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
본문 : 시 84:1-12
우리의 삶에서, 집은 건물 이상의 의미가 있습니다,
‘아파트냐, 주택이냐?’ ‘몇 평짜리 아파트냐?’
‘서울, 그것도 강남에 사느냐? 시골이냐?’라고 사람들은 묻지만,
사실 그런 것은 큰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집이 우리 육체와 마음의 안식처라는 것입니다.
힘들고 지쳐 있다가도 집에서 쉬면, 금방 힘을 얻습니다.
그래서 밤이 되면 사람들은 꼭 자기 집을 찾습니다.
어렸을 때 저에겐 집이라고 하면,
부모님이 계신 곳이었습니다.
지금은 아내가 있는 곳이 저의 집입니다.
과거 어떤 드라마에서 본 것입니다만,
병으로 먼저 죽어가는 아내에 남편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보, 당신은 내 집이야!’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만,.....
그만큼 집과 아내는 비슷하고,
지친 사람이 쉼을 얻고 회복되는 곳,
안식처라는 뜻입니다.
교회는 영혼의 안식처입니다......
그런데 우리 영혼에도 안식처가 있습니다. 어디겠습니까? 교회입니다,
우리영혼이 지쳤을 때, 삶이 무너지고,
인생의 여러 문제로 힘들어할 때, 이상하지요?
교회 와서 찬송하고 기도하며, 하나님을 만나면, 힘이 생깁니다.
왜 교회가 소중합니까?
‘하나님의 집’이기 때문입니다.
집에 가면 부모를 만나고,
가족들을 만나듯이 교회에 가면 하나님을 만납니다.
어떤 사람이 드넓은 태평양 한가운데서 난파를 당해
황량한 무인도에서 혼자 살게 되었습니다.
몇 년이 지난 어느 날 멀리 지나가는 배를 보게 되었고,
미친 듯이 손을 흔들며 구조를 요청하였습니다.
결국, 그를 발견한 배가 섬을 향해 다가왔습니다.
배에서 내린 선장은 여기저기를 둘러보다가 물었습니다.
“저기 오두막이 왜 두 채나 됩니까?” “저쪽에 있는 것은 저의 집입니다.”
“그럼 그 옆에 있는 것은?”
“그건 제가 다니는 교회랍니다!”.....
몸을 위해 집이 있다면
우리 영혼을 위해 교회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누군가는.....
‘인생의 방황은 예수님 만나면 끝이 나고,
신앙의 방황은 좋은 교회를 만나면 끝이 난다’라고 했습니다.
성결교회의 유명한 부흥강사였던 이성봉목사님이
6.25 전쟁 때 미처 피난을 가지 못하고 계시다가,
목포에서 인민군에게 체포되었다고 합니다.
젊은 장교가 목사님을 심문했습니다.
“영감, 예수 믿는 목사 맞아?” “그렇습니다.”
“예수 왜 믿어?” “천당 가려고 믿습니다.”
“천당 가보았어?”
“예, 천당 본점은 가보지 못했어도 지점은 가보았습니다.”
“지점이 어딘데?” “예, 교회입니다.
살았을 때에는 천당 지점인 교회에서 하나님 믿다가,
죽으면 천당 본점인 하늘나라에 가게 됩니다.”
이 대답을 들은 인민군이
“이 영감 진짜로구먼”하고는 석방시켜 주었답니다.
그렇습니다.
천당 지점인 교회 와서 예배하고,
그 마음에 천국이 임한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오늘 우리는 시편 84편을 읽었습니다.
이 시편은 ‘고라 자손의 시. 인도자를 따라
깃딧에 맞춘 노래’라는 제목이 붙어 있습니다.
이 시편의 역사적인 배경은 알려지지 않지만,
학자들은 이 시편이 유대인의 절기 때에,...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
저 시온으로 순례 길에 오른 이들이 불렀던
노래였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이 시편을 압도하는 주제는....
하나님과 그분의 성전,
그리고 자유롭게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사람들의 행복입니다.
이 시편에는 하나님의 이름이 다양하게 계속 등장합니다.
‘만군의 여호와’ ‘나의 왕 나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여호와 하나님’ ‘하나님’ 등입니다.
시인은 하나님을 갈망하는 마음으로
매 절마다 애타게 하나님의 이름을 부릅니다.
