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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이야기

조선 왕들의 성생활

작성자벽초 한강수|작성시간20.10.06|조회수1,713 목록 댓글 0

과거 우리나라의 왕이나 중국의 황제들은 절대권력자였다. 이들은 좋은 집에서 살며 진수성찬을 즐기고 예쁜 후궁들을 거느렸다. 왕이나 황제들은 인간의 원초적 욕망인 식욕과 색욕 그리고 권력욕을 무한히 행사할 수 있는 존재들이었다. 사실 몇몇 왕이나 황제의 색욕과 관련한 이야기는 사람들의 상상을 초월한다. 예컨대 진시황의 경우 아방궁에 모은 후궁이 1만 명을 넘었다고 하며 양귀비와의 염문으로 유명한 당 현종 같은 황제는 후궁이 4만 명을 넘었다고 한다. 조선시대 최대의 폭군으로 이름 높은 연산군 때 궁궐 기생은 1만 명을 헤아렸다고도 한다.

정도전이 왕의 침실생활에 관한 기본 입장 확립

1만 명, 혹은 4만 명의 후궁은 일부일처제에 익숙한 보통사람들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수다. 그러나 후궁이 1만 명이냐 또는 4만 명이냐는 중요하지 않을 수 있다. 이런 역사가 보여주는 사실은 인간이란 끝을 모르는 욕망 덩어리라는 것이다. 더욱 중요한 역사적 사실은 절대권력을 장악한 인간이 무한한 욕망을 무절제하게 행사할 경우 어떤 결말을 초래하는가다. 1만 명의 후궁을 거느렸던 진시황, 4만 명의 후궁을 거느렸던 당 현종, 그리고 1만 명의 궁궐 기생을 거느렸던 연산군의 말로는 나라의 멸망이나 개인의 파멸로 이어졌다.

그러므로 동양에서 군주제가 유지되던 시절 왕이나 황제의 인간적 욕망을 다루는 문제는 무엇보다 중요했다. 특히 원초적 욕망이라는 색욕은 나라의 존망과 직결되는 문제로 간주했다. 이에 왕이나 황제의 색욕을 어떻게 조절할 것이냐의 문제를 놓고 수많은 지식인이 골머리를 앓았다.

왕이나 황제의 색욕은 곧 이들의 밤생활과 직결되는 문제였다. 이는 왕이나 황제의 침실생활에 관한 여러 가지 형태로 표출되었다. 조선시대의 경우 왕의 침실생활에 관한 기본 입장은 정도전에 의해 확립되었다. 정도전은 조선 왕조의 설계자로서 건국 이념, 국가 노선, 국가 제도 등을 확립한 사람이었다. 이 정도전이 조선 왕조를 상징하는 궁궐의 이름을 경복궁으로 짓고 아울러 경복궁내 왕의 침실도 작명했는데, 그 이름이 강녕전(康寧殿)이었다.

조선의 건국 시조 태조 이성계가 낮의 여가 시간에 휴식을 취할 침실, 밤에는 또 잠도 자고 성생활도 해야 하는 침실, 그 침실의 이름을 왜 강녕전이라고 했을까. ‘태조실록’에 의하면 정도전의 속뜻은 이것이었다.

정도전이 왕의 침실을 강녕전이라고 이름붙인 이유는 ‘황극’이라는 말에 압축되어 있다. 이 황극은 흔한 말로 태극과 같은 말이다. 우주 만물이 생성되기 이전의 근본이 황극이다. 음과 양 또는 상하좌우로 나뉘기 이전의 근원으로, 식욕·색욕·권력욕 등 인간의 원초적 욕망들이 발생하기 이전의 중용 상태를 말한다. 황극은 중용 상태이므로 좌도 없고 우도 없으며 위아래도 없다. 온갖 분열과 대립이 파생되기 이전, 온갖 욕망이 들끓어 오르기 이전의 중용이 황극이며 태극이다.

