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과 환상 사이에 다리 놓기
-전경린의 아무 곳에도 없는 남자
황도경
전경린은 매력적인 소설가다. 그의 소설은 언젠가는 거대한 불을 뿜어내며 폭발할 화산의 내부처럼 음험하고 불길하다. 그의 인물들은 자신을 둘러싼 운명 속으로 깊이 침잠해 들어감으로써 그 운명의 늪 밑바닥에서 자유에 이르는 길을 뚫는다. 그들은 중도에서 멈추는 법이 없다. 운명의 끝에 놓인 것을 보고야 말겠다는 오기, 때론 불온한 독기가 되고 때론 귀기가 되기도 하는 강렬한 눈빛이 그들에겐 있다. 그래서 전경린의 매력은 심지어 마력적으로 보일 때가 있다. 그러나 그 마성이 온전하게 불길하지 않을 때, 그것은 대책 없는 치기나 허황된 감상으로 전락할 위험을 안고 있다. 마성의, 혹은 귀기어린 머리카락이 바람에 흩날릴 때에도 한편으로는 땅에 견고하게 뿌리박고 있어야만 하는 것, 그것이 우리 삶의 진실이며 또한 소설의 진실이다. 자기 안의 마성을 끝없이 일상 안에서 그리고 소설 속에서 풀어내야 할 전경린은 이 점에서 주목되는 작가인 동시에 위태로워 보이는 작가이다.
그의 첫 장편이자 제2회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인 『아무 곳에도 없는 남자』(문학동네, 1997) 역시 그러한 매력과 위태로움이 함께 느껴지는 작품이다. 기왕의 작품들에서 주로 인간 내면의 어둠과 삶의 비극적 운명성에 주목해온 전경린은, 이 작품에서는 80년대라는 시대적 어둠을 배경으로 그 속에서 젊은이들의 상처입은 운명과 그 극복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김이나, 이태인, 정서현, 유정수, 이들은 모두 지난 시대의 어둠 속에서 몸부림쳤던 젊은이들이며 지금은 너무나 급격하게 변해버린 시대 앞에서 또다른 고통과 절망을 경험하고 있는 인물들이다. 그러나 이들을 통해 정작 작가가 문제삼고자 하는 것은 역사적·시대적 맥락에서의 진실의 문제가 아니다. 이들 인물들을 통해 부각되는 것은, 그래서 작품의 초점이 되고 있는 것은, 이들 사이에서 서로 어긋나는 사랑의 문제이다. 그리고 그것은 삶의 근원적인 고독과 어긋남, 그리고 그 극복이라는 문제에 닿아 있다. 이 점에서 이 작품은 그 동안 발표된 전경린 작품들의 연장선에 서 있다.
작가는 삶의 구체적인 현실과 우리의 꿈이 어긋날 수밖에 없는 것임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그에게 있어 더욱 문제적인 것은 그 운명적인 비극성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꿈의 길을 현실로 잇고 싶어한다는 사실이다. 이나의 방에 걸려 있는 그림은 바로 그러한 꿈을 상징한다. “얼핏 보면 창밖의 풍경 같지만 다시 보면, 창밖 풍경의 일부는 캔버스에 그려진 그림”, 그래서 “캔버스에 그려진 비전과 창밖의 현실이 분간할 수 없도록 완전하게 일치”되어 있고, 그 “캔버스 위의 길을 걸어 현실로 걸어나갈 수 있”기를 꿈꾸게 만드는 그림, 그러나 그 길이 “너무나 짧아서 이내 커튼 뒤로 숨어버리는” 그림, 그 그림에는 ‘인간의 조건’이라는 제목이 붙어 있다. 이 작품의 주제는 바로 이 ‘인간의 조건’에 대면하기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 ‘인간의 조건’이 ‘시대적 조건’과 맞물리면서 그려지고 있고, 이 과정에서 삶의 본질에 대한 탐구와 후일담적 성격으로서의 시대의식이 간혹 어긋나고 있다는 점이다. 요컨대 추상화를 그리다 구상화를 그리기도 하고, 인간을 그리다 사회를 그리기도 하는 형국이 되었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현실과 환상 사이에 다리를 놓으려는 열망과 이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드러나는 지나칠 정도의 진지함과 강렬한 열정, 무게감과 서정적 울림이 공존하는 문장, 네 인물이 고루 비중 있게 다루어지면서 이들 사이에 균형이 유지되고 있다는 점, 그리고 정수의 죽음이나 태인과 이나의 재결합에 대한 암시, 이나에 대한 정서현의 애틋하고 진실된 감정 등에서 받게 되는 감동과 충격 등 작가의 만만치 않은 재능을 확인하게 하는 많은 장점에도 불구하고, 안타까움이 컸던 것은 그 때문이다.
