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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장 | 독자마당 | 김민영
언젠가 그때 나는 그의 목소리를 들었다. 그때 그가 세계를 씻었다. 보이지 않는 채, 밤새, 정말로.
하나와 끝없는 것이 무효가 되었고, 내가 된다.
빛이 있었다. 구원이. (언젠가 einmal/ 파울첼란)
루마니아 다민족 지방인 체르노비츠에서 태어난 파울 첼란은 나치의 유대인 박해 당시 극적으로 살아난 장본인이었다. 아우슈비츠의 수용소 시절과 나치에게 죽음을 당한 부모의 경험은 첼란이 시에 매진하는 데 결정적인 이유가 되었다. 그는 운명적으로 시인이 되었고 정치적인 절망에 맞서 시를 썼으나, 그의 초기 시는 대체로 음산하거나 우울하다. 시인의 의식은 생죽음을 맞았던 동족(유대인)의 고통과 상처를 고스란히 응시했으며, 「죽음의 둔주곡, Todesfuge」이란 시를 통해 나치의 비행을 고발하고 일반인에게 알렸다. 그가 유대인이었기에 유대교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는 비평가도 있지만, 그의 시는 구약 성경의 약속만을 믿는 유대인의 오만함에서 벗어나 신구약의 메시지를 담아보려 노력한 흔적이 역력하다. 1938~1970년 사이에 쓴 800여 편의 많은 시가 복잡하고 난해하다는 평을 받음에도 불구하고, 주목할 만한 점은 「숨돌림, Atemwende」(1967)에 실린 여러 편의 후기 시에서 ‘빛’ ‘진리’ ‘구원’ 등의 시어 선택을 통해 성경적인 언어 를 사용한 점이다. 「언젠가, einmal」란 이 시에서도 그리스도의 이미지를 담고 있는데, 시의 3행에서 세계를 씻은 ‘그’의 이미지와 빛과 구원이란 시어를 통해 성경에 그려진 그리스도 예수를 표현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시대적 절망과 언어 박탈감을 극복하고자 노력한 만큼 그는 많은 상을 수상했고, 당시 절망을 품었던 많은 이에게 시사한 바가 컸지만, 프랑스로 망명했던 첼란이 돌연 세느강에 몸을 던진 사건은 그 당시 큰 충격을 던져주었다. 자신을 드러내지 않았던 시인이었기에 그의 시와 수상 연설문만으로 그의 사고를 들여다볼 수밖에 없는데, 그가 그처럼 구원을 갈망했지만 실제로 자기 영혼은 구원받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너는 물에 빠져 죽어가는 나에게/ 황금을 내던져 준다./어쩌면 어느 물고기는/ 자기를 매수당하도록 내맡기는가보다.(유고시집 Weitgehoeft:1976) 이 시를 보면 마치 가룟 유다를 연상시키는데 시인의 생각이 어디에 머물러 있는지 발견하도록 만드는 단서이다. 시인 역시 성경을 상고(詳考)했을 터인데, 하나님의 말씀을 거짓으로 속이는 사단의 올무에 불행하게 걸려든 것이다.
한때 첼란의 시를 공부하면서 많은 생각을 해보게 되었다. 특별히 행복에 대해 생각해본 적도 없었는데, 첼란의 우울한 시를 통해 오히려 행복해지고 싶은 마음이 강하게 생겼다. 죽음이 미학으로 묘사되는 많은 문학작품을 대하면서 왜 사람들은 그토록 무의식적으로 죽음을 미화하는가를 생각해 보았다. 그 어디선가 왔으니 그 어디론가 가야 한다는 회귀본능일까? 사람은 잘 알지 못하는 것을 신비화하는 경향이 있는데, 죽음에 대해 정확히 아는 사람이 없으니 그럴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든다. 죽은 자는 말이 없으니 말이다. 복음을 들으면서 나는 그 모든 문제가 간단명료하게 풀렸다. 성경은 삶의 정확한 해답서이고 진리는 그곳에 있었다. 복음을 들을 때마다 가슴이 뜨거워지는 것은, 구원자의 손길을 기다리는 마음이 얼마나 복된가를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저주받을 수밖에 없었고 누군가의 관심을 끌 수 없는 인생이었는데, 하나님 한 분만이 나를 돌아보셨고 긍휼히 여기사 내 영혼을 구원하셨다. 그런 사실이 너무 놀랍고 감사하다. 1년 전 첼란의 시를 접했던 나와 1년 후의 나는 180도 바뀌어버렸다. 1년 전 나는 불안하고 예민했던 사람이라 불면증에 시달려야만 했는데, 1년 후 지금의 나는 예민함과는 거리가 멀 정도로 잠을 잘 자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나 스스로는 이렇게 바뀔 수 없는데 주님께서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우리가 진토임을 기억하셔서’(시편 103:14) 나의 부족함을 아시고 평안함을 주셨다. 1년 전까지만 해도 세상이 참 우울하게 느껴졌는데, 지금은 하나님의 종을 통한 분명한 말씀으로, 주님의 눈으로 세상을 보니까 달라 보인다. 이 얼마나 멋진 말인가! 주님의 눈으로 세상을 보면 소망이 넘치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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