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승옥 소설
무진기행 / 서울, 1964년 겨울 / 김승옥 연보
김승옥의 문학적 성가는 대체로 1966년 나온 단편집 『서울 1964년 겨울』에 의존하고 있다. 유종호가 이라는 글에서 '새로운 재능이나 감수성 또는 개성의 출현에 부수될 수 있는 찬부 양론의 개입이 끼어들 여지도 없이 그는 세대의 신구를 초월해서 즉각적으로 만장일치의 공인된 평가를 받을 수 있었다.'라고 극찬한 이래 그 평가는 관습처럼 받아들여진 감이 있다. 이어서 그는 작가의 뛰어난 언어 구사의 솜씨에 높은 평가를 하면서 모국어에 새로운 활기와 가능성에의 신뢰를 불어넣었다고 평하고 있다. 또한 주인공의 감수성으로 직결되어 있는 작가의 감수성, 자재로운 변화나 갑작스럽고 당돌한 전환, 첨예한 감성과 감각적 지각의 폭넓은 진폭, 항구적인 것에 대해서 순간적인 것을 우위에 놓는 태도는 요컨대 세상을 도회인의 눈으로 바라보고 현대 도회인의 과도히 긴장된 신경으로 외부인상에 반응한다는 점에서 도회인의 감수성으로 규정한다. 그럼에도 이른 나이에 붓을 꺾고 하나님의 계시를 받는 극적 체험으로 신앙에 깊이 빠져 버린 것은 많은 시사점을 주기도 한다.
가. 기존 연구 검토
대체로 주제와 문체의 두 측면에서 평가가 이루어져 왔다.
김주연은 라는 글에서 60년대의 대표작가로 김승옥을 평가했다. 그의 소설의 특징이 개인의 발견에 주목해 '사소한 것에서도 중요한 것을 보는 의미의 상대주의 또는 트리비얼리즘'에 있다고 했다.
김치수는 에서 김승옥의 관심은 바로 문학의 관심을 사회 전반의 개조와 역사의 흐름 전체의 파악으로부터 개인의 발견으로 회전시켰다는 점을 들고 있다.
천이두는 인간의 소외의식 및 숙명적 조건으로서의 고독을 추상적인 서술을 통해서가 아니라 존재 현장의 재현을 통해 제시해 주고 있다고 평가하고 있다.
김승옥의 문체에 대하여서는 김현이 중문과 복문의 교묘한 배합, 청각적 이미지의 교합 등으로 서구적인 냄새를 풍기면서도 번역투 같지 아니한 교묘한 문체를 보이고 있다고 평가하고 있다.
유종호는 이라는 글로 김승옥을 평가하고 있는데 특히 그 감수성의 정체는 참신한 문체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우리의 모국어에 새로운 활기와 가능성에의 신뢰를 불어 넣었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김승옥의 한계를 지적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모국어의 한 형용사에 대해서는 섬세한 반응을 보일 수 있으면서도 가령 사회구조의 모순에는 전혀 태연할 수 있는 감수성이 올바른 감수성일까"라고 회의를 표명한 것이다.
류보선은 감각적인 문체, 언어의 조응력, 배경과 인물의 적절한 배치, 소설적 완결성 등을 높이 평가하면서도 개인과 사회, 존재와 당위에 대한 비변증법적 인식으로 개인의 주체성이 가지는 적극적인 역할을 인식하지 못한 주체성 부재의 미학은 김승옥 개인의 문제이자 60년대 문학 전체의 문제라고 보았다. 그는 김승옥의 소설을 을 중심으로, 자기 세계의 확립을 모색해 나가는 전기 소설과 자기 세계를 상실하고 그가 그토록 비난해마지 않던 사회 속으로 편입되는 모습을 보여주는 후기소설로 양분하고, 이러한 변신 이면에는 개인과 세계 사이의 관계를 변증법적으로 인식하지 못하고 단순한 대립관계로만 파악한 김승옥의 한계와 1965년 크리스챤 아카데미로 입사하게 된 김승옥의 개인사적 사실이 개입되어 있는 것으로 파악한다.
백낙청은 시민문학론을 정립하는 자리에서 김승옥 소설이 소시민 의식의 한계를 드러낸다고 평가한다.
정현기는 하이데거나 싸르트르의 존재론이 1960년대, 6.25전쟁이 끝난 이후 서양의 구호물품과 함께 들어온 사실을 상기시키고, 김승옥의 소설이 '공동체 의식이 깨어진 세계, 울력으로 각기 존재를 확인하고 받던 고향을 잃은 세계, 믿고 따라야 할 정신적 지주도 지도적 역량도 잃어버린' 1960년대 상황을 형상화했다고 평가한다. 이태동은 60년대 들어서 급격하게 이루어진 도시화와 산업화로 인한 역기능으로 인간 소외의 문제가 제기되었음을 지적하고 김승옥 소설이 이러한 소외의 문제 속에서 내적인 자기 심리 과정을 드러내고 있다고 평가한다. 조남현은 김승옥 소설이 도덕적 상상력이라는 전통적인 발상법을 거부함으로써 50년대까지의 한국소설에 대해 의문 부호를 제시한 것으로 평가한다. 장세진은 김승옥 소설에 나타나는 일상적 삶에 대한 실존적 성찰을 주목하고 이를 1950년대 소설과의 변별점으로 제시한다.
이동하는 김승옥의 작품세계를 근본적으로 지탱하는 힘이 언어적 재능이나 싱싱한 호기심 등의 감각의 새로움에 있다고 보고, 이와 함께 갖추어야 할 정신의 새로움을 확보하지 못한 채 소극적 비관주의에 머물고 말았다고 평가한다. 정과리는 작중인물의 유아의식과 지나친 감정에의 지배로 인해 현실에 대한 비판적 변혁의 가능성이 배제된 채 결국 작가가 추적하는 세계가 소시민 의식으로 귀결되고 만 것으로 파악한다.
화려한 문체와 감수성의 특출함이 도처에 번쩍이는 이 작품이 유독 60년대적이라 한 것은 감수성 외에도 두 가지 사회적 이유를 갖고 있는데, 안개가 단순한 사물로서의 그것이 아니라 4·19의 좌절로 인해 젊은이가 품게 된 허무의식이 그 하나이고, 전염병처럼 60년대에 번지기 시작한 세속적 출세주의가 그 다른 하나이다라고 김윤식은 밝히고 있다.
학위 논문으로는 10여편의 논문이 있다.
80년대 중반 이정란이 의 서술 구조 연구를 계기로 김승옥에 대한 연구는 바뀌어져 갔다. 이정란은 의 서술구조를 시간적, 공간적 측면에서 살펴보아 고향과 타향의 이원론적 서술구조라는 대립구조로 파악하였고, 그것을 김승옥의 다른 작품에도 적용시켰다. 그의 소설은 타향인 도시의 남성적 세계에 눈뜨기는 하지만 거기에 쉽사리 적응하지 못하는 시골 출신자의 서울살이로 소외된 일상적 개인의 고독한 정신풍토를 보여준다는 것을 밝혔다.
