐릭터 디자이너 아라키 신고가 작화 감독을 맡아 이전까지의 데자키 오사무 감독 작품들과는 작화적 분위기가 좀 다른 작품 이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도 데자키 오사무는 순정 만화 특유의 상징적 화면 구성과 다양한 커트의 배분으로 원작의 분위기를 훌륭하게 TV 화면 안으로 옮겨 왔다. 또한 오스칼을 비롯하여 앙뜨와네트와 페르젠 사이의 미묘한 관계를 원작 만화에서 보여진 모습 이상으로 깊게 연출한 모습도 확인해 볼 수 있으며, 독특한 어조로 매회의 마지막을 장식한 나레이션들도 만화영화판 <베르사이유의 장미>의 빼놓을 수 없는 백미일 것이다.
데자키의 만화영화는 똑같은 원작을 가지고도 전혀 새로운 형태로 만들어내는게 특징이다. 그리고 그의 이러한 제작 공식은 하나의 전형이 되어 많은 후배 감독들에게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이처럼 TV 만화영화 시장에서 자신만의 고유 영역을 지키고 있었던 데자키 오사무 감독은, 어떠한 이유에서인지 극장판 만화영화 시장에서는 기대했던 만큼의 성과를 올리지 못했다.
데자키 오사무의 첫 번째 극장 개봉작은 1979년 9월 14일에 공개된 <에이스를 노려라>이다. 그러나 이 작품은 애초부터 별도의 극장판 만화영화로 만들어진 작품이 아니라, 당시 <우주전함 야마토>의 흥행 대성공 직후 불어 닥친 극장 만화영화 붐에 편승해 도쿄 무비 신사가 서둘러 개봉 시킨 TV 편집판 극장 만화영화 였다.
그런데 이 극장 편집판 <에이스를 노려라>에서 유심히 지켜보아야 할 것은 결승전 경기 장면에서의 '교차 편집' 기법이다. 테니스 경기가 긴장감 넘치게 진행 되는 동안 상관 없는 헬기의 비행 장면을 교차시켜 보여 줌으로서 관객들로 하여금 작품의 시공간적 흐름을 연상할 수 있도록 유도하고 그러한 최소한의 장면들로 긴박감이 살아 있는 경기 장면을 연출해 낸 것이었다.
이 <에이스를 노려라>에 사용된 '교차 편집'기법(영화용어로는 '몽따쥬'.)은 세르게이 에이젠슈타인의 영화 <전함 포테킨>의 '오뎃사의 계단' 장면에서 최초로 사용된 이래 <언터처블>같은 영화에서 똑같이 오마쥬 되기도 하는 등 지금까지도 많은 영화에서 사용되고 있는 편집 기법이다.
이러한 영화적 작법을 데자키 오사무가 만화영화의 제작에 적용 시켰던 것은 그가 만화영화를 영화의 한 갈래이면서도 결코 영화에 뒤지지 않는 필름 매체로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즉 <에이스를 노려라>는 데자키 오사무의 실사 영화에 대한 도전장과도 같은 작품이었고, 데자키 오사무의 만화영화를 영화로 인식시킨 출발지였다.
<에이스를 노려라>의 TV 편집판이 예상 외의 큰 성공을 거두게 되자, 이때부터 도쿄 무비신사는 데자키 오사무가 연출한 걸작 TV시리즈들을 마치 예정된 수순 처럼 편집하여 극장 개봉 시키게 된다.
그중에서도 <베르사이유의 장미>의 경우는 개봉 당시 실사 영화를 합한 연간 흥행 영화 랭킹 7위에 랭크 되었는데, 이것은 당시 개봉된 만화영화들 중에서는 린타로 감독의 <은하철도 999> 극장판 다음으로 관객이 많이 들었던 엄청난 흥행 기록이었다.
특히 데자키 오사무가 TV시리즈에서 실험적으로 적용 시켰던 영화적 기법들은 그것들이 극장 화면으로 옮겨지자 비로서 진가를 발휘했다. 그가 <내일의 죠 2>에서 즐겨 사용했던 화면 분할 기법 역시 커다란 극장 스크린을 종횡으로 가르며 영사되자 관객들은 TV 브라운관을 통해 시청할 때는 느낄 수 없었던 박진감 넘치는 액션들을 만끽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들 TV 편집판들이 극장 개봉되어 엄청난 성공을 거둔 것과는 달리 정작 데자키 오사무는 이들 작품들이 극장에서 상영된 것에 대해 불만을 표했다고 한다. 왜냐하면 이들 작품들은 모두 데자키 오사무가 극장 개봉이 아닌, TV 방영을 목적으로 만들었던 작품들이었기 때문이었다
극장에서 개봉되긴 하지만 결국 한계를 가지 수 밖에 없는 TV 편집판들에 대한 불만은 마침내 데자키 오사무의 첫번째 오리지날 극장판 만화영화 <스페이스 어드밴쳐 코브라>의 제작을 실천에 옮기게 한다.
이 작품은 일본식 SF히어로물의 1인자 테라사와 부이치가 가슈에이샤의 소년 만화지 '소년 점프'에 인기리에 연재했던 원작 만화를 데자키 오사무가 극장용 장편 만화영화로 제작한 것으로, 이전까지의 만화 원작 만화영화들 과는 달리 먼저 극장판을 제작하여 개봉 시킨 뒤 후에 TV 시리즈를 제작, 방영한 이례적인 작품 이었다.
이 작품에서도 데자키 오사무는 다채로운 응용 투과광들을 선보이며 보다 세련된 제작 기법들을선보였다. 카메라의 조작에 의한 잔상 효과를 만들어 보여주기도 하고 여기에 더욱더 실제감 넘치는 입사광 효과를 가미 시켜 영상미를 강조 하면서 만화영화에서만 가능한 화면 구도와 다양한 카메라 워킹을 통해TV 만화영화 보다는 월등히 높은 퀄리티의 극장판 만화영화로서의 장면들을 연출해 내었다.
그러나 이 <스페이스 어드밴쳐 코브라>는 정작 데자키 오사무 자신 조차 인정하지 않는 그의 최악의 작품으로 평가 받으며 흥행에서도 부진을 면치 못한 작품이었다. 그것은 이 작품의 각색을 데자키 오사무가 아닌, 원작자인 테라사와 부이치 자신이 직접 했던, 다시말해서 데자키 오사무의 <코브라>가 아닌 테라사와 부이치의 <코브라> 였기 때문 이었다.
그로인해 이 작품에서는 데자키 오사무 특유의 원작에 대한 재해석의 흔적을 찾아 볼 수 없으며 다만 원작자인 테라사와 부이치가 추구해온 주인공의 영웅성만 강조되면서극장 만화영화가 갖추어야 할 원작과의 차별성이 부여되지 못했던 것이었다.
결국 데자키 오사무가 <스페이스 어드밴쳐 코브라>에서 보여준 것은, 주제 의식이 결여된 화려한 영상들 뿐이었다.
열심히 만들었던 이 작품이 흥행에 실패하게 되자, 데자키 오사무는 이대로 물러날 수 없다는 오기에서, 당시 일본 만화계에 최고 베스트셀러였던 사이토 타카오원작의 <고르고 13>을 자신의 일생일대의 대작 만화영화로 만들게된다.
1983년 5월 28일 개봉된 <고르고 13>은, 지금까지 단행본이 무려 100권이 넘게 발행된 당대 최고의 베스트셀러 만화를 만화영화화시킨 작품으로, TV시리즈와의 연계 제작계획 없이 오로지 한편의 극장 만화영화로만 혼신의 힘을 다해 만든 데자키 오사무 생애 최대의 역작이었다.
이 작품에서도 데자키 오사무는 절정기의 연출력을 선보였고 그 중에서도 자신의 트레이드 마크와도 같은 하모니 기법들은 더욱 더 빛을 발했다.
또한 그만의 암시와 함축이 담겨져 있는 영상 언어들은 마치 초현실주의 영화처럼 화면의 구석구석을 장식했다. 여기에 그는 다른 감독들이 미처 상상해 내지 못한 앵글과 퍼스펙티브에 의해서 카메라의 시점을 자유자재로 옮겨가며 사소한 장면 하나하나에까지 만화영화만의 장점을 십분 살린 화면 구성력을 보여 주었다.