진지함은 답답함이 되고 때로 과장된 자의식으로 이어진다. 인물에 대한 애정이 지나치면 오히려 인물로서의 생기는 사라진다. 실제로 작중의 인물들은 그들이 감당해야 하는 운명의 무게가 지나치게 강조되면서 때로 다소 과장되어 있다. “이제 막 화가의 밑그림 속에서 빠져나온 것 같은 여자” “사람들이 가진 어떤 부분이 결여되어 있”으며 “홀연히 사라져버릴 것만 같은 인과성이 부족한” 여자, 일반적인 여자의 이미지를 부정하며 나타났던 여자, 그리고 “그늘진 검은 눈과 활짝 웃는 입”이라는 상반된 분위기를 가진 여자라는, 이나에 대한 묘사나, “훼손된 남자의 부드러움과 관용성을 체취처럼 풍기고 있”는 남자, “오랫동안 깊은 잠을 못 잔” 그늘이 있는 남자, 그래서 한채련이 아는 바로는 드문 부류인 남자, “남자들이 가진 자족적인 안정감이 없어 보”이고 “상식과 일상적인 것을 넘어선 묘한 허탈감과 쓸쓸함이 배어 있”으며 우아함과 카리스마적 분위기를 동시에 가진 남자, 그리고 그 카리스마가 절대적인 상실의 표정으로부터 비롯되는 남자라는, 정서현에 대한 묘사 등은 이들을 추상적이고 비현실적인 존재로 만들어놓고 있을 뿐 아니라 그 과장이 신비화에까지 이르고 있는 듯하다. 이는 아이가 없다는 것 때문에 스스로 사고를 내서 죽은, “무척이나 여성적인 여자”였다는 정서현의 아내와 카페 바하만의 마담으로 때론 어머니처럼 때론 연인처럼 정서현을 위로하고 나중에는 이나를 보살피기도 하는 한채련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뿐만 아니라 이들에게서는 자신들이 남과 ‘다르다’는 인식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예컨대 공원에서 오리 모양의 보트를 타고 호수에 ‘떠 있는’ 이나는(그녀는 흰색 스커트, 흰 운동화, 흰 양말 등의 외양 묘사에서 정결함이 강조된다) 그냥 ‘떠 있지 않고’ 열심히 다리나 팔을 젓고 있는 단란한 가족들과 대조되는데, 이는 작품 말미에 나타나는 웅덩이 속의 흰 거위의 모습과 겹쳐지는 장면으로 그녀가 차가운 현실을 피하지 않고 그 속에 몸을 담그는 존재임을 형상화한 대목이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방과 다리가 캄캄한 심연 위에 ‘떠 있는’ 꿈을 꾼 태인이라든지, 갈 곳이 없어 비명횡사한 철로변을 ‘떠도는 유령처럼’ 서로를 맴돌고 있는 태인과 정수에 대한 묘사에서 드러나듯, 이는 이나뿐 아니라 태인이나 정수, 정서현 등 작중인물 모두에게 적용된다. 이들은 모두가 보통의 사람들과는 ‘다른’ 특별한 사람들로 묘사된다. 이는 자신에 대한 오만함이나 타인에 대한 이해의 부족으로 이어질 위험이 있는데, 이나가 다른 사람들을 “자신만의 거울로 자신과 세상을 비추어보는, 오만하고 명백하고 합리적인 사람들”로 인식하고, 그들은 “아무도 혼란을 겪는 것 같지 않았다”고 단정짓고 있는 것은 그러한 예이다. 이들에게 있어 다른 사람들의 삶은, 휴일이면 피크닉 바구니에 점심과 과일을 담고 보온병에 뜨거운 커피도 담아 나들이 가는 것이 일상처럼 되어 있는, 행복한 어떤 것이다. 그래서 이들은 그러한 삶을, 그것도 그것이 어느 특별한 하루가 아니라 무수한 일상이 될 그런 삶을 꿈꾼다. 그러나 그런 행복과 안정은 타인들 어느 누구도 갖지 못한 것이다.
사실 이들의 ‘다르다’는 의식 밑에는 자신들이 아무 데도 속할 곳이 없다는 고아의식이 자리잡고 있다. 이나는 아버지와 할머니를 각각 일곱 살과 열아홉 살 때 여의고 고아처럼 살아온 인물이며, 태인도 아버지가 죽은 후 어머니가 선생과 바람을 피워 동생을 낳음으로써 심리적으로 고아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한 인물이다. 특히 이나는 아버지에 대한 선망의식이 강한데, 그녀는 아버지를 “젖냄새 나던 엄마와 구별되는 역동적이고 커다란 어떤 존재”로 기억한다. 그녀가 태인에게 매달리게 되었던 것에도 아버지에 대한 갈망이 크게 작용하고 있다. 문제는 이들의 고아의식이 절대적으로 매달릴 수 있는 것도 없고 아무 곳에도 속할 수 없는 젊은이들의 정신적 주소지로 의미화되기보다는, 쓸쓸함이나 고독과 같은 정서적 울림만을 만들어내고 있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가 이들에게서 시대적 의미를 강조하고자 한다는 점이다. 이들 인물들의 삶이 80년대라는 시대적 의미 속에서 전개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종국에 이들에게서 보게 되는 것은 고아로서의 자기연민이다. 부모 없이 자라는 아이의 절망에 대해서, 그들이 원천적으로 벗어나 있는 일상적인 행복에 대해서, 작가는 큰 연민과 안타까움을 보내고 있다.