90년대 이동재의 논문은 김승옥의 작품을 수평적 시간구조(과 ), 순환적 시간구조(), 수직적 시간구조(로 나누어 설명하고 작품 속에 나타난 시간 의식을 과거는 이미 있었던 그 자체로서, 미래는 불확실한 대로 예정되어 있는 것으로서 구별된 채 자족성을 지니고 있다고 보았다.
오은희는 그의 논문에서 김승옥은 아직껏 제대로 다듬어지지 않은 투박한 개인의 세계를 그 나름대로 정돈시키고 그것에 세련된 감성을 불어 넣어주고자 하였다고 평가하면서 두 가지 대별되는 양상인 문체와 인물의 심리에 있어 작품을 통하여 얻어지는 결과를 살펴보았다.
이정석은 김승옥의 소설을 욕망의 유형에 따라 입사욕망(, , 도피욕망(, ), 초월욕망(, )으로 나누어 고찰하였다. 그는 김승옥 문학에 나타난 욕망의 핵심은 끊임없이 부조리한 현실의 지배적 질서에 편입하려는 욕망과, 사회의 현실을 비판하고 부조리한 욕망 체계가 지배하는 현실로부터 도피하려는 욕망, 그리고 부정적 현실을 초월하려는 욕망의 교차에 있다고 분석하였다.
그 외에도 「김승옥 단편소설의 일인칭 서술자아 연구」, 「김승옥 소설 연구」, 「김승옥 소설연구 :라깡의 욕망이론으로 본 소설의 서술적 특징과 욕망의 양상을 중심으로」, 「김승옥 소설연구 : 인물의 세계 인식과 대응 양상을 중심으로」, 「김승옥 소설연구 : 자아의 인식 변모 과정을 중심으로」,「김승옥 소설연구 : 현실과 자아의 대립 양상을 중심으로」, 「김승옥 소설에 나타난 욕망의 발현양상 연구」, 「김승옥론 : 1960년대적 의미에 대하여」, 「김승옥소설론 : 인물의 근대의식과 대응양상을 중심으로」 등 많은 논문들이 있다.
이 발표되었을 때 60년대적 의식은 선명한 윤곽을 드러내었다고 말해진다. 그것은 소설의 인물이 각자의 의식을 갖고 출발되는 개인주의적 측면, 사소한 것의 중요성(트리비얼리즘) 그리고 허무주의(자기기만)로 설명될 수 있다.
50년대의 작품들을 통해 주로 보여주었던 이데올로기의 문제에서 벗어나 60년대 소설은 개인의 내면세계를 다루어 나가기 시작하였다.
이 감동을 주는 이유를 김주연은 라는 글에서 첫째, 밖에 팽개쳐져 있는 자연을 단지 그대로의 외연(外延)으로서 받아들이지 않고 내포를 확대시켜, 인간의 의식과 내접시켰다는 사실이 중요시되어야 한다고 설명한다. 김동리나 오영수, 오유권의 "안개"와 김승옥의 "안개"의 차이는 기후로서의 안개와 사물로서의 안개의 차이다. 기후로서의 자연은 다만 작품의 소도구에 지나지 않지만 사물로서의 자연은 그 작품의 프로타고니스트와 정당한 대립을 보인다.
은 이렇게 안개 속에서 그것을 벗어나는 한 젊은이의 드라마를 통해서 상황을 극복하는 한 개인의 능력을 창조하고 있다. 그것은 승옥의 트리비얼리즘의 개가이다. 트리비얼리즘이라는 것이 다만 사소한 것에 대한 집착이 아닌 "사소한 것의 사소하지 않음"에 대한 확인이라는 사실을 포함하여 한 개인에 있어 중요한 것도 중요하지 않은 것도 없다는 이성과 인식의 출발을 알리는 전제조건이라는 것을 그는 유쾌하게 보여 준 것이다.
가. 안개
안개의 상징성은 소설의 전체적 분위기를 이끄는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 안개란 모든 것을 감추어 버려 제대로 보이지 않게 한다. 안개는 막연함, 혼미, 혼돈, 음습한 기운, 인간의 복합 심성, 신비 등을 의미하기도 한다. 자연을 배경으로 해 자아를 외부와 차단하는 장애물이면서도 그 모호성으로 인해 체념이나 단절보다는 갈등과 아득한 그리움을 유발한다. 안개는 또한 인간의 존재론적 불안을 상징하며 자아가 존재하는 하나의 상황으로 표상되기도 한다. 불안한 자아를 위협하는 갈등 상황이며, 동시에 필연적인 극복 대상이 안개가 가지는 현대적 의미이다. 혼돈 속에서 인간은 탈출구를 찾고자 노력한다. 사람의 힘으로 어쩔 수 없는 안개. 먼 곳에 있는 것으로부터 사람들을 떼어놓는 안개. 그래서 해가 떠오르길 간절히 바라는 사람들, 안개 속에서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일이란 아무 것도 없다. 안개 속의 사람들은 자신이 누군가에게 보여지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그저 바라봄을 위해 몸부림을 친다.
나. 주체성으로서의 내면과 자기 세계
의 주인공인 윤회중은 "빽 좋고 돈 많은 과부"를 얻어서 지금은 대회생제약회사의 전무자리를 바라보고 있는 '출세한 촌놈'이다. 그는 며칠 쉬고 오라는 아내의 권유로 무진으로 내려오면서 하게 되는 생각의 일부를 통해 드러난다.
윤회중은 자신을 반수면상태로 끌어넣는 무진의 바람에서 금방 수면제를 만들고 이것으로써 세계에서 가장 돈 잘 버는 제약회사의 전무가 되어 있는 자신을 연상해낸다. 그는 자신의 직업에 철저한 존재이다. 그러나 그런 생각을 하자 쓴웃음이 나온다. 이 쓴 웃음은 자신의 생각이 얼마나 속물적인가 하는 데 대한 것으로 자신에 대한 한없는 부끄러움을 내포하고 있다. 가장 속물적인 생각을 하면서 이와 동시에 이러한 생각을 하는 자신에 대한 부끄러움을 느끼는 윤회중의 이같은 모습에서 감정의 모순되는 상태를 읽을 수 있거니와, 윤회중은 바로 이러한 이중성에 의해 규정된다.
그는 한편으로 자신의 내부에서 솟아오르는 속물적인 생각들이 자기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나의 밖에서 제멋대로 이루어진 뒤 나의 머릿속으로 밀고 들어오는" 것으로 생각한다. 자신이 속물이 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자신 이외의 다른 요소들에 전가시킨다. 이는 윤회중이, 자신의 삶이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한 어떤 힘에 의해, 혹은 타자에 의해, 자신이 바라던 것과는 다른 방향으로 이끌려져 왔음을 주장하는 모습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6.25가 일어났을 때의 회상은 이의 한 예가 될 것이다.