특히 데자키 오사무는 과거 <에이스를 노려라>에서 처음으로 적용 시켰었던 '교차 편집' 기법에 대한 아쉬움이 남아 있었던 것인지, 이 <고르고 13>에서 다시 한번 좀 더 정리된 '교차 편집'을 보여주었다.
교차 편집이 주는 묘미는, 동일 시간 동안 발생한 두가지 사건의 일부 장면들만을 교차 시켜 보여 줌으로서 전체의 액션을 다 보여주지 않더라도 사건의 기승전결을 스스로 연상해 내게 된다는 점이다.
데자키 오사무는 이처럼 다분히 영화적인 제작 기법을 구사하는 한편, 그것을 만화영화적인 연출법과 적절히 혼용하여 사용함으로서 극적인 긴장감을 더욱 고조 시킬 줄 알았다. 특히 <고르고 13>의 요인 암살 장면은, 지나치게 만화적인 발상에서 연출된 장면이었지만 아이디어의 기발함 때문에 후에 <고르고 13>의 대를잇는 80년대 최고의 인기 첩보만화 <시티 헌터> 에서 똑같이 인용되기도 했다.
<고르고 13>이 가지는 또하나의 의의는 <스페이스 어드밴쳐 코브라>와는 달리 원작자의 간섭이 배제된 철저한 데자키 오사무의 만화영화 였다것이다. 데자키 오사무가 이 작품의 원작에서 차용해 온 것은 주인공 '고르고13'과 기본적인 내용 구조일 뿐, 나머지 설정과 스토리 전개에 필요한 모든 도구들은 데자키 오사무 사단에 의해서 모두 재창조된 것들이었다.
이들이 만들어낸 <고르고 13>의 영상들은 당시 만들어진 그 어떤 결과물들 보다도 탁월한 것이었고 오락적으로도 전혀 손색이 없는것이었다.
무엇보다도 <고르고 13>이 세계 만화영화사에 남고 있는 이유는 세계 최초로 컴퓨터 그래픽이 도입된 장면때문이었다. 물론 이것으로 이 작품은 기네스 북에도 오르게 되었다. 언제나 새로운 기법을 적극 활용해 왔던 데자키 오사무는 기존의 셀 애니메이션에서는 느낄 수 없었던 좀 더 박진감 넘치는 효과를 얻기 위해 당시까지 검증되지 않고 있었던 컴퓨터 그래픽 기법을 과감히 도입했던 것이었다.
물론 당시의 기술적 한계상 컴퓨터 그래픽과 셀 애니메이션을 한 화면에 합성해 낼 수는 없었지만, 데자키 오사무 특유의 커트 감각에 의해서 마치 컴퓨터 그래픽으로 처리된 군용 헬기와 셀 애니메이션으로 그려진 고르고13이 실제 대결을 펼치고 있는 것과 같은 장면을 연출해 내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처럼 한편에 만화영화에 적용시킬 수 있는 거의 모든 기법을 동원하여 완성한 데자키 오사무 감독의 <고르고 13>은 이후 만들어진 <아키라>나 <왕립우주군>과 같은 역대 일본에서 만들어진 모든 대작 만화영화들이 다 그랬던 것처럼 예외없이 흥행에서 참패를 하고 만다.
물론 <고르고 13>의 흥행 실패는 작품의 완성도 자체에 문제가 있었다기 보다는 데자키 오사무가 지나치게 시대를 앞서가려 했기 때문이라고 보는 것이 옳을것이다.
비록 그는 이 작품을 끝으로 한동안 일본 만화영화계를 떠나게 되지만, 언제나 새로운 것을 발견하고 창조해내고 도입했던 그의 창의적인 시도들은 80년대 일본 극장 만화영화계를 기름지게 살찌울 수 있었던 토양이 되어 주었다
결국 이러한 각 부문별 전문 스탭의 상호 보완 시스템에 의해서 데자키 오사무 감독의 작품들은 타사의 TV 만화영화들에서는 느낄 수 없었던 그만의 작품 분위기가 만들어질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고바야시 시치로가 데자키 오사무의 작품들에 제공한 것은, 단순히 배경 그림들만은 아니었다.
마침내 프린트 선장의 보물을 발견하게 되는 <보물섬>의 크라이 막스에 해당하는 장면의 최초 발상은 물론 데자키 오사무 감독의 콘티에 의해서 연출된 장면이지만, 다양한 각도와 구도에 의해서 커트와 커트가 연결되고 있는 화면 구성들은 실제로 고바야시 시치로의 장면 설계 능력이 크게 일조한 것들이었으며 때문에 고바야시 시치로는 배경 만을 그리는 배경 감독이 아니라, 작품의 무대가 되는 배경의 최초 설정에서부터 색조의 지정에 이르기까지 전체 화면들을 구성하고 관리, 검사하는 바로, 미술 감독의 개념을 일본 만화영화계에 최초로 정착시킨 인물이었다
고바야시 시치로에 의해서 그 영상미가 더욱 빛난 또 한편의 걸작 만화영화로는<베르사이유의 장미>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최근까지 역대 일본 최고의 순정 만화영화로 기억되고 있는 이 작품에서도 고바야시 시치로는 데자키 오사무 감독의 연출의도를 극대화시킨 장면들을 선사한바 있다.
그중에서도 <베르사이유의 장미>의 마지막회를 장식한 이미지 일러스트들은 고바야시 시치로가 직접 그린 삽화들로 원작자인 이케다 리요코가 그린 일러스트 이상의 가치를 인정 받으며 한폭한폭의 미술작품들로 평가 받은 바 있다.
이처럼 데자키 오사무와 함께 <에이스를 노려라!>를 시작으로 <집없는 아이>, <보물섬>,<베르사이유의 장미>, 그리고 <내일의 죠.2>에 이르기까지 70년대 최고 인기 TV 만화영화들을 빛낸 고바야시 시치로는, 1982년 데자키 오사무 사단의 첫번째 오리지날 극장 만화영화 <스페이스 어드밴쳐 코브라>에서 또 한번 그 진가를 발휘했다.
이 작품은 지난호에 언급한 바와 같이 데자키 오사무가 아닌, 원작자인 테라사와 부이치가 직접 각색을 했던 전형적인 테라사와 부이치 풍의 만화영화였기 때문에 이전까지의 데자키 오사무식 작품 분위기와는 좀 다른 선상에 놓여있는 작품이다. 그러나 고바야시 시치로는,그러한 변질된 작품의 분위기를 억지로 데자키 오사무식 화풍으로 바꾸려고 하기 보다는, 오히려 테라사와 부이치의 만화 분위기에 가장 어울릴 듯한 색조와 배경들을 선보이며 미술 감독의 역량에 따라 만화영화의 분위기가 얼마나 고급스러워질 수 있는가에 대한 사례를 만들어 보여주었다.
그리고 이어서 1983년, 다시 고뱌야시 시치로는 데자키 오사무 감독의 생애 최대 역작 <고르고 13>에서 전작 극장판인 <스페이스 어드벤쳐 코브라>를 능가하는 시각적 원숙미를 보여주게 된다. 전형적인 일본식 하드보일드 성인 극화 만화의 표본이라고 할 수 있는 이 작품에서 그는, <고르고 13>의 원작 만화의 분위기를 데자키 오사무식 화풍 안에서 고전적이지만 세련미가 살아 있는 장면들로 훌륭히 이식해 냈고, 또한 화면의 곳곳을 장식하고 있는 디테일한 배경들은 그 자체만 가지고도 <고르고 13> 완성도를 대변해 주고 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또한 데자키 오사무의 전매특허라고 할 수 있는 하모니 기법이 그 빛을 발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 고바야시 시치로에 의해서 완성된 것들이었다. 여기에 앞서 거론 했던 촬영 감독 다카하시 히로카타의 다양한 응용 투과광들이 함께 어우러져 고바야시 시치로의 배경들은 더욱 빛나게 된다.
이처럼 고바야시 시치로는 매순간 데자키 오사무의 만화영화들을 가장 돋보이게 치장해 주고 보완해 주었던 일등공신이자 만화영화 제작에 있어서 미술 감독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가에 대해 일깨워 주었던 매우 특출난 존재의 만화영화 관련 스탭이었다.