이 과도한 애정으로 인해 인물들은 다소간 유아적인 면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특히 이나의 경우 이것이 두드러진데, “유치를 갈지 않은 여섯 살짜리 계집아이의 머리카락”을 가진 여자로 묘사된 것에서도 드러나듯 그녀는 어린 꼬마아이처럼 보일 때가 많다. 그녀는 잘 울고, 허약하다(이유가 분명하지 않게 유산을 하고, 유람선에서는 파랗게 질린 얼굴이 되어 안내원의 완강한 팔에 부축되어 선실 안으로 들어간다). 그녀는 약하고 불쌍한, 그래서 보호받아야 할 인물인 것이다. 그런데 작가는 이런 그녀에게 강인함과 냉철함을 함께 부여하고자 한다. 정서현의 애정과 보호를 거부하고 홀로 서기를 선언하는 것이 그것이다. 그러나 유산을 한 후 회사 상사일 뿐인 정서현 아파트에서 조리를 하고 또 그후에는 그의 별장에서 기거하면서 따뜻한 보살핌을 받은 후, 이제는 다른 곳으로 가서 글을 쓰겠다며 “전 고아이긴 해도 어린애는 아니에요”라고 강조하는 그녀의 선언은, 비록 정서현과의 관계가 생명과 사랑의 소중함을 깨닫게 한 계기가 되었다고 하더라도 자연스럽지 않다. 남루해지는 것이 두렵지 않다든지, 고통을 스스로 선택하려 한다든지, 생의 아주 먼 곳까지 가려고 한다든지 하는 그녀의 말도 피상적으로 들린다.
그런가 하면 작중인물들은 시골 \ 도시, 행복 \ 불행, 단순한 삶 \ 복잡한 삶 등에 대해 그야말로 단순하고 이분법적인 사고를 드러낸다. 예를 들어 이나나 정수가 갖지 못한 여성의 평범하고 행복한 삶은 바지 대신 부드럽고 하늘거리는 옷 \ 원피스 입기, 백화점 쇼핑하기, 데이트하기로(정수가 죽은 후 한성규는 그녀에게 관심을 갖고 따뜻하게 대해주었더라면 그녀가 “보통의 사무실 여직원들처럼 백화점 세일 기간을 이용해 새 옷과 새 구두를 사들이고, 어느 날 옆사무실의 총각과 데이트를 하기도 했을 것”이라고 얘기한다) 단순화된다. 뿐만 아니라 선배 동욱의 시골집으로 내려간 태인이 시골 농부를 보며 그들처럼 살고 싶다고 생각하는 것이나, 이나가 단순한 일을 하며 살고 싶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그 삶에 대한 구체적 인식이 결여되어 있어 쉽게 공감되지 않는다. 때문에 단순한 삶을 건강하고 진실된 삶으로 강조하고 꿈꾸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단순한 삶을 살 것으로, 또 정작 살려고 할 인물로 보이지도 않는다. 이들에게는 자신들의 복잡하고 특별한 삶 속에 도취된 자기연민이 강하게 자리잡고 있다. 이나가 정서현의 별장에서 “먹고 섹스하고 목욕하고 바다에 나가고 햇빛을 쪼이고, 낚시를 하고 요리를” 해 먹으면서 자신이 단순해진 것을 느낄 때, 그것은 엄밀히 말해 단순해진 것이 아니라 편안해진 것이며 현실의 모든 조건으로부터 벗어나 진공 상태로 들어간 것이다.
이처럼 이 작품이 80년대라는 시대적 배경에서 출발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세상이나 삶을 인식하는 것에서 추상성과 관념성을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은, 작가가 사용하는 언어나 문장 구성에서도 확인된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보자.
사랑의 속성은 파멸이지. 사랑은 본질적으로 불가능한 것이오. 어쩌면 그것은 생과 반대편에 있는 것 같애. 그래서 사람들은 사랑이냐, 생이냐의 갈림길에서 종종 생으로의 투항을 강요당하는 것이고. 행복한 생이란 자기의 사랑과 상대의 사랑, 그리고 유실되는 시간에 대한 기만을 무거운 관용으로 끌어안고 가는 서글픈 미학이지.
호수는 흡사 거대한 거울처럼 그녀의 결핍을 비춰주었다.
삶은 언제나 결핍 아니면, 환멸의 벼랑인 거요. 그러니 환멸과 결핍, 그 사이에 추억과 꿈의 세번째 공간이 필요한 거요.
여자가 머리를 자를 때 그것은 자신이라는 존재의 총체를 극복하려 하는 욕망의 표현일 수 있다. 요컨대 한 시절의 자아를 휘끈 넘어서려는 의지인 것이다.
의미를 규정하고 정의내리려는 잠언과도 같은 문장이나, 삶, 죽음, 존재, 생존, 생, 존재의 여린 흔들림, 생과의 접촉, 생의 근원, 삶의 결핍 등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어휘가 빈번하게 나타난다. 특히 이러한 현상은 서술자의 말에서뿐 아니라 인물들의 대사에서도 별 차이 없이 드러나고 있다.
