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3월 18일(화) 19:00
1980년대와 민족분단의 서사
황석영·이문열·김원일
*평론
김승환1)
1.민족의 서사를 다루는 80년대적 기법
나는 시대는 그 시대마다의 기법이 있다고 믿는다. 개인의 창의(創意)를 서릊어 버리려는 어리석은 생각이라고 역정을 낼 수도 있겠지만 시대가 지시하는 기법은 결코 무시할 만큼 가벼운 것이 아니다. 시대가 작품을 구상하여 작가에게 지시하면 작가는 자신의 상상력을 보태서 작품을 생산한다. 창작의 과정에서 개입하는 시대라는 또 다른 작가가 있는 셈이다. 보이지 않는 손의 개입은 자본주의 사회의 시장과 같은 기능을 하고 사회주의 사회의 공장과 같은 역할을 한다. 그런 점에서 우리가 여기 논의의 대상으로 삼은 세 작품인 『무기의 그늘』, 『영웅시대』, 『겨울 골짜기』는 1980년대 남한이라는 보이지 않는 작가가 생산한 민족의 사회사인 셈이다. 그렇다면 대저 80년대란 우리에게 무엇인가.
사람들은 80년대를 음울로 기억한다. 그리고 아비규환과 등달은 압제의 군화를 떠올린다. 이러한 시대적 콘텍스트를 '분단이래 억압되어 왔던 정치적 상상력이 1980년대의 제반 모순 상황과 맞물리면서 거세게 갈등을 분출'2)했다고 해석하기도 한다. 하지만 어떤 사람은 80년대를 환희까지는 아니지만 절제와 절도(節度)와 같은 긍정적 암호로 각인시켜 두고 있다. 이 상반되는 두 코드 모두 전시대에 대한 해체의 의미를 가진다. 그 해체와 재조정은 곧 창작환경의 변화를 의미한다. 즉 작가의 배후이자 또 다른 작가라고 할 수 있는 시대에 대한 인식이 서로 다를 경우 전혀 다른 작품이 생산될 것은 자명한 이치. 여기서 작가의 문체나 창작방법과는 현저히 다른 인식의 차별성이 개입하게 된다. 거기, 황석영이 있고 김원일이 있으며 이문열이 있다. 1980년대가 가졌던 분단에 대한 해석이 이 세 작품으로 상징화되었다고 가정하고 차근차근 살펴보기로 하자.
여기서 우리가 논의할 김원일의 『겨울골짜기』, 황석영의 『무기의 그늘』, 이문열의 『영웅시대』는 여러 면에서 비교될 수 있는 특별한 작품들이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이 세 작품은 80년대에 생산되었고 70년대의 주정(酒精)으로 발효시킨 민족분단의 서사라는 공통성을 지니고 있다. 또한 형식적으로 장편소설이며 그 중에서도 대서사 형식에 가장 충실한 작품이라는 유사성도 있다. 세 작품 모두 민족의 문제를 다루었다. 특히 민족의 역사를 분단체제에서 보고 해석하는 이 창작의 행위는 작가적 의무 수행인 동시에 시대적 명령을 수행하는 고결한 형식이다. 원래 서사는 민족이나 국가나 역사와 같은 주제를 다루게 되어 있기는 하지만, 이 세 작품은 <분단체제하의 가년스런 한국이라는 민족의 서사>를 치열하게 파고 든 밀도(密度)의 깊이 때문에 더 의미가 있다. 분단체제하의 분단은 주제가 될 수 없거나 주제를 넘어서서 삶 전체를 규정하는 절대적인 것3)이기에 그 문학적 탐구는 작가로서 방기할 수 없는 의무에 해당한다. 내용과 형식의 상호관계에서 내용의 절대성은 형식의 변별성을 강요한다. 이 연장선에서 장르적 성격이 규정된다. 민족의 서사를 다룰 경우 소설이라는 형식이 비교적 적합하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세 작품 모두 두 권의 완결적인 장편소설의 형식을 갖추고 있다. 대하소설의 대서사가 아니라 적당한 길이의 장편으로 민족의 분단현상을 그렸다는 뜻으로 읽혀도 좋겠다. 이 점은 간단해 뵈지만, 좀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문제다. 민족을 서사의 대상으로 삼을 때, 「금강」이나 「남한강」과 같은 서사시가 있을 수 있고, 『토지』나 『태백산맥』과 같은 대하장편소설이 있을 수 있다. 물론 단편 양식으로도 시간과 공간을 압축하여 민족적 삶의 총체성을 담을 수도 있지만, 그것은 아주 드문 일이다. 이렇게 보면 서사시나 대하장편소설이 아닌 두 권의 장편소설이라는 물리적 특성을 결코 간단히 보아 넘길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세 작가들간의 경쟁이나 대타의식이 작동했을까? 그럴 수도 있다. 『단종애사』와 『대수양』과 같은 반사적 상호텍스트의 교환이 아닌 타자에 대한 자기훈육으로 작품이 생산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가능성보다 발생구조적 상황에서 이 세 작품의 동시다발적 탄생으로 이해해야 할 것 같다. 즉, 1960년대의 남북관계에 대한 새로운 이해가 70년대를 거치면서 다양한 인식체계를 가뭇없이 숙성시켰고, 80년대에 이르러 그 시대적 의미와 작가의 세계관이 만나서 이들 작품이 생산되었던 것이다. 거기 이 보석처럼 빛나는 세 장편이 있는 것이니 먼저 각각의 의미를 살펴보는 것이 어떨까?
2.『무기의 그늘』(황석영) - 공간이동과 거울 현상
문단에서는 그를 '황구라'라고 한다. '구라'란 거짓말을 친근하게 사용하고 싶을 때 쓰는 어휘다. 이 비속어를 쓰더라도 사람들은 황석영의 언행에 과장과 왜곡이 심하다는 일차적 의미로만 해석하지 않는다. '구라'란 어휘 속에 잠겨있는 소설가적인 상상력과 창의력에 무게를 두고 싶어할 것이다. 우리는 이런 가량없는 삶의 형식을 사기라고 한다. 사기(詐欺)란 못된 꾀로 남을 속이는 행위다. 그런데 그의 형식은 오히려 사기(肆氣)에 가까워서 자기의 기분대로 함부로 방자한 성미를 부리며 행동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것을 사람들은 사기(詐欺)라고 짐작하는 것이다. 황석영에 있어서 인간적 사기와 소설적 사기는 같다. 그러니 그의 소설적 사기는 속속들이 먹히게 되고 가속이 붙어서 이제는 자신도 사기를 하는 것인지, 일상적 삶을 사는 것인지 구별이 되지 않을 경지에 이르러 있다. 우리는 이 삶의 형식을 탓할 이유가 없다. 생존과 초극의 경계를 오고 가는 것은 나쁜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의 사기가 자신의 물질적 이익을 목표로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미 그는 사기의 인생을 살기로 작정했으므로 언사에 거침이 있을 까닭이 없다. 그의 언행은 전설이 되고, 한 세대 건너서는 신화가 된다. 언제 어디서 황석영이 어쨌다더라 하는 전설 겸 신화는 거꾸로 작가와 독자의 의식을 지배하면서 자연스럽게 사실로 등극한다. 그는 점점 신비해지고, 그의 사기는 예술이란 고상한 이름으로 미화(美化)된다. 문제는 그의 사기가 세속적인 사기가 아니라는 점이다. 자신의 온 몸을 걸고서 사기를 행한다면 우리는 그런 사람을 예술가라고 부른다. 그러니 예술적 사기라는 말이 성립할까 모르겠는데, 하여간 그는 인간적 기이함이나 예술적 유별성에서 평범한 말로 묘사되지 않는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여기서 논의하는 작품 『무기의 그늘』은 바로 그러한 예술적 사기와 리얼리즘 미학이 교차하면서 연출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지금은 다정한 이름 베트남은 오랫동안 남한의 적이었다. 미제(美帝)의 용병이라는 비판을 들어가면서 성장제일주의 원칙에 따라 외화획득의 첨병으로 참전한 남한 군인들은 자기에 대한 주체를 국가에 헌납해야만 했다. 주체의 상실은 타자를 강제한다. 이 '시드러운 전쟁'에 참전했던 작가의 의식 속에는 베트남에 대한 죄의식도 난무했을 것이고, 자기 상실의 고통도 가득했을 것이다. 작가 자신이 베트남 민족해방운동의 타자(他者)로 존재했기 때문에 이번에는 소설에서 그 관계를 역전시키고자 노력했음은 당연한 결과다. 작가는 이 점을 포착하여 타자로서의 베트남을 설정하기에 이른 것이다. 강진호 선생의 해석처럼 '역사를 보는 타자의 시선'4)을 그는 공간의 변화로 풀고자 했다. 이 공간이동은 시점과 서술이동을 동반하는데 이렇게 해서 생산된 『무기의 그늘』은 동아시아 역사라는 무대에서 황석영이 연출한 절묘한 공연이다. 이것을 나는 공간적 타자성이라고 불러보고 싶다.
