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 잠언모음집
1. 신의 죽음과 인간의 과제
*신의 죽음
광인: 밝은 오전에 등불을 켜들고 광장에 달려나와 ‘나는 신을 찾는다! 나는 신을 찾는다!’라고 끊임없이 외치던 저 광인에 대해서 그대들은 들은 적이 없는가? 마침 광장에는 신을 믿지 않는 많은 사람들이 한데 모여 있어 그는 큰 웃음거리가 되었다. ‘신이 없어졌나 보지?’라고 어떤 사람은 말했고, ‘신이 어린 아이처럼 길을 잃었나보지?’라고 다른 사람은 말했다. ‘아니면 신이 숨어 있나보지?’ ‘신이 우리를 두려워하나 보지?’ ‘신이 항해를 떠났나?’ ‘아니면 신이 이민을 갔나?’라고 그들은 떠들썩하게 소리치며 비웃었다. 광인은 그들 한가운데로 뛰어 들어가 그들을 꿰뚫는 듯한 시선으로 노려보았다. ‘신이 어디로 갔느냐고?’ 그는 소리쳤다. ‘내가 그대들에게 말해주마! 우리가 신을 죽였다! 너희들과 내가 말이다. 우리 모두가 그의 살해자이다! 하지만 우리가 어떻게 그렇게 엄청난 일을 했을까? … 이 지구를 태양의 사슬로부터 풀어놓았을 때 우리는 무슨 일을 저질렀는가? 지구는 이제 어디로 움직이고 있는가?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모든 태양들로부터 멀어져 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계속 추락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뒤로, 옆으로, 앞으로, 모든 방향으로 말이다. 아직도 위와 아래가 존재하는가? 우리는 무한한 무를 통과하는 것처럼 방황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텅 빈 공간의 숨결이 우리를 감싸고 있는 것은 아닌지? 더 추워지지 않았는가? 더욱 더 칠흑 같은 밤이 계속되지 않을까? 밝은 오전에도 등불을 밝혀야 하지 않을까? 신을 파묻은 자들의 소란에 대해서 우리는 아직도 아무 것도 듣지 못하고 있는가? 우리는 아직도 신의 시체가 부패해 가는 냄새를 전혀 맡지 못하고 있는가?’ ...... 여기서 광인은 입을 다물고 청중들을 둘러보았다. 그들 역시 입을 다물고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마침내 그는 자신의 등불을 땅에 내동댕이쳤다. 등불은 산산조각이 나고 불은 꺼져 버렸다. ‘나는 너무 일찍 왔다.’ 그는 계속 말했다. ‘나의 때는 아직 오직 않았다. 이 엄청난 사건은 아직 도상(途上)에 있고 배회 중에 있다. 그것은 아직 인간의 귀에까지 도달하지 못했다. 번개와 천둥도 시간이 필요하다. 별빛도 시간이 있어야 한다. 행위들도 비록 이미 행해진 것이라도 보여지게 되고 들려지게 되기 위해서는 시간이 있어야 한다. 이 행위는 인간들에게는 아직도 가장 멀리 있는 별보다도 더욱 멀리 있다. 그런데 바로 그들 자신이 그것을 행한 것이다.’
소문에 의하면 그 광인은 그날 여러 곳의 교회에 뛰어들어 자신이 작곡한 ‘신의 영원진혼곡 Requiem aeternam deo’를 불렀다고 한다. 밖으로 끌려나와 심문을 받았을 때 그는 오직 다음과 같은 말만 계속했다고 한다. ‘만일 신의 무덤과 묘비가 아니라면 이 교회들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즐거운 지식)
2. 힘에의 의지
*신에 대한 믿음의 기원으로서의 의지의 박약함
신에 대한 믿음은 이제 ‘연약한’ 자들이 만들어낸 하나의 허구라는 사실이 드러났다. 그러면 그러한 믿음이 마련해준 위안과 보호 없이도 삶이 가능할 것인가?(반시대적 고찰)
*힘에의 의지야말로 가치의 기준이다.
나는 가르친다. - 약하게 하는 모든 것, 우리의 생을 고갈시키는 모든 것에 대한 부정을.
나는 가르친다. - 강하게 하는 것, 힘을 비축하는 것, 힘의 감정을 시인하는 모든 것에 대한 긍정을.
이러한 부정도 이러한 긍정도 지금까지 설파된 적은 없다. 사람들이 가르쳐 온 것은 덕, 무아(無我), 동정이며, 삶의 부정마저 역설되어 왔던 것이다. 이 모든 것들은 참다운 생을 다 소모해버린 사람들의 가치이다. ...
*힘에의 의지
모든 동물은 - 그러므로 철학적인 동물도 포함하여 - 그의 전력을 다하여 최고의 힘의 감정을 달성할 수 있는 최적의 유리한 상태를 추구하기 위해서 본능적으로 노력한다. 모든 동물은 본능을 통해서나 모든 이성을 초월하는 미묘한 분별력을 통하여, 최적상태에 이르는 통로를 막거나, 막을 수 있는 모든 종류의 방해자나 장애물을 혐오한다.(도덕의 계보)
* 행복은 감각적인 쾌락이 아니다.