작가는 수상소감에서 “시대의 상처와 개인적인 고통들이 맞물려 터져버린 유리알 목걸이처럼 산산이 흩어져 존재감이 상실된 인물들 (……) 한 시대의 포악한 어둠을 걷어내고 떳떳하게 이어준 그 푸르던 청년들은 지금 왜 아무 곳에도 없을까요?”라고 물으며, 80년대라는 시대적 의미를 강조한 바 있다. 그리고 너무나 무겁고 냉혹한 시대를 투쟁하듯 살아야 했던 젊은이들의 모습을 통해 그 한 시대를 넘어서는 운명의 보편성과 생의 불가능성을, 그리고 사랑을 이야기하고 싶었다고도 고백한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그것은 생의 본질에 대한 천착이라는 작업과 시대에 대한 인식이라는 두 마리 토끼 잡기가 된 것 같다. 엄밀히 말해 작중인물들의 고통은 시대나 역사적 상처에서 비롯되지 않는다. 내가 보기에 그것은 고아의식과 그에 대한 보상심리, 그리고 그 좌절에서 비롯된다. 이 점에서 “역사의 어두운 밤이었고, 길이 나를 데리러 왔지. 난 피하지 않고 그 길에 응답했어”라는 이나의 글 마지막 대사에서도 새삼 강조되는 시대적 의미는 다소 부자연스럽다. 이것은 르네 마그리트의 그림 제목처럼 ‘인간의 조건’을 그려내고 싶었을 작가의 의도를 약화시켜놓고 말았다.
사실 인물들은 앞서 지적한 감상성이나 유아성, 나약함, 현실과의 거리감 등을 자신 안에서 발견하고 극복하는 과정을 밟는다. 예컨대 이나의 경우, 사과, 생선, 식빵, 엽서 사기로 드러나는 구체적 현실로의 귀환(작가는 이를 “생과의 접촉”이라 표현한다), 머리 자르기라는 행위 속에 드러나는 다른 삶으로의 변신 등이 이루어진다. 그러나 “역사나 진리보다 더 중요한 것은 생명이 우글거리는 현실의 삶 자체”라는 인식은 작가 \ 서술자의 말로서가 아니라 인물들의 이야기 속에 녹아서 전해져야 한다. 뿐만 아니라 “결국 부족한 것은 사랑이었다”는 태인의 깨달음에도 불구하고 작품에는 사랑이 과잉되어 있다. 이는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작가가 작중 세계나 인물에 대해 거리를 유지하지 못하고 지나치게 밀착되어 있는 데 기인한 감상성의 한 예이다. 이외에도 사건 전개에서 드러나는 우연성이나, 이나가 유산을 결심하다가 갑자기 마음을 바꾸고 모성애를 느끼는 심리 변화의 타당성, 태인의 의식이 변모되는 과정의 갑작스러움, 정수의 유서에서 드러나는 세련된 비유와 관념적인 어휘의 문장 등도 작가가 인물과의 거리조정에 소홀했음을 드러내는 점들이다.
그러나, 이 같은 문제점들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은 여전히 매력적이다. 그 매력은 아이러니컬하게도 앞서 지적한 문제점들이 제기되는 동일한 지점에서 나온다. 그의 문장 하나하나에는 작품 전체를 흐르는 어둠과 무게에 걸맞는 진정성이 실려 있다. 작품 끝까지 꼿꼿한 자세를 흐트러뜨리지 않고 무게감을 유지하면서 인물들의 내면의 흔들림을 담아내고 있는 작가의 서술에는, 삶의 진실에 정면 대응하고자 하는 진지한 고뇌와 치열한 열망이 꿈틀거린다. 인물의 안과 밖, 자연과 사물을 세심하게 연결시켜 통일된 하나의 세계를 만들어내는 묘사력도 탁월하고, 비유와 상징은 낯설면서도 탄탄하다. 특히 밤사이 비명횡사한 고양이들의 주검이 널려 있는 국도와 그 위에 서 있는 이나의 모습으로 처리된 마지막 장면은, 생을 가로지르려는 열망으로 캄캄한 밤의 한복판으로 뛰어든 그들 혹은 우리들의 운명을 처연하게 돌아보게 하는 감동적인 여운을 남긴다. 기왕의 전경린 소설이 그러했듯 환상처럼 자리잡고 있는 우리 안의 열망이 현실로 한 걸음 발을 내딛고 있는 곳, 그곳에 이 작품은 서 있다. 그 열망이 현실의 조건과 대결하면서 긴장을 유지하는 것, 그것이 전경린에게 남겨진 과제가 아닐까. 현실과 환상 사이에 다리를 놓고자 하는, 그 불가능해 보이는 작업이 현실과의 보다 치열한 싸움을 통해 생생한 구체성을 갖게 되기를, 그리하여 그 길 위로 나 역시 걸어가게 되기를 기대한다.
황도경 1962년 출생. 이화여대 영문과와 동대학원 국문과 졸업. 평론 및 논문으로 "이상의 소설공간 연구" "‘집’으로 가는 글쓰기―신경숙의 ‘외딴방’" "뒤틀린 性, 부서진 육체―오정희 소설의 한 풍경" 등이 있다.