1985년 일본 후지 TV에서 방영 개시된 아다치 미쓰루 원작의 <터치>는 고바야시 시치로의 새로운 면모를 확인 시켜준 매우 의미 있는 작품 이었다. 무시 프로덕션 시절부터 데자키 오사무와 함께 만화영화를 배웠었던 또 한명의 베테랑 감독 스기이 기사부로가 연출한 이 <터치>의 첫 번째 TV 시리즈에서 고바야시 시치로는 과거 데자키 오사무 감독의 작품들에서 보여왔던 이미지와는 전혀 다른 미술 패턴을 선보이게 된다.
이 작품의 원작 만화가 내포하고 있는 특유의 잔잔한 감동의 여운을 TV 브라운관 안으로 옮겨와 겉으로는 결코 화려해 보이지 않지만 원작 만화에서는 느낄 수 없었던 또 다른 분위기를 자아내며 지금까지 많은 만화영화 애호가들 사이에서 이 <터치>는, 만화를 원작으로 만화영화화된 역대 최고의 작품으로 평가 받고 있다
그러나 고바야시 시치로의 예술가적 역량이 최고조에 달했던 작품은 같은 해 개봉된 이색 아트 판타지 만화영화 <천사의 알>이라고 할 수 있다.
<공각기동대>의 감독 오시이 마모루와 <파이널 판타지>로 유명한 일본 최고의 비주얼 일러스트레이터 아마노 요시타카가 공동 원작을 하고 <꼬깔 모자 삼총사>의 나쿠라 야스히로와 <신세기 에반게리온>의 캐릭터 디자인을 맡았던 사다모토 요시유키가 각기 작화 감독과 원화를 그리는 등 당대 최고의 아트 애니메이터들이 총동원되어 완성된 이 작품에서 고바야시 시치로는 미술 감독 겸 레이 아웃 감수를 맡아 다시는 만들어질 수 없을 것으로 보여지는 기념비적인 영상들을 남겨 놓게 된다.
그런데 고바야시 시치로를 일본 최고의 미술 감독으로 칭하고 있는 것은 그의 회화적 역량 때문 만은 아니다. 어떤 장르, 어떤 매체를 막론하고 마치 자신의 한계를 시험해 보려는 듯 본인의 스타일과 전혀 무관한 작품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피해가기 보다는 오히려 더욱 그 작품을 연구하고 자기화 시키려는 노력에 의해서 작품의 분위기를 극대화 시킬 수 있는 색감과 배경들을 재창조해 왔기 때문이다.
카미조 아쓰시 원작의 OVA판 <토이>도 어떤 의미에서 보자면,고바야시 시치로의 미술 감독으로서의 작가 정신이 반영된 작품이라 평가할 수 있을 만큼 그의 원작에 대한 분석과 실험의 흔적을 찾아 볼 수 있는 작품으로서 순정 만화 특유의 여백의 미가 강조된 순백색 톤의 색감에 의해서 작품의 완성도가 더욱 배가된 최고의 순정 만화영화였다. 또한 고바야시 시치로는 앞서 소개한 데자키 오사무나 스기이 기사부로 이외에도 일본을 대표하는 대감독들과 다수의 작품을 함께 제작하며 작품의 완성도 관리에 절대적인 기여를 해왔다.
이것은 그만큼 일본내 만화영화 관련 스탭들이 고바야시 시치로의 미술가적 역량을 인정하고 또 신임하고 있음을 반증하는 것으로서 80년대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과 라이벌 관계를 형성했던 일본 최고의 실력파 만화영화 감독 야스히코 요시카즈의 마지막 감독 작품이었던 <비너스 전기>에서도, 고바야시 시치로는 가설과 추측으로 밖에 상상할 수 없는 금성의 황폐한 자연 환경을 매우 설득력 있게 묘사함으로서 또 한편의 만화영화 미술 교본을 남겨 놓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고바야시 시치로가 매번 대감독들과 함께 대작 만화영화의 제작에만 참여해 온 것은 아니다. 오히려 B급 시장이라고해서 자신의 후배들 조차 꺼려하는 OVA 시장에서 까지 그는 '비디오용 만화영화는 모두 싸구려이다'라는 선입견을 무너뜨리고 다양한 작품들의 미술 관리를 해나갔다.
국내에도 원작 만화가 적지 않게 소개 되어있는 나스 유키에 원작의 학원 청춘 순정 만화 <여기는 그린우드>에서도 원작 만화의 분위기를 그대로 살려 내게 된다.
또한 그는 일본내에서 활약중인 만화영화 관련 스탭들을 통틀어 가장 오랜 기간 동안 TV 시장에 남아있는 인물이기도 하다.
특히 1994년에 만들어진 <빨간 망토 챠챠>는, 고바야시 시치로의 TV 만화영화에 대한 특별한 애착이 담겨 있는 작품으로서 마치 보는이들로 하여금 만화영화로 만들어진 한권의 동화책을 보는 듯한, 익살스럽지만 동심이 살아 있는 장면들을 묘사해내었다.
특히 이때부터 고바야시 시치로는 마치 나이를 거꾸로 먹고있는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과거의 작품들과는 판이하게 다른 아동 취향의 순정 만화영화들에 손을 대기 시작한다
<빨간 망토 챠챠> 이후에도 국내에 <천사 소녀 네티>라는 제목으로 방영된 바 있었던 <괴도 세인트 테일>등의 작품들에 미술 감독을 연속적으로 담당한 바 있다.
그런데 이러한 고바야시 시치로의 TV 만화영화에 대한 집착은, 대부분의 일본내 만화영화 제작 스탭들이 TV 만화영화를 통해 데뷔한 이후 이름이 조금만 알려지면 OVA나 극장 시장으로 빠져나가는 것과 대비해 보았을 때, 매우 상반되는 것으로 일본 만화영화업계의 또 다른 귀감으로 평가받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1996년 가을, 고바야시 시치로는 오래간만에 다시 극장가에 복귀하게 된다.
바로 <변덕쟁이 오렌지로드>의 새로운 극장판 그리고, 그 '여름의 시작'편의 미술 감독을 맡게 된 것이다. 이 작품에서도 고바야시 시치로는 극장의 대형 화면에 걸맞는 갖가지 섬세한 영상미를 수놓으며 마도카 신드롬으로 대변되었던 <오렌지로드>의 추억을 다시 한번 회상시켜 주었다.
한 편 이 작품은 개봉 당시, 만화가 아닌 소설을 원작으로 만들어진 까닭에 예상치 못한 주인공들의 성인화로 과거 TV판 <오렌지로드>와의 이질감이 부각되면서 팬들에게 적지 않은 혼란을 몰고 오기도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 <오렌지로드>의 새로운 극장판은 쿄오스케와 마도카, 그리고 히카루가 단지 성인이 되어버린 것일 뿐, 어디까지나 TV판 <오렌지로드>의 연장 선상에 놓여있는 작품으로서 고바야시 시치로는 역시 자신이 미술 감독을 맡았었던 과거 TV판 <오렌지로드>와는 또다른 느낌의 작품 분위기를 만들어낸 것이었다.
고바야시 시치로가 미술 감독을 맡았던 가장 최근의 인기 만화영화로는 <소녀 혁명 우테나>가 있다. 벌써부터 국내 매니아들 사이에서는 최고의 화제가 되고 있는 이 작품은<미소녀전사 세일러문>으로 90년대 가장 주목받고 있는 만화영화 감독인 이쿠하라 쿠니히코가 원안 및 감독을 맡고 <화음>시리즈로 유명한 순정 만화가 사이토 치호가 만화영화화를 전제로 만화를 연재했던 프로젝트 만화영화로서 고바야시 시치로는 다시 한번 이 작품의 화려한 미장센들을 치장해 내며 노병의 건재함을 과시했다.
특히 이 작품에서 강조되고 있는 날카롭지만 조형미가 넘치는 구조물들과 유니크한 디자인의 성벽 문양들은 이전까지의 만화 영화들에서는 작화상의 난해함을 이유로 거의 표현된 바 없었던<소녀혁명 우테나>만의 독특한 매력을 발산해 주고 있는 상징적인 이미지들이다.