또 이 시편에는 ‘주의 장막’ ‘여호와의 궁정’ ‘주의 제단’ ‘주의 집’
‘주의 궁정’ ‘하나님의 집’ ‘시온’ 등 성전을 가리키는 용어들도
집중적으로 등장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성전을 그리워하는 시인의 마음을 잘 나타내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이 시편에는 ‘복이 있도다(אַשְׁרֵי 아쉬레이)’라는
감탄사가 세 번이나 등장합니다.
자 그렇다면 성도님들 !
이 시편은 어떤 사람이 복이 있다고 노래할까요?
주의 장막이 어찌 그리 사랑스러운지요
첫 번째, 하나님의 성전을 사모하는 자가 복이 있습니다.
<1-2절을 읽어라>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장막이 어찌 그리 사랑스러운지요.
내 영혼이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하여 쇠약함이여
내 마음과 육체가 살아 계시는 하나님께 부르짖나이다.”
여기에 보면, 이 시인은 ‘만군의 여호와여,
주님이 계신 곳이 얼마나 사랑스러운지요.’
라는 말로 이 시를 시작합니다.
그리고 ‘내 영혼이 주님의 궁전 뜰을 그리워하고 사모합니다.’
라고 고백합니다.
어느 정도로 주의 전을 사모하고 있습니까?
그 영혼이 쇠약해질 정도입니다,
여기서 ‘쇠약함이여’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כָּלְתָה 칼레타’입니다.
이 단어의 문자적인 의미는 ‘끝나다, 멸하다’입니다.
시인은 ‘주의 전에 너무 가고 싶어서 얼굴이 창백해지고,
죽을 것 같다.’ ‘애간장이 타서 녹아질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렇게까지 주의 장막,
주의 전을 사모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주의 집에 사는 자’가 복이 있기 때문입니다.
4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4절도 같이 읽습니다.
“주의 집에 사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항상 주를 찬송하리이다 (셀라)”
성도님들 ! 주의 집에 사는 자가 누구입니까?
성전에서 섬기는 제사장과 레위인들,
그리고 언제든지 자유롭게 성전에 와서 예배하는 자들입니다.
아마 이 시편을 쓴 시인은, 어느 날 주의 성전 처마 밑에,
참새의 둥지가 있고, 제비의 보금자리가 있는 것을
발견했던 것 같습니다. 그는 참새 가족과 제비 가족이
행복하게 사는 모습을 보면서 “저게 행복이구나!”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나의 왕, 나의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제단에서 참새도 제 집을 얻고
제비도 새끼 둘 보금자리를 얻었나이다”(3절) 하고 노래합니다.
자신이 주의 전을 얼마나 사모하는지, 제단 곁에 둥지를 튼
참새와 제비들이 부럽다고 한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자유롭게 신앙 생활하지만,
교회에 오고 싶어도 올 수 없는 사람들이 세상에는 많습니다.
모퉁이돌 선교회 대표이신 이삭 목사님의 글에 보면...,
80년대 말경 구소련의 어느 도시에서 한 비밀 예배처를
탐방할 기회를 얻었다고 합니다. 예배처에 가보니,.....
. 예배드리기 전부터 성경 통독을 하면서 울던 성도들은
예배가 시작되어서도 울음을 그치지 않았습니다.
낡은 풍금으로 반주를 하는 단 몇 명뿐인 성가대의 송영도
울음 때문에 제대로 나오지 않았고 회중의 찬송 소리에도
울음이 섞였습니다.
설교를 들을 때나 성찬을 나눌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예배를 마친 후 ‘왜 그렇게 울면서 예배를 드리느냐’고
그 이유를 물었더니....
“오늘이 이 세상에서 드리는 마지막 예배가 될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라고 한 사람이 대답했습니다.
그들 중에는 어느 날 갑자기 KGB에 잡혀가서....
20년 혹은 30년이 넘도록 돌아오지 못하는 사람들이 수두룩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주의 전에 와서 민군의 여호와,
우리 하나님을 자유롭게 만나는 사람,
날마다 주의 전에 거하는 사람은
얼마나 복된 사람이겠습니까?(4절)
그들의 입에서는 찬양 소리가 끊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 안에서 사는 자는
세상 모든 것을 얻은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김장환 큐티365」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군산의 한 빵집은 오전 10시에 빵이 나오는데,...
2시간 전부터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선다고 합니다.