요컨대 정도전이 왕의 침실을 강녕전이라고 한 이유는 밤에 조용히 황극을 닦으며 식욕·색욕·권력욕 등 인간의 원초적 욕망들을 잠재우라는 의미라고 하겠다. 이렇게 해야 하늘이 내리는 오복을 받을 수 있다고 설득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왕의 밤생활이 식욕·색욕·권력욕에 휩쓸려 들어갈 경우 오복이 아니라 천벌이 내린다는 경고가 숨어 있다.

따라서 정도전은 강녕전을 궁궐의 정중앙에 위치시켰다. 강녕전 전면에 사정전과 근정전, 후면에 교태전 그리고 좌측에 연생전 우측에 경성전 등이 그것이다. 이처럼 궁궐의 정중앙에 왕의 침실을 배치한 이유는 왕의 침실이 바로 지상의 황극임을 상징하기 위해서였다. 여기에서 우주의 황극이 음양과 상하좌우로 분열되기 이전의 근원이듯, 지상의 황극인 왕의 침실도 분열되어서는 안 된다는 논리가 도출된다. 왕의 침실은 다른 사람과 공유할 수 없다는 뜻이다. 왕은 궁궐의 정중앙에 위치한 침실에 홀로 거처하며 하늘의 황극을 닦아야 한다는 결론이다.

실제로 조선시대 왕의 침실은 왕비와 함께 쓰는 것이 아니라 왕 혼자만 쓰는 공간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어둡고 외로운 왕의 침실을 왜 혼자만의 공간으로 하였을까. 조선시대 왕은 크게 보면 국가의 최고권력자이며 작게는 왕실의 가장이었다. 왕은 신료들과 더불어 나랏일을 처리하기도 하고 왕비나 후궁들과 가정생활도 해야 했다. 왕이 나랏일과 가정생활을 잘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정도전은 이 문제도 황극에서 해답을 찾았다.

왕은 나랏일을 하면서 수많은 사람을 만난다. 이들은 서로 생각과 처지가 다르다. 서로 분열하고 대립하는 수많은 사람을 상대로 왕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왕이 좌나 우 또는 위나 아래라고 하는 한 부분에 집착한다면 그 반대편과는 적대적이 될 것이다. 이런 왕은 전체를 포괄하는 왕이 아니라 일부분의 왕일 뿐이다. 문제는 왕이 특정한 부분의 집착에서 어떻게 벗어날 것인가이다.

왕이 낮에 사람들을 만나는 시간에는 개인적 집착에서 벗어나기 힘든 것이 인지상정이다. 왕이 낮 동안 들끓어 올랐던 집착과 편견을 홀로 돌아보며 우주의 황극과 같은 중용의 마음을 되찾을 시간과 공간이 필요하다. 그곳이 바로 왕의 침실이었다. 이런 왕의 침실에는 왕 외에 누구도 있어서는 안 된다. 정도전이 왕의 침실은 황극의 도를 닦는 공간이어야 한다고 강조한 이유가 또 여기에 있었다.

왕의 침실은 궁궐에서의 위치뿐만 아니라 침실의 공간 구성 자체도 황극을 상징했다. 왕의 침실은 기본적으로 우물 정(井)자 형태였는데 이 우물 정자가 황극과 관련 있었다. 즉, 왕의 침실은 우물 정자처럼 중앙의 방 하나와 이를 둘러싼 8개의 방으로 구성되었다. 중앙의 방은 황극이며 주변 8개의 방은 8괘를 상징했다. 당연히 왕이 잠을 자는 방은 황극을 상징하는 중앙의 방이었다. 중앙을 둘러싼 8개의 방에서는 지밀나인들이 야간 숙직을 섰다.