윤회중이 군대에 가지 않게 된 것을 "어머니에 의해서", "어머니에게 몰려서" 골방 속에 숨어 지내게끔 된 것이며, 그것은 "골방보다는 전선을 택하고 싶어해 하는" 자신의 희망과는 반대되는 결정이었다는 것이다. 그는 일기장에서 그 자신의 부끄러움을 드러낸다. 그는 자신이 친구들과는 달리 전선에 나아가지 못하는 것을 한없이 부끄러워 하지만 이 부끄러움은 자신의 현재를 부정하고 그로 하여금 전선으로 나아가게 만드는 힘으로 작용하지는 못한다. 그는 사실상 부끄러움이라는 감정의 조작을 통해 자신의 현재를 변호하고 있을 뿐인 것이다.
윤회중의 이와 같은 모순된 상태는 무진에서 그가 만나는 사람들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무진에서 그는 "해방 후의 무진중학 출신 중에선 형님이 제일 출세하셨다고들 하고" 있다는 박의 말을 통해 가장 잘 요약된다. 자신의 내면에서 느끼는 부끄러움과는 관계없이 그는 출세한 사람이고 성공한 사람이다. 그와 함께 가장 출세한 사람으로 평가되는 조가 그를 바라보는 태도는 아마도 그가 처해 있는 상황에 대한 가장 예리한 비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야, 이 약아빠진 놈아, 넌 빽 좋고 돈 많은 과부를 물어놓고 기껏 내가 어디서 굴러온 줄도 모르는 말라빠진 음악선생이나 차지하고 있으면 맘이 시원하겠다는 거냐?"
자신의 바쁜 모습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조의 모습에서 윤회중은 서울에서의 자신을 떠올려 본다. 그만큼 둘은 서로 닮아 있다. 조는 윤회중의 내면에 존재하는 부끄러움이나 고민에 대해서는 조금도 고려하고 있지 않는바, 그것은 그 자신의 욕망인 동시에 윤회중에게 있었을 욕망에 대한 가장 객관적인 해석이라고 할 수 있다. 조의 말을 들으면서 윤회중이 아무런 항변도 할 수 없는 것도 이러한 사실에서 비롯된다.
의 마지막은 윤회중이 부끄러움을 느끼면서 서울로 되돌아가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는 "한 번만, 마지막으로 한 번만 이 무진을, 안개를, 외롭게 미쳐가는 것을, 유행가를, 술집 여자의 자살을, 배반을, 무책임을 긍정하기로 하자. 마지막으로 한 번만이다. 꼭 한 번만."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당신은 무진읍을 떠나고 있습니다. 안녕히 가십시오.'라고 쓰여 있는 팻말을 보면서 심한 부끄러움을 느낀다. 윤회중이 느끼는 부끄러움은 이 대목에 이르면 그 진정성을 의심받게 되는 단계에 이른다. 윤회중의 부끄러움은 이 대목에 이르면 그 진정성을 의심받게 되는 단계에 이른다.
이렇듯 내면성이 주체의 자율성에 대한 주장에서 비롯되는 한 양상으로 타자와 구별되고자 하는 욕망의 표현이라 할 수 있지만 내면성의 주장은 결국 겉으로 드러나는 삶의 모든 양상들에 있어서 타자와 아무런 차이점도 갖지 못하는 결과를 빚어내고 만다.
다. 나르시시즘과 타자로부터의 자아 발견
자신의 신체를 마치 성적 대상처럼 대하며 성적인 쾌감을 지닌 채 보고, 만지고, 애무하고, 최후에는 완전한 만족상태에 이르는 행위를 임상적으로 표현하기 위하여 P.네케가 쓰기 시작한 용어가 '자기도취' 즉 나르시시즘(narcissism)이다. 이러한 나르시시즘은 상대방에게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을 때도 발생된다.
윤회중은 거울단계의 아이처럼 마지막으로 무진을 방문하면서 타자로부터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윤회중이 만난 여러 인물들 중에서 하선생과 자살한 술집 여인의 시체에서 성적인 욕구를 느낀다. 그 이유는 두 인물에게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무진에서의 생활에 만족하는 만족형인 세무서장 조와 무진에서의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는 하선생과 자살한 술집 여인의 시체로 나타나는 불만족형 중 윤회중은 불만족형과 동일시되고 있다. 하선생과 술집 여인은 모두가 무진에서의 생활을 못 견뎌했다. 윤회중 역시 무진을 자신의 도피처로 이용하고 있을 뿐 특별한 만족을 느끼지는 못하였다. 윤회중은 두 여인에게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나르시시즘을 느끼게 된다.
(1) 역 구내에서 본 미친 여자
"그 무렵에 쓴 나의 일기장들은, 그 후에 태워 버려서 지금은 없지만, 모두가 스스로를 모멸하고 오욕(汚辱)을 웃으며 견디는 내용들이었다. '어머니, 혹시 제가 지금 미친다면 대강 다음과 같은 원인들 때문일 테니 그 점에 유의하셔서 저를 치료해 보십시오…….' 이러한 일기를 쓰던 때를, 이른 아침 역 구내에서 본 미친 여자가 내 앞으로 끌어당겨 주었던 것이다. 무진이 가까웠다는 것을 나는 그 미친 여자를 통하여 느꼈고"
윤회중이 6.25 전쟁 당시 무진으로 내려온 뒤에 미칠만한 상황은 충분히 전개되었다. 윤회중이 미친 여자를 보고서 무진을 떠올린 것도 자신과의 동질성을 느꼈기 때문인 것이다. 윤회중은 이렇게 자신이 아닌 타자(미친 여자)에게서 자신을 발견하는 데, 이것은 '거울의 단계'에서 일어나는 상황과 흡사하다. '거울의 단계'에서 아이는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 자신인양 착각을 일으킨다. 그러나 거울에 비친 아이의 모습은 거울 속의 상에 의해서 비쳐진 모습에 지나지 않을뿐 내재적 자아가 결여된 상태이다. 아이는 타자에 의해서 자신을 깨닫게 된다.
(2) 하선생
하선생은 윤회중에 있어 나르시시즘의 대상이었다.
윤회중은 그의 친구인 세무서장 조의 집을 자신의 후배인 박선생과 방문한다. 조의 집에서 하 선생을 만나게 되는데 그녀는 무진중학교의 음악 선생으로 술자리의 벌칙으로 '목포의 눈물'울 부르고 윤회중과 돌아오는 길에 자신을 서울로 데려다 달라고 부탁한다. 무진에서의 생활이 미칠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졸업 연주회에서 불렀던 '나비 부인'중의 아리아 '어떤 갠 날'을 잊지 못하는 하선생이 무진에서 부를 수 있는 노래는 '목포의 눈물'과 같은 권태로운 것들뿐이었다. 이러한 상황을 탈피하고 싶었지만 그녀에게는 무진을 떠날 용기가 없었다. 이 점은 윤회중 역시 마찬가지였다. 홀어머니의 강권에 의해 골방에 숨어 지낼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든 탈출하고 싶었던 골방, 이러한 점들은 윤회중 자신과 하선생을 동일시하기에 충분했다.