이념이 소설을 쓰는 것은 아니다. 사상이 소설을 쓰는 것도 아니며 감정이 소설을 쓰는 것도 아니다. 역사나 사회가 쓰는 것도 아니며 작가의 창작능력이 쓰는 것도 아니다. 이 모든 것이 총체적으로 어울려야 소설이 생산된다. 그런데 황석영은 이념과 사상의 힘을 펜 끝에서 빼지 못했다. 그리하여 얻어진 사상의 무게는 천근 만근 서사의 진행을 내리누르기 때문에 소설이 전체적으로 무거워 졌다. 『무기의 그늘』을 읽고 가볍다고 느끼는 독자는 없을 것이다. 어려운 것은 아니지만 국가의 서사라는 대주제에 값하는 무게를 가지고 있음은 직관적으로 읽힌다. 이 얼마나 아이러니인가. 사기와 엄숙. 엄숙한 사기라는 말이 있어야 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그 때 자기검열이 실시된다. 자기검열이란 스스로 자신을 훈육하고 통제하면서 자기갱신을 위한 절제를 하는 것을 뜻한다. 나는 그의 작품에서 서정적인 감성이 잘 드러나지 않고 성적인 묘사가 겅성드뭇한 것은 모두 그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엄숙이라는 자기검열. 자기를 끊임없이 감시하고 검열하게 되면 자기 자신의 이상과 철학으로부터 멀리 떨어질 수 없다. 반대로 이상과 철학이 개입할 수밖에 없다. 늘 눈 부릅뜨고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하겠는가?'라고 스스로 자문하고 자답하며 올바로 살겠다고 강다짐을 하다보면 그럴수록 서사는 더욱 무거워진다. 나는 그런 점에서 서술이나 묘사라고 쓰지 않고 서사라고 써야 할 필요를 느낀다. 거기 『무기의 그늘」이 있다.
이 소설은 우리에게 '미국이란 무엇인가?'라는 곤란한 질문을 제기한다. 꿈과 절망을 동시에 선사하고 해방과 압제를 떠올리게 만드는 나라 미국. '미국 패권주의의 동아시아적 대안으로서의 베트남'5)은 친미 분단 반공 체제인 남한의 타자(他者)로 존재했었다. 한국이라는 자기는 베트남이라는 타자를 만나서 자기를 인식하고 확인하며 미국으로부터 독립한 자기정체성 확보를 위하여 노력한다. 여기서 베트남은 타자이면서 자기인 남한의 거울인 셈이고, 남한은 베트남이라는 스승으로부터 역사의 교훈을 문학적 상상력으로 재해석하여 훈육받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무기의 그늘』은 제 3의 서술자를 통해서 한국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표면적으로 보면 한국인 등장인물들에게 조금 더 시선이 주어지는 전쟁소설이라고 해도 틀리지 않다. 또한 베트남 전장에서 벌어진 여러 사건들을 여러 나라의 등장인물을 통해서 해석하고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미국은 무엇인가'는 단지 미국의 지배전략이나 패권을 묻는 것이 아니라 그를 통해서 '한국은 무엇인가'를 묻는 아름찬 문제여서 간단치 않다. 자연히 '한국인은 누구인가'로 환원한다. 그리고 이내 '나는 무엇인가'로 재환원한다. 결국 황석영은 '미국은 무엇인가'를 베트남 전쟁 속에서 해석하면서 '나는 무엇인가'라는 존재론적 문제에 착지(着地)했다. 그 과정에서 '한국은 무엇인가'라는 민족적 운명공동체의 생존을 짚어봄으로써 민족사의 전망을 열고 민족문학사의 의미를 확보한 것이다.
한국인들은 미국을 알라이(alley) 즉 우방이라고 믿는다. 미국인들도 한국인에게 예외 없이 '알라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말하는 쪽이나 듣는 쪽이나 그것을 그대로 믿는 눈치는 아니지 않은가? 푸꼬의 말처럼 세상이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로만 짜여진 것은 아니지만, 이런 대서사를 이야기할 때 우리는 확연한 이분법을 버릴 수는 없다. 너무나 간단하고 그래서 너무나 정확한 이 이분법은 사실 위험하다. 하지만, 남한의 민중이 미국의 시민과 동등한 권리와 가치를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면 우리는 그를 천치(天痴)라고 부른다. 제 정신 가진 사람이 어디 쉽게 천치가 되고 싶겠는가. 당연히 지배하는 미국 시민과 종속 당한 한국 민중이라는 선연한 등식이 존재한다. 이것을 기분 나쁘다고 폐기할 수는 없다! 간혹 순진한 이상주의자들은 인간은 평등하다와 같은 격언을 믿고서 미국 시민과 한국 민중이 평등하다든가 인간은 존엄한 것이다라는 명언을 믿고서 모든 인간들이 똑같은 무게를 가지는 것으로 착각하는 사람이 없지는 않다. 그러나 그렇게 말한다고 해서 미국 시민과 한국 민중이 평등하게 되는 것은 아닐진대, 우리는 냉정해질 필요가 있다.