군산 시내에는 빵집이 정말로 많은데.....
사람들은 여기에만 줄을 섭니다.
어느 방송국의 한 프로그램에서 리포터가 줄을 서 있는 사람들에게
왜 이렇게 줄을 서서까지 빵을 사려 하냐고 묻자
사람들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여기 빵이 정말 맛있어요.
올 때마다 줄을 서야 하지만
충분히 기다릴 가치가 있어요.”
그렇겠지요. 생텍쥐페리(Saint-Exupéry)의 책
「어린 왕자」에는 이런 말이 나옵니다.
“네가 오후 4시에 온다면 난 3시부터 행복할 거야.”
서로 사랑하는 연인들은 상대방이 늦어도 기쁘게 기다립니다.
상대방이 그만큼 소중하고 사랑스럽기에,
기다리는 시간도 즐겁습니다.
그러나 권태기에 빠지고 사랑이 식어지면, 어떻게 됩니까?
5분만 늦어도 표정이 굳어지고 목소리가 날카로워집니다.
혹시 성도님들은 주일날 교회 가는 시간이 기다려집니까?
만약 교회에 와서 주님을 예배하고,
성도들과 함께 교제하는 시간이 기다려지고,
마음 설레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분명히 주님과 동행하고 있는 사람,
그의 입에 늘 찬송이 있는 사람일 것입니다.
성도님들 ! 누가 복 있는 사람입니까?
시편 84편은 ‘주의 집에 사는 자들이 복이 있다’고 했습니다.
주의 전을 사모하고 예배를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 시편은 어떤 사람이 복이 있다고 노래할까요?
첫 번째, 하나님의 성전을 사모하는 자가 복이 있습니다.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
두 번째,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사람이 복이 있습니다.
5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주께 힘을 얻고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
여기서 ‘시온’은 하나님의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을 말합니다.
영적으로는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속한 사람에게는
그 마음에 하나님 나라를 향하여 가는 큰 길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말이 다르고 행동이 다르고 가치관이 다릅니다.
그 마음에 ‘길’이 분명하게 있기 때문입니다.
‘그 마음에 길이 있다’는 말이 놀랍지 않습니까?
사람은 그 마음에 난 길을 따라 삽니다.
밤이 되면 사람들은 집으로 갑니다.
아무리 술에 취해도 자기 집은 잘 찾아갑니다.
그 마음에 ‘집으로 가는 길’이 있기 때문입니다.
술 취했다고 집을 못 찾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것처럼 예수 믿는 우리 안에는
바로 ‘시온으로 가는 길’,
‘천국으로 가는 길’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말 성경에는 ‘시온의 대로’라고 되어 있지만,
사실 원문에는 ‘시온’이라는 말이 없습니다.
그냥 ‘대로(大路)’, ‘길’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대로’로 번역된 히브리어 ‘מְסִלֹּות 메실로트’는
‘쌓아 올리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자연적으로 난 길이 아니라 인공적으로 만든 길....
곧 돌을 깔고, 다져서 만든 길이라는 뜻합니다.
우리 식으로 말하면, 포장도로입니다.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다’는 것이 그렇습니다.
자연적으로 난 길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가 만드는 길’입니다.
그래서 사람마다 마음의 길이 다릅니다.
마음이 향하는 곳이 사람마다 다르고, 인생의 목적지가 다릅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 믿는 우리에게는
천국 가는 길이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그의 마음에 ‘길’, ‘시온의 대로’가 생깁니다.
그래서 감리교회 창시자 존 웨슬리는
우리가 예수 믿고 신앙 생활하는 것을
‘하나님 나라 가는 길’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예수 믿고 구원받은 사람은
‘하나님 나라로 가는 길에 선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그리스도인은 그 마음의 길,
시온의 대로가 희미한 사람이 있습니다.
겨우 주일에 한 번 교회에 나오기 때문에.
그 길이 희미한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 가는 길, 시온의 대로에 잡초가 무성하게 나 있습니다.
자주 가지 않기 때문입니다.
나중에는 그곳이 길인지 아닌지조차 알 수 없게 됩니다
. 그렇게 되면, 결국 길을 잃고 말 것입니다.
우리 중에는 그런 사람이 많습니다.
요즘 제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은,
주일성수 개념이 희미해진 것입니다.
코로나 이전에는 그래도 주일은 교회 와서 예배드리는 날이었습니다.
