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의 시체를 넘어 - 마르그리트 유르스나르의 소설
정 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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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문학에 깊은 애정을 갖고 있는 지인 한 사람이 나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요즘 우리나라 소설가들은 작품을 너무 많이 쓰려고 하는 것 같다. 마치 많이 쓰지 않으면 안 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힌 것처럼 보인다. 내 눈에는 그 모습이 안쓰럽게도 보이고, 어리석게도 보이고, 우습게도 보인다. 편견일지 모르지만 난 많이 쓰는 작가를 신뢰하지 않는다. 우리나라에도 평생을 건 작품 한두 편 남기고 사라지는 작가가 있었으면 좋겠다.” 그는 차를 마시면서 지나가는 듯한 어투로 말했지만 눈빛과 표정은 결코 그렇지 않았다. 나는 그의 의견에 동감이라는 표현으로 고개를 끄덕였을 뿐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얘기는 더이상 진전되지 않고 다른 화제로 넘어가버렸다.
그의 말은 우리 문단 풍경에 대한 예리한 비판일 뿐 아니라 문학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 즉 ‘왜 쓰는가’에 대한 깊은 성찰을 요구하고 있었다. 내가 침묵한 것은 이 질문의 무거움 때문이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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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프랑스의 여류작가 마르그리트 유르스나르(1903년 프랑스인 아버지와 벨기에계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그는 프랑스를 비롯, 유럽 각지에서 살다가 1939년 미국의 북동해안에 위치한 마운트 디저트 섬에서 1987년 사망할 때까지 살았음)를 그의 장편소설 『하드리아누스의 회상록』과 『어둠 속의 작업』을 통해 처음 만났다.
『하드리아누스의 회상록』은 고대 로마제국의 오현제(五賢帝)로 기록되는 황제들 중 세번째 황제 하드리아누스가 죽음을 앞두고 지난날을 회상하는 것을 토대로 한 역사소설이자 고백소설이다. 작품을 읽은 이는 알겠지만 『하드리아누스의 회상록』에는 스토리가 없다. 다만 죽음을 앞둔 한 노인의 인간과 역사에 대한 회상만 있을 뿐이다. 그 회상의 강물은 명징하면서 유장하고, 애상적이면서 평온하다. 그리고 또 하나, 이 소설은 처음부터 읽지 않아도 된다. 어느 곳을 펼쳐 읽어도 작품 깊숙이 배어 있는 독특한 맛을 느낄 수 있다. 말하자면 이 소설의 감상 포인트는 줄거리가 아니라 문장이다(여기에서 문체라고 말해서는 안 됨을 나는 알고 있다. 왜냐하면 내가 읽은 것은 번역문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훌륭한 번역이라 하더라도 문체의 변신은 피할 수 없고, 따라서 어떤 번역문도 문체라고 말해선 안 된다. 물론 번역자의 문체라는 표현은 성립되지만).
고백하건대 나는 이 소설을 단숨에 읽지 못했다. 마치 산보를 하듯 느릿느릿, 때로는 순서를 바꾸어가면서 저작(咀嚼)하듯 읽었다. 유르스나르는 ‘작가 노트’에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이 책은 1924년에서 29년 사이에, 내 나이 스무 살에서 스물다섯 살에 여러 다양한 형식으로 전체적으로 혹은 부분적으로 구상되었고 쓰여졌다. 이때의 원고는 다 없애버렸고, 없애버릴 만했다.” 작가는 1934년 다시 집필을 시작했는데, 그 후 수년 동안 중단과 시작을 여러 차례 되풀이했다. 이 갈등을 토로한 작가의 글은 음미해볼 만하다.