-전경린의 아무 곳에도 없는 남자
황도경
전경린은 매력적인 소설가다. 그의 소설은 언젠가는 거대한 불을 뿜어내며 폭발할 화산의 내부처럼 음험하고 불길하다. 그의 인물들은 자신을 둘러싼 운명 속으로 깊이 침잠해 들어감으로써 그 운명의 늪 밑바닥에서 자유에 이르는 길을 뚫는다. 그들은 중도에서 멈추는 법이 없다. 운명의 끝에 놓인 것을 보고야 말겠다는 오기, 때론 불온한 독기가 되고 때론 귀기가 되기도 하는 강렬한 눈빛이 그들에겐 있다. 그래서 전경린의 매력은 심지어 마력적으로 보일 때가 있다. 그러나 그 마성이 온전하게 불길하지 않을 때, 그것은 대책 없는 치기나 허황된 감상으로 전락할 위험을 안고 있다. 마성의, 혹은 귀기어린 머리카락이 바람에 흩날릴 때에도 한편으로는 땅에 견고하게 뿌리박고 있어야만 하는 것, 그것이 우리 삶의 진실이며 또한 소설의 진실이다. 자기 안의 마성을 끝없이 일상 안에서 그리고 소설 속에서 풀어내야 할 전경린은 이 점에서 주목되는 작가인 동시에 위태로워 보이는 작가이다.
그의 첫 장편이자 제2회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인 『아무 곳에도 없는 남자』(문학동네, 1997) 역시 그러한 매력과 위태로움이 함께 느껴지는 작품이다. 기왕의 작품들에서 주로 인간 내면의 어둠과 삶의 비극적 운명성에 주목해온 전경린은, 이 작품에서는 80년대라는 시대적 어둠을 배경으로 그 속에서 젊은이들의 상처입은 운명과 그 극복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김이나, 이태인, 정서현, 유정수, 이들은 모두 지난 시대의 어둠 속에서 몸부림쳤던 젊은이들이며 지금은 너무나 급격하게 변해버린 시대 앞에서 또다른 고통과 절망을 경험하고 있는 인물들이다. 그러나 이들을 통해 정작 작가가 문제삼고자 하는 것은 역사적·시대적 맥락에서의 진실의 문제가 아니다. 이들 인물들을 통해 부각되는 것은, 그래서 작품의 초점이 되고 있는 것은, 이들 사이에서 서로 어긋나는 사랑의 문제이다. 그리고 그것은 삶의 근원적인 고독과 어긋남, 그리고 그 극복이라는 문제에 닿아 있다. 이 점에서 이 작품은 그 동안 발표된 전경린 작품들의 연장선에 서 있다.
작가는 삶의 구체적인 현실과 우리의 꿈이 어긋날 수밖에 없는 것임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그에게 있어 더욱 문제적인 것은 그 운명적인 비극성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꿈의 길을 현실로 잇고 싶어한다는 사실이다. 이나의 방에 걸려 있는 그림은 바로 그러한 꿈을 상징한다. “얼핏 보면 창밖의 풍경 같지만 다시 보면, 창밖 풍경의 일부는 캔버스에 그려진 그림”, 그래서 “캔버스에 그려진 비전과 창밖의 현실이 분간할 수 없도록 완전하게 일치”되어 있고, 그 “캔버스 위의 길을 걸어 현실로 걸어나갈 수 있”기를 꿈꾸게 만드는 그림, 그러나 그 길이 “너무나 짧아서 이내 커튼 뒤로 숨어버리는” 그림, 그 그림에는 ‘인간의 조건’이라는 제목이 붙어 있다. 이 작품의 주제는 바로 이 ‘인간의 조건’에 대면하기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 ‘인간의 조건’이 ‘시대적 조건’과 맞물리면서 그려지고 있고, 이 과정에서 삶의 본질에 대한 탐구와 후일담적 성격으로서의 시대의식이 간혹 어긋나고 있다는 점이다. 요컨대 추상화를 그리다 구상화를 그리기도 하고, 인간을 그리다 사회를 그리기도 하는 형국이 되었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현실과 환상 사이에 다리를 놓으려는 열망과 이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드러나는 지나칠 정도의 진지함과 강렬한 열정, 무게감과 서정적 울림이 공존하는 문장, 네 인물이 고루 비중 있게 다루어지면서 이들 사이에 균형이 유지되고 있다는 점, 그리고 정수의 죽음이나 태인과 이나의 재결합에 대한 암시, 이나에 대한 정서현의 애틋하고 진실된 감정 등에서 받게 되는 감동과 충격 등 작가의 만만치 않은 재능을 확인하게 하는 많은 장점에도 불구하고, 안타까움이 컸던 것은 그 때문이다.