왕의 침실에는 온돌을 놓아 난방을 했는데, 난방은 숯을 이용했다. 왕의 잠자리는 침대가 아니라 이불과 베개를 놓은 형태였다. 왕이 잠잘 때 머리는 북쪽이었으며 머리맡에는 병풍을 쳤다. 왕이 잠을 자는 방에는 이부자리와 병풍을 제외한 어떠한 기물도 들어가지 않았다. 물론 이것은 만에 하나 기물들이 흉기로 이용될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라고 할 것이다. 왕이 잠을 자는 중앙의 방을 둘러싼 8개의 방 가운데 왕의 머리가 향한 북쪽의 방에서는 지밀나인들이 숙직을 서지 않았다고 한다. 아마도 이것은 왕의 머리와 북쪽을 신성시해서였을 것이다. 그 대신 머리맡에 병풍을 놓았던 것이다.

그러나 인간 자체가 욕망 덩어리인지라 그 욕망이나 편견에서 벗어나기는 무척 어려운 일이었다. 침실의 위치와 공간구조 그리고 이름만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절대 아니었다. 이에 조선시대 왕들은 침실 벽에 좋은 글귀들을 써놓거나 병풍에 교훈적인 그림을 그려 놓고 늘 마음을 다잡고자 노력하기도 했다.

예컨대 태조 이성계는 정도전이 써준 경구들을 침실의 사방 벽에 붙여 놓았으며 성종은 ‘미불유초 선극유종’(靡不有初 鮮克有終)이라는 경구를 붙여 놓았는데, 이는 ‘처음에 착하지 않은 사람이 없지만 끝까지 착한 사람은 드물다’는 뜻이었다. 초심, 즉 처음의 마음을 끝까지 지켜나가고자 하는 의미라고 하겠다. 이뿐만이 아니다. 조선시대 관료들은 더욱 실제적인 방법으로 경연이라는 제도를 활용했다. 경연은 왕과 신하가 모여 경전을 읽고 토론하는 일종의 세미나였다. 조선시대 관료들은 경연중에서도 밤에 하는 경연인 야대(夜對)를 강조했다. 야대를 하면 왕이 여자들을 만나는 시간이 줄어든다. 자연스럽게 색욕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이었다.

이런 노력들은 모두 수양과 교육을 통해 원초적 욕망을 벗어난 훌륭한 지도자로 만들기 위한 발버둥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왕도 인간인데 원초적 욕망들을 모두 억제하기만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특히 색욕은 부부생활이나 자녀 출산과도 직결되므로 금욕 못지않게 성생활 자체도 중요했다.

조선시대 왕의 성생활은 몇 가지 특징이 있다. 무엇보다 왕의 침실을 지상의 황극이라는 생각에서 왕 혼자만 사용하게 함으로써 왕비나 후궁과의 합방이 문제되었다. 즉, 언제 합방할지, 합방은 어떤 식으로 할지 등이 중요한 문제였다. 이것은 결국 조선시대 왕의 성생활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에 관한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조선시대 왕이 왕비나 후궁과 어떻게 합방했는지를 알려면 중국의 ‘주례’라는 책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 책은 조선 왕조의 설계자 정도전이 조선 체제의 기본 모델로 이용하였기 때문이다. ‘주례’에는 황제의 본부인인 황후와 함께 후궁들이 등장하는데, 조선시대 왕도 본부인인 왕비와 함께 후궁이 있었다. ‘주례’에는 중국 황제의 경우 황후 1명을 위시하여 부인(夫人) 3명, 빈(嬪) 9명, 세부(世婦) 27명, 여어(女御) 81명 등 120명의 후궁이 황제의 합방 상대자로 나온다. 황제는 이들 121명의 여성과 어떤 방식으로 합방했을까.