황석영은 이 물음을 가장 명징(明徵)하게 보여줄 매개인물로 팜 꾸엔을 내세운다. 그는 처음에 민족해방전선의 전사가 되고자 하였지만 의지의 박약을 핑계로 아주 쉽게 그 뜻을 포기한다. 그리고 베트남 장교가 되어 미군의 주목을 받게 된다. 사이공에서 대학을 나온 다음 나트랑의 육군간부학교에서 교육받을 때 친미주의자로 변신한 것이다. 그의 천부적인 후각은 그를 친미주의자로 만들었는데, 그 계기는 무척 단순하다. 베트남에 맞는 전술을 토론하는 자리에서 미군의 전술을 채택하는 발언으로 미군의 주목을 받은 명민한 팜 꾸엔은 그 기회를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전술을 가르치던 미국인 고문관은 즉시 '이 우수한 장교'를 주목했다. 그는 꾸엔을 연락장교로 임명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꾸엔은 가장 미국적인 사고를 갖춘 장교로 지목되었고 그것은 미군이 원하는 바였다. 그는 빠르게 진급했고 곧 람 장군에게 추천되었다'6). 그런데 그는 '아무 것도 책임지지 않겠다는 주의이고, 그러나 절대로 손해보지 않고 살아 남겠다는 입장이며 드디어는 싱가포르나 타일랜드쯤에 정착하고 싶은 개인적 소망을 갖고 있었다. 그는 사이공 대학의 우수한 법률학도였다. 그는 이른바 도시 부르좌의 자식이었다'7) 이 능란한 처세의 달인은 상황의 논리에 따라, 힘의 중력을 파악하고서 친미반동포주의라는 이기주의로 기울었던 것이다. 이 대목이 의미하는 것은 매우 간단하다. 미국의 반식민지 지역에서 친미 인사(人士)가 어떻게 육성되고 관리되는가 하는 점이다. 미국은 이렇게 자신의 영향력을 넓혀 갔으며 막강한 자본의 힘으로 베트남인들을 종속시켰다. 그런데 그런 것을 모르는 사람도 없을 뿐만 아니라 그런 것을 언술(言術)로 재생하는 사람도 딱하기는 마찬가지다. 문제는 작가가 왜 이런 얄망궂은 서사의 형식을 택했는가 하는 점이다. 따라서 이 부분은 작가의 역사에 대한 믿음을 재생한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즉, 남한과 같은 반식민지 상태에 놓여 있던 베트남의 현실을 통해서, 그리고 그 현실 속에서 영악한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을 통해서, 작가는 이 두 아시아의 국가들이 어떻게 미국의 지배상태에 놓이는가를 확인하고 싶었을 것이다.
앞에서 나는 이 작품은 '미국이란 무엇인가?'를 묻는 확인의 형식이라고 말한 바 있다. 이것은 <밀라이 사건>을 삽입한 것에서 잘 드러난다. 1권의 15장은 미군의 양민학살 사건으로 유명한 <밀라이 사건>의 취조일지 형식으로 기술되었다. <20사단 제1대대 C중대의 밀라이 마을에서의 작전 중 과오에 대한 참고 보고서>가 부제로 달려 있는 이 부분은 실제 사건의 전말을 거의 그대로 옮겨 놓은 것이고 따라서 작가의 형상화가 개입하지 않은 부분이다. 그러므로 서사의 구성원리로 보면 이 부분은 상당히 이질적이다. 이야기의 흐름이나 인과관계에서 꼭 필요한 것도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이 부분을 삽입함으로써 이야기의 흐름을 차단시켰고 또 인과관계를 교란시켰다. 예외적인 돌발 서술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그런데 이 부분이야말로 황석영이 왜 『무기의 그늘』을 썼는가를 분명히 말해 주는 고귀한 대목이다. 작가는 바로 그런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이다. 미군은 베트남 해방군이 될 수 없으며 점령군일 뿐이다라는 사실을 그는, 소설적 부조화를 무릅쓰고서 언술(discourse)하고 싶었음에 분명하다. 이 때, 창작은 상상에서 사실로 균형의 추를 옮겨 놓는다. 이야기에서 서사로 옮아간다. 당연히 창작방법으로 리얼리즘의 기법이 선택되는 것이며 작가의 사상과 의식이 직통으로 작품과 소통하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그는 현실과 역사를 냉혹하게 바라본다.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것은 쿠르베가 탄광촌을 사실주의 기법으로 그려낸 기법과 유사하다. 다만 그는 모사적 사실주의에 머물지 않고 자신의 세계관을 강하게 주입시킨다. 이 글에서 논의하는 세 작가 중, 서사의 무게가 가장 무거운 작가가 황석영이다. 그는 민족과 국가의 운명이라는 대서사를 이념적인 관점에서 서술했다. 그리고 자기 자신이 민족의 서사를 개인화하려고 할 만큼 상징적인 언행으로 민족모순에 부딪혀 보았다. 나는 이 작품은 1985년의 콘텍스트에서 읽혀야 한다고 믿는다. 왜냐하면 이 작품이 베트남 전쟁을 주제로 한 전쟁소설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문제작가 황석영이 베트남을 통해서 남한의 역사를 재단하는 기법을 썼기 때문이다. 내용은 간단하다. 서사 구조로 보면 베트남 중부전선에서 한국인과 베트남인 그리고 미국인들이 얽혀서 이전투구의 모습을 연출한다는 에피소드들의 집합이다. 이 점에 있어서 『무기의 그늘』은 다른 작품과 다르지 않다. 그러나 이 작품은 한 민족의 생존과 해방의 대서사라는 주제를 가지고 있지만 이야기 구조는 미세한 생활의 현장을 다루어야 한다는 역사소설의 법칙을 벗어나지 않았다. 그래서 <베트남 민족해방의 서사>로 명료하게 구조화할 수도 있다. 맞다. 이 작품의 서사구조나 이야기의 내용은 모두 다 베트남 민족에 대한 것뿐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렇게만 읽을 수는 없다. 이런 작품이 생산된 발생구조적 토대를 작가와 언어 속에서 해석해야 하겠다는 생각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아니 다른 비평가들도 그랬거니와, 1985년 남한이라는 상황의 콘텍스트를 이 작품에 대입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1985년은 어땠던가. 무서운 시절이었다. 유신체제보다 더 무서워서 삼엄한 지경이었기에 작가들은 시대적 악력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치열하게 응전하던가, 역사나 공간이동을 통하여 우회적인 표현의 방법을 찾던가, 독재 찬양의 용비어천가를 부르던가 하는 곤란한 형식만이 존재했던 시기였다. 이 때 그는 비유의 형식을 택했다. 리얼리즘의 기법과 정신을 토대로 하기는 하지만 공간상황을 베트남으로 설정함으로써, 언어의 비유가 아닌 공간의 비유라는 특별한 형식을 썼던 것이다. 그로써 그는 한국사회와 한국인들이 아령칙하게 망각했던 자기 자신을 비추어 볼 거울을 만들어 놓은 셈이다. 문학사에 빛나는 거울 하나, 그것이 입담 좋은 작가 황석영의 『무기의 그늘』이다.
3.『영웅시대』(이문열)- 영웅적 신비주의
시대가 소설을 쓴다는 우리의 전제를 확인할 수 있을까? 있다. 이 글에서 다루는 이문열의 『영웅시대』가 그것을 증명한다. 1984년에 완결적으로 발표되었으므로 이 작품은 70년대와 80년대의 시대정신을 담고 있고, 또 작가의 성숙된 세계관도 살아있는 문제작이다. 이 작품 역시 시대가 작품을 쓰고 작가가 대필(代筆)했다는 원리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그런데 작가에 초점을 맞추어 보면 작가의 과거가 이 작품을 쓰도록 만들었다는 해석도 가능하다. 참으로 참절하고 매우 통절하며 인간적으로 충분히 이해가 가는 다음 대목을 보자.