진지함은 답답함이 되고 때로 과장된 자의식으로 이어진다. 인물에 대한 애정이 지나치면 오히려 인물로서의 생기는 사라진다. 실제로 작중의 인물들은 그들이 감당해야 하는 운명의 무게가 지나치게 강조되면서 때로 다소 과장되어 있다. “이제 막 화가의 밑그림 속에서 빠져나온 것 같은 여자” “사람들이 가진 어떤 부분이 결여되어 있”으며 “홀연히 사라져버릴 것만 같은 인과성이 부족한” 여자, 일반적인 여자의 이미지를 부정하며 나타났던 여자, 그리고 “그늘진 검은 눈과 활짝 웃는 입”이라는 상반된 분위기를 가진 여자라는, 이나에 대한 묘사나, “훼손된 남자의 부드러움과 관용성을 체취처럼 풍기고 있”는 남자, “오랫동안 깊은 잠을 못 잔” 그늘이 있는 남자, 그래서 한채련이 아는 바로는 드문 부류인 남자, “남자들이 가진 자족적인 안정감이 없어 보”이고 “상식과 일상적인 것을 넘어선 묘한 허탈감과 쓸쓸함이 배어 있”으며 우아함과 카리스마적 분위기를 동시에 가진 남자, 그리고 그 카리스마가 절대적인 상실의 표정으로부터 비롯되는 남자라는, 정서현에 대한 묘사 등은 이들을 추상적이고 비현실적인 존재로 만들어놓고 있을 뿐 아니라 그 과장이 신비화에까지 이르고 있는 듯하다. 이는 아이가 없다는 것 때문에 스스로 사고를 내서 죽은, “무척이나 여성적인 여자”였다는 정서현의 아내와 카페 바하만의 마담으로 때론 어머니처럼 때론 연인처럼 정서현을 위로하고 나중에는 이나를 보살피기도 하는 한채련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뿐만 아니라 이들에게서는 자신들이 남과 ‘다르다’는 인식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예컨대 공원에서 오리 모양의 보트를 타고 호수에 ‘떠 있는’ 이나는(그녀는 흰색 스커트, 흰 운동화, 흰 양말 등의 외양 묘사에서 정결함이 강조된다) 그냥 ‘떠 있지 않고’ 열심히 다리나 팔을 젓고 있는 단란한 가족들과 대조되는데, 이는 작품 말미에 나타나는 웅덩이 속의 흰 거위의 모습과 겹쳐지는 장면으로 그녀가 차가운 현실을 피하지 않고 그 속에 몸을 담그는 존재임을 형상화한 대목이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방과 다리가 캄캄한 심연 위에 ‘떠 있는’ 꿈을 꾼 태인이라든지, 갈 곳이 없어 비명횡사한 철로변을 ‘떠도는 유령처럼’ 서로를 맴돌고 있는 태인과 정수에 대한 묘사에서 드러나듯, 이는 이나뿐 아니라 태인이나 정수, 정서현 등 작중인물 모두에게 적용된다. 이들은 모두가 보통의 사람들과는 ‘다른’ 특별한 사람들로 묘사된다. 이는 자신에 대한 오만함이나 타인에 대한 이해의 부족으로 이어질 위험이 있는데, 이나가 다른 사람들을 “자신만의 거울로 자신과 세상을 비추어보는, 오만하고 명백하고 합리적인 사람들”로 인식하고, 그들은 “아무도 혼란을 겪는 것 같지 않았다”고 단정짓고 있는 것은 그러한 예이다. 이들에게 있어 다른 사람들의 삶은, 휴일이면 피크닉 바구니에 점심과 과일을 담고 보온병에 뜨거운 커피도 담아 나들이 가는 것이 일상처럼 되어 있는, 행복한 어떤 것이다. 그래서 이들은 그러한 삶을, 그것도 그것이 어느 특별한 하루가 아니라 무수한 일상이 될 그런 삶을 꿈꾼다. 그러나 그런 행복과 안정은 타인들 어느 누구도 갖지 못한 것이다.
사실 이들의 ‘다르다’는 의식 밑에는 자신들이 아무 데도 속할 곳이 없다는 고아의식이 자리잡고 있다. 이나는 아버지와 할머니를 각각 일곱 살과 열아홉 살 때 여의고 고아처럼 살아온 인물이며, 태인도 아버지가 죽은 후 어머니가 선생과 바람을 피워 동생을 낳음으로써 심리적으로 고아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한 인물이다. 특히 이나는 아버지에 대한 선망의식이 강한데, 그녀는 아버지를 “젖냄새 나던 엄마와 구별되는 역동적이고 커다란 어떤 존재”로 기억한다. 그녀가 태인에게 매달리게 되었던 것에도 아버지에 대한 갈망이 크게 작용하고 있다. 문제는 이들의 고아의식이 절대적으로 매달릴 수 있는 것도 없고 아무 곳에도 속할 수 없는 젊은이들의 정신적 주소지로 의미화되기보다는, 쓸쓸함이나 고독과 같은 정서적 울림만을 만들어내고 있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가 이들에게서 시대적 의미를 강조하고자 한다는 점이다. 이들 인물들의 삶이 80년대라는 시대적 의미 속에서 전개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종국에 이들에게서 보게 되는 것은 고아로서의 자기연민이다. 부모 없이 자라는 아이의 절망에 대해서, 그들이 원천적으로 벗어나 있는 일상적인 행복에 대해서, 작가는 큰 연민과 안타까움을 보내고 있다.