‘여러 비빈이 황제와 합방하는 방식은 다음과 같다. 황후나 비빈은 달의 형상을 본받는다. 그러므로 달이 점차 차듯 비빈들이 황제와 합방하는 것은 아래 비빈이 먼저이고 위의 비빈이 뒤다. 여어 81명은 매일 밤 9명씩 9일 밤을 황제와 합방한다. 세부 27명은 매일 밤 9명씩 3일 밤을 황제와 합방한다. 빈 9명은 9명이 1일 밤을 황제와 합방한다. 부인 3명은 3명이 1일 밤을 황제와 합방한다. 황후는 혼자 1일 밤을 황제와 합방한다. 이렇게 하면 달이 보름 만에 다 차듯 한 바퀴를 돌게 된다.’ (‘주례’)

이것은 ‘주례’ 주석의 대가로 알려진 정현(鄭玄)이 주석한 내용이다. 이에 의하면 중국 황제는 황후를 제외한 후궁들과는 집단적으로 합방하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즉 여어·세부·빈과는 9명씩 합방하고 부인과는 3명씩 합방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중국의 황제는 후궁들과의 집단 합방뿐만 아니라 환관들과의 동성애도 적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는 그만큼 중국의 성문화가 개방적이었음을 보여준다.

이에 비해 조선의 왕은 후궁들과 집단합방하지는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게다가 ‘주례’에서는 황제가 하루도 쉬지 않고 매일 밤 황후나 후궁들과 합방하는 것으로 나타나지만, 조선의 왕은 매일 밤 합방하지도 않았다. 이것은 중국에 비해 조선시대의 성 윤리가 매우 엄격하였다는 의미다. 또한 ‘주례’에서는 황후나 후궁들이 황제의 침실로 와서 합방하는 것으로 나타나지만 조선시대 왕은 꼭 그런 것은 아니었다. 예컨대 왕이 왕비나 후궁의 침실로 찾아가 합방하는 것이 일반적 상황이었다. 이는 아마도 조선시대 왕과 후궁 사이에 집단합방이 없었기에 그랬을 것으로 짐작된다. 왕이 어느 후궁에게 갈지는 순전히 왕의 마음에 달려있었다.

하지만, 왕비나 후궁이 왕의 침실로 찾아와 합방하는 일도 없지 않았다. 이런 경우는 보통 왕비나 후궁에게 아들이 들어설 것 같은 길일에 제조상궁이 왕에게 합방을 권유한다고 한다. 또는 왕이 미리 점찍어둔 궁녀나 기생을 왕의 침실로 은밀히 불러 합방하는 일도 있었다. 왕의 부름을 받은 궁녀나 기생은 새옷에 분단장을 하고 왕의 침실로 들어간다고 한다.

이처럼 중국 황제의 성생활과 비교되는 조선시대 왕의 성생활은 경복궁내 왕비의 침실인 교태전(交泰殿)이라는 이름 속에 함축적으로 나타나 있다. 교태전은 주역의 64괘 중 열한번째 괘인 태괘(泰卦)의 ‘천지교태’(天地交泰)라는 구절에서 따왔다. 태괘의 본 이름은 지천태(地天泰)라고 하는데, 위에 지괘가 오고 아래에 천괘가 온다. 지괘는 땅을, 천괘는 하늘을 상징한다. 상식적으로는 하늘이 위이고 땅이 아래지만 태괘에서 땅이 위로 가고 하늘이 아래로 가는 것은 하늘과 땅의 교합을 상징한다. 태괘는 남녀관계로 따지면 성관계를 갖는다는 의미다. 남녀가 교합하여 화목을 이루고 그 결과 자녀를 출생해 복을 받는다는 의미로도 볼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 몇 가지 의문을 가질 수 있다. 조선시대 왕은 몇 살 때부터 성생활을 시작하였는가, 성교육은 받았는가, 왕과 왕비의 부부간 성생활은 얼마나 자주 또 어떤 식으로 이루어졌는가 등이다. 이런 문제는 결국 전통 시대의 성의학에 관련되는 문제로서 당시의 궁중의학과 직결되어 있었다.