“어떻든 나는 젊었다. 불혹의 나이가 되기 전에는 감히 쓸 생각을 해서는 안 되는 책들이 있다. 이 나이가 되기 전에는 사람에서부터 사람까지, 세기에서부터 세기까지를 갈라놓은 자연적인 대경계가 있음을, 한없이 다양한 인간들이 있음을 인식하지 못하거나, 혹은 단순한 행정적 구역이나 세관이나 무장된 초소들에 지나친 중요성을 부여할 수 있다. 황제와 나 사이에 있는 이 거리를 정확히 가늠하는 데 이르기 위해 나에겐 수년간의 세월이 필요했다.” 그러다 1948년 12월, 미국에 정착해 살고 있었던 유르스나르는 전쟁 동안 스위스에 맡겨두었던 짐 하나를 받는다. 그 속에서 누렇게 바래진 『하드리아누스의 회상록』 원고를 발견하는 순간 그는 이 소설을 기어이 써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끊어졌던 소설의 길을 다시 잇기 시작하는데, 작가는 자신의 그 모습을 아름답게 묘사하고 있다.
“나는 이 소설을 다시 시작하기 위해 새 원고지를 챙겨 뉴멕시코의 타오스를 향해 출발했다. 그때 내 심정은 헤엄쳐 맞은편 둑에 도달할지 자신도 없이 물 속에 뛰어든 사람 같았다. 밤늦은 시각, 나는 뉴욕에서 시카고로 달리는 기차에서 지하묘지에 든 것처럼 침대칸에 틀어박혀 소설을 썼다. 그리고 다음날 온종일 시카고 어느 역 식당에서 폭설에 묶인 기차를 기다리며 작업했고, 다시금 새벽까지 산타페의 급행열차 전망차칸에서 혼자, 콜로라도의 첩첩산의 검은 뒷자락과 영원한 별들의 그림에 둘러싸여 작업했다. 음식물과 사랑과 수면과 인간에 대한 지식을 말하는 부분은 이처럼 단숨에 쓰여졌다. 나는 그보다 더 열정에 찬 하루 낮을, 그보다 더 머리가 명철했던 밤을 거의 다시 겪어보지 못했다.” 1951년 마침내 장편소설 『하드리아누스의 회상록』이 세상에 발표되었다. 작업을 시작한 지 27년 만이었다.
유르스나르의 또 하나의 장편소설 『어둠 속의 작업』은 중세에서 르네상스로 넘어가는 16세기를 배경으로, 신학자이자 철학자며 의사, 연금술사, 아마추어 천문가, 식물학자인 제농이라는 한 인물의 일대기를 그린 소설로, 작가가 20대에 착상하여 60대에 완성했다.
처음에는 주인공 이름을 그대로 딴 "제농"이라는 제목의 단편소설을, 다음에는 중편 "뒤레의 그림에서"를 발표한 후 마침내 『어둠 속의 작업』이라는 장편소설을 탄생시켰다. 40여 년 동안 숱한 자료조사와 수집에 심혈을 기울인 작가는 끊임없는 수정을 통해 정교한 대건축물을 완성한 것이다. 소설의 주인공 제농에 대해 “거의 반평생을 그와 같이 살다보니 나중에는 혈육과도 같은 정을 느꼈다”고 토로하는 유르스나르의 다음과 같은 고백은 작가라면 깊이 음미해야 할 내용이다.
“어떤 작가에게도 평생 동안 생각하고 써야 할 소설들이 있다. 나에게는 『어둠 속의 작업』과 『하드리아누스 회상록』이 거기에 해당하는 작품들이었다.”
3
작품에 투여된 시간의 길이가 고스란히 그 작품의 무게로 환원되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시간 속에 서린 작가의 고뇌, 그 피와 땀, 경이로운 인내와 성실성을 나는 깊이 신뢰한다. 모든 예술이 그렇듯 소설은 시간과의 싸움이다. 허술한 소설, 진정성이 결핍된 소설은 시간의 무게를 견디지 못한다. 지나간 시간의 갈피를 들추어보라.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소설의 시체들이 산처럼 쌓여 있음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시체의 산은 하루가 다르게 높아만 간다.
자신의 소설이 그 시체의 일부를 이루고 있다고 생각해보라. 차라리 쓰지 않고, 발표하지 않음이 낫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