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성이 지극했던 왕세자 이향
조선의 5대 왕 문종은 1414년(태종 14) 세종과 소헌왕후의 첫째 아들로 한양의 사저에서 태어났다. 이름은 향(珦), 자는 휘지(輝之)이다. 부왕 세종이 왕위에 오르고 3년이 지난 1421년(세종 3)에 8세의 나이로 세자에 책봉되었다.
문종은 성품이 인자하고 명철했으며, 학문을 좋아하고 음악과 여색은 즐기지 않았다. 그는 특히 문장에 뛰어났다. 세자 시절 문종이 집현전 학사들에게 귤을 담아 보낸 소반에 귤시(橘詩)를 지어 적은 일이 있었다. 이를 본 집현전 학사들이 그 뛰어난 문장과 글씨에 반해 서로 베껴 적으려고 소반을 놓지 않았다고 한다.
문종은 효성이 지극하기로도 유명했다. 문종은 부왕이 앵두를 좋아하는 것을 알고 궁에 손수 앵두나무를 심고, 앵두가 익으면 부왕에게 가지고 갔다. 이를 맛본 세종은 어디에서 가져온 앵두보다도 세자가 손수 심어 가져온 앵두의 맛이 가장 좋다며 기뻐했다고 한다. 실록에는 문종의 효성에 대해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임금의 성품이 지극히 효성이 있어 양궁(兩宮)에 조금이라도 편안치 못한 점이 있으면 몸소 약 시중을 들어서 잘 때도 띠를 풀지 않으시고 근심하는 빛이 얼굴에 나타났다. 소헌왕후가 병환이 났을 적에 사탕을 맛보려고 했는데, 후일에 어떤 사람이 이를 올리는 이가 있으니, 임금이 이를 보시고는 눈물을 흘리면서 휘덕전(輝德殿)에 바치었다. 세종이 병환이 나자 근심하고 애를 써서 그것이 병이 되었으며, 상사(喪事)를 당해서는 너무 슬퍼해 몸이 바싹 여위셨다. 매양 삭망절제(朔望節祭)에는 술잔과 폐백을 드리고는 매우 슬퍼서 눈물이 줄줄 흐르니, 측근의 신하들은 능히 쳐다볼 수가 없었다. - 《문종실록》 권 13, 문종 2년 5월 14일
문종은 1427년(세종 9)에 김오문(金五文)의 딸 휘빈 김씨와 혼인했다. 그러나 휘빈 김씨는 문종이 자신을 가까이하지 않자 은밀한 술법을 동원해 문종의 사랑을 얻으려고 했다. 이러한 불순한 행실이 결국 세종의 귀에까지 들어가 쫓겨나게 되었다.
세종은 1429년(세종 11) 폐출된 휘빈 김씨를 대신해 봉여(奉礪)의 딸을 새 세자빈으로 들였다. 순빈(純嬪) 봉씨다. 그러나 문종은 순빈도 가까이하지 않았다. 이에 세종은 후사가 걱정이 된다는 신료들의 의견을 받아들여 세자에게 세 명의 소실을 얻어 주었다. 그 후 문종은 소실들의 거처를 드나들기 시작했지만 순빈에게는 여전히 마음이 가지 않았는지 좀처럼 처소를 찾지 않았다. 화가 난 순빈은 술을 마시고 행패를 부리기도 하고, 궁녀들과 추문을 일으키기도 했다. 이는 세종의 심기를 더욱 불편하게 했다. 결국 두 번째 세자빈 순빈 역시 1436년(세종 18)에 폐출되고 말았다.
이처럼 문종은 왕위에 오르기도 전에 두 명의 세자빈이 폐출되는 불운을 겪었다. 처음부터 자질이 부족한 세자빈을 간택한 것도 문제였지만, 문종이 부인들에게 정을 주지 않았던 것도 문제였다. 문종은 워낙 몸이 허약해 여색을 즐기지 않았다. 이는 덕이 높은 며느리를 보고자 했던 세종에게도 큰 상심이 되었다.
문종은 새로 세자빈을 간택하지 않고 세 명의 소실 중에서 당시 유일하게 자식(경혜공주)을 낳은 권씨를 세자빈으로 삼았다. 권씨는 이후 아들을 한 명 더 낳았는데, 이가 단종이다. 권씨는 단종을 낳고 사흘 만에 죽었으며, 훗날 현덕왕후(顯德王后)로 추존되었다. 이후 문종은 더 이상 세자빈을 두지 않은 채 정비가 없는 상태로 왕위에 올랐다. 이 밖에 문종은 세 명의 소실 중 한 명인 양씨에게서 딸 하나를 더 낳았다.
5년의 섭정과 2년의 짧은 치세
문종은 29년 동안이나 세자의 자리에 있었던 준비된 왕이었다. 1445년(세종 27)부터 문종은 건강이 좋지 않은 세종을 대신해 섭정을 했다. 세종은 그 전부터 이미 여러 차례 "나의 계획한 일이 젊을 때와 다른 것이 많고, 또 풍질(風疾)이 있어 스스로 힘쓰기 어려우니 세자로 하여금 모든 정무를 대신 다스리게 하겠다."라는 뜻을 비쳤다. 대신들은 법도에 어긋난다는 이유로 이를 반대했으나 세종은 1443년(세종 25) 왕세자가 섭정하는 제도를 만들고, 이에 따라 1445년(세종 27)부터 본격적으로 모든 정무를 세자가 맡아보게 되었다.
1450년(세종 32) 2월 세종이 죽자 문종은 마침내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이미 세자 시절부터 노쇠한 부왕을 대신해 섭정을 했던 터라 왕위에 올랐다고 갑자기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그래서 문종 대 역시 세종 대 말기의 분위기가 그대로 이어지고 있었다. 당시는 대간의 역할과 권력이 점차 커지던 시기였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문종은 오히려 자주 구언(求言)했으며, 언로(言路)를 넓히기 위해 문무(文武) 4품 이상의 관원들에게만 허락되던 윤대(輪對, 임금을 만나 직무에 대해 아뢰던 일)를 6품까지 참여할 수 있도록 했다.
또한 1451년(문종 1)에는 새롭게 고친 《고려사》를 편찬하고, 1452년(문종 2)에는 《고려사절요》를 편찬했다. 이처럼 문종은 역사를 통해 문치주의를 실천하기 위해 노력했다.
문종은 세종처럼 학식과 인품을 갖춘 성군으로 성장할 자질을 갖추고 있었다. 다만 세종이 말년에 세자 섭정을 시킨 것이 오히려 왕권을 약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고, 그 와중에 문종의 두 동생 수양대군과 안평대군 등 종친 세력이 커진 것이 화근이었다. 더구나 몸이 허약했던 문종은 왕위에 오른 후에 점차 병색이 짙어져 2년 3개월 만에 죽고 말았다. 향년 39세였다.
문종이 죽자 종법에 따라 그의 적장자인 단종이 왕위에 올랐다. 이때 단종의 나이는 12세였다. 문종은 죽기 전 김종서, 황보인(皇甫仁) 등의 원로대신에게 한 명뿐인 아들의 보필을 부탁했다. 그러나 세종 말년 이후로 왕권이 약화된 틈에 문종의 동생이자 단종의 숙부인 수양대군과 안평대군이 호시탐탐 정권을 노리고 있었다. 태어나자마자 모후를 잃고 또다시 성년이 되기도 전에 부왕을 잃은 어린 왕의 운명은 그야말로 풍전등화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