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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이야기

유성룡과 이순신

작성자벽초 한강수|작성시간20.09.26|조회수380 목록 댓글 0

유성룡은 ‘징비록’에서 ‘순신은 어려서부터 담력이 컸고 말타기와 활쏘기에 유난히도 능했다’고 썼다. 유성룡이 이순신을 단정투로 평가한 것은 그가 이순신을 매우 잘 알고 있었음을 시사한다. 이는 두 사람이 서울 한 동네에서 철부지 시절을 보내면서 가슴 진한 우정을 쌓았기 때문일 것으로 풀이된다.

이순신과 유성룡의 출생지는 서로 다르다. 이순신은 1545년 서울에서, 유성룡은 1542년 외가인 경북 의성에서 태어났다. 나이는 유성룡이 이순신보다 3살 많았다.두 사람은 3살 차이지만 아주 친한 친구였다. 공부는 늘 유성룡이 앞섰고 말타기 활쏘기등의 무예는 이순신이 늘 잘했다고 한다.

또한 두 사람의 어릴 적 집안 형편은 유성룡이 이순신보다 좀더 나았던 것 같다. 그 이유는 유성룡의 아버지 유중영은 황해도 관찰사현 도지사를 역임하고 있었는데 반해, 이순신의 부친 이정은 아무런 관직을 갖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유성룡은 22세 때 사마시를 합격하고 24세 때에는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후, 공직생활을 시작했다. 이순신도 32세에 식년무과에서 병과로 급제한 후, 전후방의 오지를 돌면서 무관직을 수행하고 있었다. 그런데 도움의 손길을 먼저 내민 것은 유성룡이었다.

1586년 1월, 당시 예조판서였던 유성룡은 이순신을 위한 첫 번째 구원투수 역할을 자청했다. 즉 종6품 사복시 주부 이순신을 종4품 벼슬인 함경도 경흥고을 조산보 병마 만호현 대대장에 해당하는 직책자리에 추천한 것이다. 그것은 1597년 1월 27일자 ‘선조실록’에 나온다.

물론 유성룡이 개인적 친분만으로 이순신을 추천한 것은 아니다. 유성룡은 “순신은 성종 때 이거의 자손으로 신은 그가 능히 자기 직책을 감당할만하다고 여겼기 때문에 그를 조산보 만호로 천거했던 것입니다”라고 추천 사유를 밝혔다. 이순신에 대한 유성룡의 후원과 관심은 그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조일전쟁의 전운이 감돌던 1591년 2월 13일, 유성룡은 이순신의 두 번째 구원투수로 나섰다. 종6품 정읍현감 이순신을 정3품 벼슬인 전라좌수사로 전격 발탁한 것이다. 이때 유성룡의 직책은 좌의정 겸 이조판서였다. 이순신의 전라좌수사 발탁은 한꺼번에 무려 6단계를 뛰어넘는 파격적인 인사였기 때문에 대간들의 반대가 무척 심했다.지금으로 치면 육군 중위 소대장을 해군소장으로 파격 승진 시킨 것이다. 아무리 어릴적 친구지만 무슨 배짱으로 그리 할수 있었을까? 유성룡은 친구 이순신을 믿었던 것이다. 유성룡을 신임하던 선조가 그대로 밀어붙이는 바람에, 이순신은 조선 수군의 ‘별’이 될 수 있었다.

이 대목에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갈 것은 본래 전라좌수사 자리는 원균의 몫이었다는 점이다. 1591년 2월 초, 선조는 원균을 전라좌수사에 임명했다. 그러나 사간원이 ‘원균의 전라좌수사 임명은 부당한 인사입니다. 따라서 원균을 다른 사람으로 바꿔야 합니다’라는 체차상소를 올리는 바람에 원균의 임명은 1591년 2월 4일자로 취소되었다. 그 주된 이유는 당시 원균의 근무평정점수가 최하위였기 때문이다.

이순신은 전라좌수사에 부임하자마자 자신의 관할구역인 5관 순천부, 낙안군, 보성군, 흥양현, 광양현 5포 사도, 방답, 여도, 녹도, 발포를 순시하면서 철저한 현장점검을 실시했다. 그는 예하 부대를 순시하면서 군기강화와 무기점검, 성곽 해자 보수, 연대구축, 철쇄 설치 등을 지휘 감독했다. 그리고 판옥선 및 거북선 건조, 화약 제조, 군사훈련 강화 등을 통해 전라좌수군의 전투력 증강에 박차를 가했다. 그러는 사이 운명의 임진년1592년 새해가 밝았다.