이것은 60대 중반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신세대들의 취향 보다도 한발 앞서 새로운 유행을 만들어가는 고바야시 시치로의 창의력에 의해서 완성된 결과물들로서 그는 이후에도 타무라 유미 원작의 최신작 <바사라>의 미술 감독을 자처하는 등 아직까지도 가장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는 명실상부한 일본 최고의 미술 감독 자리를 지키고 있다.
또한 <공각기동대>의 미술 감독이었던 오구라 히로마사나극장판의 화려한 배경들을 장식했던 히라타 슈이치 등의 당대 최고의 미술 감독들이 모두 이 고바야시가 길러낸 제자임을 감안해 보자면 일본 만화영화계에서 그가 차지하는 비중이 어느 정도인지, 유추해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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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여러곳에서 끌어온 글이라 하지만 이건 양이 많다 보니 정리만 해도 힘이들군요.. 이게 바로 일본 애니역사 교과서라 할수 있겠네요.. (뿌듯.. ^^;;)
아무튼 도움이 되셨길 빌며.. 전 다시 꼬르륵~~
그리고 고바야시는 데자키를 논하려면 이사람도 같이 설명하는게 좋을거라 생각되서 같이 올립니다.
근데 올리면 모하나.. -.-
PS:데쓰카도 언제 올려보죠..(반응이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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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자키 오사무 감독은,<도전자 허리케인>과<베르사이유의 장미>,그리고 <디어 브라더> 등으로 국내에도 이미 잘 알려져 있다.
이들 작품들 외에도 데자키 오사무 감독이 연출한 만화영화들은, 비디오물에서부터 극장용 장편 만화영화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모습으로 변천되어 왔다. (아톰의 아버지 데츠카 오사무와는 다른 사람입니다. ^^)
1943년 도쿄에서 출생한 데자키 오사무는 어려서부터 만화와 영화에 높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인물이었다. 하지만 그가 만화도 영화도 아닌, 만화영화를 자신의 직업으로 선택하게 된 계기는 바로 일본 최초의 TV 시리즈 만화영화 <철완아톰>에큰 자극을 받았기 때문 이라고 한다.
결국 이 <철완 아톰>으로 말미암아 데자키 오사무는 무시 프로덕션에 문을 두드리게 되었고 이때부터 그는 동화와 원화를 거쳐마침내 <철완 아톰> 112화 '샘슨의 긴 머리'편 부터는 직접 연출까지 담당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후 데자키 오사무는 린타로, 스기이 기사부로, 토미노 요시유키 등과 같은 명감독들과 함께 호흡을 맞추며 초창기 무시 프로덕션이 제작한 TV 만화영화들에 핵심 제작진으로 참가하게 된다.
그중에서도 1967년 일본 후지 TV를 통해 방영된 <오공의 대모험>은 역시 데즈카 오사무의 원작 만화를 스기이 기사부로가 총감독을 맡고 데자키 오사무가 각화 연출을 맡았던 작품으로, 데자키 오사무의 초기 연출 스타일을 다소나마 느껴볼 수 있는 작품 이었다
특히 데자키 오사무는, 데뷔 초기 시절부터 콘티 작업을 주로 했었던 린타로와는 달리 동화와 원화 과정을 거친 작화 출신 연출자였기 때문에 자신이 참가한 작품들에 알게 모르게 자신만의 그림체를 조금씩 담아 나가게 되었다.
무협 만화영화 <도루루>의 경우도 데즈카 오사무의 원작 만화를 만화영화화 시킨 작품 이었지만, 함께 이 작품의 각화 연출을 맡았던 토미노 요시유키나 다카하시 료스케가 연출한 편들과 달리 데자키 오사무가 연출한 에피소드들은 데자키 오사무 만의 화풍이 은근히 베어 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60년대 무시 프로덕션의 TV 만화영화들에서 기량을 발휘했던 데자키 오사무는,1969년 처음으로 극장용 대작 만화영화의 제작에 참가 했다. 일본판 <아라비안 나이트>의 스탭으로 기용된 것이었다.
이 작품은 일본의 대표적 영화 메이져 헤럴드 영화사의 거대 자본에 의해서 만들어진 대작 만화영화로서 데즈카 오사무의 총제작 지휘하에 데자키 오사무를 비롯하여 스기이 기사브로, 히라타 토시오, 무라노 마사미,스기노 아키오 등과 같은 당시 무시 프로덕션의 최정예 TV 시리즈 감독들이 원화를 그린 작품 이었다.
특히 데즈카 오사무는 이 작품의 스케일감을 더욱 부각 시키기 위해서 배경의 일부를 미니어쳐로 제작하여 특수 촬영 효과를 사용 하는 등여러 부문에 거쳐 심혈을 기울인 흔적을 찾아 볼 수 있다.
하지만 아쉽게도 이 작품은 흥행에 참패하고 말았다. 최근의 디즈니 만화영화를 보는 것 같은 방대한 스케일과 세련된 색감 등 작품 자체로는 나무랄데 없는 이 작품은 그러나 관객들의 외면을 받고 말았던 것. 이런 이유로 제작사였던 무시 프러덕션이 도산 위기에 몰릴 정도였다.
그러나 이것은 후에 데자키 오사무의 감독 인생에 또 다른 계기가 되어주기도 한다.
하지만 무시 프로덕션에 닥친 위기는 오히려 데자키 오사무에게 전화위복의 계기를 마련해 주게 되었다. <내일의 죠>의 TV 시리즈를 연출할 수 있는 기회가 그에게 찾아 왔기 때문 이었다.
1968년부터 고단샤의 주력 소년 만화지 '소년 매거진'에 연재되고 있었던 치바 데쓰야 원작의 <내일의 죠>는, 당시 무시 프로덕션이 만성적인 적자에서 벗어나기 위해만화영화의 제작을 수주 받은,그리고 데즈카 오사무의 원작 만화가 아닌, 외부 작가의 원작 만화를 만화영화화 시킨 이례적인 작품 이었다.
바로 이 <내일의 죠>의 첫 번째 TV 시리즈를 통해서 마침내 감독 데뷔를 하게된 데자키 오사무는, 이 작품을 무시 프로덕션이 청탁 받은 단순 부업거리로 생각하지 않고 원작의 분위기를 잘 살려내어 방영 당시 엄청난 시청률을 기록했다.
물론 이것은 <내일의 죠>의 원작 만화가 지니고 있는 지명도가 크게 일조한것이기도 했지만, 데자키 오사무라는 이름을 일본 만화영화계에 각인 시켜 놓기에는 충분한 결과물 이었다.
애당초 데츠가 오사무라는 당대의 거장이 세웠으며 또한 그의 작품들을 중심으로 제작해온 무시 프러덕션에서 만화영화 인생을 시작한 데자키 오사무에게 그 무대는 커다른 힘이 되어주기도 했지만 반면 그가 자신의 독자적인 세계를 만들어가는데 오히려 방해가 되었는지도 모른다.
<천일야화>의 실패가 그의 보호막이면서 동시에 걸림돌이었던 데츠카 오사무 그리고 무시 프러덕션과 조금 거리를 두고 자신의 세계를 만들어갈 수 있는 계기가 된 것이다.
<내일의 죠>가 기대 이상의 호평을 얻게 되자 이때부터 데자키 오사무는 주변 제작사들로부터 많은 작품의 감독 제의를 받게 된다.
그중에서도 도에이 동화와 타쓰노코 프로덕션, 니폰 애니메이션사 등과 함께일본 TV 만화영화 시장의 대표 주자로 군림해온 도쿄 무비 신사는 데자키 오사무의 영입에 가장 적극성을 보인 제작사였다.
데자키 오사무는 일본 최고의 개그,명랑 만화가 아카즈카 후지오 원작의 <천재 바카본>을 시작으로 도쿄뮤비신사와 인연을 맺게 된다.
그를 처음 만화영화감독으로 이끈 무시 프러덕션으로부터 벗어나 이제 도쿄뮤비신사에서의 시기가 시작된 것이다
<천재 바카본>을 만든 같은 해 데자키 오사무는, 도쿄 무비 신사의 간판 만화영화였던 <루팡 3세>의 총 콘티를 맡아 다양한 화면 구성과 커트 배분 능력을 보여 주게 된다. 다만, 당시까지는 데자키 오사무와 무시 프로덕션과의 계약 관계가 남아 있었기 때문에'사키 마쿠라'라는 가명을 써서 비밀리에 작업을 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여기에다 이 작품은 데자키 오사무가 당시 이 시리즈의 감독을 맡고 있었던 미야자키 하야오와 함께 제작에 참가했던 유일한 작품이었다.