"철이 글마가 뭔데?"
아이들이 일제히 호기심에 찬 눈으로 되물었다. 처음 말을 꺼낸 아이가 약간 으쓱해하는 태도로 대답했다.
"글마 아나? 빨갱이 새끼데이.
(중략)
그 말에 아이들은 모두 놀란 얼굴이 되었다. 대여섯밖에 안 된 이런 축 가운데는 낯빛까지 핼쓱해지는 아이도 있었다.
"그라믄 우리 글마하고 놀리 말자."
"맞다. 글마가 커서 우리 잡아묵으믄 우아노?"8)
철이가 누굴까? 작품 속의 인물을 현실에 대입시키는 것이 어리석음을 모르지 않는다. 그러나 바로 그 점이 이 작품 『영웅시대』의 존재이유이자 발생구조의 비밀이기 때문에 건너 뛸 수는 없다. 여기서 철이는 작가인 이문열 자신이다. 그러니까 철이는 자신의 어린 시절을 투영(投影)한 대리 작중인물이라고 해도 좋겠다. 실제로 이문열은 '빨갱이 아버지'라는 고통을 가슴 깊이 간직하고 있었는데, 어린 시절의 상처가 현실의 일상적 고통과는 다르다는 점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어린 시절의 작가가 느낀 고통의 크기는 매우 주관적이므로 그런 문제는 논리적으로만 볼 성질이 아니다. 작가 스스로 그렇게 느꼈을 수도 있지만 그 역시 논리성을 들이댈 부분이 아니다. 작가가 그렇게 믿고 있고 그런 상처가 있다고 통절히 생각하는 한, 이 문제는 감정의 차원에 머물러야 한다. 하여간 '빨갱이 아들'로서 분할과 배제의 쓰라린 기억을 가진 작가는 과거에 대한 복수를 해야 했다. 이문열 식의 해원(解寃) 방식이다. 그렇다면 자신의 원한에 찬 과거사에 대한 일종의 복수 형식이 바로 이 작품 『영웅시대』인 셈이다. 그러니까 작가가 이런 식의 복수를 할 이유가 있다는 것인데, 그것은 냉정히 보면 유아기적 낭만성에 빠져 있는 형국이다. 추론을 생략하기로 하되, 어린 시절의 유아기 의식이 『영웅시대』라는 통과예식을 거쳐서 성인의식으로 나가는 과정에 있는 것.
그의 『영웅시대』는 가족사와 깊이 연관되고 있다. 보기에 따라서 가족사를 서사화한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가장이 된 어머니가 어린 자식을 품고 귀향(歸鄕)하는 시난고난한 서사, 바로 그것은 이문열 자신의 이야기였고 시대가 연출한 민족의 고난사였다. 그런 점에서 수많은 비판에도 불구하고 『영웅시대』가 민족적 운명공동체의 바깥에 있지 않은 것은 시대와 역사가 잘못 연출한 진실이었기 때문이리라. 그의 영웅에 대한 복잡한 심리 이면에는 유랑의식이 강하게 작용하고 있는 것 같다. 정신적으로 정주(定住)할 수 없고 끊임없이 유랑하고 유리(遊離)하는 생존의 형식을 그는 운명으로 인식한 것이다. 그 결과로써 지상에 살 집이 없다고 말하는 것은 불안과 슬픔의 감정과 상통한다. 정신적으로 안주하지 못하고서 늘 떠돌아야 하는 운명을 다른 말로 역마(驛馬)라고 한다. 어딘지 하염없이 가야 하는 고행의 길을 그는 스스로 선택한 것이다. 이것은 아버지의 인력이라거나 아버지 부재의 반사작용이라고 할 수만은 없다. 아버지가 있고, 아버지의 중압이 있었더라도 그는 유랑의 길을 택했을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아버지의 중압감이 전통적 문장의 길과 통했기 때문에 그가 문인이 된 것이지 만약 아버지가 있어서 안온한 그들이 되었더라면 그는 정말 육체와 바랑이 하나 짊어진 유랑자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는 때때로 아버지에 대한 복잡 미묘한 부분을 방패로 삼는다. 집안이 몰락했다고 하는 순간, 그에게 몰락해야 할 거대한 가문이 존재하는 것이어야 하며, 연좌제의 고통이 여린 가슴에 못을 박았다고 하는 순간, 연좌제가 사상과 감정까지 지배하는 절대적인 힘으로 작동하게 된다. 이런 기계론적인 인과법칙에서 이문열의 문학세계를 지배하는 것은 아버지와 역사와 사회였다. 바꾸어 말하면 아버지와 역사와 사회가 아니었으면 지금의 이문열은 없어야 한다. 그럴까? 아니다. 작가는 환경과 역사와 사회의 영향을 받기는 하지만 기계론적으로 지배당하지 않는다. 그것이 작가다.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작가는 환경과 역사를 헤쳐가면서 새로운 전망을 창출하는 창의적 존재다. 의아하게 생각하는 분이 계실지 모르니 예를 들어보자. 이문열과 반대로 아버지가 평범한 부르조아로 적당한 지위와 적당한 부를 가지고 있었으며 남한에서 끝까지 살아남았더라면 이문열의 작품세계는 그 반대가 되어야 하는가? 아니다. 만약 이문열의 부친께서 성공한 부르조아 시민으로 상당한 재산과 지위를 가지고 있었다면 작가이자 자식인 이문열은 그 반작용으로 김지하나 김남주가 될 수 있었던 것인가? '아니다'. 이문열은 어떤 경우에도 지금의 이문열일 것이다. 어떤 경우의 수를 놓아도 지금의 이문열에는 큰 변화가 없다. 그래야 이문열로서 가치가 있다. 어떤 순열과 조합을 해도 지금의 이문열이라는 믿음이 있을 때, 우리는 이문열을 평가하고 비판할 가치가 있는 법.
아버지를 빙자했지만 그것은 빙의(憑依)를 입은 것과 같다고 할까, 그것이 사실은 이문열의 실체이자 본심이다. 그의 부친은 그의 말대로 육이오 때 수원농업학교의 선생을 했으며 사회주의자였고, 전쟁 중 월북한 분이다. 말하자면 사상적 신념의 길을 선택한, 그래서 자식에게 영웅이라고 간주되는 공산주의자였다. 여기서 그의 부친인 이원철(李元喆)이 투철한 사회주의자였다거나 사상적으로 깊이가 있었고 실천의 일매진 길을 갔다거나 하는 것은 고려해야 할 사항이기는 하지만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이문열 자신의 부친에 대한 벋버스름한 생각이 어떻고 또 그로 인하여 자신의 세계관 형성에 어떤 영향을 받았는가 하는 점이다. 이것은 일종의 원리다. 어린 시절의 높은 산이 장성하여서 찾아 가 보니 자그마한 동산이었다라는 과거에 대한 준비된 착란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고, 작가 자신의 선택과 판단을 존중하자는 뜻이기도 하다. 나는 계속해서 오늘의 이문열이 가치 있으며 오늘과 반대되는 이문열은 가치가 없을지 모른다는 점을 강조해 두겠다.