먼저 조선시대 왕은 몇 살 때부터 성생활을 시작하였는가 하는 점부터 살펴보자. 태괘를 구성하는 위의 지괘와 아래의 천괘는 완전히 성숙한 남녀를 상징한다. 계절로는 봄의 시작인 1월이다. 봄이란 씨를 뿌리는 계절이다. 즉 육체적, 정신적으로 완전히 성숙한 남녀가 봄철에 씨를 뿌리듯 성관계를 맺는다는 점이 암시되어 있는 것이다. 당연히 왕도 육체적, 정신적으로 완전히 성숙한 이후 성생활을 시작해야 한다는 뜻이 들어있다. 이와 관련해 조선시대 궁중의학의 대명사인 ‘동의보감’(東醫寶鑑)에는 다음과 같은 언급이 있다.

‘남자가 여덟 살이 되면 신장의 기운이 충실해져 머리털이 길어지고 영구치가 난다. 남자가 열여섯이 되면 신장의 기운이 왕성해져 정액이 만들어지고 정기가 넘쳐나며 음양이 조화된다. 그러므로 능히 자녀를 둘 수 있다. (중략) 남자가 예순네 살이 되면 치아와 머리털이 빠진다. 오장 가운데 신장은 오행 가운데 수(水)를 주관하며 오장육부의 정기를 받아 간직한다. 오장이 왕성해야 정액을 만들 수 있는데, 남자 나이 예순네 살이 되면 오장이 모두 쇠약해지고 뼈와 근육도 허약해져 정액이 모조리 없어진다. 그러므로 머리털은 희어지고 몸은 구부러지며 똑바로 걷지도 못하고 자식도 둘 수 없다.’

남자가 음양 교합을 하여 자녀를 두려면 열여섯이 되어야 가능하다는 의미다. 달리 말하면 조선시대 왕의 성생활은 열여섯 살 때부터 권장되었다고 할 수 있다. 반면 열여섯 이전에 왕 또는 왕세자가 성생활을 시작하면 생명을 단축하게 한다고 생각하였다. 예컨대 현종이 자신의 왕세자를 열 살에 혼인시키려고 하자 신하들은 다음과 같은 의견을 진술했다.

“부제학 이민적(李敏迪) 등이 글을 올려 아뢰기를 ‘제왕(帝王)의 혼인은 일반인과 다르지만 제왕이라고 해도 몸에 혈기가 있는 것은 보통사람과 마찬가지입니다. 왕세자가 타고난 자질이 숙성하고 높기는 합니다. 그렇지만 이제 겨우 나이 열 살입니다. 열 살이 어찌 아내를 둘 나이라고 하겠습니까. 신들도 왕세자의 혼인 절차가 복잡해 왕세자의 합방(合房)이 올해에 있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혼인하게 되면 2∼3년 안에 합방하게 될 것입니다. (중략) 삼가 생각하건대, 선조대왕과 인조대왕은 모두 잠저(潛邸)로 대통을 이어받았는데 혼인을 모두 어린 나이에 하지 않았습니다. 이에 나라를 다스린 것이 혹은 40년이 넘고 혹은 30년 가까이 되기도 하였습니다.”(‘현종실록’)

그러나 조선시대 왕들의 혼인 연령은 대개 열 살 전후였다. 따라서 혼인하더라도 공식적인 합방은 열다섯 살이나 열여섯 살이 되어야 이루어졌다. 예컨대 열 살에 혼인한 사도세자의 경우 공식적으로 합방한 나이는 열다섯 살이었다. 그렇지만 조선시대 왕들의 혼인연령이 열 살 안팎인 점을 고려하면 공식적인 합방을 하기까지 5~6년 이상의 기간이 있는데, 이 기간 왕들은 전혀 성관계를 갖지 않았다는 말일까. 위의 이민적이 2~3년 안에 합방했다고 한 점을 미루어보면 실제는 대부분의 왕이 10대 초반에 이미 성경험을 했으리라고 짐작된다. 그 결과 조선시대 많은 왕이 단명했다는 것이 이민적의 견해였다.