미야자키 하야호가 데츠카 오사무 이후 일본 만화영화를 이끈 또 한명의 주역이었고 보면 본격적으로 새로운 제작사와 함께 작업을 시작한 이 시기가 그의 폭넓은 작품세계를 일구는데 중요한 계기가 되었던 때라고 보아도 좋을 것 같다. 또한 앞으로 데자키 오사무가 도쿄 무비 신사를 통해 선보이게 될 걸작 TV 만화영화들의 탄생을 알리는 예행 연습이기도 했다.
데자키 오사무는 고교 재학 시절, 만화영화 감독이 아닌 만화가 지망생 이었다.
하지만 자신의 꿈이 이루어지지 않아서 사회에 진출하여, 한동안은 샐러리맨 생활을 하기도 했는데, 1962년, 데즈카 오사무가 자신의 만화를 만화영화화시키기 위해 설립했던 무시 프로덕션의 제 3기 동화맨으로 발탁되었다. 그리고 이것이 계기가 되어 되어 이때부터 만화영화를 천직 삼아 동화와 원화 과정을 착실히 배워 기본기를 닦아 나갔던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그만의 탁월한 작품 해석 능력이 더해져, 오늘날 데자키 오사무는 일본 최고의 각색 능력을 지닌 만화영화 감독으로 평가 받고 있다.
그는 이미 익히 알려져 있었던 만화나 소설을 어떤 모습으로 재구성해냈을까.
1973년, 마이니치 TV를 통해 방영 개시된 <에이스를 노려라!>는 데자키 오사무 감독이 도쿄 무비 신사와 정식 계약을 맺고 제작한 그의 실질적인 감독 데뷔작이다.
이 작품은 슈에이샤의 소녀 만화지 '마가렛트'에 연재되고 있었던 야마모토 스미카 원작의 만화를 데자키 오사무 감독이 직접 재각색하여 만든 TV 만화영화이다. 주인공 '오카 히로미'와 '류자키'를 중심으로 한 라이벌 구도의 대립 이외에도 코치와 선수간의 갈등을 매우 드라마틱하게 묘사하여 성인층에게 까지 많은 호평을 받은 작품 이었다.
이 작품은 지난 1988년 안노 히데아키 감독이 <톱을 노려라>라는 제목으로 패러디 만화영화를 만들었을 정도로 일본의 만화영화 팬들에게는 지금까지도 역대 최고의 스포츠 순정 만화영화로 기억되고 있는 작품이다.
결국 이 <에이스를 노려라!>로 데자키 오사무는 단숨에 일본에서 주목 받는 감독의 대열에 올라서게 되었다.
그런데 <에이스를 노려라!>로 동년배의 감독들 보다 훨씬 빨리 인기 감독이 된 데자키 오사무는 다음 작품으로 돌연 세계 명작 동화 <집없는 아이>를 선보였다.
당시 일본 만화영화계의 흐름이 대부분 인기 원작 만화의 후광에 의해 이끌려 가고 있는 상황이었지만, 오히려 데자키 오사무는 익히 알려져 있는 세계 명작 동화를 선택하여, 원작자의 간섭이 개입되지 않는 감독 스스로의 시각으로 자유롭게 그리고 새롭게 그 작품을 해석하고 재창조하고 싶었던 것이다.
때문에 데자키 오사무의 <집없는 아이>에는 원작에서는 느껴볼 수 없었던, 그만의 내용 구조와 새롭게 정리된 대사들이 매우 감동적으로 스며 있다. 또한 데자키 오사무는 이 작품을 일본 최초의 입체 TV 만화영화로 제작하여 방영 당시 큰 화제가 되기도 했다. 만화영화감독으로서 그의 탁월한 재능은 개성이 넘치는 연출력이기도 했지만 또한 원작에 대한 독특하면서도 예민한 각색능력 역시 놓치지 말아야 할 대목이다.
이처럼 그는 언제나 새로운 제작 기법을 실제 작품 제작에 적용 시키는 것을 좋아했던 인물이었으며 결국 여기에 자신 만의 독창적인 작품 해석 능력과 무시 프로덕션 시절부터 명콤비를 이루어 왔던 작화 감독 스기노 아키오의 정감 있는 그림체가 더해져셔 데자키 오사무가 만든 세계 명작 만화영화들은 니폰 애니메이션사의 세계 명작 만화영화들과 분명한 차별성을 보여주게 되었다.
이미 유명해져 있고 많은 팬들을 가진 지명도 있는 원작으로부터 그는 늘 새로운 작품을 재창조해냈다. <내일의 죠>나 <에이스를 노려라>에서 '원작보다 낫다'라는 쉽지 않은 평가를 이끌어냈던 그는 이제 TV시리즈 시장의 매우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던 '세계명작만화'에서도 그만의 각색능력을 선보인 것이다. 그리고 <보물섬>에서 그 정점을 본다.
데자키 오사무가 일본 TV 만화영화계에 남겨 놓은 최고의 걸작은 단연 <보물섬>이다.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 원작의 <보물섬>은 이미 세계 각지에서 영화로, 연극으로, 또 만화영화로 만들어진 바 있지만, 그중에서도 이 데자키 오사무의 <보물섬>을 최고의 작품으로 평가하고 있는 이유 역시 그의 탁월한 작품 해석 능력 때문 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데자키 오사무는 이 작품에서 문제의 외다리 해적 죤 실버에 대한 해석을 이전까지의 <보물섬>에서 비춰진 이미지들과 달리 하고 있다.
악역이지만 카리스마가 살아 있고 해적이지만 정감이 느껴지는 이중적인 모습의 인물로 재창조해 냈던 것이다. 이것은 당시까지 일본 TV 만화영화 시장에 팽배해 있었던 어린이 주인공 위주의 성격 배분 판도를 뒤집어 (주인공 짐 호킨스가 동경할 수 있을 만큼의)분명한 성격이 부여된 어른상을 보여준 것이었다.
흔히 극장판 만화영화에 비해 대개 무난한 그야말로 '아동용'으로 여겨지는 TV시리즈 애니메이션으로서 이만큼 존재감있는 캐릭터들을 볼 수 있는 작품이 또 있을까. 국내에서도 방영되었던 이 작품은, 결정적인 장면엣 화면 자체가 하나의 정지된 일러스트로 표현되는 그의 특유한 '하모니'기법의 사용으로도 인상적이다
<보물섬>을 통해 작가 의식이 반영된 TV 만화영화를 선보였던 데자키 오사무는 이듬해 다시 인기 원작 만화의 만화영화화 작업에 착수했다. 역대 최고의 인기 순정 만화 <베르사이유의 장미>를 감독하게 된 것이다.
프랑스 혁명을 배경으로 그려진 <베르사이유의 장미>는 아마도 <캔디 캔디>와 함께 국내에 최초의 일본만화 붐을 몰고온 작품으로 기억될 수 있다.
또 오스칼이라는 중성적인 매력의 캐릭터는 여전히 많은 사람들에게 기억된다. 이 애니메이션으로서의 <베르사이유의 장미> 역시 기술적으로 쉽지 않은 '순정만화의 애니메이션화'에서 매우 성공적인 사례로 꼽힌다.
다만 이 작품은 원작자인 이케다 리요코의 요청에 따라 데자키 오사무의 명콤비인 스기노 아키오가 아닌, 일본 최고의 미형 캐릭터 디자이너 아라키 신고가 작화 감독을 맡아 이전까지의 데자키 오사무 감독 작품들과는 작화적 분위기가 좀 다른 작품 이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도 데자키 오사무는 순정 만화 특유의 상징적 화면 구성과 다양한 커트의 배분으로 원작의 분위기를 훌륭하게 TV 화면 안으로 옮겨 왔다. 또한 오스칼을 비롯하여 앙뜨와네트와 페르젠 사이의 미묘한 관계를 원작 만화에서 보여진 모습 이상으로 깊게 연출한 모습도 확인해 볼 수 있으며, 독특한 어조로 매회의 마지막을 장식한 나레이션들도 만화영화판 <베르사이유의 장미>의 빼놓을 수 없는 백미일 것이다.