쾌락주의건, 염세주의건, 공리주의건, 행복주의건 - 대체로 쾌감과 고통에 의해서, 즉 부수적인 상태나 부차적인 것에 의해서 사물의 가치를 재는 모든 사고법은 모두 소박한 초보적인 사고법이다. 적어도 창조력과 예술가적 양심을 갖고 있는 자는 그러한 사고법에 대해서 조소와 동정을 금할 수 없을 것이다. … 인간이 어떻게 왜소화되고 있는가, 그대들이 어떻게 인간을 왜소화시키고 있는가를 우리들은 본다! 이제 우리들은 그대들의 동정을 보고 표현할 수 없는 불안을 느낄 때가 있으며, 그대들의 동정에 대해서 몸을 지키고, 그대들의 진지함을 어떠한 경박성보다도 위험하다고 느낄 때가 있다. 그대들은 가능하다면 - 이처럼 어리석은 ‘가능하다면’이 없지만 - 괴로움을 아주 없애려고 한다. 그러나 우리들은? 우리들은 오히려 일찌기 없었던 고통을, 높고 나쁜 것을 바라고 있다! 그대들이 바라는 안락이라는 것은 우리들의 목표가 아니다. 그것은 우리들에게는 종말이라고 생각되는 것이다! 그것은 인간을 조소해야 할 것, 경멸해야 할 것으로 만드는 것이며, 인간은 그것에 의해서 자신의 몰락을 바라게 되는 것이다! 고통의 - 위해한 고통의 - 단련만이 이제까지 인간이 모든 향상을 창조했다는 사실을 그대들은 모르는가? 영혼의 강력함을 기르는 불행 속의 영혼의 저 긴장, 위대한 파멸을 눈 앞에 볼 때의 영혼의 전율, 불행을 걸머지고, 견디고, 해석하고, 이용하는 영혼의 독창성과 용맹성, 그리고 또한 일찌기 영혼에 보내진 깊이·비밀·가면·정신·간지·위대함의 모든 것,- 이들은 모두 괴로움을 통해서, 위대한 고통의 단련을 통해서 영혼에 보내진 것이 아니었던가?(선악의 피안)
* 디오니소스신과 힘에의 의지
저 위대한 은둔자들 속에 내재된 감성의 신, 유혹자인 신, 타고난 양심의 유혹자, 그의 소리는 모든 영혼의 맨 밑바닥까지 내려가는 법을 알고 있다. …
그는 조악한 영혼을 순화시키고 그러한 영혼의 소유자들로 하여금 새로운 갈망 을 맛보게 한다. … 이 감성의 신과 접한 모든 사람은 보다 풍요롭게 되어 그의 곁을 떠나게 되는데, 은총을 받거나 놀라운 충격을 받아서, 혹은 이국적인 물건에 의해 경외감을 갖게 되고 압도당해서 그렇게 된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차라리 그 자신 속에서 풍요로워지고, 자신에 대해서 전보다 더 새로워지고, 깨어져 열리고, 봄바람에 의해서 부풀리고 고무되고, 아마도 보다 더 불확실해지고 더 유연해지고 더 연약해지고 더 기가 죽게 되지만, 그러나 아직 구체적으로 무어라 말할 수 없는 희망과, 새로운 의지와 충일감으로 가득 차고, 새로운 불만과 저류로 가득 차고 - 그런데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 중인가, 나의 친구들이여.
... 그는 다름 아닌 디오니소스 신이다.(선악의 피안)
* 자기지배와 힘에의 의지
가장 필요한 연마 - 작은 일에 자제할 수 없다면 큰 일에 자제할 수 있는 능력도 상실된다. 적어도 한 번이라도 무엇인가 하찮은 일을 단념하지 않은 하루는 실패한 날이라고 할 수 있으며 다음 날은 위험한 날이다. 만일 자신이 지배자라는 기쁨을 지속적으로 누리고자 한다면 이와 같은 연마는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가장 고독하고 가장 은폐되고 가장 초연한 인간, 선악을 넘어서 있는 인간, 자신의 덕성을 지배할 수 있는 인간, 의지로 넘치는 인간, 이러한 인간을 가장 위대한 인간이라고 할 수 있다. 전체적이면서 다양하고 풍부하면서 폭 넓게 될 수 있는 능력, 바로 이것이야말로 위대함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선악의 피안)
네로와 칼리큘라가 왕좌에 앉아 있었을 때 최하의 인간이 정상에 있는 인간보다 가치있다는 역설이 생겨나게 되었다.(안티크리스트)
오직 타락한 자들만이 파괴, 거세, ‘그리고 여타의 그와 같은 폭력적 수단들’을 불가피한 것으로... ‘간주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절도를 지키기에는 너무나도 의지가 박약하기 때문이다.(우상의 황혼)
독일인은 위대성이 가혹과 잔인함을 통해서만 나타난다고 생각한다. 그런 경우에는 그들은 경탄해 마지않으면서 기꺼이 복종하는 것이다. 온화와 평정 속에 위대함이 있다는 것을 그들은 쉽게 믿지 못한다. 그들은 괴테에게서 위대함을 찾아내지 못하고, 베토벤이 훨씬 더 위대한 존재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어처구니없는 착각이다!(서광)
*힘에의 의지
감각과 정신은 도구이며 장난감이다. 그것들 뒤에는 여전히 자기(das Selbst)가 있다. 자기는 감각의 눈으로 찾고, 정신의 귀로도 듣는다. 자기는 항상 들으며 찾는다. 그것은 비교하고, 강요하고, 정복하고, 파괴한다. 그것은 지배하며, 또한 자아의 지배자이다. 그대의 사상과 감정 뒤에, 나의 형제여, 강한 명령자, 알려지지 않은 현자가 있다. 그것이 자기라고 일컬어진다. 그것은 그대의 몸 속에 살고, 그것은 그대의 몸이다.(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나의 형제여, 그대가 ‘정신’이라고 부르는 그대의 작은 이성도 몸의 도구, 즉 그대의 커다란 이성의 작은 도구이며 그것의 장난감에 불과하다.(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 헷세의 시에서 나타난 ‘힘에의 의지의 사상’
단계
모든 꽃이 시들듯이
청춘이 나이에 굴하듯이
일생의 모든 시기와 지혜와 덕망도
그때 그때에 꽃이 피는 것이며
영원히 계속될 수는 없다.