그러니 우리 어찌 이문열이라는 그 이름 석자를 가벼이 대할 수 있으리오. 때로 리얼리즘의 공적(公敵)으로 치부되기도 하고, 때로 그 소설의 열기가 남한을 들뜨게 했었으니 그는 한국문학사에서 결코 가벼이 처리될 작가가 아니다. 그런 이문열이 왜 리얼리즘의 공적(公賊)으로 비판받아야 했는가는 모두 다 아는 바와 같다. '안티 이문열'과 같은 어휘가 성립할 정도이며 대중적 국민작가라는 별칭이 따라다니는 것은 그가 사회와 역사의 현실에 비켜서 있다는 뜻일 것이다. 그러니까 그는 역사와 현실을 생존의 처절한 현장으로는 인식하지만, 동시에 신기하며 환각적인 그 무엇으로 간주한다. 그래서 그는 '보수주의와 과거회상론자'로 낙인이 찍혀서 천형처럼 문학의 변방에서 신기한 장면을 연출한 작가로 더 알려져 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그가 '낭만적 상상력과 귀족적 과거지향'9)이라는 지점에서 출발했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 같다. 그리고 『영웅시대』라는 작품에서 보듯이 북으로 넘어간 아버지에 대한 깊은 회한을 이기지 못해서 자기 스스로 과거의 시간 속에 유폐(幽閉)시킨 유별난 작가다. 그 때문에 '그의 작품은 읽을만하지만 작가로서의 이문열은 부정적이고 문제적인 인물이다'라는 일반적 합의가 문단에서 통용되고 있지 않은가?
부정적 개념으로서의 이문열 현상은 개인의 문제를 넘어서 분단체제 한국사회 전체의 문제다. 이것은 일종의 역사가 제공한 원죄(原罪)이다. 즉, 구한말부터 민족주체의 자주를 가지지 못한 역사의 부채가 빚은 한마당이니까 말이다. 따라서 그는 분단체제 한국사회가 아니라면 설명되기 어려운 역사적 코드를 가지고 있다. 반대로 말하면 한국사회이기 때문에 소설과는 별개로 이문열 현상이 생겨난다고 해야 할 것 같다. 그는 가족사의 문제를 민족의 문제로 승화시킨 작가 중의 한 사람이며, 특이하게도 보수주의적 전망을 가지고 글도 쓰고 살기도 하는 문제적인 인물이다. 이 때문에 그는 화려하고 깊이 있는 문체와는 별개로 시대착오적 보수주의자로 종종 비판을 받는다. 그가 벌리는 과거와의 대결은 자신을 패배시키고 마침내 진보주의에 대한 원한에 이르는 길로 접어든다. 그런데 그는 어째서 자신이 보수주의자로 비판을 받는지조차 모르는 것이 더 안타깝다. 이런 경우에는 자신이 스스로 설명을 해야 한다. 그래야만 매듭이 풀린다. 문제는 타자와의 싸움이 아니며 자신과의 각다분한 싸움임을 이문열은 외면하지 말아야 한다. 그렇다면 그의 태도는 어떤가. 애써 오불관언(吾不關焉)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아니 오히려 그런 현상을 즐기고 적당한 지렛대로 이용하면서 웃고 있을 것이다. 작가에게 제일 무서운 것은 무관심이다. 아무도 자기 작품을 읽어 주지 않고 아무도 평해 주지 않으며 아무도 말하지 않는 것은 작가로서 견디기 힘든 형벌이다. 그래서 작가들은 종종 신중한 전략이나 기이한 형식으로 자신의 문학적 존재를 과시하며 문제를 일으키는 경우가 있다. 이문열은 변방에서 그런 전략을 구사한다. 작가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그 전략의 형식이자, 자신에 대한 자신의 복수가 바로 『영웅시대』라는 장편이다.
『영웅시대』란 무엇인가? 이 작품은 크게 가멸었던 영남 대지주 아들이면서 해방 직후 남로당계 공산주의자로 활동하다 월북하여 북한에서 사는 이동영과 그리고 남한에 남은 아내 조정인과 그의 자식들의 고난에 찬 삶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문열 자신의 부친을 형상화했다는 주인공은 사회주의에 대한 이상을 가지고 자기 삶을 던졌다가 현실체제 속에서 모순을 느끼고 좌절, 끝내 죽음을 맞게 된다. 작가의 자전적인 가족사에 기초하여 좌·우익 갈등의 문제를 형상화한 이 소설은 작가의 역사의식과 정치의식(이데올로기적 허무주의)이 적극 투영된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이처럼 『영웅시대』는 한 가족의 생존사를 남북전쟁 전후시기에서 서사화한 문제작이다. 나 개인적으로는 1982년 겨울에 아직 대구에 있던 이문열 선생을 만난 적은 있지만 당시 그가 그런 작품을 구상하거나 쓰고 있는 줄은 몰랐고, 다만 『사람의 아들』과 같은 작품만 인상적으로 논했던 기억이 새롭다. 그런 그는 아무래도 서울이 작품활동하기에 좋다고 판단했던지 서울로 이주를 했고 곧이어 『영웅시대』라는 문제작을 출간했다. 이 작품에서 그가 혐의를 받고 있는 것은 안동지역의 완고한 가부장제의식과 아버지에 대한 반사로서의 반공의식, 그리고 이것들이 함께 상승작용하여 만들어낸 이문열식의 과거지향의식 등이다. 그가 서울로 간 것은 현실을 인정하고 더 낳은 창작조건을 찾아간 것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내면적으로 권력에 대한 집착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앞에서도 말한 것처럼 그는 부유(浮遊)하는 방랑자의 기질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권력지향적이다. 지금까지 가슴 깊은 열등의식으로 가지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법권력을 추구하여 한동안 사법시험을 준비했음이 그것을 반증한다. 이것은 나쁜 것이 아니니 탓하지 말자. 다만 문학의 열정을 잠재우고서 전혀 다른 길을 선택할 수 있는 용기와 과단성에 주목하자.
문학에서의 그는 언제나 외로웠다. 자신이 인기 있는 작가라고 하지만 문학의 중심, 아마도 이문열은 배제와 분할이라고 일축하겠지만, 문학판에서는 늘 소외당해 있었다. 그는 아마도 외롭고 괴로웠을 것이다. 하지만 유아독존의 논리를 개발한 그는 외로움과 괴로움을 자신감과 일매진 이론으로 상쇄시키면서 나름대로 문학의 세계를 구축해 나간다. 실의와 소외는 영남인들에게 낯선 것이 아니다. 사람들은 모두들 시절을 원망하고 자신을 알아주지 않는 세상을 탓하지만, 영남의 남인들은 특히 소외를 극복하는 형식에 익숙하다. 그가 만약 방랑과 소외의 우울한 나날을 문(文)으로 극복하고자 했다면 분명히 이러한 영남 문인들의 전통과 무관하지 않다고 본다. 그가 스승으로 있는 '부악문원'이라는 사숙(私塾)에서는 주로 사서삼경과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등의 동·서양 고전철학을 학습한다. 그리고 글을 연마한다. 자신의 아카데미아를 만들어 두고서 자신이 이상적이라고 생각하는 방식으로 후진을 양성하겠다는 것이 그의 뜻이라고 한다. 어딘지 어색하지만 고전에 대한 절대적 믿음이 바로 그러한 방식을 낳게 했을 것이다. 이 역시 몰락한 영남 선비들의 생활사와 무관하지 않다. 때를 위하여 정중동하면서 독서와 수신으로 세상을 도모하리라는 숨은 뜻. 아기장수가 날개 돋기를 기다리고 준비하다가 날개가 돋으면 날아서 세상을 다스리겠다는 이 영웅주의. 이것은 이문열에게 주어진 선험적 환경이 아니라 이문열이 상상하는 하리들린 인문학의 세계다. 이렇게 말하면 지역적 특수성을 문학작품 해석에 인위적으로 붙여서, 지역주의를 강화하는 것으로 비칠 수도 있는데 그렇더라도 나는 사대부 가문의식과 소외당했던 영남문인의 전통이 그의 창작과 관계 있다고 말해 두겠다. 이것은 자기 출신 계층의 계급의식이 한 개인을 지배한다는 것과는 다르다. 중요한 것은 자신의 계급의식과는 별개로 어떤 세계관을 가지고자 했는가 하는 점이다. 그는 망설이지 않고, 아니 어쩔 수 없이, 비주류의 유랑인일 수밖에 없다.