데자키의 만화영화는 똑같은 원작을 가지고도 전혀 새로운 형태로 만들어내는게 특징이다. 그리고 그의 이러한 제작 공식은 하나의 전형이 되어 많은 후배 감독들에게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이처럼 TV 만화영화 시장에서 자신만의 고유 영역을 지키고 있었던 데자키 오사무 감독은, 어떠한 이유에서인지 극장판 만화영화 시장에서는 기대했던 만큼의 성과를 올리지 못했다.
데자키 오사무의 첫 번째 극장 개봉작은 1979년 9월 14일에 공개된 <에이스를 노려라>이다. 그러나 이 작품은 애초부터 별도의 극장판 만화영화로 만들어진 작품이 아니라, 당시 <우주전함 야마토>의 흥행 대성공 직후 불어 닥친 극장 만화영화 붐에 편승해 도쿄 무비 신사가 서둘러 개봉 시킨 TV 편집판 극장 만화영화 였다.
그런데 이 극장 편집판 <에이스를 노려라>에서 유심히 지켜보아야 할 것은 결승전 경기 장면에서의 '교차 편집' 기법이다. 테니스 경기가 긴장감 넘치게 진행 되는 동안 상관 없는 헬기의 비행 장면을 교차시켜 보여 줌으로서 관객들로 하여금 작품의 시공간적 흐름을 연상할 수 있도록 유도하고 그러한 최소한의 장면들로 긴박감이 살아 있는 경기 장면을 연출해 낸 것이었다.
이 <에이스를 노려라>에 사용된 '교차 편집'기법(영화용어로는 '몽따쥬'.)은 세르게이 에이젠슈타인의 영화 <전함 포테킨>의 '오뎃사의 계단' 장면에서 최초로 사용된 이래 <언터처블>같은 영화에서 똑같이 오마쥬 되기도 하는 등 지금까지도 많은 영화에서 사용되고 있는 편집 기법이다.
이러한 영화적 작법을 데자키 오사무가 만화영화의 제작에 적용 시켰던 것은 그가 만화영화를 영화의 한 갈래이면서도 결코 영화에 뒤지지 않는 필름 매체로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즉 <에이스를 노려라>는 데자키 오사무의 실사 영화에 대한 도전장과도 같은 작품이었고, 데자키 오사무의 만화영화를 영화로 인식시킨 출발지였다.
<에이스를 노려라>의 TV 편집판이 예상 외의 큰 성공을 거두게 되자, 이때부터 도쿄 무비신사는 데자키 오사무가 연출한 걸작 TV시리즈들을 마치 예정된 수순 처럼 편집하여 극장 개봉 시키게 된다.
그중에서도 <베르사이유의 장미>의 경우는 개봉 당시 실사 영화를 합한 연간 흥행 영화 랭킹 7위에 랭크 되었는데, 이것은 당시 개봉된 만화영화들 중에서는 린타로 감독의 <은하철도 999> 극장판 다음으로 관객이 많이 들었던 엄청난 흥행 기록이었다.
특히 데자키 오사무가 TV시리즈에서 실험적으로 적용 시켰던 영화적 기법들은 그것들이 극장 화면으로 옮겨지자 비로서 진가를 발휘했다. 그가 <내일의 죠 2>에서 즐겨 사용했던 화면 분할 기법 역시 커다란 극장 스크린을 종횡으로 가르며 영사되자 관객들은 TV 브라운관을 통해 시청할 때는 느낄 수 없었던 박진감 넘치는 액션들을 만끽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들 TV 편집판들이 극장 개봉되어 엄청난 성공을 거둔 것과는 달리 정작 데자키 오사무는 이들 작품들이 극장에서 상영된 것에 대해 불만을 표했다고 한다. 왜냐하면 이들 작품들은 모두 데자키 오사무가 극장 개봉이 아닌, TV 방영을 목적으로 만들었던 작품들이었기 때문이었다
극장에서 개봉되긴 하지만 결국 한계를 가지 수 밖에 없는 TV 편집판들에 대한 불만은 마침내 데자키 오사무의 첫번째 오리지날 극장판 만화영화 <스페이스 어드밴쳐 코브라>의 제작을 실천에 옮기게 한다.
이 작품은 일본식 SF히어로물의 1인자 테라사와 부이치가 가슈에이샤의 소년 만화지 '소년 점프'에 인기리에 연재했던 원작 만화를 데자키 오사무가 극장용 장편 만화영화로 제작한 것으로, 이전까지의 만화 원작 만화영화들 과는 달리 먼저 극장판을 제작하여 개봉 시킨 뒤 후에 TV 시리즈를 제작, 방영한 이례적인 작품 이었다.
이 작품에서도 데자키 오사무는 다채로운 응용 투과광들을 선보이며 보다 세련된 제작 기법들을선보였다. 카메라의 조작에 의한 잔상 효과를 만들어 보여주기도 하고 여기에 더욱더 실제감 넘치는 입사광 효과를 가미 시켜 영상미를 강조 하면서 만화영화에서만 가능한 화면 구도와 다양한 카메라 워킹을 통해TV 만화영화 보다는 월등히 높은 퀄리티의 극장판 만화영화로서의 장면들을 연출해 내었다.
그러나 이 <스페이스 어드밴쳐 코브라>는 정작 데자키 오사무 자신 조차 인정하지 않는 그의 최악의 작품으로 평가 받으며 흥행에서도 부진을 면치 못한 작품이었다. 그것은 이 작품의 각색을 데자키 오사무가 아닌, 원작자인 테라사와 부이치 자신이 직접 했던, 다시말해서 데자키 오사무의 <코브라>가 아닌 테라사와 부이치의 <코브라> 였기 때문 이었다.
그로인해 이 작품에서는 데자키 오사무 특유의 원작에 대한 재해석의 흔적을 찾아 볼 수 없으며 다만 원작자인 테라사와 부이치가 추구해온 주인공의 영웅성만 강조되면서극장 만화영화가 갖추어야 할 원작과의 차별성이 부여되지 못했던 것이었다.
결국 데자키 오사무가 <스페이스 어드밴쳐 코브라>에서 보여준 것은, 주제 의식이 결여된 화려한 영상들 뿐이었다.
열심히 만들었던 이 작품이 흥행에 실패하게 되자, 데자키 오사무는 이대로 물러날 수 없다는 오기에서, 당시 일본 만화계에 최고 베스트셀러였던 사이토 타카오원작의 <고르고 13>을 자신의 일생일대의 대작 만화영화로 만들게된다.
1983년 5월 28일 개봉된 <고르고 13>은, 지금까지 단행본이 무려 100권이 넘게 발행된 당대 최고의 베스트셀러 만화를 만화영화화시킨 작품으로, TV시리즈와의 연계 제작계획 없이 오로지 한편의 극장 만화영화로만 혼신의 힘을 다해 만든 데자키 오사무 생애 최대의 역작이었다.
이 작품에서도 데자키 오사무는 절정기의 연출력을 선보였고 그 중에서도 자신의 트레이드 마크와도 같은 하모니 기법들은 더욱 더 빛을 발했다.
또한 그만의 암시와 함축이 담겨져 있는 영상 언어들은 마치 초현실주의 영화처럼 화면의 구석구석을 장식했다. 여기에 그는 다른 감독들이 미처 상상해 내지 못한 앵글과 퍼스펙티브에 의해서 카메라의 시점을 자유자재로 옮겨가며 사소한 장면 하나하나에까지 만화영화만의 장점을 십분 살린 화면 구성력을 보여 주었다.
특히 데자키 오사무는 과거 <에이스를 노려라>에서 처음으로 적용 시켰었던 '교차 편집' 기법에 대한 아쉬움이 남아 있었던 것인지, 이 <고르고 13>에서 다시 한번 좀 더 정리된 '교차 편집'을 보여주었다.
교차 편집이 주는 묘미는, 동일 시간 동안 발생한 두가지 사건의 일부 장면들만을 교차 시켜 보여 줌으로서 전체의 액션을 다 보여주지 않더라도 사건의 기승전결을 스스로 연상해 내게 된다는 점이다.