생의 외침을 들을 때마다 마음은
용감히 서로워하지 않고
새로이 다른 속박으로 들어가듯이
이별과 재출발의 각오를 해야 한다.
대개 무슨 일이나 처음에는 이상한 힘이 깃들어 있다.
그것이 우리를 지키며 사는 데 도움이 되는 것이다.
우리는 공간을 명랑하게 하나씩 거닐어야 한다.
어디서나 고향에 대해서와 같은 집착을 느껴서는 안된다.
우리의 정신은 우리를 구속하려 하지 않고,
우리를 한 단계 씩 높여주며 넓혀주려고 한다.
우리 생활권에 뿌리를 박고
정답게 들어 살면 탄력을 잃기가 쉽다.
여행을 떠날 각오가 되어 있는 사람만이
습관의 마비작용에서 벗어나리라.
죽을 때 아마 다시 우리를 새로운 공간으로 돌려보내서
젊게 꽃피워 줄는지도 모른다.
우리를 부르는 생의 외침은 결코 그치는 일이 없으리라....
그러면 좋아, 마음이여, 작별을 고하고
편히 있으라.1)
헷세는 우리를 부르는 생의 외침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니이체가 말하는 힘에의 의지는 그렇게 우리를 끊임없이 자기고양에의 길로 밀어대는 생의 외침이다. 힘에의 의지가 명하는 대로 우리는 항상 자신이 그때그때 도달한 단계를 미련 없이 명랑하게 뛰어넘어야 한다.
* 초인은 사자 같은 어린애다.
어떻게 정신이 낙타가 되고, 낙타는 사자가 되며, 드디어 사자는 아이가 되는 것인지, 나는 이 정신의 세 단계 변화를 그대들에게 말하고자 한다. ··· 무엇이 무거운가? 억센 정신은 이렇게 묻고, 낙타처럼 무릎을 꿇고 짐을 잔뜩 짊어지고자 한다. ··· 억센 정신은 이 가장 어려운 것들을 스스로 걸머진다. 이리하여 짐을 짊어지고 사막을 달려가는 낙타와 같이 그는 자기의 사막으로 달려간다. 그러나, 고독한 사막에 이르면 두번째의 변화가 일어난다. 여기에서 정신은 사자가 되고, 그는 자기만이 있는 사막에서 자유를 군주로 추대하고자 한다. ··· 승리를 쟁취하고자 그는 크나큰 용과 겨룬다. 정신이 더 이상 군주나 신이라고 부르지 않을 커다란 용은 어떤 것인가? 크나큰 용이란 ‘그대는 마땅히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사자의 정신은 ‘나는 원한다’라고 말한다. ···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는 것 - 그것은 사자라도 감히 할 수 없다. 그러나 새로운 창조를 위하여 자유를 창조하는 것 - 그것은 사자라도 감히 할 수 있다. 나의 형제들이여, 스스로 자유를 창조하여 의무에 대하여 신성한 거절을 하기 위하여 사자가 필요한 것이다. ··· 사자도 감히 할 수 없는 것을 아이가 능히 할 수 있는가? 어찌하여 약탈하는 사자는 또한 아이가 되어야만 하는가? 아이는 순결이요, 망각이며 새 출발이고 유희이며 스스로 돌아가는 바퀴요, 최초의 운동이며 신성한 긍정이다.(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 영원불변한 고정된 실체로서의 영혼에 대한 믿음은 문법적인 착각에서 비롯된 것이다.
과거의 사람들은 문법과 문법적 주어를 믿듯 ‘영혼’을 믿었다. 그래서 그들은 ‘나’는 제약자이고 ‘생각한다’는 술어이자 피제약자라고 생각했으며, 생각한다는 행위에는 생각하는 주체가 그 생각의 원인으로서 반드시 존재한다고 믿었다.
이제 사람들은 놀라운 끈기와 간계를 가지고 그 올가미에서 빠져나오려고 한다. 그리고 스스로에게 묻는다. 오히려 그 반대, 즉 ‘생각한다’가 제약자이며 ‘나’는 피제약자라는 것이 오히려 진실이 아닌가라고. 그럴 경우, ‘나’는 생각에 의해서 ‘만들어진’ 파생물에 불과하다.(선악의 피안)
*자기극복의 과정은 끝이 없다.
아무리 훌륭한 것이라도 역시 구토를 일으키는 것 같은 것이 아직 달라붙어 있다. 최상의 인간일지라도 아직 극복되어야 할 존재인 것이다!(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 인간은 초극되어져야만 하는 그 무엇이다.
나는 그대들에게 초인을 가르친다. 인간은 초극되어져야만 하는 그 무엇이다. 그대들은 인간을 극복하기 위하여 무엇을 했는가?
지금까지 모든 존재자는 자기 자신을 능가하는 무엇인가를 창조해 왔다. 그대들은 이 위대한 조수(潮水)의 썰물이 되길 원하며 인간을 초극하기보다 오히려 동물로 되돌아가고자 하는가?
인간에게 원숭이란 어떤 존재인가? 하나의 웃음거리 혹은 하나의 참기 어려운 수치가 아닌가? 그리고 초인에게는 인간 또한 그러한 존재이다. 하나의 웃음거리 혹은 참기 어려운 수치인 것이다.