윤회중은 하선생과 헤어진 뒤 그 날 밤 통금 해제 사이렌 소리가 울리도록 잠을 이루지 못하는데, 그 때 하선생에 대한 생각을 떠올린다.
"그 여자는 서울에 가고 싶다고 했다. 그 말을 그 여자는 안타까운 음성으로 얘기했다. 나는 문득 그 여자를 껴안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다."
결국 윤회중이 성적인 충동을 느낀 것은 하선생에 대한 생각이 무르익을수록 너무나 자신과의 모습과 닮았기 때문에 연민을 느끼게 되었고, 그 표현 방식으로 성적 충동을 느끼게 된 것이다. 하선생에게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한 윤회중은 나르시시즘에 빠져들 수밖에 없었다. 윤회중에게 있어서 하선생은 이미 타자가 아닌 자신의 모습이었던 것이다.
"주인들은 나를 옛날의 나로 대해 주었고 그러자 나는 옛날의 내가 되었다."
윤회중은 하선생과 함께 자신이 폐병에 걸렸을 당시 묵었던 그 집을 찾아가게 된다. 이때 윤회중은 '옛날의 나'로 돌아가게 되는 데, '옛날의 나'란 바로 공상과 불면에 시달리었고, '쓸쓸하다'라는 단어가 씌어진 편지를 썼던 그때의 윤회중을 말한다. 즉 무진에서의 생활을 외롭고, 탈출하고만 싶어하는 하선생의 생활과 같은 처지의 나였다. 이러한 윤회중의 하선생에 대한 행위는 단순한 성적 욕구 충족이 아닌 나르시시즘의 한 유형으로 볼 수 있다.
(3) 자살한 술집 여인
"나는 문득, 내가 간밤에 잠을 이루지 못하고 뒤척거리고 있었던 게 이 여자의 임종을 지켜 주기 위해서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통금해제의 사이렌이 불고 이 여자는 약을 먹고 그제야 슬며시 잠이 들었던 것만 같다. 갑자기 나는 이 여자가 나의 일부처럼 느껴졌다. 아프긴 하지만 아끼지 않으면 안 될 내 몸의 일부처럼 느껴졌다."
윤회중이 술집 여인의 자살한 시체에서 자신의 일부를 발견하는 장면이다.
윤회중은 무진으로 오는 도중에 잠을 청하게 하는 수면제에 대한 공상을 한다. 윤회중이 '수면제가 이미 만들어져 있었던 게 아닌가'란 생각을 하게 된 것은 무진에서의 괴로워했던 기억들을 모두 잊고 싶어했던 욕망의 표현으로 볼 수 있다. 술집 여인이 무진에서의 삶을 포기한 이유도 역시 자신의 생활을 견디지 못한 나머지 절망한 이유 때문일 것이다. 윤회중이 6.25 당시 골방 속에서 미칠 것만 같았던 자신, 자신의 양심에 대한 가책으로 죽고 싶은 심정이었다. 술집 여인 역시 자신의 양심에 대한 죄책감에 시달렸을 것이고, 그것으로 인하여 죽음을 택하였다고 볼 수 있다. 윤회중의 마지막 무진행은 전무로의 승진을 위한 것이었고 그 승진은 그리 떳떳하지 못한 굴욕적인 승진이었다. 그래서 그는 어머니의 산소에 가서 묘 속에라도 들어가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이러한 술집 여인의 시체를 통해서 윤회중은 자신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고, 급기야 시체를 보면서 정욕이 끓어오름을 느낀다. 윤회중에게 있어 술집 여인의 시체는 더 이상 남이 아닌 자신이었기 때문이다.
라. 상징계와 질서 부재의 도피
라캉이 연구하고자 했던 정신분석학은 프로이트로의 복귀였다. 그는 인간의 무의식이 언어와 많은 관련을 가졌음을 인식하고 무의식과 언어의 관계를 연구하였다. 라캉은 언어학을 정신분석학에 도입하였다. 특히 그는 구조언어학에 관심을 가져 언어학의 영역을 무의식으로까지 범위를 넓히어 연구하였다. 라캉은 페르디낭 드 소쉬르의 시미피앙(기표)과 시니피에(기의)의 용어를 빌려 언어와 무의식의 관계를 해명하고자 하였다. 프로이트가 언어를 단지 무의식의 해석수단으로 언어의미는 고정된 것으로 본 데 대하여 라캉은 언어의미가 고정된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라캉은 존재의 주체 형성 과정을 크게 상상적 단계와 상징적 단계로 구분하면서 주체의 욕망을 설명하고 있다. 상상적 단계는 아동 발달의 초기 단계에 해당하는 것으로 주체와 객체, 자신과 외부 현실간의 뚜렷한 구별이 아직은 불가능한 시기로서 아이가 제3자가 개입하지 않는 어머니와의 2자 관계를 유지하는 단계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상상적 단계는 거울 단계를 거치면서 상징적 단계로 진입하게 된다.
거울단계는 아이가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만족할 정도로 통일된 자신의 이미지를 보게 되는 단계를 말한다. 이때 아이는 자신의 거울상이 완벽한 자신의 자아상이라는 착각을 하게 된다. 즉, 자기애적 단계라고 할 수 있는데 아이는 거울상과의 동일시를 통해 자신에 대한 완벽한 이상과 만족을 갖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어머니와 아이의 2자 관계를 통해 형성되었던 자신의 자아상과 자기애는 아버지가 개입함으로써 상징적 단계로 진입하게 된다. 라캉이 말하는 '아버지의 법'은 아이를 어머니와의 합일된 관계에서 떼어놓음으로써 아이를 가족과 사회의 구성원으로 성장하게끔 법과 질서와 문화의 세계로 진입시키는 역할을 한다.
아이는 이제 어머니와 아버지 그리고 자신 사이에 형성되었던 오디푸스 콤플렉스에서 벗어나 아버지와의 동일시를 통해 '아버지의 법'이 말하는 금기사항과 질서를 받아들이게 된다. 그러나 이때 아이의 상상적 단계, 즉 어머니와의 합일된 충족감과 스스로가 완벽하다고 믿었던 자아상은 무의식의 세계로 들어가게 된다. 따라서 상징적 단계에서 주체가 형성됨과 동시에 무의식이 형성된다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아이는 상상적 단계에서 상징적 단계로 이행하면서 주체가 형성된다. 즉, 아이가 어른으로 성장한다는 것은 자연질서에서 문화질서로의 이행을 말하며 '아버지의 법'이 지시하는 언어와 사회의 법칙에 순응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때 형성된 주체는 '아버지의 법'을 통한 상징적 단계와 상상적 단계의 분리를 통해 획득된 것으로 분열된 주체라고 할 수 있다. 이 분열된 주체는 상징적 질서 속에서 살아가면서도 끊임없이 상상적 단계, 즉 무의식적 대상과 합일을 욕망하는 주체인 것이다.