그러면 열 살 전후에 혼인하는 조선시대 왕들은 성교육을 받기는 받았을까. 성교육을 받았다면 어떤 식으로 받았을까. 조선시대 왕들이 열 살 안팎에 혼인하는 이유는 세자 책봉과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었다. 세자 책봉은 기본적으로 후계 왕으로서의 준비를 시키기 위해서였다. 이 기간 세자는 세자 시강원의 선생님들께 왕이 되었을 때 필요한 지식과 경륜을 교육받았다.

그런데 공식적인 세자교육에서 성교육은 찾아볼 수 없었다. 세자에게 교육하는 과목은 4서3경 같은 유교경전이거나 시·서·화에 관련된 문학 교육이었기 때문이다. 예컨대 정조가 세손이었을 때 교육받은 과목은 ‘효경’ ‘소학초략’ ‘동몽선습’ ‘소학’ ‘대학’ ‘논어’ ‘사략’ ‘맹자’ ‘중용’ ‘서경’ ‘강목’ ‘시경’ 등이었는데, 이런 과목은 성교육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 그렇다고 성교육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다음의 사례를 보자.

“세자의 나이가 조금 장성하였으나 그 음경이 오이처럼 드리워져 발기되는 때가 없었다. 소변도 그대로 흘려버려 항시 앉은 자리를 적셨으므로 하루에 한 번쯤 요를 바꾸거나 바지를 두 번씩 바꾸기도 하였다. 그리고 혼사를 치를 나이가 되었지만 남자의 도리를 다할 수 없어 명성왕후는 미친 듯 한탄하였다. 하루는 명성왕후가 궁비(宮婢)에게 부탁하여 세자에게 성교하는 것을 가르쳐 주도록 하고, 자신은 문 밖에서 큰 소리로 ‘되느냐? 안되냐?’ 하고 물었다. 그 궁비가 ‘안됩니다’라고 대답하였다. 명성왕후는 두어 번 한숨을 내쉬다 가슴을 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매천야록’)

이는 순종이 세자였을 때의 이야기다. 순종은 아홉 살 때 혼인했으므로 위의 사건은 그 직전의 일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즉, 순종은 혼인하기 직전인 8~9살 때 실전을 통한 성교육을 받은 셈이다. 이 사례가 모든 왕들에게 해당하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조선시대 왕들이 혼인하기 직전 비공식적으로 성교육을 받았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또한, 조선시대 왕들은 개인적으로 성 지식을 습득할 수 있었다. 예컨대 전통 시대 대표적인 성의학서인 ‘소녀경’ ‘금병매’ 등을 읽고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성의학 서적들이 궁중도서관에 소장되어 있었으므로 마음만 먹으면 충분히 읽고 학습할 수 있었다.

결국, 조선시대 왕들은 당시 남자의 성년으로 간주한 15~16세 이전에는 비록 혼인했더라도 성생활이 권장되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아울러 성교육도 공식적으로 받는 것이 아니라 혼인 직전 비공식적으로 받거나 개인적으로 학습할 수밖에 없었다고 할 것이다.

그러면 15~16세가 되어 명실상부하게 성년으로 간주된 왕들은 어떻게 성생활을 했을까. 왕과 왕비의 부부간 성생활은 얼마나 자주 또 어떤 식으로 이루어졌을까. 현재의 시각에서 조선시대 사람들의 부부간 성생활을 바라볼 때 주의할 부분이 있다. 즉, 당시의 부부간 성생활은 부부간의 화목보다 좋은 자녀의 출생이 더 큰 목적이었다는 점이다. 특히 세습제였던 조선시대에는 왕이 좋은 아들을 보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따라서 왕의 성생활은 왕비의 임신과 직결되는 문제이기도 하였다. 당연히 왕의 성생활과 왕비의 임신 등도 당시 궁중 한의학으로 대표되던 성의학 지식에 의거하여 이루어졌다. 한의학에 의하면 하늘과 땅의 음양이 서로 잘 어울려 만물이 만들어지듯 부모의 정기가 결합함으로써 새 생명이 태어난다고 하였다. 요즘의 말로 한다면 남자의 정자가 여자의 난자에 착상된다는 뜻이다. 한의학에서 남자의 정자는 정액에 해당하고 여자의 난자는 자궁혈(子宮血)에 해당한다. 몸과 마음이 건강한 자녀가 태어나려면 당연히 정액과 자궁혈이 좋아야 한다. 이와 관련하여 허준은 다음과 같은 언급을 하고 있다.