그대들은 벌레로부터 인간에로의 길을 걸어왔으나, 아직도 그대들은 많은 점에서 벌레이다. 그대들은 예전에 원숭이었고 지금도 인간은 어떤 원숭이보다 더한 원숭이다.(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위대한 인간은 필연적으로 모든 일에 회의를 품는 사람이다. 모든 종류의 확신에 사로잡히지 않는 자유로움이, 그의 의지의 강함에 포함되어 있다. 신념을 갖기를 바라는 일, 긍정에 있어서건 부정에 있어서건 어떻든 무언가 무조건적인 것을 바라는 일은 약한 마음의 증명이다. 그런데 모든 약한 마음은 의지의 약함인 것이다. 신념에 가득 찬 사람은 필연적으로 나약한 인간인 것이다. 따라서 ‘정신의 자유’, 다시 말해서 본능으로서의 불신은 바로 위대함의 전제이다.(힘에의 의지)
나는 인간이 아니라 다어너마이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종교의 교조 같은 것이 되고자 하지 않는다. 여러 가지 종교는 천민의 일인 것이다. 종교적 인간과 접촉한 뒤에는 나는 어쩔 수 없이 손을 씻게 된다.(이 사람을 보라)
*자기극복이란 본능과 충동을 억압하고 근절시키는 것이 아니라 승화시키는 것이다.
어떤 종전에는 사람들이 정념에 내재된 그 우매함 때문에 바로 정념 그 자체와 투쟁을 벌인 적인 있었다. 사람들은 손을 잡고 정념을 근절시키려고 했던 것이다. 과거의 모든 괴물, 도덕가들은 하나같이 ‘정념을 죽여야 한다’는 점에서 의견을 같이 했다. ... 단순히 우매함과 달갑잖은 결과를 방지하기 위해서 정념과 욕망을 근절해 버린다는 것은 오늘날 우리에게는 그 자체가 하나의 심한 우매함으로 보인다. 통증을 중단시키기 위해서 이빨을 뽑아버리는 치과의사들을 우리는 이제 존경하지 않는다. ... 한편으로 보면, 기독교가 성장해온 토양에서는 도저히 ‘정념의 정신화’가 배태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마땅할 것이다. 왜냐하면 잘 알려져 있다시피 초대교회에서는, ‘마음의 가난’을 위해서 ‘지성’과 대항하여 싸웠던 적이 있으니 말이다. 거기서 어떻게 정념에 대한 지능적인 싸움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 교회는 정념을 제거하고자 한다. 교회가 시행하고 있는 그 ‘치료법’이라는 것도 거세법이다. 교회는 결코 ‘우리는 어떻게 하나의 욕망을 정신화하고, 미화하고, 신성하게 할 수 있는가?’라고 묻지 않는다. 교회는 어느 시대에나 계율의 주안점을 근절에(관능의, 교만의, 권력욕의, 탐욕의, 복수심의 근절에) 두어왔다. - 그러나 정념을 그 뿌리로부터 공격한다는 것은 삶을 그 뿌리로부터 공격한다는 것과 같다. 따라서 교회가 행하고 있는 것은 삶에 적대적인 것이다. (우상의 황혼)
관능의 정신화는 사랑이라고 일컬어진다. 이것은 기독교에 대한 하나의 커다란 승리라고 할 수 있다. 또 하나의 승리는 적의(敵意)의 정신화이다. 이 승리는 적을 가진다는 것의 가치를 깊이 인식하고 있다는 데에 있다. … 교회는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자신의 적을 파멸시키고 싶어했다. 우리들 부도덕자들이나, 반기독교인들은, 교회의 존재가 우리들에게 이롭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 정치의 세계에서도 적의는 훨씬 정신적인 것이 되었고, 훨씬 신중하고, 훨씬 사려깊고, 훨씬 참을성 있는 것이 되었다. 어느 당파든 반대당의 세력을 쇠퇴시키지 않는다는 것이 이편의 보존에 유리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우상의 황혼)
* 적의의 정신화
적과 대등하다는 것 - 이것이 대개 성실한 결투의 첫째 전제다. 상대방을 얕보고 있는 경우, 전쟁은 할 수 없다. 명령을 하는 것 같은 경우, 무언가를 내려다보고 있는 것 같은 경우에는 전쟁을 할 것까지도 없다.
나의 병법은 네 개의 조항으로 요약된다.
첫째, 나는 승리를 뽐내고 있는 것 같은 일에만 공격을 가한다. - 사정에 따라서는 그것이 승리를 뽐내기까지 기다린다.
둘째, 나는 동맹자를 찾아 낼 수도 없을 성싶은 일에 대해서만, 고군분투하게 될 것 같고, 나만을 위험에 부딪히게 할 성싶은 일에 대해서만 공격한다. 나 자신을 위험에 직면하게 하지 않는 것 같은 일은 나는 공적으로는 한 번도 한 적이 없다. 이것이 올바른 행위라는 것에 대한 나의 기준이다.
세째, 나는 결코 개인을 공격하지 않는다. 나는 일반적이면서도 기어다니고 있어서 붙잡기 어려운 것을 눈으로 볼 수 있게 하는 일종의 도수가 높은 확대경으로서 개인을 사용할 뿐이다.
네째, … 그 뿐 아니라 공격을 가하는 일은 내 경우에는 호의의 하나의 징표이며, 때로는 감사의 징표다. 내 이름을 어떤 일과 어떤 이름과 결부시킴으로써 나는 적의를 나타내며 표창하는 것이다.(이 사람을 보라)
네 가지 훌륭한 태도. 우리 자신과 친구에게는 정직하게, 적에게는 용감하게, 피정복자에게는 관대하고 언제나 예의바르게, 이것이 우리가 따라야 할 네 가지 주요한 미덕들이다.(서광)
* 이원론적 사고방식은 허약한 의지력에서 비롯된 것이다.