라캉은 소쉬르가 언어를 구성하는 두 측면으로 설명한 기표(시니피앙)와 기의(시니피에)를 통해 주체를 파악한다. 주체가 형성되기 이전의 아이는 거울상을 통해 자신의 모습과 자신을 동일시한다. 즉 기표와 기의를 동일시하는 것이다. 이러한 동일시를 통해 아이는 자신과 일체감을 느낀다. 그러나 '아버지의 법'이 개입하면서 아이는 언어의 세계로 진입하게 되고 언어의 세계 속에서 기호는 차이를 통해서만 의미를 획득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즉 기표와 기의의 합일은 불가능하다는 사실, 기표와 기의 사이에는 항상 의미를 빗겨가는 잔여(Rest)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라캉은 바로 이러한 '잔여' 때문에 욕망이 발생하고 어떠한 욕망도 완벽하게 충족될 수 없다고 한다.
따라서 주체는 욕망의 결핍을 메우기 위해 부단히 대상을 바꿔가며 기표에서 기표로 이동하는 것이다. 이에 대해 라캉은 주체는 언어의 영향으로 분리되기 때문에 불확실한 존재라고 한다. 따라서 불확실한 존재로서 주체는 타자를 통해 자신을 추구하며 주체의 욕망은 타자(기표)를 통해 나타난다고 한다.
고향은 문명과 이성이 스며들기 이전의 장소라고 할 수 있다. 이는 문명과 질서로 상징되는 상징계적 공간과는 차별을 보이는 것으로 다분히 상상계적 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언어가 개입되기 이전의 상상계적 공간에서는 감각으로도 인간은 충분이 자연과의 합일, 자신과의 합일, 어머니와의 합일을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김승옥의 소설의 서술자들은 현실에서 불안하고 소외감을 느낄 때, 전혀 자신에 대해 불안과 소외감을 느끼지 않았던 고향을 그리워한다. 그리고 이 때의 고향은 자신의 상상계적 자아를 만날 수 있는 상징적인 공간으로서의 고향이자 어머니의 공간으로서의 고향인 것이다.
김승옥의 소설에서 '아버지의 부재'는 '어머니'와 주체의 관계를 왜곡시키는 결과로도 작용한다. '아버지'의 부재로 인해 아이가 자신의 욕망을 '어머니'라는 존재에게로 고착시키기도 하지만 반면에 '어머니'가 자신의 욕망을 아이에게 고착시키기도 한다. 아이가 상징계로 진입하기 전의 상태에 있을 때 어머니는 아이에게 있어서 권력을 쥔 존재이다.
'아버지의 법'으로 인한 어머니와 아이의 분리는 아이를 어머니에 대한 욕망에서 떼어놓는 것과 동시에 어머니를 아이에 대한 욕망에서도 분리시킨다. 그러나 '아버지'가 부재할 경우 아이의 바람과는 상관없이 어머니의 아이에 대한 소유 욕망은 제어되지 못할 우려가 있다. '나'의 상상계적 욕망을 고착시키려는 어머니의 욕망에 대한 서술자의 부정적 감정이 에 나타난다.
'나'의 '홀어머니'는 '나'를 골방 속에 숨기고 '나'의 감정과는 상관없이 '나'의 무사만을 기뻐하지만 반면에 '나'는 어머니의 골방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어한다. 하지만 삶의 주체로서 '전선'을 적극적으로 선택하지 못하고 어머니의 욕망에 머물러 있다. 이런 '나'의 모습은 상상계적 자아의 소극적인 태도와 유사하다. 상상계적 자아는 어머니의 욕망을 욕망하면서 어머니와 동일시를 느낀다. 즉, 자신이 주체적으로 욕망의 대상을 선정하고 달성하는 것이 아니라 어머니에 의해 선택된 욕망만을 욕망하는 것이다. 이는 상징계적 주체의 적극성과는 다른 상상계적 자아의 소극적인 측면이다.
남자라곤 단지 나의 출세를 돕는 일을 맡아하는 장인이 존재하는 데, 이는 아버지의 역할을 가지고 있는 정상적인 자아성숙이나 사회적 성공적 정신이 아니다. 아버지의 부재 즉, 상징계의 질서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무진이 상상계의 장소라는 의미이다. 그래서 윤회중은 상징계의 질서 부재로 '엉뚱한 생각을 아무런 부끄럼 없이, 거침없이 해낼 수' 있었던 것이다. 무진에서는 어 이상 윤회중의 행동을 제어할 아버지의 법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가 성인이 되어 무진을 찾게 되는 이유는 항상 현실로부터의 도피로 이루어진다. 서울로부터 도망하거나 새출발을 위해서 무진으로 도피를 한다. 김승옥 소설에서 도피욕망이 지향하는 상상계적 공간은 '고향'이다. 하지만 윤회중이 생각하는 무진에 대한 과거의 기억은 편안함보다는 어둡던 기억들이 많다. 상징계의 질서로 자신이 동료들과 전쟁터에 가고 싶었지만 어머니에 의해 제지당했고, 자신만의 현실회피에 미칠 것만 같았다. 무진이 윤회중에게 있어서 상상계의 공간으로 자리잡게 된 것은 바로 이 부분이다. 윤회중은 무진에 있는 동안 상징계의 질서를 수용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무진은 윤회중에게서 상징계의 질서를 빼앗아 버렸고, 상상계의 고립된 생활을 지속시켰다. 즉 무진은 외부의 폭력이나 삶의 위기로부터 그를 보호해주는 안식의 공간이면서, 한편으로는 현실로부터 고립됨으로써 사회적 자아를 상실하는 소외의 공간이었다. 이 때문에 윤회중은 무진에서의 생각과 행동은 상징계의 질서에서 일탈할 수밖에 없었다.
폐병 치료차 귀향했을 때도 윤회중은 혼자만의 고립된 생활, 즉 상상계적 공간에 갇혀 쓸쓸하게 지낸다. 일자리를 잃고 사랑하던 '희'마저 떠났을 때 서울에서 도피처로 무진을 택한다. 윤회중은 '새출발이 필요할 때 무진으로 간다는 것은 우연이 결코 아니었다.'라고 말한다.
윤회중의 마지막 방문은 타인에 의해서 이루어졌지만, 윤회중의 무진행은 상징계의 질서로부터의 도피로 볼 수 있다.
윤회중이 상징계의 질서에서 벗어나 있다는 양심을 달랠 수 있는 장소는 상상계의 공간인 무진밖에 없었다.
마. 사이렌 소리
사이렌 소리란 일반적으로 제약을 상징하거나 경고를 상징한다. 은 시작부터 윤회중에게 제약을 가하는 사회적 질서(아버지의 법)가 나타나지 않았다. 마음대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장소로 비춰지고 있었는데 통금 사이렌 소리는 이런 무진에서의 모든 엉뚱한 생각과 상징계의 질서에서 벗어난 행동에 금지 명령을 내린 것이다.