이 과도한 애정으로 인해 인물들은 다소간 유아적인 면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특히 이나의 경우 이것이 두드러진데, “유치를 갈지 않은 여섯 살짜리 계집아이의 머리카락”을 가진 여자로 묘사된 것에서도 드러나듯 그녀는 어린 꼬마아이처럼 보일 때가 많다. 그녀는 잘 울고, 허약하다(이유가 분명하지 않게 유산을 하고, 유람선에서는 파랗게 질린 얼굴이 되어 안내원의 완강한 팔에 부축되어 선실 안으로 들어간다). 그녀는 약하고 불쌍한, 그래서 보호받아야 할 인물인 것이다. 그런데 작가는 이런 그녀에게 강인함과 냉철함을 함께 부여하고자 한다. 정서현의 애정과 보호를 거부하고 홀로 서기를 선언하는 것이 그것이다. 그러나 유산을 한 후 회사 상사일 뿐인 정서현 아파트에서 조리를 하고 또 그후에는 그의 별장에서 기거하면서 따뜻한 보살핌을 받은 후, 이제는 다른 곳으로 가서 글을 쓰겠다며 “전 고아이긴 해도 어린애는 아니에요”라고 강조하는 그녀의 선언은, 비록 정서현과의 관계가 생명과 사랑의 소중함을 깨닫게 한 계기가 되었다고 하더라도 자연스럽지 않다. 남루해지는 것이 두렵지 않다든지, 고통을 스스로 선택하려 한다든지, 생의 아주 먼 곳까지 가려고 한다든지 하는 그녀의 말도 피상적으로 들린다.
그런가 하면 작중인물들은 시골 \ 도시, 행복 \ 불행, 단순한 삶 \ 복잡한 삶 등에 대해 그야말로 단순하고 이분법적인 사고를 드러낸다. 예를 들어 이나나 정수가 갖지 못한 여성의 평범하고 행복한 삶은 바지 대신 부드럽고 하늘거리는 옷 \ 원피스 입기, 백화점 쇼핑하기, 데이트하기로(정수가 죽은 후 한성규는 그녀에게 관심을 갖고 따뜻하게 대해주었더라면 그녀가 “보통의 사무실 여직원들처럼 백화점 세일 기간을 이용해 새 옷과 새 구두를 사들이고, 어느 날 옆사무실의 총각과 데이트를 하기도 했을 것”이라고 얘기한다) 단순화된다. 뿐만 아니라 선배 동욱의 시골집으로 내려간 태인이 시골 농부를 보며 그들처럼 살고 싶다고 생각하는 것이나, 이나가 단순한 일을 하며 살고 싶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그 삶에 대한 구체적 인식이 결여되어 있어 쉽게 공감되지 않는다. 때문에 단순한 삶을 건강하고 진실된 삶으로 강조하고 꿈꾸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단순한 삶을 살 것으로, 또 정작 살려고 할 인물로 보이지도 않는다. 이들에게는 자신들의 복잡하고 특별한 삶 속에 도취된 자기연민이 강하게 자리잡고 있다. 이나가 정서현의 별장에서 “먹고 섹스하고 목욕하고 바다에 나가고 햇빛을 쪼이고, 낚시를 하고 요리를” 해 먹으면서 자신이 단순해진 것을 느낄 때, 그것은 엄밀히 말해 단순해진 것이 아니라 편안해진 것이며 현실의 모든 조건으로부터 벗어나 진공 상태로 들어간 것이다.
이처럼 이 작품이 80년대라는 시대적 배경에서 출발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세상이나 삶을 인식하는 것에서 추상성과 관념성을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은, 작가가 사용하는 언어나 문장 구성에서도 확인된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보자.
사랑의 속성은 파멸이지. 사랑은 본질적으로 불가능한 것이오. 어쩌면 그것은 생과 반대편에 있는 것 같애. 그래서 사람들은 사랑이냐, 생이냐의 갈림길에서 종종 생으로의 투항을 강요당하는 것이고. 행복한 생이란 자기의 사랑과 상대의 사랑, 그리고 유실되는 시간에 대한 기만을 무거운 관용으로 끌어안고 가는 서글픈 미학이지.
호수는 흡사 거대한 거울처럼 그녀의 결핍을 비춰주었다.
삶은 언제나 결핍 아니면, 환멸의 벼랑인 거요. 그러니 환멸과 결핍, 그 사이에 추억과 꿈의 세번째 공간이 필요한 거요.
여자가 머리를 자를 때 그것은 자신이라는 존재의 총체를 극복하려 하는 욕망의 표현일 수 있다. 요컨대 한 시절의 자아를 휘끈 넘어서려는 의지인 것이다.
의미를 규정하고 정의내리려는 잠언과도 같은 문장이나, 삶, 죽음, 존재, 생존, 생, 존재의 여린 흔들림, 생과의 접촉, 생의 근원, 삶의 결핍 등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어휘가 빈번하게 나타난다. 특히 이러한 현상은 서술자의 말에서뿐 아니라 인물들의 대사에서도 별 차이 없이 드러나고 있다.