거세라든가 근절과 같은 것은 너무 의지가 박약하고 너무 퇴락하여 도저히 절도를 지킬 수 없는 사람들이 욕망에 대항하여 싸우느라고 본능적으로 선택하는 수단이다. ... 그러한 극단적인 수단을 불가피하게 동원하는 사람들은 퇴락한 사람들 뿐이다. 또한 의지박약, 좀 더 정확하게 말해서, 자극에 대해서 반응하지 않을 수도 있는 능력의 결여도 그 자체가 또 다른 형태의 퇴락에 불과하다. ... 성직자와 철학자들의 역사, 그리고 예술가들의 역사를 조사해 보라. 관능에 대한 가장 극심한 독설들은 노쇠자들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었고 금욕자들로부터 나온 것도 아니었으며 금욕자가 될 수 없었던 자들, 그리고 금욕자가 될 필요가 있었던 자들로부터 나온 것들이었다.(우상의 황혼)
3. 예술에 대해서
예술, 나아가 예술 이외의 아무 것도 없다! 예술은 삶을 가능하게 하는 위대한 형성자요, 삶에의 위대한 유혹자요, 삶의 위대한 자극제이다.(힘에의 의지)
예술은 진리보다도 더 한층 가치가 있다.(힘에의 의지)
다만 미학적 현상으로서만 세계와 인간의 실존은 영원히 정당화된다.(비극의 탄생)
진리는 추악하다. 진리 때문에 망하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예술을 갖는 것이다.(힘에의 의지)
그리스 비극예술의 본질은 아폴론적인 성격과 디오니소스적인 성격의 종합이다.
4. 도덕에 대해서
* 주인도덕과 노예도덕
이 첫 번째 유형의 도덕(주인도덕)에서는 ‘선’과 ‘악’의 대립은 대체로 ‘고귀함’과 ‘비천함’의 대립을 의미한다. … 고귀한 인간들은 겁많은 인간, 전전긍긍하는 인간, 소심한 인간, 눈앞의 이익에만 급급한 인간, 편협하고 의심많은 인간, 비굴한 인간, 학대를 감수하는 개 같은 인간, 거지 같은 아첨꾼, 그리고 특히 거짓말장이 등을 경멸한다. 평민들은 거짓말장이라는 것이 모든 귀족들의 근본신조이다. 고대 그리이스의 귀족들은 자신들을 지칭할 때, ‘우리 진실한 인간들’이라는 식의 말투를 사용했다. …
두 번째 유형의 도덕인 노예도덕은 (주인도덕과) 다르다. 학대받고 억압받고 고통당하고 부자유하며 자신에 대해서 확신을 갖지 못하며 피곤한 자가 도덕을 운위한다고 가정해 보자. … 그는 강자들의 행복은 진정한 행복이 아니라고 믿고 싶어한다. 반면에 고통받는 자들의 괴로움을 조금이라고 덜어주는 것들이 각광을 받고 찬양을 받게 된다. 따라서 여기서 존중되는 것은 연민, 자비롭고 친절한 손길, 온정, 인내심, 근면성, 겸손함, 친밀함 등이다. 왜냐하면 이런 것들은 괴로운 삶을 견뎌나가는 데 도움이 되는 것이며 또한 그 유일한 수단이 되기도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노예도덕은 본질적으로 유용성에 입각한 도덕이다.
저 유명한 ‘선’과 ‘악’의 대립개념의 기원이 바로 여기에 있다. 노예의 느낌 속에서 권력, 위협적인 것, 공포를 느끼게 하는 것, 세련된 것, 무시할 수 없는 강력한 힘 등은 모두 악한 것으로 비친다. 그러므로 노예도덕에 따르면 ‘악한’ 인간이란 공포감을 불러일으키는 인간이다. 그러나 주인도덕에서는 공포를 불러일으키거나 그러한 의도를 가진 사람이 바로 ‘선한’ 인간이며 반면에 경멸감을 불러일으키는 인간은 ‘악한’ 인간이 된다.(선악의 피안)
* 노예도덕의 실체
보복할 수 없는 무력함은 ‘선량’으로 바뀌고, 겁 많은 비열은 ‘겸허’로 바뀌며, 증오하는 상대에 대한 복종은 ‘순종’(자세히 말하면 이러한 복종을 명령하는 자에 대한 복종, 이 자를 그들은 신이라고 부른다)고 바뀌어집니다. 약자의 비공격성, 그들이 풍부하게 지니고 있는 비겁 그 자체, ‘문전에서’ 서성거리며 어쩔 수 없이 기다리는 것 - 이러한 것들이 여기서는 인내라는 발림말로 불리우고 심지어는 덕 그 자체로 불리워집니다. 복수할 수 없음이 복수하고자 하지 않는 것이 되고 아마도 관용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합니다.(도덕의 계보)
마음씨가 착하고 아주 주눅이 든 인간이 호인이라는 관념은 사실은 힘의 저하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한 호인은 겁먹은 소심한 성품 때문에 자신을 억제하고 있다.(힘에의 의지)
5. 정치에 대해서
* 귀족주의적인 계층사회가 이상적이다.