윤회중에게 있어서 통금 해제 사이렌 소리는 상징계의 질서에서 벗어남을 의미한다.
바. 아내의 전보
윤회중이 그 동안 무진에서 지냈던 생활은 서울에서와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엉뚱한 공상, 하선생과의 정사, 자살한 술집 여인에게서 느끼는 정욕 등, 모두 상징계의 공간이 서울에서는 일어날 수 없는 일들이었다. 오로지 무진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상황이었다. 윤회중은 무진에서 만큼은 자유로울 수 있었고, 상징계의 질서에서 일탈할 수 있었다. 또한 무진은 긴장을 풀어버릴 수 있는 장소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아내의 전보로 인하여 윤회중은 자신이 행동이 상징계의 질서에서 벗어나 있다는 것과 자신을 상실하고 있다는 모든 상황을 재인식하게 되었다. 자신의 행동에 책임지고도 싶었지만 아내의 전보는 윤회중이 서울이라는 상징계로 복귀하는 직접적인 요인이 되고 있다.
윤회중은 아내의 전보를 받고 무진에서의 행동을 자책하게 된다. 그리고 무진에서의 행동을 긍정하기로 한다. 마지막으로 한 번만. 윤회중은 어떻게 해서든지 무진에서의 행동을 긍정하기로 한다. 그러나 무진을 떠나면서 그는 심한 부끄러움을 느낀다.
1960년대는 근대화, 산업화, 도시화라는 우리 역사상 유례없을 뿐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그 속도가 이례적이리만큼 빨랐던 거대 변화가 시작되던 연대이다. 김승옥의 뛰어난 단편들은 산업화, 도시화, 근대화가 본격적으로 가동하기 시작한 거대 변화의 징후를 섬세하고 날카롭게 보여주고 있다. "모든 욕망의 집결지"라고 한 작중 인물의 입을 통해 정의되어 있는 서울의 밤풍경을 재현한 약 광고와 술 광고와 유흥가의 선전지가 고작인 부분에서는 산업화가 시동 단계에 있던 서울을 특징적으로 보여준다.
은 우연히 만난 세 사람의 사내가 만나고, 교환하고, 헤어지는 풍경을 통해 사회에도 얼마만큼 가까와 오는 소외의 문제를 환기시킨다. 소외란 원래 서구의 개념이며, 그것은 과학의 발달과 교회의 상대화, 기계의 능률화, 그것의 정확한 자동화 현상 뒤에 일어나는 인간의 고립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 모든 밖의 현상이 그 기능의 극을 보여 주고 있지 않는 한 소외란 말은 관념에 불과할 뿐이다.
익명과 익명의 우연한 부딪침이라는 도회의 항상적 경험을 취급하고 있는 이 작품은 피차간에 인적 사항을 얘기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형식일 뿐이다. 그들 사이에는 의미 있는 경험 교환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공동의 관심사가 없기 때문이며 그래서 이들의 대화는 엄밀한 의미에서 대화가 아니라 각자의 독백일 뿐이다. 이들은 특별히 악한 사람도 특별히 선한 사람도 아니며 우연한 타자와의 서먹서먹함에서 어떤 냉랭함이 있다. 30대 후반의 아저씨는 사실은 말벗이 없어서 끼어든다. 병원에서 아내가 죽은 것을 말할 상대가 없어서, 우연히 알게 되어 2년 전에 결혼했지만 처갓집이 어딘지도 모르는, 그래서 '할 수 없이' 아내의 시체를 병원에 판 돈으로 말할 상대를 찾아 포장 마차에 익명의 사람들에 끼어 들고자 한다. 물론 돈 때문에 동행을 한다. 서적 외판원으로 사람살이의 우연성과 사람 관계의 익명성은 더욱 강조된다. 사람 사이에서 가장 가까운 것으로 파악되는 부부 사이에서 사람 관계의 우연성과 황당함은 더욱 두드러져 보인다. 그러다 보니 사소한 일에 대한 서로의 독백만이 있다.
도시적 인간관계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청년간의 대화의 내용들은 별 의미가 없다. 개체화되어 있거나 각자 소외된 모습의 드러냄일 뿐이다. 자신만이 알고 있는 사실들에 대한 토로는 기계화되어 가는 근대화의 과정에서 기계화되지 않은 삶의 모습이며 그에 대한 작가의 인식은 제목이 말하는 근대화의 시기인 1960년대에 가장 산업화가 빠른 속도로 이루어지는 서울에서 겨울 같은 추운 인간 관계에 대한 소극적인 문제 의식의 발로라 할 것이다.
에서는 김승옥이 긍정적으로 뽑아 올린 트리비얼리즘이 가장 적나라하게 열거되면서 그것이 개인 의식의 고양과 긴밀한 협조를 이룬다. 이 소설에서 사건을 찾는다면 갈 데가 없어 헤메다가 목격한 화제와 중년 사내에게서 듣는 그의 아내의 처참한 죽음이었다. 화재만 하더라도 "화재는 오로지 화재 자신의 것"이라는 밖의 사건의 사물화일 뿐이다.
이 작품의 파국으로 보이는 사내의 죽음과 그 죽음을 보는 대학원생과 "나"의 반응은 이에 대해 결정적인 증빙을 준다. 여관의 한 방에 투숙하느냐 각기 다른 방을 갖느냐에서 이들은 물론 "각기 다른 방" 쪽을 택하는데 그것은 단지 "벽으로 나누어진 방을, 그것이 우리가 들어가야 할 곳"이었을 뿐 아니라 그 사내를 자살로부터 막기 위해 생각해 낸 가장 적당한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대학원생은 개인의식의 팽배를 드러낸다.
"혼자 있기"를 거부하던 중년 사내가 독방에서 비로소 죽음을 택한다는 것은 그가 결코 다른 두 젊은이에 비해 개인화와는 먼 거리에 있는 한국의 인습적인 취락(聚落)주의, 인정주의를 못 벗어났다고 보는 것보다는 한 사람의 개인화 과정에서 빚어지는 한 개성의 파멸이라고 보는 편이 타당할 것이다.
이 글에서 등장인물들의 돈에 대한 태도는 하나의 개인으로 취급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다. 거리의 선술집에서 만난 세 사람은 술값의 지불에 있어 각각 자기의 몫만을 맡는다. "서른 대여섯 살짜리"의 사내가 동행을 요구했을 때도 "아저씨 술값만 있다면…"이라는 조건이다. 세 사람을 일행으로 묶어주는 것이 돈이고 중년의 사내를 떨구고 가려는 것을 붙잡는 것도 돈이다. 그래서 돈을 다 써서 약속대로 가겠다고 할 때 중년의 사내는 늦은 밤임에도 불구하고 월부책값을 받겠다는 것이다. 이는 사회에서의 소외의 윤곽을 보여주는 것이다. 곧 한 개인이 개성화하는 도정을 보여주는 것이다.