그런데 요즘에는 그런 ‘주일성수’ 개념이 희미해져서
교회에 와서 예배하는 것이 아니라....
유튜브로 목사님의 설교만 듣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아닙니다. 그래서는 안됩니다.
우리 마음에 시온의 대로,
‘교회를 향한 길’이 분명해져야 합니다.
성도님들 !
죄가 무서운 것은, 죄가 우리 마음에 있는 시온의 대로를 지우고,
죄의 길을 만들기 때문입니다. 죄는 어쩌다가,
실수로 한번 짓게 되는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죄는 금방 우리 육신에 영향을 미쳐서, 한번 죄를 지으면,
그 죄를 반복하게 되고.....
그러다가 ‘죄의 길’이 마음에 생기게 됩니다.
문제는 마음에 죄의 길이 생기면, 그때부터
그 죄는 엄청난 힘을 가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도박을 끊기 어렵고, 마약을 끊기 힘들고,
술을 끊기가 그렇게 힘듭니다.
이미 ‘그 마음에 길’이 나 있기 때문입니다.
혹시 성도님들의 마음에는 어떤 길이 있습니까?
시온의 대로, 교회로 가는 길, 천국으로 가는 길이 있습니까?
아니면 죄의 길이 있고, 자신도 모르게 그 죄의 길로 끌려가고 있습니까?
가만히 보면..., 예수님을 믿고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기는 하지만,.....
몸은 자꾸 다른 길로 가는 그리스도인들이 많습니다.
죄의 유혹, 육신의 욕망에 흔들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야 할 길은 하나님 나라, 교회인데 몸은 자꾸 다른 길로 갑니다.
그러니 얼마나 안타깝습니까?
‘기도해야지, 성경 읽어야지, 용서하고, 사랑해야지..
.’ 잘 알지만 그대로 살아지지 않습니다
. 몸이 자꾸 다른 길로 가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혹시 그런 분이 있다면 기도해야 합니다.
울면서 기도해야 합니다.
실제로 그렇게 살지 못하면,
아직 ‘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시온의 대로’를 따라 하나님의 전에 이르려면,
하나님께서 힘을 부어주셔야 합니다
. ‘시온의 대로’는 그저 순탄한 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눈물 골짜기를 지나야 합니다. <6-7절을 같이 읽습니다>
“그들이 눈물 골짜기로 지나갈 때에 그곳에 많은 샘이 있을 것이며,
이른 비가 복을 채워주나이다 그들은 힘을 얻고
더 얻어 나아가 시온에서 하나님 앞에 각기 나타나리로다” ....
보세요 여기에 보면 시온을 향해 올라가는 순례자들이
‘눈물 골짜기’를 지날 것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눈물 골짜기’란 히브리어로 ‘בָּכָא 바카’라고 합니다.
이 단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 여러 의견이 있지만,
학자들이 대체로 동의하는 것은,
이 단어가 ‘메마른 광야’를 뜻한다는 것입니다.
메마른 광야를 지나는 것은 눈물 나는 일입니다
. 그래서 ‘눈물 골짜기’라고 의역을 한 것입니다.
늘 하나님을 찾고 주의 전에서 예배하는 사람도 ....
메마른 광야, 즉 눈물 골짜기를 지나가야 할 때가 있습니다.
믿음이 좋다고 해서 걷는 곳마다 낙원으로 변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러나 염려할 필요는 없습니다.
6절은 그들이 눈물 골짜기를 지날 때
‘그곳에 많은 샘이 있을 것이며’라고 합니다.
눈물 골짜기, 메마른 광야를 만날 때마다
하나님의 은혜가 임합니다.
“이 길이 살 길이다! 이 길이 하나님께로 가는 길이다”
주님은 계속하여 힘을 주십니다.
그렇게 해서, 7절에 보면,
그들은 결국 하나님 앞에 다다르게 됩니다.
성도님들 !
지금도 그렇게 우리 곁에서 힘을 주시고,
인도하시는 분이 누구일까요?
바로 우리 안에 오신 성령님이십니다.
성령님은 계속 우리를 격려하고 우리에게 “주님을 바라보라,
주님께 순종하라”고 하십니다. 그렇습니다.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사람,
눈물 골짜기를 지날 때에도 주님이 주시는 힘으로,....