1592년 초 유성룡은 인편을 통해 이순신에게 개인적인 편지와 ‘증손전수방략’이라는 병서를 선물했다. 이순신은 1592년 3월 5일자 ‘난중일기’에다 그 병서가 수륙전과 화공전의 전술을 설명해주는 매우 뛰어난 책이라고 극찬했다.

우리는 이 기록을 통해 유성룡의 인간됨과 고위 공직자로서의 남다른 사명의식을 엿볼 수 있다. 자신이 천거한 최전방 장수에게 병법책과 격려편지까지 보냈다는 것은 이순신에 대한 유성룡의 관심과 후의가 그만큼 각별했다는 것을 말해준다. 아무튼 유성룡이 조선 조정에 있는 한 이순신은 행복하고 든든했다. 
조일전쟁이 발발하자 유성룡은 좌의정에 병조판서와 도체찰사를 겸하며 모든 군무와 행정을 총괄했다. 이순신 역시 전라좌수사로서 1592년 한 해 동안 10전 10승을 기록하며 유성룡의 기대에 화려한 전공으로 보답했다.

1593년 10월 6일 유성룡은 정예 직업군인을 양성하는 훈련도감을 설치하고, 조선 조정에 등을 돌린 민초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일대개혁을 단행했다. 이는 조선 개국 후 200년 동안 유지해 온 신분제 사회질서의 근간을 뒤흔들 수 있는 파격적인 조치였다.

 

첫째, 민초들의 세금부담을 크게 경감시켜 주는 조세개혁을 추진했다. 기존의 공납제도는 가호단위로 부과되는 조세로서 민초의 고혈을 짜내는 역진세였다. 그는 땅의 소유면적에 따라 세금을 차등 부과했고, 세금 역시 쌀로 내도록 했다. 이것이 바로 대동법의 효시인 작미법(作米法)이다.

 

둘째, 병역의무는 민초들의 몫이었고 양반들은 제외되었다. 유성룡은 병역법 개정을 통해 양반들에게도 병역의무를 부과시켰다. 그런 다음 양반과 민초들이 같은 부대에서 근무하도록 했다. 그렇게 해서 탄생한 부대가 속오군(束伍軍)이다.

 

셋째, 천인들도 전투에 참여해서 군공을 세우면 천인신분에서 구제해주는 면천법을 단행했다. 본래 천민은 양반의 사유물이라는 이유에서 병역의무를 부과하지 않았다. 그러나 면천법이 알려지자 천인들 가운데 전투에 자진 참여하는 사람들이 많아졌고, 이는 조선 군대의 전투력 향상으로 이어졌다.

 

민초들은 유성룡의 개혁조치에 절대적인 지지와 환호를 보냈다. 그리고 이런 민초들의 지지가 조일전쟁을 승리로 이끄는데 견인차 역할을 했다. 그러나 북인, 서인, 동인들의 생각은 민초들과 달랐다. 특히 이이첨을 비롯한 북인들의 눈에는 유성룡이 양반들의 기득권을 박탈하고, 신분제 사회질서를 파괴시킨 주범으로 비쳐졌던 것이다. 선조 역시 마음이 불편하기는 매 한가지였다. 자신의 인기는 하한가인데 반해, 유성룡의 대국민 인기는 상종가를 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공익보다 사익을 우선시 했던 사이비 선비들이 그런 정치적 틈새를 놓칠 리 만무했다. 그들은 유성룡을 실각시키기 위해서 힘을 합쳤다. 그들은 ‘명나라의 과도관주사 정응태의 무주사건’을 정치적 덫으로 활용했다. 즉 그 사건을 명나라에 해명하기 위한 사신으로 유성룡을 지목했는데, 그가 거절했다는 것을 빌미로 삼았다. 유성룡에 대한 그들의 탄핵상소는 집요했다. 선조도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면서 전란극복의 일등 공신인 유성룡을 영의정 자리에서 내쫓았다. 그때가 조일전쟁의 종전일인 1598년 11월 19일 아침이었다.

공교롭게도 그날 아침,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은 자신이 최후의 결전장소로 삼았던 노량 앞바다에서 왜적의 조총을 맞고 장렬하게 전사했다. 1597년 3월 초, 이순신이 한양으로 압송되어 혹독한 고문을 받게 될 무렵, 유성룡은 선조에게 사직서를 제출하며 이순신을 지켜주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자신이 영의정에서 실각하는 바람에 이순신의 죽음을 막아주지 못했다. 약 6년 8개월 동안 왜적의 침략을 온몸으로 지켜냈던 구국의 별 두 개가 동시에 사라지자, 조선 조정은 갑자기 어둠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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