20대 중반의 청년들은 마지막 순간에도 의미 있는 대화를 나누지 못한다. 너무 늙어버린 것 같다는 대학원생과 겨우 스물다섯 살이라고 말하는 구청 직원의 '독백'의 교환은 도시적 인간관계를 나타낸다. 이 작품을 통해서 우리는 도시화라는 거대면화 속의 인간 관계를 뚜렷하고 생생하게 재경험하고 그것이 옛 농촌 공동체와 어떻게 다른가를 생각하게 된다.
이 글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그러나 근대화라든가 기계화되어 가는 파편화된 삶을 의식하지도 못하면서 그 원인조차 말하지 않는다. 1970년대 이후 문학이 참여 쪽에 기울어지는 경향과는 여러 측면에서 작가의 의식이 다른 것을 볼 수 있다. 단지 의 주인공처럼 자신의 내부의 문제로만 보는 경향선 상에 있다.
가. 자기 세계의 추구와 자율적 욕망에 대한 환상
선술집에서 우연히 만난 나와 안은 파리를 사랑하느냐는 물음으로 시작해서 자신만이 알고 있는 사실들에 관한 대화를 나누게 된다. 나와 안이 발견한 것은 지극히 사소한 것들이다. 그것은 단성사 옆 골목의 쓰레기통과 그 안에 든 초코릿 포장지, 적십자병원 정문 앞의 호도나무, 미자라는 아가씨가 사준 빤쯔, 백십원이 들어 있는 한 되들이 빈 술병 등으로 누구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을 법한 하찮은 사물들인 것이다. 그러나 지극히 사소하고 보잘것없는 이 물건들은 다른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고 오직 나와 안만이 관심을 갖고 기억한다는 사실 때문에 그들만이 간직하고 있는 세계, 그들만의 소유가 된다. 나아가 그들은 자신이 알고 있는 사실을 다른 사람이 안다면 그것은 자기의 소유가 아니며 중요하지도 않은 것으로 생각하기까지 한다. 이들은 자기만이 알고 있는 사실을 통해 타자에 대한 일종의 우월한 욕망을 드러낸다. 그들은 사물을 아유화하고 무화시키는 의식의 자율성에 대한 주장을 통해 현대를 살아가는 도시인의 삶을 은밀하게 비판하는 것이다.
나와 안의 모습은 속물이라 불리는 타자의 삶을 反-모델로 하여 그들과의 차이에 주목함으로써 자신의 욕망을 구성하는 주체가 얼마나 하찮은 것들에 집착할 수밖에 없는가 하는 것을 잘 보여준다. 타자로부터의 중개를 거부하고 타자가 욕망하지 않는 무엇인가를 욕망하기 위해 이들은 지극히 하찮은 것을 욕망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욕망하는 대상이 하찮은 데서 속물이 배태된 것이라면 이와 마찬가지로 속물들에 대한 우월욕망을 드러내는 주체 역시 그가 욕망하는 대상이 하찮은 것이기에 그들 자신이 비판하는 속물들과 동일한 존재가 될 수밖에 없다.
한편 이들은 타자가 추구하는 세계와는 다른 자기만의 세계의 확보를 통해 타자에 대한 우월욕망을 드러내지만 결코 자기 세계 속에서 만족을 누릴 수가 없다. 이는 한편으로는 자기 세계의 실상이 극히 미미하다는 사실과 관련이 되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들의 욕망이 타자의 무관심을 견딜 수 있을 만큼 충분히 강하지 못하다는 사실과 관련이 된다. 이들은 자기 세계를 추구하면서 다른 누군가가 자신의 자기세계를 인정해 주기 바라는 욕망을 드러낸다. 이것은 이들의 자기세계가 타자의존적이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부분이 된다.
안이 꿈틀거리는 것을 사랑하느냐고 묻자 나는 아침의 만원 버스칸 속에서 보는 젊은 여자 아랫배의 조용한 움직임을 사랑한다고 말한다. 나는 그 이야기가 라디오의 박사게임 같은 데 나갔을 때 대답하려니 하고 일부러 기억해 두었던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사실에서도 알 수 있듯이 내가 발견해 가는 나만의 세계란 나만이 누리고 나만이 즐기는 세계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기 위해 준비하고 간직해 둔 세계이다. 여기에서 타자로부터 인정받고자 하는 욕망이 개재해 있는 것이다. 사실 자기만의 세계를 추구하는 내가 또다른 자기 세계를 추구하는 인물인 안과 대화를 나눌 수 있다는 것부터가 이미 이러한 인정에의 욕망에 이들이 노출되었음을 보여주는 부분이라 할 것이다.
자기 세계를 추구하는 이들 주인공은 타자의 인정을 끊임없이 욕망함으로써 타자의 욕망으로부터 결코 자유로워지지 못한다. 그들은 비극적 면모를 지닌 듯하면서도 실제로는 비극적인 인간에게 가능한 유일한 형태의 대화인 독백을 견뎌내지 못하고, 대화의 상대자를 마련함으로써, 혹은 자신의 행위를 보아줄 누군가를 찾음으로써 그 한계를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나. 소외 인식과 극복 시도
소외란 사회심리적으로는 "사람들이 상호간에 연대감을 상실하고 원자와 같이 뿔뿔히 헤어져 고립하기 때문에 생기는 사회나 집단에 대한 소원의 감정"이라고 정의된다. 하우저에게 있어서 소외는 개인과 사회와의 관계가 상실되었다는 감각, 자기 자신의 일에도 적극적으로 참가하지 않고 있다는 감각, 자신의 향상심이나 자신의 규범 또는 야심을 살릴 희망이 완전히 상실되었다는 감각 등으로 폭넓게 규정되고 있다.
은 인물 상호간의 소통 단절이라는 측명이 가장 잘 드러난 김승옥의 작품이며 "소외 바로 그 자체는 아니라 하더라도 소외에 얼마나 가까워지고 있는가에 대한 충분한 예감"을 보여주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얼어붙은 거리를 휩쓸며 부는 차가운 바람'이나 '바람에 흔들리는 카바이트 불빛' 따위의 삭막한 배경 아래서 은 시작된다. 서울은 진정한 가치가 훼손된 욕된 공간이다. 이러한 서울의 겨울날 만난 세 주인공에 대한 소개는 이들이 진정한 인간관계를 맺지 못하고 있음을 잘 보여 준다.
이러한 소외된 상태를 극복하고, 인간적인 소통을 회복하고자 안과 김 사이에는 대화의 시도가 이루어진다. 그러나 그 대화의 시도는 성공적인 소통의 회복을 이루어내지 못한다.