이 사상적 유랑성의 산물이 바로 『영웅시대』다. 우선 영웅시대라는 영웅의 표제어가 의미심장하다. 그는 유독 영웅을 좋아한다. 또 다른 대표작 역시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이었다. 물론 이들 작품에서의 영웅은 절대권력자로서의 영웅을 뜻하는 것이 아니며 이문열이 그런 영웅을 지향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내면 깊이 뿌리박고 있는 영웅에 대한 특별한 지향의식은 간단히 접어 버릴 만큼 무의미하지는 않다. 영웅의식이 좋건 나쁘건 그의 내면에 큰 인력으로 작동되고 있음을 뜻한다. 그런데 이들 작품이 영웅적인 언행이나 영웅의 일생을 다루고 있지는 않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반대로 다른 사람들이 영웅이라고 믿고 싶어하는 특별한 사람의 심리나 상황을 다루고 있다. 영웅들이 되고자 망동하던 시절에 영웅들의 대서사에 짓밟힌 민중들의 삶을 역설적으로 표현한 것이 바로 『영웅시대』다.
요즈음 그는 무척 불편하다. 아마 그럴 것이다. 자기가 믿는 역사에 대한 신념이 가뭇없이 허물어져 가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말하면 그는 분명히 자신은 역사와 현실에 대한 편견이 없으며 오히려 누구보다 정확하게 시대를 읽고 역사를 이해한다고 말할 것이다. 바로 그 점이 이문열의 오류다. 우리는 이 기법과 재주에서 훌륭한 작가가 세계관의 결함으로 인하여 소설가적 실책은 물론이고 인간적 자책까지 범하는 것을 안타깝게 지켜보아야 했다. '내가 어디가 보수적이고 왜 과거지향적이며 어째서 패권옹호적인가?'라고 말한다면 그렇게 말하는 순간, '말 하나라도 그 사람의 이데올로기'10)라는 김현 선생이 내린 분석의 창이 절로 이문열의 가슴을 겨냥하게 된다. 그리고 어떻게 소설가이자 지식인이라는 사람이 지역적 패권주의를 숨지기 않고 공공연히 주장하면서, 그것을 비판하는 방패까지 미리 만들어 내보일 수 있는가? 그리고 어떻게 민족사의 순교자를 자처하고서 사람에 대한 믿음을 배반한 채 대중적 열망을 뽀쁄리즘으로 매도할 수 있는가? 이 모든 것은 1980년대나 2000대에 갑자기 생겨난 것이 아니라 1970년대 초반 그가 소설창작을 시작할 무렵부터 아니 그 이전부터 지니고 있던 한계였다. 무척 꺼림직하거니와 생래적으로 파시즘적이거나 신비주의적인 선험성이 있는 것은 아닌지--.
마지막으로 한마디. 이야기꾼 또는 작가 이문열이 <예술의 독자성과 자율성>을 주장했다는 점을 논의와 연관하여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믿는다. 항용 극우 보수주의자들은 자신이 얼마나 자유주의적이고 또 한때 극좌 이데올로기를 신봉했는가를 면죄부처럼 펼쳐 보인다, 예외 없이. 자신이 파시즘 신봉자이거나 극우가 아니라는 것을 애써 증명하는 안쓰러운 모습을 우리는 종종 만나게 되는데, 이문열은 일정한 논리와 뛰어난 감수성으로 그것을 은폐하고 있다. 다른 사람들의 경우 문학의 역사성이나 사회성에 대한 적개심을 엉뚱하게 자신이 겪어본 경험상, 믿을 만한 것이 못 되는 낡은 이데올로기라는 식으로 치부하면서 그런 것은 별 가치가 없고 영원한 예술이야말로 의미 있다는 경계 없는 황당의 지경을 오고간다. 그런 문인들이 추구하는 것은 독선과 영예를 동반한 카리스마다. 결국은 권력인 셈이다. 우리 주위에는 그런 문인들이 너무나 많다. 딱한 일이다. 이문열 역시 예외는 아니다. 그는 철저하게 자기세계라고 믿고 싶어하는 영역 속에서 카리스마를 추구한다. 황당무계의 말은 한심과 당황의 들판을 바잡게 달리고 있다. 이문열의 언행에서 그러한 애처로운 모습을 발견하는 것은 어쩌면 문학의 특권인지 모르니 우리가 오히려 감사해야 하는 것인가!11)
4.『겨울 골짜기』(김원일) - 선연한 노을빛
많은 사람들은 「노을」의 선연한 비극을 간직하고 있다. 진한 빨간 색의 무참한 비극, 그것이 바로 그의 대표작 중의 하나인 「노을」의 색깔이다. 그 작품에서 김원일은 민족의 비극을 민족 전체의 거대서사가 아닌 한 가족의 생존사와 마을의 수난사로 바꾸어 보여줌으로써, 민족문학사에 커다란 족적을 남겼음은 아는 바와 같다. 그가 그런 작품을 쓸 수 있었던 까닭에 대해서 인공치하에서 살았던 체험과 그 이후 독서를 통한 추체험의 힘이라고 말하는데, 너무나 묘사가 절절한 것은 특별히 새겨 둘 만한 의미라 하겠다. 나 개인적으로는 「노을」에서 형제가 겪는 고난과 고통을 묘사한 부분처럼 절절한 묘사는 아직 보지 못했다. 그것은 그만큼 작가의 형상성이 뛰어나다는 것을 뜻하면서 겪어보지 않고서는 쓸 수 없는 체험의 힘이라고 덧붙여 두고 싶다. 그런 체험의 힘과 추체험의 힘으로 소설을 쓰던 작가가 실제의 사실을 주목하기 시작했다. 오랫동안의 연재를 거쳐서 출간된 작품은 『겨울 골짜기』.