지금까지 이 ‘인간’이라는 종이 향상되어 온 것은 귀족 사회의 소산이었으며 앞으로도 또한 그럴 것이다. 이 귀족 사회는, 인간과 인간 사이에는 가치의 차이와 많은 등급의 계급 서열이 존재한다는 것을 믿으며, 어떠한 의미에서든 노예 제도를 필요로 하고 있다. 각 계층 간에 뿌리 깊은 차이가 존재할 때, 그리고 지배계급이 항시 예속자들과 도구들을 경원하고 경멸하며 복종과 명령, 억압과 경원이 일반화될 때 거리의 파토스가 싹트게 되는데 이것이 없다면 또다른 보다 신비한 파토스 역시 자라날 수 없었을 것이다. 즉 영혼 그 자체 안에서의 간격을 새로이 확장하려는 끊임 없는 갈망, 보다 높고, 보다 희귀하며, 보다 특이하고, 보다 넓으며, 보다 포괄적인 상태로의 발전은 기대할 수 없다. 좀더 간단히 얘기한다면 ‘인간’이란 종의 향상, 지속적인 ‘인간의 자기초극’ - 초도덕적인 의미의 도덕적 공식을 빌려서 말한다면 -은 기대할 수가 없는 것이다.(선악의 피안)
6. 영원회귀사상
*영원회귀사상
모든 것은 가고 모든 것은 되돌아온다. 존재의 수레바퀴는 영원히 굴러간다. 모든 것은 죽고 모든 것은 다시 꽃핀다. 존재의 연령은 영원하다.
모든 것은 부서지고 모든 것은 새로 결합된다. 존재의 동일한 집은 영원히 재건되어진다. 모든 것은 헤어지고 다시 서로 만난다. 존재의 원환은 영원히 자신에 충실하게 회전한다.
매순간에 존재는 시작된다. ...... 중심은 도처에 있다.(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생성에 존재의 성격을 각인하는 것 - 이것이 힘에의 의지의 최고형태이다... 모든 것이 회귀한다는 것은 존재의 세계에 생성의 세계가 극한적으로 접근한 것이다.(힘에의 의지)
인간의 위대함을 나타내는 데에 있어서 내가 택한 방식은 운명애이다. 앞을 향해서도 뒤를 향해서도 모든 영원에 걸쳐서 하나도 변경을 요구하지 않는 일. 필연적으로 닥쳐오는 일을 은폐하지 않고 견딜 뿐 아니라 사랑하는 일.(이 사람을 보라)
* 운명애와 괴테
괴테에게는 일종의 거의 환희에 차있고 신뢰에 넘치는 숙명론이 있다. 그러한 숙명론은 반항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하여 맥없이 늘어져 있지도 않으며 자신을 하나의 전체로 형성하려는 숙명론이다. 그것은 전체성(Totalität) 안에서 비로소 모든 것은 구원되며 좋고 정당한 것으로서 나타난다는 믿음에 입각해 있다.(힘에의 의지)
괴테를 잠깐 만나 얘기를 나눈 그 노련한 외교관은 자기 친구에게 “그는 큰 슬픔을 견디어 온 사람이다”라고 말했다. - 괴테는 이 말을 “그는 괴로움과 쓰라림을 겪은 사람이기도 하다”라고 번역했지만 덧붙여 이렇게 말하고 있다.
“만일 우리들의 얼굴에 우리가 겪어온 슬픔과 지난날의 활동의 자취가 가시지 않는다면, 우리들의 노력이 남긴 모든 것에도 그와 같은 자국이 남아 있더라도 이상할 것은 없다”고.
그리고 이것이 우리나라의 ‘교양 있는 속물’들이 제일 행복한 독일인이라고 지적하는 괴테인 것이다.(반시대적 고찰)
7. 초인에 대해서
*초인은 비인간이면서 초인이다.
인간은 비동물(Untier)이면서 초동물(Übertier)이다. 상위의 인간은 비인간(Unmensch)이면서 초인(Übermensch)이다. 양자[비인간이면서 초인이라는 것]는 공속한다. 인간이 위대해지고 고양되면서 그는 또한 더 깊이를 갖고 두려운 존재가 된다. (이러한 사실의) 한 측면을 원하지 않으면서 다른 측면을 원해서는 안된다. 오히려 한 측면을 보다 철저하게 원하면 원할수록 그 만큼 철저하게 사람들은 다른 측면을 달성하게 되는 것이다.(힘에의 의지)
인간이 크기와 높이로 성장함에 따라서 그는 또한 깊이와 두려움을 일으키는 자(das Furchtbare)로서 성장한다.(유고)
우리가 ‘보다 높은 문화’라고 부르는 것은 잔인함의 정신화와 심화에 근거하고 있다.(선악의 피안)
* 초인은 그리스도의 영혼을 갖는 캐자르다.
그리스도의 영혼을 갖는 캐자르(힘에의 의지)
뜨거운 심정과 냉엄한 머리, 이들이 맞서는 곳에 광풍이 일어난다. 즉 ‘구세주’가 나타난다.(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권력이 자비로와져서 고개를 숙일 때, 나는 그러한 겸손함을 아름다움이라고 부른다. 나는 다른 사람이 아닌 당신과 같이 강한 사람에게서 가장 많은 아름다움을 원한다.(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 초인은 하나의 바다다.
진실로 인간은 더러운 강이다. 사람이 불순하게 되지 않고, 더러운 흐름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하나의 바다가 되어야 한다.
들어라, 나는 그대들에게 초인을 가르친다. 초인은 바로 이 바다다. 그 속에서만 그대들의 커다란 경멸은 몰락할 수 있을 것이다.(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 초인과 아리스토텔스의 ‘긍지에 찬 사람’
사람들은 니이체가 말하는 초인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궁금해 한다. 나는 니이체가 말하는 초인은 ‘고귀한 인간’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니이체가 고귀한 인간에 대해서 말할 때 우리는 자연히 아리스토텔레스가 ‘긍지에 찬 인간’에 대해서 묘사한 것을 상기하게 된다. ‘긍지에 찬 인간’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묘사는 니이체 말하는 고귀한 인간 내지 초인상을 생생하게 그려내고 있다고 생각하기에 여기에 약간 길게 소개하고자 한다.