안과 김은 소외된 현대인으로서의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부정적으로 파악된 현실 세계에 대한 거부와 개인의 자유를 향한 바람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단절되고 소외된 인간관계의 회복을 위해 이들이 도달한 세계는 역설적이게도 자기 세계의 설정이다. 이들이 내세우고 있는 사소한 사실들의 가치를 결정짓는 유일한 요소는 그것이 다른 사람들과 공유하는 것이냐, 자기 자신만의 것이냐일 뿐이다. 이들은 언뜻 보기에는 소통에 성공한 것으로, 다시 말해 소외를 극복한 것으로 보이나, 기실 이들은 '서로를 존중'한다는 미명 아래, 소외된 상태를 인정하고 있다. 타인과 같이 존재하는 것은 단지 같은 시공 속에 존재한다는 의미 외에는 아무것도 아니다. 이들에게 관심 있는 것은 단지 자신의 '소유'로서의 사실뿐이기 때문이다. 안이 개인의 익명성이 보장되어 있고, 가족으로부터도 완전히 소외된 공간인 여관을 자신의 잠자리로 택한다는 진술이나, 이들이 "각기 계산하기"를 택한다는 사실은, 이들의 소외된 자기 세계에 대한 집착을 잘 보여준다.
현대인의 소외를 극복하기보다는 수락하고 인정하는 이 두 인물과 대조적인 인물이 '아저씨'이다. '타인 속에 존재'하는 인물인 아저씨는 안과 김과 '함께 가기'를 소원한다. 아저씨의 '돈'을 매개로 한 인간 관계의 모습은 자본주의가 그 단초에 깔고 있는 화폐의 의미, 그와 관련된 사유 재산의 의미, 그리고 그것들로부터 파생된 소외의 의미를 잘 보여 준다.
이러한 매개화되고 타락한 가치로서의 금전에 의한 인간관계에 환멸을 느낀 아저씨가 화재 현장에서 돈을 불 속에 집어 던지는 행위는 진정한 인간관계의 회복을 희구하는 아저씨의 마지막 시도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아저씨의 시도는 즉시 거부된다. 돈이 떨어진 아저씨를 향해 안은 "약속이 끝났으니 우린 가겠습니다."라고 차갑게 말한다.
작품의 인물들의 진술이나 태도뿐만 아니라, 그 플롯에 있어서도 현대인의 소외를 드러내고 있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인과성에 의해 결집된 플릇이 아니라, 독립적인 사건들이 동기화되지 않은 채 우연성에 의해 결합된 플롯이다. 고립된 시간과 공간은 연속성이 단절된 삶의 절망적 상황을 드러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다. 좌절의 드러냄으로서의 자살
문학 작품 속에서의 죽음은 "극단적인 소외 현상을 표출하는 한 상징 기법"이며, 문학 사회학이 관점에서 본다면 "현실 세계 상황 속에서의 존재의 직접적 삶과 연계되는 것"이다.
의 아저씨의 죽음은 소외 극복을 향한 소통 시도의 좌절이라는 점에서 더욱 비극적인 것이다. 끊임없이 혼자 있기를 두려워 한 아저씨는 혼자 있게 놓여진 순간 죽음으로의 탈출구를 찾을 수밖에 없게 된다. 알라레스에 따르면, 자살 시도란 "도와달라는 외침"이며, "자살자가 기대할 수 있는 유일한 해결은 이런저런 종류의 도움"이다. 그러나 이러한 아저씨의 외치는 현대 사회 속에서의 소외를 수락하는 인간인 안과 김에 의해 무시된다. 실로 그가 유일하게 사귀려고 했었던 사람들은 그와 아무런 교섭도 갖기를 원하지 않는 그런 자들이었다.
김과 안은 타인의 죽음에 대해 전혀 무관심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실존적인 관점에서 볼 때, "타인의 죽음은 사회적인 환경에서 일어나는 하나의 사건"일 뿐이다. 그러나, 자살이 도움을 청하는 행위라는 알라레즈의 견해나, 사회적 행동의 제1조건을 상호성에 두는 오르테가의 견해에서 졸 때, 이들의 행동은 비윤리적인 것이다. 이러한 비윤리적 행동은 그 자체로 현대사회의 소외 현상을 드러내 보이고 있다. 마지막 장면에서 '늙음'은 소외된 개인의 무력감을 의미한다고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손덕균, 『김승옥의 연구』, 배재대대학원석사학위논문, 1998. 6
정영훈, 『김승옥 소설에 나타난 욕망의 발현양상 연구』, 서울대대학원석사학위논문, 1998.8
정학재, 『김승옥 소설 연구』-인물의 세계 인식과 대응 양상을 중심으로-, 한양대대학원석사학위논문, 1997. 6
성수미, 『김승옥 소설 연구』-라깡의 욕망이론으로 본 소설의 서술적 특징과 욕망의 양상을 중심으로-, 서울시립대대학원석사학위논문, 1999. 2
김승옥 연보(年譜)
1941년 (1세) 12월 일본 오오사카에서 출생
1945년 (5세) 귀국하여 전남 순천에 정착함
1948년 (8세) 순천 국민학교에 입학하였다가 여수 동산 국민학교로 전학함
1951년 (11세) 다시 순천 북국민학교로 전학함. 「새벗」지에 동시(童詩)를 발표함
1954년 (14세) 순천 중학교 입학. 교지에 콩트, 수필 등을 발표
1957년 (17세) 순천 고등학교 입학
1960년 (20세)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불문과 입학. 서울경제신문에 연재 만화 을 그려 연재함. 서울대 문리대 학생신문 「새세대」의 및 컷 등을 그림
1961년 (21세) 「새세대」지의 기자가 되어 문예면 및 논문면을 맡아봄
1962년 (22세) 단편 이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문단에 데뷔. 김현·최하림과 함께 동인지 「산문시대」창간. 이 동인지에 등을 발표
1963년 (23세) 「산문시대」에 을 발표
1964년 (24세) 단편 (「문학춘추」) (「문학춘추」) (「사상계」) (「세대」) 등을 발표
1965년 (25세) 단편 (「사상계」)발표. 이 작품으로 제10회 동인 문학상 수상
1966년 (26세) 단편 (「창작과 비평」) (「자유공론」) (「신동아」) 발표. 장편 을 「문학」지에 연재 시작(未完)
1967년 (27세) 중편 을 중앙 일보에 연재. 단편 을 란 제명으로 각색함. 김동인의 단편 를 각색·연출하여 영화화함
1968년 (28세) 장편 을 「신동아」에 연재 시작했으나 2회에 중단함. 중편 을 주간지 「선데이 서울」에 연재함. 이어령의 작품 을 영화로 각색하여 대종상 중 각본상을 수상
1969년 (29세) 장편 를 「주간여성」에 연재. 단편 을 「월간 중앙」에 발표. 이때부터 시나리오 각색에 주력함
1972년 (32세) 과 이 삼성 신서 「한국문학전집」 71권으로 간행됨
1975년 (35세) 이 「한국단편문학대계」(삼성출판사간) 13권에 수록됨
1976년 (36세) 창작집 「서울, 1964년 겨울」과 「60년대식」이 서음 문화사에서 간행됨
1977년 (37세) 중편 을 「문학사상」에 발표. 이 작품으로 제1회 이상문학상 수상. 콩트집 「위험한 얼굴」이 지식산업사에서 간행됨
1983년 (43세) 「제3세대 한국문학」12권, 김승옥편(삼성출판사) 간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