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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르게네프의 언덕 - 윤동주

작성자이 윤|작성시간22.08.21|조회수223 목록 댓글 0


 
투르게네프의 언덕 

 

윤동주 

 


 
  나는 고갯길을 넘고 있었다. 그때 세 소년 거지가 나를 지나쳤다.
  첫째 아이는 잔등에 바구니를 둘러메고, 바구니 속에는 사이다병, 간즈메통, 쇳조각, 헌 양말짝 등 폐물이 가득하였다.
  둘째 아이도 그러하였다.
  셋째 아이도 그러하였다.
  텁수룩한 머리털, 시커먼 얼굴에 눈물 고인 충혈된 눈, 색 잃어 푸르스럼한 입술, 너들너들한 남루, 찢겨진 맨발, 아아 얼마나 무서운 가난이 이 어린 소년들을 삼키었느냐! 나는 측은한 마음이 움직이었다.
  나는 호주머니를 뒤지었다. 두툼한 지갑, 시계, 손수건 있을 것은 죄다 있었다.
  그러나 무턱대고 이것들을 내줄 용기는 없었다. 손으로 만지작만지작거릴 뿐이었다.
  다정스레 이야기나 하리라 하고 "얘들아" 불러 보았다.
  첫째 아이가 충혈된 눈으로 흘끔 돌아다볼 뿐이었다.
  둘째 아이도 그러할 뿐이었다.
  셋째 아이도 그러할 뿐이었다.
  그리고는 너는 상관없다는 듯이 자기네끼리 소근소근 이야기하면서 고개로 넘어갔다.
  언덕 우에는 아무도 없었다.
  짙어가는 황혼이 밀려들 뿐. 

  (1939.9. 作)

 

♣ 이 작품은 아주 날카로운 풍자시이다. 

식민지 조선에서 투르게네프는 이광수, 톨스토이와 함께 당시 조선에서 가장 많이 읽혔던 작가 중 하나일 정도로 일제강점기 지식인들에게 많은 영감을 주었다.
윤동주 역시 투르게네프의 산문시를 탐독하고 많은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윤동주가 남긴 '투르게네프의 언덕'은 당시 투르게네프의 산문시 중 가장 인기를 끈 '거지'를 오마주한 것이다.

 

 

거지 

 

이반 세르게예비치 투르게네프(Ivan Sergeevich Turgenev, 1818.11.9~1883.9.3. 러시아 소설가)

 

 

거리를 걷노라니, 웬 늙다리 거지가 소매를 채며 동냥을 달랜다.

시뻘겋게 충혈이 되고 눈꼽이 긍정한 두 눈, 시퍼런 입술, 누덕누덕 헤어진 옷, 상처가 푸릇푸릇 난 살......

아아, 빈궁이 어떻게나 이 불서러운 인생을 삼켜버렸는고!

그는 뻘겋게 부르튼 더러운 손을 내게로 내밀고서 탄식탄식 무어라 중얼거리며 동냥을 청한다.

나는 호주머니를 뒤져보았다...... 그러나 돈지갑도 시계도, 심지어는 손수건조차 없어, 가진 것이란 아무 것도 없었다.

그러나 거지는 여전히 기다린다. 내민 손을 맥없이 부들부들 떨면서.

어쩌면 좋을지 하도 딱해서 나는 부들부들 떠는 그 더러운 손을 꽉 붙잡으며,

"여보게, 미안하이. 가진 것이란 아무것도 없네그려. 참말 미안하이."

그는 시뻘겋게 충혈된 눈으로 나를 보면서, 시퍼런 입술에다 웃음을 띠우고 차디찬 내 손을 꽉 붙잡으며,

"천만에요 영감마님, 고맙습니다. 이것두 積善이십니다. 영감마님."

나도 그에게서 분명히 적선을 받은 줄 안다.

 

(1878.12. 作. 1919. 2. 시인 김억 번역 '태서문예신보'에 발표)

 

 

- 그의 산문시에서는 인생의 막바지에 이른 사람만이 전할 수 있는 삶의 불가해함에 대한 체념과 죽음에 대한 공포, 그리고 한편으로는 바로 그것이 선물처럼 가져다 줄 화해와 용서에 대한 기대가 담겨 있다.

또한 19세기 러시아의 가혹한 농노제 아래 일어났던 어두운 현실을 고발했던 리얼리즘 소설 대가로서의 면모를 산문시집에서도 엿볼 수 있다.

 

오늘날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는, 우리 사회에 구조적으로 정당화되어 가는 '투르게네프식 동정'을 어떻게 극복할 것이며,

윤동주 시인이 설정한 '밀려 오는 황혼 속의 언덕'은 또 어떻게 넘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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