<‘긍지에 찬 인간’은 자신이 고귀하고 탁월한 가치를 갖는 인간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며 사실 그렇게 고귀한 가치를 갖는 인간이다. 이에 대해서 고귀한 가치도 없으면서 자신이 그러한 가치를 갖는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교만한 사람이며, 자신이 실제로 갖는 가치보다 자신이 더 작은 가치를 갖는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비굴한 사람이다. 그리고 별로 탁월하지 않은 사람이 자신을 탁월하지 않은 인간으로 인정하는 경우에 그는 겸손한 사람이지만 긍지가 있는 사람은 아니다. 왜냐하면 긍지에는 위대한 태도가 속하기 때문이다.
긍지에 찬 인간이 위험 앞에서 두 팔을 내저으면서 정신없이 도망치는 것이나 도둑질과 같은 불의를 행하는 것은 어울리지 않는다. 그의 고귀한 품격이 그러한 짓을 허용하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긍지는 모든 덕을 고귀하게 장식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모든 덕에게 보다 위대한 형식을 부여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그러한 덕들 없이는 생겨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긍지를 갖는 인간이 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이를 위해서는 자신의 인격을 고상하고 완전하게 도야하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이다.
긍지에 찬 사람은 자신이 가장 고귀한 것에 상응하는 가치를 갖는다고 생각하기에 그에게는 외적인 선들 중에서는 오직 하나만이 관심의 대상이 된다. 그것은 바로 명예이다. 그는 훌륭한 사람들이 내리는 커다란 명예는 그에게 합당하거나 아니면 (그가 받아야 할 것에) 미치지 못하기 때문에 흔연히 받아들일 것이다. 미치지 못한다고 하는 것은 최고의 탁월성을 갖춘 인간에게는 그에게 합당한 명예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는 사람들이 그 이상으로 더 가치 있는 것을 그에게 줄 수 없기 때문에 그들이 주는 명예를 받기는 할 것이다. 이에 대해서 만일 무가치한 인간들이 사소한 이유로 주는 명예라면 그는 그것을 전연 멸시하는 태도로 대할 것이다. 그것은 그의 진가에 합당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의 명예를 손상시키려 하려는 행위에 대해서도 그는 똑같이 경멸하는 태도를 취할 것이다. 그것은 그에게는 근거 없는 모욕에 불과한 것이기 때문이다.
긍지에 차 있는 인간은 이렇게 명예에 관심을 갖지만 그는 부, 권력 그리고 어떠한 종류의 성공과 실패에 대해서도 그는 자신의 고귀한 품격에 적합하게 태도를 취할 것이다. 성공했다고 해도 그는 지나치게 기뻐하지 않을 것이며 실패했다고 해도 지나치게 슬퍼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사실은 명예조차도 사소한 것이기 때문이다. 남들의 인정을 받고 안 받고에 좌우되는 것을, 다시 말해서 명예의 노예가 되는 것을 그의 고귀한 품격이 허용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명예를 획득하기 위해서 권력이나 부를 추구하지만, 이 명예조차도 사소한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다른 모든 것들은 어떠한 가치도 갖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교만하게 보인다.
그는 삶에 필수적이거나 중요하지 않은 것을 갖고 있지 않다고 해서 한탄하거나 다른 사람들의 도움을 요청하지 않는다. 그러한 태도는 자신이 그러한 것을 중요시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이익을 가져다주는 것보다는 어떠한 이익도 가져다주지 않을지라도 아름다운 것을 택한다. 왜냐하면 바로 그러한 태도가 내적으로 자족하는 인간에게 합당하기 때문이다.
긍지에 찬 인간은 약간의 일밖에 자신의 고귀함에 상응하는 것으로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사소한 일 때문에 위험에 뛰어든다든지 위험 자체를 좋아하는 사람은 아니지만, 위대한 것을 위해서라면 위험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다. 그는 생존한다는 것을 절대적인 가치로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기에 위험에 뛰어들지 않으면 안될 때에는 생명을 아끼지 않는다. 그리고 그는 사람들이 명예를 겨루는 경우에나 다른 사람들이 최우위를 점하고 있는 경우에는 뛰어들지 않으며 높은 명예나 위대한 명분이 걸려 있는 경우가 아니면 조용히 지켜보는 자세를 취한다. 그는 좀처럼 어떤 일에 착수하지 않지만, 한다면 위대한 일을 행한다.
그는 다른 사람들에게 혜택을 주는 것을 좋아하며 그 자신이 혜택을 입을 때는 수치스럽게 생각한다. 왜냐하면 혜택을 준다는 것은 우월한 인간에 적합한 것이며 혜택을 받는 것은 열등한 인간에 적합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가 혜택을 입을 때 그는 더욱 많은 것을 가지고 보답한다. 이를 통해서 원래 혜택을 준 사람이 오히려 혜택을 더 많이 받은 것이 되고 그에게 빚을 진 셈이 되기 때문이다. 긍지에 찬 인간은 자신은 전혀 또는 거의 남의 도움을 청하지 않으면서도 기꺼이 다른 사람들을 돕는다.
긍지에 찬 인간은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나 부유한 사람들에게는 위엄 있는 태도를 취하지만 보통 사람들에게는 겸손한 태도를 취한다. 이는 전자에게 우월한 태도를 갖는다는 것은 곤란하며 당당한 일인 데 반해서 후자에게 우월한 태도를 갖는다는 것은 용이하기 때문이며, 전자에게 당당한 태도를 취하는 것은 천하지 않은 데 반해서 하층 사람들에게 그러한 태도를 취하는 것은 마치 약한 사람들에게 완력을 쓰는 것처럼 천하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증오와 사랑을 공공연히 표명한다. 왜냐하면 자신의 감정을 숨긴다는 것은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할 것이냐 때문에 자신의 솔직함을 희생하는 비겁한 짓이기 때문이다.