날마다 한 걸음씩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그 사람이 복 있는 사람입니다.
이 시편은 어떤 사람이 복이 있다고 노래할까요?
첫 번째, 하나님의 성전을 사모하는 자가 복이 있습니다.
두 번째,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사람이 복이 있습니다.
주께 의지하는 자......
세 번째, 누가 복이 있는 사람입니까?
주께 의지하는 자가 복이 있습니다.
<11-12절을 읽어라>
“여호와 하나님은 해요
방패시라 여호와께서 은혜와 영화를 주시며
정직하게 행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아끼지 아니하실 것임이니이다
만군의 여호와여 주께 의지하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
여기에 보면, 시인은 ‘하나님이 해요, 방패시라’고 노래합니다.
‘해’라는 말은 온갖 좋은 것들이 다 하나님께로부터 온다는 뜻이고,....
‘방패’라는 말은 우리 인생의 진정한 보호자는 하나님이시라는 말입니다.
특히 여기서 ‘의지하는’이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בֹּטֵחַ 보테흐’는
‘피난하기 위해 서둘러 가다’라는 뜻입니다.
인생의 고통과 어려움을 당했을 때,
오직 하나님께로만 달려가는 사람,
그 사람이 가장 복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저는 이 설교를 준비하다가
10절 말씀이 제 가슴에 와 닿았습니다.
사실 10절은 눈물겹도록 아름다운 구절입니다.
자 10절을 같이 읽어 볼까요?
“주의 궁정에서의 한 날이 다른 곳에서의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사는 것보다
내 하나님의 성전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 ,.....
여기에 보면 이 시인은 ‘하나님의 성전 뜰에서
지내는 한 날이 다른 곳에서의 천 날보다 더 낫다’
‘악인의 장막에 거하는 것보다 하나님 성전의 문지기로
있는 것이 더 좋다’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런 신앙을 가질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알다시피 이 시편은 고라 자손이 쓴 시입니다.
원래 고라는 레위의 증손으로 이스할의 아들이었습니다.
족보로 따지면, 고라와 모세는 사촌형제지간입니다.
그런데 같은 집안인 모세는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되고,
아론과 그 자녀들은 제사장이 되었는데, 자신은 겨우
성막의 기구를 옮기는 일을 맡게 되었으니
, 얼마나 자존심이 상하였겠습니까?
그래서 다단, 온 그리고 지휘관 250명과 함께 모세에게 반기를 들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영광중에 나타나 고라와 그 무리들을 심판하셨습니다.
땅이 갈라져 다 삼켜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이 시편을 쓴 고라의 자손은 그의 조상 고라와는 달랐습니다.
그의 조상 고라는 제사장직을 원하여 모세에게 반기를 들었지만...., 그는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내 하나님의 성전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 한 절만 가지고도 저에게 은혜가 되었습니다.
이 시인은 하나님과 교제하는 자가 누리는 그 기쁨의 크기를 깨달은 사람입니다.
은혜를 받고 보니, 꼭 제사장이 아니더라도 상관없습니다. 성전 문지기로 있는 것도 좋습니다.
사실 교회에서 종을 치면 어떻고, 주차 안내, 화장실 청소면 어떻습니까?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일은 좋은 교회를 만나서 그곳에 내 둥지를 틀고.....
내 보금자리로 삼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성도님들 !
- 하나님과 주의 전을 사모하며...
-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사람이 복됩니다.
- 하나님께로 달려가는 심정으로
‘나는 성전의 문지기가 되는 것도 감사합니다.’라고 하는
사람, 그가 복 있는 사람입니다.
오늘 마지막으로 부를 찬송가 208장은,
미국교회 찬송가 중에 가장 오래된 것으로,....
남북 전쟁 직후에, 회중교회 목사인 드와이트(Timothy Dwight)가 쓴 시에 곡을 붙인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나라와 주님이 계신 성전과
주님이 피 흘려 사신 교회를 늘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 교회는 천성과 같습니다.
마침내 하늘의 영광과 베풀어주신 축복이
진리와 함께 영원히 넘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내 안에 오셨다는 구원의 감격을 가지고....
주일을 성수하며....., 특히 주의 전인 교회를 사랑하고,.......
교회에서 봉사하는 것을 소중히 여겨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 날마다 주님께서 부어주시는
새 힘을 얻는 저와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금산교회 김화준목사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