작가는 수상소감에서 “시대의 상처와 개인적인 고통들이 맞물려 터져버린 유리알 목걸이처럼 산산이 흩어져 존재감이 상실된 인물들 (……) 한 시대의 포악한 어둠을 걷어내고 떳떳하게 이어준 그 푸르던 청년들은 지금 왜 아무 곳에도 없을까요?”라고 물으며, 80년대라는 시대적 의미를 강조한 바 있다. 그리고 너무나 무겁고 냉혹한 시대를 투쟁하듯 살아야 했던 젊은이들의 모습을 통해 그 한 시대를 넘어서는 운명의 보편성과 생의 불가능성을, 그리고 사랑을 이야기하고 싶었다고도 고백한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그것은 생의 본질에 대한 천착이라는 작업과 시대에 대한 인식이라는 두 마리 토끼 잡기가 된 것 같다. 엄밀히 말해 작중인물들의 고통은 시대나 역사적 상처에서 비롯되지 않는다. 내가 보기에 그것은 고아의식과 그에 대한 보상심리, 그리고 그 좌절에서 비롯된다. 이 점에서 “역사의 어두운 밤이었고, 길이 나를 데리러 왔지. 난 피하지 않고 그 길에 응답했어”라는 이나의 글 마지막 대사에서도 새삼 강조되는 시대적 의미는 다소 부자연스럽다. 이것은 르네 마그리트의 그림 제목처럼 ‘인간의 조건’을 그려내고 싶었을 작가의 의도를 약화시켜놓고 말았다.
사실 인물들은 앞서 지적한 감상성이나 유아성, 나약함, 현실과의 거리감 등을 자신 안에서 발견하고 극복하는 과정을 밟는다. 예컨대 이나의 경우, 사과, 생선, 식빵, 엽서 사기로 드러나는 구체적 현실로의 귀환(작가는 이를 “생과의 접촉”이라 표현한다), 머리 자르기라는 행위 속에 드러나는 다른 삶으로의 변신 등이 이루어진다. 그러나 “역사나 진리보다 더 중요한 것은 생명이 우글거리는 현실의 삶 자체”라는 인식은 작가 \ 서술자의 말로서가 아니라 인물들의 이야기 속에 녹아서 전해져야 한다. 뿐만 아니라 “결국 부족한 것은 사랑이었다”는 태인의 깨달음에도 불구하고 작품에는 사랑이 과잉되어 있다. 이는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작가가 작중 세계나 인물에 대해 거리를 유지하지 못하고 지나치게 밀착되어 있는 데 기인한 감상성의 한 예이다. 이외에도 사건 전개에서 드러나는 우연성이나, 이나가 유산을 결심하다가 갑자기 마음을 바꾸고 모성애를 느끼는 심리 변화의 타당성, 태인의 의식이 변모되는 과정의 갑작스러움, 정수의 유서에서 드러나는 세련된 비유와 관념적인 어휘의 문장 등도 작가가 인물과의 거리조정에 소홀했음을 드러내는 점들이다.
그러나, 이 같은 문제점들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은 여전히 매력적이다. 그 매력은 아이러니컬하게도 앞서 지적한 문제점들이 제기되는 동일한 지점에서 나온다. 그의 문장 하나하나에는 작품 전체를 흐르는 어둠과 무게에 걸맞는 진정성이 실려 있다. 작품 끝까지 꼿꼿한 자세를 흐트러뜨리지 않고 무게감을 유지하면서 인물들의 내면의 흔들림을 담아내고 있는 작가의 서술에는, 삶의 진실에 정면 대응하고자 하는 진지한 고뇌와 치열한 열망이 꿈틀거린다. 인물의 안과 밖, 자연과 사물을 세심하게 연결시켜 통일된 하나의 세계를 만들어내는 묘사력도 탁월하고, 비유와 상징은 낯설면서도 탄탄하다. 특히 밤사이 비명횡사한 고양이들의 주검이 널려 있는 국도와 그 위에 서 있는 이나의 모습으로 처리된 마지막 장면은, 생을 가로지르려는 열망으로 캄캄한 밤의 한복판으로 뛰어든 그들 혹은 우리들의 운명을 처연하게 돌아보게 하는 감동적인 여운을 남긴다. 기왕의 전경린 소설이 그러했듯 환상처럼 자리잡고 있는 우리 안의 열망이 현실로 한 걸음 발을 내딛고 있는 곳, 그곳에 이 작품은 서 있다. 그 열망이 현실의 조건과 대결하면서 긴장을 유지하는 것, 그것이 전경린에게 남겨진 과제가 아닐까. 현실과 환상 사이에 다리를 놓고자 하는, 그 불가능해 보이는 작업이 현실과의 보다 치열한 싸움을 통해 생생한 구체성을 갖게 되기를, 그리하여 그 길 위로 나 역시 걸어가게 되기를 기대한다.
황도경 1962년 출생. 이화여대 영문과와 동대학원 국문과 졸업. 평론 및 논문으로 "이상의 소설공간 연구" "‘집’으로 가는 글쓰기―신경숙의 ‘외딴방’" "뒤틀린 性, 부서진 육체―오정희 소설의 한 풍경"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