데자키 오사무는 이처럼 다분히 영화적인 제작 기법을 구사하는 한편, 그것을 만화영화적인 연출법과 적절히 혼용하여 사용함으로서 극적인 긴장감을 더욱 고조 시킬 줄 알았다. 특히 <고르고 13>의 요인 암살 장면은, 지나치게 만화적인 발상에서 연출된 장면이었지만 아이디어의 기발함 때문에 후에 <고르고 13>의 대를잇는 80년대 최고의 인기 첩보만화 <시티 헌터> 에서 똑같이 인용되기도 했다.
<고르고 13>이 가지는 또하나의 의의는 <스페이스 어드밴쳐 코브라>와는 달리 원작자의 간섭이 배제된 철저한 데자키 오사무의 만화영화 였다것이다. 데자키 오사무가 이 작품의 원작에서 차용해 온 것은 주인공 '고르고13'과 기본적인 내용 구조일 뿐, 나머지 설정과 스토리 전개에 필요한 모든 도구들은 데자키 오사무 사단에 의해서 모두 재창조된 것들이었다.
이들이 만들어낸 <고르고 13>의 영상들은 당시 만들어진 그 어떤 결과물들 보다도 탁월한 것이었고 오락적으로도 전혀 손색이 없는것이었다.
무엇보다도 <고르고 13>이 세계 만화영화사에 남고 있는 이유는 세계 최초로 컴퓨터 그래픽이 도입된 장면때문이었다. 물론 이것으로 이 작품은 기네스 북에도 오르게 되었다. 언제나 새로운 기법을 적극 활용해 왔던 데자키 오사무는 기존의 셀 애니메이션에서는 느낄 수 없었던 좀 더 박진감 넘치는 효과를 얻기 위해 당시까지 검증되지 않고 있었던 컴퓨터 그래픽 기법을 과감히 도입했던 것이었다.
물론 당시의 기술적 한계상 컴퓨터 그래픽과 셀 애니메이션을 한 화면에 합성해 낼 수는 없었지만, 데자키 오사무 특유의 커트 감각에 의해서 마치 컴퓨터 그래픽으로 처리된 군용 헬기와 셀 애니메이션으로 그려진 고르고13이 실제 대결을 펼치고 있는 것과 같은 장면을 연출해 내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처럼 한편에 만화영화에 적용시킬 수 있는 거의 모든 기법을 동원하여 완성한 데자키 오사무 감독의 <고르고 13>은 이후 만들어진 <아키라>나 <왕립우주군>과 같은 역대 일본에서 만들어진 모든 대작 만화영화들이 다 그랬던 것처럼 예외없이 흥행에서 참패를 하고 만다.
물론 <고르고 13>의 흥행 실패는 작품의 완성도 자체에 문제가 있었다기 보다는 데자키 오사무가 지나치게 시대를 앞서가려 했기 때문이라고 보는 것이 옳을것이다.
비록 그는 이 작품을 끝으로 한동안 일본 만화영화계를 떠나게 되지만, 언제나 새로운 것을 발견하고 창조해내고 도입했던 그의 창의적인 시도들은 80년대 일본 극장 만화영화계를 기름지게 살찌울 수 있었던 토양이 되어 주었다
결국 이러한 각 부문별 전문 스탭의 상호 보완 시스템에 의해서 데자키 오사무 감독의 작품들은 타사의 TV 만화영화들에서는 느낄 수 없었던 그만의 작품 분위기가 만들어질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고바야시 시치로가 데자키 오사무의 작품들에 제공한 것은, 단순히 배경 그림들만은 아니었다.
마침내 프린트 선장의 보물을 발견하게 되는 <보물섬>의 크라이 막스에 해당하는 장면의 최초 발상은 물론 데자키 오사무 감독의 콘티에 의해서 연출된 장면이지만, 다양한 각도와 구도에 의해서 커트와 커트가 연결되고 있는 화면 구성들은 실제로 고바야시 시치로의 장면 설계 능력이 크게 일조한 것들이었으며 때문에 고바야시 시치로는 배경 만을 그리는 배경 감독이 아니라, 작품의 무대가 되는 배경의 최초 설정에서부터 색조의 지정에 이르기까지 전체 화면들을 구성하고 관리, 검사하는 바로, 미술 감독의 개념을 일본 만화영화계에 최초로 정착시킨 인물이었다
고바야시 시치로에 의해서 그 영상미가 더욱 빛난 또 한편의 걸작 만화영화로는<베르사이유의 장미>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최근까지 역대 일본 최고의 순정 만화영화로 기억되고 있는 이 작품에서도 고바야시 시치로는 데자키 오사무 감독의 연출의도를 극대화시킨 장면들을 선사한바 있다.
그중에서도 <베르사이유의 장미>의 마지막회를 장식한 이미지 일러스트들은 고바야시 시치로가 직접 그린 삽화들로 원작자인 이케다 리요코가 그린 일러스트 이상의 가치를 인정 받으며 한폭한폭의 미술작품들로 평가 받은 바 있다.
이처럼 데자키 오사무와 함께 <에이스를 노려라!>를 시작으로 <집없는 아이>, <보물섬>,<베르사이유의 장미>, 그리고 <내일의 죠.2>에 이르기까지 70년대 최고 인기 TV 만화영화들을 빛낸 고바야시 시치로는, 1982년 데자키 오사무 사단의 첫번째 오리지날 극장 만화영화 <스페이스 어드밴쳐 코브라>에서 또 한번 그 진가를 발휘했다.
이 작품은 지난호에 언급한 바와 같이 데자키 오사무가 아닌, 원작자인 테라사와 부이치가 직접 각색을 했던 전형적인 테라사와 부이치 풍의 만화영화였기 때문에 이전까지의 데자키 오사무식 작품 분위기와는 좀 다른 선상에 놓여있는 작품이다. 그러나 고바야시 시치로는,그러한 변질된 작품의 분위기를 억지로 데자키 오사무식 화풍으로 바꾸려고 하기 보다는, 오히려 테라사와 부이치의 만화 분위기에 가장 어울릴 듯한 색조와 배경들을 선보이며 미술 감독의 역량에 따라 만화영화의 분위기가 얼마나 고급스러워질 수 있는가에 대한 사례를 만들어 보여주었다.
그리고 이어서 1983년, 다시 고뱌야시 시치로는 데자키 오사무 감독의 생애 최대 역작 <고르고 13>에서 전작 극장판인 <스페이스 어드벤쳐 코브라>를 능가하는 시각적 원숙미를 보여주게 된다. 전형적인 일본식 하드보일드 성인 극화 만화의 표본이라고 할 수 있는 이 작품에서 그는, <고르고 13>의 원작 만화의 분위기를 데자키 오사무식 화풍 안에서 고전적이지만 세련미가 살아 있는 장면들로 훌륭히 이식해 냈고, 또한 화면의 곳곳을 장식하고 있는 디테일한 배경들은 그 자체만 가지고도 <고르고 13> 완성도를 대변해 주고 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또한 데자키 오사무의 전매특허라고 할 수 있는 하모니 기법이 그 빛을 발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 고바야시 시치로에 의해서 완성된 것들이었다. 여기에 앞서 거론 했던 촬영 감독 다카하시 히로카타의 다양한 응용 투과광들이 함께 어우러져 고바야시 시치로의 배경들은 더욱 빛나게 된다.
이처럼 고바야시 시치로는 매순간 데자키 오사무의 만화영화들을 가장 돋보이게 치장해 주고 보완해 주었던 일등공신이자 만화영화 제작에 있어서 미술 감독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가에 대해 일깨워 주었던 매우 특출난 존재의 만화영화 관련 스탭이었다.
1985년 일본 후지 TV에서 방영 개시된 아다치 미쓰루 원작의 <터치>는 고바야시 시치로의 새로운 면모를 확인 시켜준 매우 의미 있는 작품 이었다. 무시 프로덕션 시절부터 데자키 오사무와 함께 만화영화를 배웠었던 또 한명의 베테랑 감독 스기이 기사부로가 연출한 이 <터치>의 첫 번째 TV 시리즈에서 고바야시 시치로는 과거 데자키 오사무 감독의 작품들에서 보여왔던 이미지와는 전혀 다른 미술 패턴을 선보이게 된다.