『겨울 골짜기』는 빨치산의 신원면 점령 직전 시점에서부터 시작해 이후 '거창양민학살사건'으로 알려지게 된 비극의 연원과 전개과정을 추적하고 있다. 소설은 산과 마을의 시점을 오가면서 서술되는데, 서사의 중심인물은 천우신조로 살아난 아기의 아버지 문한돌과 그의 동생이자 빨치산인 문한득이다. 유족회의 조사에 따르면 학살 피해자는 719명이다. 그 가운데 14세 이하의 어린이가 359명으로 절반을 차지하고 있으며, 61세 이상의 노인이 74명이었다. 성별로도 여자가 388명이나 되는데 '공비 협력자 187명을 군법회의에 넘겨 처형한 사건'이라는 당시 발표 내용 자체가 전쟁의 야만성을 잘 드러낸 처절한 사건이었음을 증명한다. 그리고 이를 조사하러 가던 국회의원들이 공비로 위장한 국군의 사격으로 철수하는 일까지 벌어져서 그야말로 이 사건은 전쟁의 틈새에 걸린 이상한 일로 부끄러운 오점을 남겼다. 역사에 따르면 1951년 2월 11일 신원면의 분지 안에서는 총성과 비명, 초연과 선혈이 뒤섞이고 교차하면서 아수라의 지옥을 연출한다. 국군 제11사단 9연대 3대대 병력들이 신원면 대현·중유·와룡리 주민 6백여 명을 집단 학살한 것이다. 남선(남한) 군인들이 여자와 어린아이, 노인이 포함된 비무장 양민을 '청소'한 까닭은 그들이 빨치산과 내통한 통비분자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국군의 주장은 사건 발생 두 달 전인 1950년 12월 5일 4,5백 명의 빨치산이 신원면 양지리의 분주소를 습격, 점령한 이후 다음해 2월 7일 국군이 신원면에 진주하기까지 이 지역을 장악하고 있었다는 사실에 근거를 두고 있다. 『겨울 골짜기』는 바로 이 안슬펐던 역사적 사건을 소설화한 작품이다.
소설이 상상이기는 하지만 그렇더라도 역사적 사실이 없다면 이 작품은 생산되지 못했을 것이다. 따라서 근원 사건을 어떻게 해석하느냐가 이 소설의 출발점인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나는 문득 이 소설과 황석영의 작품에 등장하는 베트남 '밀라이 학살 사건'의 상동성을 떠올렸다. 이 두 사건의 상동성은 학살이라는 어휘에 집중된다. 학살은 죽음과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다. 학살(虐殺)은 무고한 사람을 무참히 살해했다는 좀더 잔혹하고 부당한 의미를 함의한다. 그런데 두 학살은 전쟁상황이라는 논리에서 자행되었고, 은폐될 뻔했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갑자기 이문열이라면 어떻게 서술했을까라는 의문이 든다. 이문열 역시 학살이라고 했을 것인가, 아니면 그저 억울한 죽음이라고 했을 것인가?
김원일은 잘 알려진 것처럼 중후한 문체, 서술의 균형, 침착한 어조를 특징으로 하는 작가다. 화려하거나 감각적이지 않은 대신 탄탄한 서사성을 잘 살리는 훌륭한 기법을 가진 소설가다. 그렇다면 이 소설 역시 그의 창작방법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을 것이지만 그것만 가지고서 작품을 썼을 리는 없지 않은가. 다음과 같은 장면은 서사성을 넘어서서 사실성이 더 강력함을 증명한다.
"양편 주의주장을 믿다가 우리가 덕본 게 뭐가 있노. 늘쌍 협박 당하고 뺏기기만 했제."
"인제 어느 쪽이든지 찔러바치는 게 틀켰다 하모 마실에서 먼첨 덕석말이를 해서 요절을 내뿌려야 해."
마을사람들은 치를 떨며 그렇게들 말하였다.12)
이 대화에서 보듯이 이데올로기를 비켜 가는 방법은 리얼리즘이다. 좀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고, 또 전혀 역설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적어도 이 작품에서는 그렇다. 원래 묘사적 정확성으로서의 리얼리즘은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인 비판적 리얼리즘으로 이행했다가 사회주의적 전망을 실은 사회주의 리얼리즘으로 진행하게 된다. 그런데 이 작품을 규정하는 1980년대라는 보이지 않는 작가는 그러한 교조적 리얼리즘을 허용하지 않는다. 물론 이 경우에 희미한 동녘처럼 신 새벽을 전망하는 이데올로기적 작품이 생산될 수는 있다. 그러나 이 경우에는 독자인 대중들의 본능적 혐오감을 처리하기가 마땅치 않다. 그래서 작가는 자신의 서사주의를 십분 발휘하여 객관적 리얼리즘이라는 묘사의 각도를 설정했다. 이 때의 묘사는 그러니까, 1950년대 남한의 벽지마을을 인식하고 보는 각도와 거리를 뜻한다. 딱한 일이기는 하지만 1980년대가 규정하는 인식의 형식은 여전히 반공주의였으며, 당연히 '거창 양민 학살사건'의 표면화는 일종의 금기였다. 금기의 사실을 표면텍스트화하고자 할 때 작가는 당연히 창작의 각도와 형식에 대한 고민을 해야 하고, 그 고민의 악력(握力)이 사실에 대한 객관적 묘사라는 기술의 방법을 강제한다. 금기를 해제하는 창작방법은 묘사적 사실주의다. 이 때의 묘사적 사실주의란 역사적 사실에 대한 충실한 재현을 뜻한다. 그런데 사실에 대한 사실적 기록과 그를 바탕으로 한 상상력의 발휘는 생각보다 쉽지 않다. 사실을 사실로 표현하는 것은 역사의 잉그러짐 즉 굴절 현상이 강제되어 있기 때문이다. 유클리트 기하학의 직선은 굴절된 공간 속에서 곡선으로 휘어지는 원리와 같다. 1980년대까지의 남한 사회사는 반공이라는 역사의 확대경을 통과해야 하고 원한과 증오라는 창으로 투사(透寫)해야 한다. 당연히 역사적 사실을 쓸 때 이데올로기의 세례로 세척을 한 다음에 써야만 한다. 여기서 작가의 고민이 증폭된다. 따라서 작가는 굴절비율만큼 더 강한 반반공의식(ANTI-anti-communism)을 가질 때라야만 사실을 사실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 작가의 세계관과 창작방법론이 개입한다. 세계관이란 역사를 보는 눈이라고 소박하게 정의해 보고, 창작방법론이란 주제를 다루는 기법이라고 범박하게 규정해 보자. 역사적 사실을 사실로 다루는 것이 쉽지 않은 만큼에 비례하여 작가는 사회적 압력을 감당해야 한다. 그리하여 마침내 서사의 끝이야말로 새로운 시작이라는 정통의 기법을 작가는 택했다. 다음과 같이
문한돌씨네 가족이 옥계천에 걸린 나무다리를 막 건넜을 때였다. 뒤쪽 박산골짜기에서 요란한 총소리가 들렸다. 기관총을 쏘아대는지 연발로 쏟아지는 총소리가 오래오래 이어졌다. 한돌씨는 그 총소리에 진저리를 치며 뒤쪽을 후딱 돌아보다가, 아내가 가슴에 안고 있는 피로 뒤발한 저고리가 눈에 들어왔다. 아기의 모습은 저고리에 푹 싸여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어룽지는 눈물 앞에 핏덩이의 아기 모습이 우련하게 떠올랐다. 저 많은 죽음의 보상으로 이렇게도 모질게 세상에 한 목숨이 태어났는가. 그는 이제 핏줄을 이을 아들을 두었음에 그 어떤 보람이나 기쁨도 느낄 수가 없었다. 더운 눈물이 뺨을 적시며 흘러내렸으나, 복받쳐 터져 나오려는 울음조차 목이 메어 제대로 쏟을 수가 없었다.13)
신원리 사건을 신원(伸寃)하는 방법으로 작가는 아기의 탄생이라는 구조를 택했다. 과거의 죽음과 미래의 탄생이라는 이 상반되는 항력(抗力)에서 작가는 은유적으로 사건을 처리했다. <거창 양민학살 사건>이 일어나는 되뜬 과정과 원인 그리고 전개되는 상황을 사실과 상상으로 잘 그려냈지만 정작 사건에 대한 해석과 같은 미묘한 부분은 슬며시 비켜나간 셈이다. 이것은 작품의 한계(限界)라기보다는 시대의 한계라고 보아야 한다. 시대가 지시한 최대최소의 범주를 이탈하기는 어려운 것이니까 말이다. 민족의 비원을 해소하는 형식은 그렇기 때문에 적극적인 분단체제 극복의 의지로 이행하지 못했다. 이 점이 김원일의 문학사적 의미일 것인데, 민족분단을 서사화하기는 했지만 민족의 미래를 전망하지는 못했다는 비판을 피하기는 어려울 듯하다. 이것이 그가 가진 색채 감각으로서의 노을빛이다. 선연한 노을빛이 민족사의 언덕에 기울 때, 우리는 새 아기의 탄생처럼 동쪽 하늘을 바라보아야 하는 것.
