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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이야기

인조의 애첩 조귀인은 역사상 최고 요부

작성자벽초 한강수|작성시간20.09.21|조회수2,176 목록 댓글 0

인조의 애첩 조귀인은 역사상 최고 요부

조귀인은 1630년 종4품 숙원으로 책봉되어 입궁하였다. 그녀는 경상우도 병마사를 지낸 조기(순창 조씨)와 그의 첩 한옥(漢玉)의 딸로 태어났다. 그녀 모친은 기록은 없지만 이름으로 보아 천인 기생 출신인 것으로 보인다. 출생년도는 정확한 기록이 없는데 1630년 숙원으로 책봉되어 입궐한 것으로 보아 소현세자의 빈인 강빈의 나이와 비슷할 것으로 추정된다.

 

조귀인은 천출이었으나 인조의 후궁이었으므로 사가로 따지면 강빈의 시서모(媤庶母)가 되었다. 출신 배경이 전혀 다른 나이 비슷한 두 젊은 여인들이 시서모와 며느리의 관계이니 원만하기가 어려웠다. 또한 조귀인은 시기와 질투심이 많고 권모술수와 이간질이 매우 능한 조선 최고의 악질 여자라 대궐에서 풍파가 일어날 것은 누구라도 예측이 가능했다.

 

그녀는 1639년 아들 승선군(이름 징)을 낳은 후에 자기 아들을 왕위에 올릴 계획을 간신 김자점과 비밀리에 추진하면서 침술의 이형익을 시켜 소현세자를 죽였다. 인조는 내심 장남의 죽음을 반겼고 김자점은 인조와 조귀인의 마음을 읽고 강빈을 죽이는데 적극 앞장섰다.


소현세자 살해 후 인조와 조귀인의 다음 목표는 강빈과 그 아들들 

강빈은 청국에서 남편 소현세자를 돕기 위해 농사를 짓고 장사도 하여 거액의 돈을 벌었다. 그 돈으로 청국과의 외교 자금으로도 사용하고 개, 돼지만도 못한 생활을 하는 조선 포로 노예들을 많이 환속시켜 가족이 있는 고국 조선으로 보내주어 백성들의 인기가 대단했다. 강빈의 이런 활동이 권력에 대하여 항상 의심을 갖고 있는 시아버지 인조의 시기와 미움을 사는 것은 물론 제거대상이 되는 원인도 되었다.  

1643년 강빈의 부친 강석기가 죽어 강빈이 잠시 귀국하였는데 인조는 강빈이 미워 강빈에게 친정 부친상에 문상조차 못하도록 왕명으로 명령하였다. 그 후 인조와 며느리 강빈과의 사이가 점점 더 악화되어 가고 있던 중 1645년 4월 소현세자가 갑자기 독살을 당했다. 그 배후에는 늙은 인조의 애첩인 요녀 조귀인이 있었다.


소현세자가 죽은 후 최대의 정치 문제는 소현세자 장남인 원손 이석철(당시 10세)의 왕위 계승 문제였다. 강빈을 원수보다 더 증오하는 조귀인은 강빈의 아들이 왕이 된다면 그것은 죽는 것보다 더 싫었고 까딱하면 자기와 아들의 목숨도 날아 갈 수 있었다. 인조도 얄밉고 미운 그 잘난 며느리 강빈의 아들이 왕이 된다는 것은 독약을 마시는 것 같이 싫었다. 인조와 그의 여인 조귀인의 마음은 하나였다. 대신들이 소현세자의 장남인 원손 석철의 세손 책봉과 장자 상속의 원칙을 강력하게 주장했지만 인조는 원손의 나이가 어리다는 핑계로 소현세자의 동생 봉림대군(17대 효종)을 재빨리 세자로 책봉했다. 이제 강빈과 그녀의 어린 아들 삼형제의 목숨은 더 이상 이 세상의 것이라고 하기는 어려웠다.


인조는 며느리 강빈을 “간통한 개새끼”라고 사약 내려 죽여
소현세자 사망 후 1년도 안된 1646년 1월 인조 수라상의 전복구이에 독약이 발견되었다. 조귀인이 꾸민 짓이었다. 그러나 주모자로 곧 강빈이 지목되었고 강빈의 나인 5명이 모진 고문 끝에 죽었는데 끝까지 혐의를 부인하였다. 어디에도 강빈의 흔적을 발견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인조는 시아버지를 죽이려는 강빈의 악독한 범죄라고 억지 논리를 만들고 왕의 주장에 반대하는 신하들을 유배를 보내고 유배 간 강빈의 오라비들을 모두 죽였다. 누이가 세자빈이 되었던 것이 죄였다. 강빈이 맏며느리이고 며느리도 자식이니 선처해 달라는 대신들의 간청에 왕은 “개새끼를 어떻게 임금의 자식이라 할 수 있느냐” 하고 욕으로 일축했다.
강빈이 억울하다는 쪽으로 민심이 흐르자 인조는 억지 간통 사건을 조작해 그 더러운 죄를 강빈에게 더 붙여 1646년 3월 사약을 내려 죽였다. 명문가의 딸로 시아버지 살해 미수와 간통죄라는 더러운 죄를 뒤집어쓰고 36세의 젊은 나이에 죽었으니 강빈의 한은 바다를 메우고도 남았다. 강빈이 사형당한 날 시아버지의 애인 조귀인은 “제 년이 양반의 딸, 그렇게 잘 났어! 그러니 쌍년의 딸인 나에게 죽어야지. 그리고 그 잘난 네년 새끼들도 죽어야 마땅하지, 하하하!” 하면서 입이 찢어지도록 웃었다 한디.


강빈을 죽인 후에는 인조는 강빈의 어머니와 어린 친정 조카들도 죽였다. 이것도 부족해 인조는 1647년 강빈의 아들들, 즉 자신의 어린 친손자들 3명을 모두 제주도에 귀양 보냈고 거기서 1년 후인 1648년 13세의 장손 이석철과 9세의 차손 이석린이 풍토병으로 죽었으나 타살의 의심이 컸다.


요녀조귀인의 완전 승리였다. 애첩에 놀아나 친손자들을 포함하여 장남 일가를 참혹하게 몰살한 이런 잔인한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이 세상에 또 어디 있겠는가? 

인조는 과연 악질 패륜아 정원군의 아들이었고 왕이 되어서는 절대로 안 될 사람이었다.

최고 무능한 왕과 최고 악독한 후궁이었다.



그녀를 폐위시켜야 한다는 상소가 빗발쳤지만, 효종은 부왕 인조가 그녀를 총애하던 것을 생각하여 자진케 하되 장례는 제도에 맞게 치르도록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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