“남녀가 한번 교합하면 정액 반 홉이 없어진다. 정액을 없애고 보충하지 않으면 몸이 피곤해진다. 그러므로 욕정을 참지 않으면 정액이 없어지고, 정액이 없어지면 기운이 약해진다. 기운이 약해지면 병이 오고, 병이 오면 몸이 위태로워진다. 아! 정액은 사람의 몸에서 가장 중요한 보물이로다.”

그러므로 왕이 좋은 자녀를 보기 위해서는 욕정을 줄이고 마음을 수양해야 했다. 달리 말하면 황극의 도를 닦아 정액을 충실하게 길러야 한다는 뜻이다. 이렇게 왕이 자신의 침실에서 홀로 황극의 도를 닦다 왕비의 임신 적기에 합방해야 하는 것이었다. 허준은 이를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남자의 정력이 미약하면 비록 남녀 교합을 해도 정액이 약해 자궁으로 곧바로 들어가지 못하고 수태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왜 이런 현상이 나타나는가. 그것은 평상시 욕망과 욕정을 절제하지 않아 정액을 함부로 낭비했기 때문이다. 이런 때는 마땅히 정력과 정액을 보강해야 한다. 아울러 마음을 고요히 하여 욕정의 불길이 함부로 일어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이렇게 하여 정력과 정액을 충실히 하고 때에 맞추어 교합하면 일거에 수태할 수 있다.”

“아들을 얻고자 한다면 부인의 월경 후 1·3·5일 가운데 봄에는 갑을(甲乙)이 들어가는 날에, 여름에는 병정(丙丁)이 들어가는 날에, 가을에는 경신(庚辛)이 들어가는 날에, 겨울에는 임계(壬癸)가 들어가는 날에 교합하되 한밤중이 지난 다음에 사정해야 한다. 이렇게 하면 아들이 태어나는데, 그 아들은 장수를 누리고 똑똑하기조차 하다. 부인의 월경 후 2·4·6일에 교합하면 딸이 태어난다. 6일이 지난 뒤에는 교합하지 않는 것이 좋다.”

왕이 자신의 침실에서 고요히 몸과 마음으로 황극의 도를 닦는다면 몸과 마음이 모두 충실해질 것이다. 그렇게 몸과 마음을 충실하게 준비했다가 왕비의 임신 적기가 되면 합방하는 것이다. 합방은 물론 왕이 왕비의 침실로 가서 한다. 이렇게 왕과 왕비가 합방하면 어떻게 될까. 그 효과에 대해 허준은 다음과 같이 최고의 결과를 예언했다.

“복과 덕이 있고, 큰 지혜와 인격을 갖춘 아이가 태어난다. 아울러 그 아이의 성품과 행실이 어긋나지 않아 집안이 나날이 번성할 것이다.”

좋은 아들을 바라는 왕이나 왕비에게 이보다 더 큰 축복이 있겠는가. 하늘이 왕에게 이런 축복을 허락하는 이유는 바로 왕이 몸과 마음으로 황극을 닦았기 때문이다. 요컨대 조선시대 왕의 침실은 몸과 마음으로 황극을 닦는 공간이었다고 결론내릴 수 있다. 혼자만의 침실에서 황극을 잘 닦았을 때 왕은 최고권력자로서뿐만 아니라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도 복을 받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희망사항이라고 할 수 있었다. 헤아릴 수 없는 이론과 노력에도 조선시대 왕이나 왕세자 중에는 자신의 색욕을 절제하지 못하고 파멸의 나락으로 떨어진 사람들이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예컨대 연산군의 경우가 그렇다.