5.민족의 서사가 지향하는 21세기의 형식
한 시대에는 한 시대의 문체가 있다. 주제 역시 그렇다. 형식 또한 그렇다. 분단이라는 역사의 주제를 민족의 관점에서 서술한 서사의 형식에 대한 탐구가 이 글의 첫번째 의도였다. 이 글에서 다룬 1980년대에 생산된 세 장편소설의 무게 비중은 같다. 황석영과 이문열과 김원일이라는 갈선 문단의 중진들이 각각 분단체제 한국을 보고 해석하는 내용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글의 밀도나 비중을 비롯한 형식상의 차이는 크지 않다. 그러나 그 유사성은 작품의 의미를 곧바로 규정하지는 않는다. 아니 오히려 미세한 유사성은 거대한 차별성을 예고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차별성을 이질성으로 치환해서는 안 된다. 형식의 유사성과 창작방법의 차별성은 1980년대적 다양성으로 읽혀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 세 작품을 지금의 독법으로 읽어서는 안 된다. 작품의 생산에는 작가의 창작방법론 외에 시대적 의미가 개입하게 마련이니까 말이다. 한 작품이 생산되는데 어떤 구조적 토대가 작용하고 있었는가는 매우 중요한 부분이다. 그러니까 작품이 생산된 문학환경을 제외하고 그 작품의 주제나 구조만을 분석하는 것은 아주 위험한 일이다. 작품 자체의 해석조차 어려울 수도 있다. 그래서 우리는 한 작품의 발생구조적 토대 속에서 해석자의 상상력과 정치한 분석력을 동원하여 시대 정신을 읽고 작가의 의도와 오류를 해석해야만 한다.
공간이동을 통한 거리와 시점의 낯설음을 통하여 미학적 의미를 확보한 황석영의 『무기의 그늘』, 가족사적 생존의 형식을 민족사적 의미로 치환시킨 이문열의 『영웅시대』, 역사적 사실을 사실로 재현하고자 사회적 압력을 돌파한 김원일의 『겨울골짜기』는 모두 1980년대 남한이 생산한 의미 있는 작품들이다. 대서사라고 할 수 있을지는 좀 생각해 보아야 할 것 같은데, 두 권이라는 일률적인 장편의 형식을 택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두 권 정도로 다루어져야 할 서사의 내용이라는 묵시적인 창작의 구상이 유사한 결과를 생산하기는 했지만, 그리고 그것은 합의는 아니지만, 꼭 그랬어야만 하는 보이지 않는 힘이 1980년대의 날연한 남한 사회에 존재했다고 생각한다. 이 때의 보이지 않는 힘은 반제 반봉건 친미 분단 반공이라는 코드를 뜻하고 그 해체의 역학구조를 의미한다. 시대가 풀어야 할 숙제인 분단체제의 극복이라는 명제를 제각각 해석한다고 했을 때, 이 모든 역사의 모순이 동시에 작동되는 총체성의 양상으로 내닫기 때문에 결국 작가는 대서사 양식을 택할 수밖에 없는 것.
그 힘이란 역사적 모순에 대한 항거의 힘이며, 사회적 압력에 대한 반동의 징표다. 1980년대에도 여전히 금기라고밖에 표현할 수 없는 대서사의 힘들이 남한 사회에 가득 차 있었다. 일찍이 최인훈이 『광장』에서 남북의 문제를 다룸으로써 금기의 벽을 허물기는 했지만, 벽 한 모롱이가 허물어진다고 해서 벽 전체가 무너진 것은 아니었다. 시간이라는 절대적인 물리력이 필요한 것이다. 그것은 켜켜이 쌓인 역사의 중층적 모순이 단시간에 해소되지 않음을 반증(反證)한다. 민중이 태동하는 1970년대를 지나 민주화의 어둠과 그늘이 교차하는 1980년대는 바로 그러한 전 시대의 역사적 압력에 대한 반동(反動)의 시대였다. 그 반동의 문학적 응전의 형식이 바로 이 세 작품이다. 순간적 지각인 시가 <조국은 하나다>라고 외쳤다면 역사적 전망의 소설은 민족분단의 생존을 서사화했던 것이다. 민족의 서사에 대한 작가의 방법이야말로 1980년대의 금자탑이 아닐 것인가라고 짐작해 본다. 그 금자탑에는 다음과 같은 문제들이 각인되어 있다. 미국이란 우리에게 무엇인가, 과거의 원한을 어떻게 해소할 것인가, 우리 가슴속 깊은 곳의 원죄의식이 얼마나 무서운가,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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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ference
1)1954년 생. 충북대 교수, 문학평론가. 『해방공간의 현실주의 문학연구』 외,
homepage http://web.chungbuk.ac.kr/~whan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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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백낙청, 『민족문학과 세계문학 2』, 창작과 비평사,1985. p.67.
4)강진호, "개인의 체험과 역사를 보는 타자의 시선-황석영의 오래된 정원을 중심으로", 『탈분단 시대의 문학논리』, 새미,2001. p.11.
5)강정구, "미국 패권주의와 동아시아적 대안, 베트남", 『황해문화』, 2002년 가을. p.73.
6)황석영, 『무기의 그늘 1』, 형성사,1985. p.123.
7)황석영, 『무기의 그늘 1』, 형성사,1985. p.130.
8)이문열, 『영웅시대』 2, 민음사,2001년 신장판 3쇄(1984년 초판), pp.729-730.
9)이동하, "낭만적 상상력의 세계인식", 『집 없는 시대의 문학』, 정음사,1985. p.24.
10)김현, "이문열의 작품세계 - 베끼기의 문학적 의미", 『제삼세대 한국문학』 - 이문열, 삼성출판사,1987. p.438.
11)김승환, "이문열 소론", http://web.chungbuk.ac.kr/~whan86/discuss7.htm 2003년 3월 10일.
12)김원일, 『겨울골짜기』 상, 민음사,1987. p.125.
13)김원일, 『겨울골짜기』 하, 민음사,1987. p.59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