그는 쉽게 찬탄하지 않는다. 그에게는 어떠한 것이나 위대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남의 소문을 말하지 않는다. 그는 자신에 대해서도 남에 대해서도 말하지 않는다. 그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 찬양을 끌어내거나 다른 사람들이 격하되거나 하는 데에는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동일한 근거로 그는 적에 대해서라도 나쁜 말을 하지 않는다. 위압을 나타내기 위해서 굳이 하는 경우는 별도이지만.
그는 뒤끝이 없다. 아무 것도 잊어버리지 않는다는 것은 그의 본질에 합당하지 않다. 특히 불쾌한 일이 문제가 될 때 그는 그것을 간과해버린다.
긍지에 찬 인간의 발걸음은 조용하며 음성은 깊이가 있으며 말하는 것도 침착하다. 왜냐하면 소수의 사항 밖에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은 성급하지 않으며 또 어떠한 것도 크다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은 흥분하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서 날카로운 고성과 빠른 발걸음은 바로 사소한 것들도 중시하는 그러한 신경질적인 긴장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긍지에 찬 인간은 이상과 같은 사람이다.
8. 동정과 이웃사랑에 대해서
* 타인이 스스로 설 수 있도록 함께 도우라.
너에게 고통받은 친구가 있다면 그의 고뇌에 휴식처가 되도록 하라. 그러나 딱딱한 침대, 야전침대가 되도록 하라. 그러면 너는 그에게 가장 도움이 되리라.(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 자신을 사랑하는 자만이 남도 사랑할 수 있다.
인간은 자신을 굳게 의지하고, 두발로 용감히 서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지 못하면 사랑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없어지고 만다.(이 사람을 보라)
사랑하도록 유혹한다. - 자기 자신을 증오하는 자, 그런 사람을 우리는 경계하지 않으면 안 된다. 왜냐하면 그의 한과 복수의 제물로 우리가 희생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를 유혹하여 자기 자신을 사랑하도록 하자!(서광)
* 동정보다 동락(同樂 Mitfreude)이 더 중요하다.
나는 지금 소수인들이 이해하고 있는 것, 그리고 동정의 설교자가 전혀 이해할 수 없는 것을 그대에게 가르치고자 한다. 그것은 동락이다. 동정이 아니라, 동락이 친구를 만든다.(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9. 현대인비판
* 청빈과 은둔에 대해서
위대한 영혼들에게 지금도 대지는 활짝 열려져 있다. 홀로 은거하는 자와 둘이서 은거하는 자를 위해 많은 자리들이 여전히 빈 채로 남아 있고, 그 자리의 둘레에는 고요한 냄새가 감돈다. 위대한 영혼들에게 아직도 자유로운 삶이 활짝 열려 있다. 정녕, 적게 소유한 자는 그만큼 소유되는 경우도 적다. 조촐한 청빈을 찬양할지니!(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 현대인들의 초조에 대해서
현대의 초조 - 지구의 서쪽으로 갈수록 현대의 초조는 더욱 심해진다. 그래서 미국인에게는 유럽의 국민들이 모두 조용함을 사랑하며 즐기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모양이지만, 사실은 유럽에서도 사람들은 꿀벌처럼 뒤얽혀서 날아다니고 있는 것이다. 이 소동은 대단하여 고등문화는 이젠 더 이상 열매를 맺을 수 없을 지경이다. 마치 계절의 변화가 너무 빠른 것 같은 느낌인 것이다.
침착성이 없기 때문에 우리들의 문명은 새로운 야만상태로 빠져 들어가고 있다. 활동가가, 즉 침착성이 없는 사람들이 이 이상으로 위세를 떨친 적은 없었다. 따라서 인류는 정관(靜觀)하는 삶을 크게 강화할 필요가 있다.(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초조가 세상을 뒤엎고 있다. 현대인들은 너나 없이 자기 자신으로부터 달아나고 있기 때문이다.(반시대적 고찰)
고된 노동을 사랑하고 빠른 것, 새로운 것, 진기한 것을 추구하고 있는 당신들이여. 당신들은 모두 인내력이 부족한 자들이다. 당신들의 근면은 도피이다. 자기를 망각하려고 하는 의지이다.(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끊임없이 창작을 하려고 하는 것은 속된 일인 동시에 자신의 선망과 질투와 야심을 드러내는 것일 뿐이다.(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지루함에의 용기 - 자기 자신과 자기가 하는 일을 지루하게 생각할 만한 용기를 갖지 않은 자는 예술면에서도 과학면에서도 지고의 정신을 소유했다고 할 수 없다.(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독창적인 모든 정신에게 지루함은, 행운의 뱃길과 즐거운 바람에 앞서는 잔잔한 물결이다. 그들은 그것을 견디고 그 효과가 자기에게 나타나기를 기다려야 한다. - 이런 말이야말로 보통사람들이 엄두도 못내는 일이다.(즐거운 지식)
고독한 자는 말한다. - 사람은 고독에 따르기 마련인 많은 권태와 불쾌한 감정, 지루함의 대가로 자기 자신과 자연에 더 없이 깊이 침잠하는 그 15분을 얻는다. 지루함에 대해서 완전히 보루를 쌓은 자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보루를 쌓은 법이다. 자기 자신의 가장 깊은 샘에서 솟아나는, 제일 힘이 되는 생명의 물을 그는 결코 마시지 못할 것이다.(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