연산군은 조선시대 국왕 가운데 유별나게 여색을 밝힌 왕이었다. 수많은 후궁을 들였을 뿐만 아니라 궁궐 기생들을 어마어마하게 들였다. 전국의 젊고 예쁜 여성들을 궁궐로 들이기 위해 채홍사(採紅使)라는 희한한 이름의 관리들을 파견하기도 했다. 이렇게 궁궐로 들인 기생이 1만여 명을 헤아렸다. 1만여 명의 기생 중에서 흥청(興淸)이라고 이름붙인 1,000여 명의 기생은 아예 궁궐 안에 거주하게 하여 사실상의 후궁으로 삼았다. 심지어 연산군은 수많은 양반 관료들의 처를 건드리거나 큰어머니 박씨와 추문을 만들기도 했다. 연산군을 권좌에서 몰아낸 중종반정의 주도자 박원종은 바로 박씨의 남동생이었다. 이 박원종이 연산군을 축출하는 일에 앞장서게 된 이유는 무엇보다 연산군의 무절제한 색욕에 있었다고 할 것이다. 이에 대하여 역사서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연산군은 남녀관계의 행실이 더욱 추잡해져 선왕의 궁녀까지 음행한 일이 있었다. 뿐만 아니었다. 연산군은 궁중의 잔치에 양반 관료들의 부인들을 초청하고 그 중 얼굴이 예쁜 자는 문득 끌어들여 간통하였다. 부끄러움이 없는 부인들은 궁중에 남아 있기를 원하기까지 하였다. 그 중 연산군의 사랑을 받은 자는 자주 불러들여 밤을 지새운 후 내보내고 그 남편의 벼슬을 승진시켜 주었다. 연산군의 큰아버지 월산대군의 부인 박씨를 세자를 보호해 주라고 핑계하고 대궐 안으로 끌어들여 강간하기도 하였다. 이에 박씨는 부끄러워 자살하였다.’ (‘연려실기술’)

위의 역사는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절대권력자인 왕이 사사로운 욕망에 굴복할 때 자신뿐만 아니라 나라까지 파멸에 이를 수 있다는 교훈 아닐까. 또 절대권력자라고 해도 개인적 욕망을 극복하는 일은 궁극적으로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자신의 몫이라는 교훈 아닐까.

왕이랑 중전이랑 밤을 치를때 기록하는 내시도 있었다. 중전이 임신을 했을 때 언제 관계를 맺어져 아기씨를 가졌는지 알수있게 하기위해서.

중전과 함께 밤을 보내려고 하면 중전은 후사를 생산 해야 했기에..좋은 기운을 타고 나야 했기에 단 둘이 있는게 아니라 밤에 문 밖에 지밀상궁과 침방내시가 서서 전하 이렇게 하셔야 하옵니다.지금입니다.아직 아니옵니다.

하며 왕과 중전의 행동을 조절했다. 물론 방밖엔 상궁과 내시 나인들이 있었고 왕이 만약의 경우 왕이 심장마비나 복상사의 위험이 있을 경우를 대비해 나인들은 숨통을 튀어줄 임시 치료구 바늘까지 가지고 있었다.
왕과 잠자리를 하게 된 여인들은 손톱 발톱 다 바짝 깎아야 했다..왕의 몸에 상흔이 남지 않도록..
암튼 왕의 잠자리에 왕은 어려서부터 습관이 되서 불편한 줄 모를지도 모르지만 그넘의 왕노릇이 우리가 생각하는대로 오늘은 이 여자 내일은 저 여자 마음대로 가질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가진다 해도 잠자리가 지금 생각하는만큼 자유로운 것도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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