이 작품의 원작 만화가 내포하고 있는 특유의 잔잔한 감동의 여운을 TV 브라운관 안으로 옮겨와 겉으로는 결코 화려해 보이지 않지만 원작 만화에서는 느낄 수 없었던 또 다른 분위기를 자아내며 지금까지 많은 만화영화 애호가들 사이에서 이 <터치>는, 만화를 원작으로 만화영화화된 역대 최고의 작품으로 평가 받고 있다
그러나 고바야시 시치로의 예술가적 역량이 최고조에 달했던 작품은 같은 해 개봉된 이색 아트 판타지 만화영화 <천사의 알>이라고 할 수 있다.
<공각기동대>의 감독 오시이 마모루와 <파이널 판타지>로 유명한 일본 최고의 비주얼 일러스트레이터 아마노 요시타카가 공동 원작을 하고 <꼬깔 모자 삼총사>의 나쿠라 야스히로와 <신세기 에반게리온>의 캐릭터 디자인을 맡았던 사다모토 요시유키가 각기 작화 감독과 원화를 그리는 등 당대 최고의 아트 애니메이터들이 총동원되어 완성된 이 작품에서 고바야시 시치로는 미술 감독 겸 레이 아웃 감수를 맡아 다시는 만들어질 수 없을 것으로 보여지는 기념비적인 영상들을 남겨 놓게 된다.
그런데 고바야시 시치로를 일본 최고의 미술 감독으로 칭하고 있는 것은 그의 회화적 역량 때문 만은 아니다. 어떤 장르, 어떤 매체를 막론하고 마치 자신의 한계를 시험해 보려는 듯 본인의 스타일과 전혀 무관한 작품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피해가기 보다는 오히려 더욱 그 작품을 연구하고 자기화 시키려는 노력에 의해서 작품의 분위기를 극대화 시킬 수 있는 색감과 배경들을 재창조해 왔기 때문이다.
카미조 아쓰시 원작의 OVA판 <토이>도 어떤 의미에서 보자면,고바야시 시치로의 미술 감독으로서의 작가 정신이 반영된 작품이라 평가할 수 있을 만큼 그의 원작에 대한 분석과 실험의 흔적을 찾아 볼 수 있는 작품으로서 순정 만화 특유의 여백의 미가 강조된 순백색 톤의 색감에 의해서 작품의 완성도가 더욱 배가된 최고의 순정 만화영화였다. 또한 고바야시 시치로는 앞서 소개한 데자키 오사무나 스기이 기사부로 이외에도 일본을 대표하는 대감독들과 다수의 작품을 함께 제작하며 작품의 완성도 관리에 절대적인 기여를 해왔다.
이것은 그만큼 일본내 만화영화 관련 스탭들이 고바야시 시치로의 미술가적 역량을 인정하고 또 신임하고 있음을 반증하는 것으로서 80년대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과 라이벌 관계를 형성했던 일본 최고의 실력파 만화영화 감독 야스히코 요시카즈의 마지막 감독 작품이었던 <비너스 전기>에서도, 고바야시 시치로는 가설과 추측으로 밖에 상상할 수 없는 금성의 황폐한 자연 환경을 매우 설득력 있게 묘사함으로서 또 한편의 만화영화 미술 교본을 남겨 놓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고바야시 시치로가 매번 대감독들과 함께 대작 만화영화의 제작에만 참여해 온 것은 아니다. 오히려 B급 시장이라고해서 자신의 후배들 조차 꺼려하는 OVA 시장에서 까지 그는 '비디오용 만화영화는 모두 싸구려이다'라는 선입견을 무너뜨리고 다양한 작품들의 미술 관리를 해나갔다.
국내에도 원작 만화가 적지 않게 소개 되어있는 나스 유키에 원작의 학원 청춘 순정 만화 <여기는 그린우드>에서도 원작 만화의 분위기를 그대로 살려 내게 된다.
또한 그는 일본내에서 활약중인 만화영화 관련 스탭들을 통틀어 가장 오랜 기간 동안 TV 시장에 남아있는 인물이기도 하다.
특히 1994년에 만들어진 <빨간 망토 챠챠>는, 고바야시 시치로의 TV 만화영화에 대한 특별한 애착이 담겨 있는 작품으로서 마치 보는이들로 하여금 만화영화로 만들어진 한권의 동화책을 보는 듯한, 익살스럽지만 동심이 살아 있는 장면들을 묘사해내었다.
특히 이때부터 고바야시 시치로는 마치 나이를 거꾸로 먹고있는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과거의 작품들과는 판이하게 다른 아동 취향의 순정 만화영화들에 손을 대기 시작한다
<빨간 망토 챠챠> 이후에도 국내에 <천사 소녀 네티>라는 제목으로 방영된 바 있었던 <괴도 세인트 테일>등의 작품들에 미술 감독을 연속적으로 담당한 바 있다.
그런데 이러한 고바야시 시치로의 TV 만화영화에 대한 집착은, 대부분의 일본내 만화영화 제작 스탭들이 TV 만화영화를 통해 데뷔한 이후 이름이 조금만 알려지면 OVA나 극장 시장으로 빠져나가는 것과 대비해 보았을 때, 매우 상반되는 것으로 일본 만화영화업계의 또 다른 귀감으로 평가받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1996년 가을, 고바야시 시치로는 오래간만에 다시 극장가에 복귀하게 된다.
바로 <변덕쟁이 오렌지로드>의 새로운 극장판 그리고, 그 '여름의 시작'편의 미술 감독을 맡게 된 것이다. 이 작품에서도 고바야시 시치로는 극장의 대형 화면에 걸맞는 갖가지 섬세한 영상미를 수놓으며 마도카 신드롬으로 대변되었던 <오렌지로드>의 추억을 다시 한번 회상시켜 주었다.
한 편 이 작품은 개봉 당시, 만화가 아닌 소설을 원작으로 만들어진 까닭에 예상치 못한 주인공들의 성인화로 과거 TV판 <오렌지로드>와의 이질감이 부각되면서 팬들에게 적지 않은 혼란을 몰고 오기도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 <오렌지로드>의 새로운 극장판은 쿄오스케와 마도카, 그리고 히카루가 단지 성인이 되어버린 것일 뿐, 어디까지나 TV판 <오렌지로드>의 연장 선상에 놓여있는 작품으로서 고바야시 시치로는 역시 자신이 미술 감독을 맡았었던 과거 TV판 <오렌지로드>와는 또다른 느낌의 작품 분위기를 만들어낸 것이었다.
고바야시 시치로가 미술 감독을 맡았던 가장 최근의 인기 만화영화로는 <소녀 혁명 우테나>가 있다. 벌써부터 국내 매니아들 사이에서는 최고의 화제가 되고 있는 이 작품은<미소녀전사 세일러문>으로 90년대 가장 주목받고 있는 만화영화 감독인 이쿠하라 쿠니히코가 원안 및 감독을 맡고 <화음>시리즈로 유명한 순정 만화가 사이토 치호가 만화영화화를 전제로 만화를 연재했던 프로젝트 만화영화로서 고바야시 시치로는 다시 한번 이 작품의 화려한 미장센들을 치장해 내며 노병의 건재함을 과시했다.
특히 이 작품에서 강조되고 있는 날카롭지만 조형미가 넘치는 구조물들과 유니크한 디자인의 성벽 문양들은 이전까지의 만화 영화들에서는 작화상의 난해함을 이유로 거의 표현된 바 없었던<소녀혁명 우테나>만의 독특한 매력을 발산해 주고 있는 상징적인 이미지들이다.
이것은 60대 중반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신세대들의 취향 보다도 한발 앞서 새로운 유행을 만들어가는 고바야시 시치로의 창의력에 의해서 완성된 결과물들로서 그는 이후에도 타무라 유미 원작의 최신작 <바사라>의 미술 감독을 자처하는 등 아직까지도 가장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는 명실상부한 일본 최고의 미술 감독 자리를 지키고 있다.
또한 <공각기동대>의 미술 감독이었던 오구라 히로마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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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여러곳에서 끌어온 글이라 하지만 이건 양이 많다 보니 정리만 해도 힘이들군요.. 이게 바로 일본 애니역사 교과서라 할수 있겠네요.. (뿌듯.. ^^;;)
아무튼 도움이 되셨길 빌며.. 전 다시 꼬르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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