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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文學靑年 시절 소설가 韓水山

작성자별아저씨|작성시간08.07.20|조회수61 목록 댓글 0

 
나의 文學靑年 시절   소설가 韓水山
 
恩師들, 그리고 강원도의 평화
 
『恩師들이 나에게 보여 준 것은 문학의 향기였다』

● 위수령 내린 텅 빈 강의실에서 빈 노트와 씨름
● 글을 쓰는 게 아니라 고치는 일임을 가르쳐 준 黃順元 선생
● 노트 한 권에 詩 한 편을 쓰는 朴木月 선생 통해 詩를 배워
● 필화사건 달래며 격려하시던 朴龍珠 선생

韓水山

1946년 강원도 출생. 춘천高·경희大 영문과 졸업. 1972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사월의 끝」이 당선되어 등단. 1973년 장편 「解氷期의 아침」이 한국일보에 입선. 주요 작품으로 「부초」, 「안개 시정 거리」, 「流民」, 「밤의 찬가」, 「욕망의 거리」 등이 있다.

위수령과 텅 빈 강의실
 그해 가을은 衛戍令(위수령)과 함께, 그렇게 시작되었다. 1971년 10월15일이었다. 개학과 함께 격화된 反정부 학생시위를 막기 위해 정부가 내린 조치였다. 서울 시내 10개 대학에 휴업령이 내려지고 교정에는 무장군인이 진주했다. 그때 나는 경희大 영문과 3학년생이었다.
 
  위수령이 내리던 그날 나는 내가 속해 있던 학생서클 「백단학회」에서 학생들에게 배포할 지하유인물의 내용을 검토하느라 친구의 하숙집에 틀어박혀 있었다. 「백단학회」는 민족주의를 연구하는 학생운동단체였다. 그때 함께 의기투합했던 연구부원으로는 지금 방송활동을 하고 있는 정범구 前 국회의원이 있었다. 그는 정외과 학생이었다.
 
  유인물에 어떤 내용을 실을 것인가를 논의하던 어두컴컴한 하숙방에 후배가 들이닥쳤다. 그가 숨 가쁘게 알려 온 것은 『오늘 시위에서 우리 서클의 후배들이 몇 명 잡혀 갔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잠시 후 『학교에 군대가 진입했다』는 소식이 이어졌다.
 
  경찰서로 찾아가 담 밖을 서성거리던 우리는 저녁식사 대신 쓴 소주를 마시다가 밤늦게 헤어졌다. 그날 밤, 내가 깊은 번민 속에서 내린 결정이란 얼마나 여린 것이었던가. 나는 그때까지 내 관심의 內延(내연) 속에 있던 사회적 관심과 정치적 이념들을 형이하학이라고 못 박았다. 그들과의 조용하고도 잔혹한 이별이었다. 내 정신의 촉수는 형이상학이라고 스스로 규정하고 있던 「창조적 작업」에 가 있었다.
 
  다음날 학교로 가 보았다. 일체의 출입이 통제된 정문에는 모래부대를 쌓아올린 바리케이드가 쳐지고, 기관단총을 겨눈 무장군인들로 삼엄했다. 대운동장에는 진주한 군대가 설치한 막사가 즐비했다. 軍에 의해 접수된 학교의 모습은 그때 내가 느끼고 있던 정치적 현실을 압축해 놓은 가장 적나라한 상징이었다.
 
  며칠 후 나는 도시락과 빈 노트 한 권 그리고 한 움큼의 연필을 준비한 채 학교로 향했다. 경희大는 산록에 자리 잡고 있어서, 위쪽으로 조금만 올라가면 담을 친 철조망 여기저기에 구멍이 뚫려 있는 곳을 찾아낼 수 있었다. 나는 그 개구멍을 뚫고 학교 안으로 들어갔다. 허가받은 극소수의 사람들 이외에는 출입이 통제되어 있는 학교 캠퍼스는 고요의 바다였다. 몸을 숨기고 軍이 진주해 있는 운동장으로 다가가 보니 수경사 소속 군인들은 태권도인지 뭔지를 하며 몸을 단련하고 있었다.
 
  나는 殺意(살의) 가득한 교정을 이리저리 돌아서, 인문대 강의실 창문을 타넘어 안으로 들어갔다. 나는 그렇게, 내가 몸 바칠 산문의 세계로 숨어 들어갔던 것이다.
 
  텅 빈 강의실 안에 의자들을 모아 놓고 앉아, 12자루의 연필을 천천히 깎았다. 그리고 빈 노트를 펼쳤다. 귀가 멍할 정도의 적요,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는 강의실 안을 이따금 말벌이 윙윙거리며 날았다. 그리고 무언가를 쓰기 시작했다. 아니 소설을 써 보려고 했다.
 
  한 줄을 썼다가 지우고, 몇 줄을 썼다가 노트를 찢어 내는 일이 반복되었다. 그렇게 하루가 갔지만 저녁 무렵 몰래 학교를 빠져나올 때 내 노트에는 아무 것도 써 있지 않았다.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나는 그렇게 위수령으로 점령당한 빈 학교 강의실로 숨어 들어갔고, 빈 노트를 앞에 놓고 연필을 깎고 있었다.
 
 
  黃順元 선생, 『너 연애 잘 못하지』
 
경희大 교정 뒤편의 숲길에서.

  일주일이 갔을 때, 연필로 쓴 한 편의 글이 노트에 남았다. 다음 글은 닷새가 걸렸다. 그리고 다음에는 사흘이. 왜 그것이 홀수로만 이루어졌는지 모르겠다. 그리고 다섯 편째의 글을 쓰고 난 뒤 다시 학교 문이 열리고 강의가 시작되었다.
 
  학교가 문을 열자, 매주 화요일이면 그때까지 쓴 습작소설을 들고 연구실로 黃順元(황순원) 선생님을 찾아갔다. 지난주에 드린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새로 쓴 작품을 놓고 오는 일이 반복되었다. 때로는 연구실이 아닌 사당동 집으로 오라고 하실 때도 있었다. 비 오는 날이면 장화를 신고 걸어야 하는 진흙탕 길, 사당동 로터리 언덕배기에 있는 선생님 댁을 그렇게 드나들었다.
 
  이 徒弟的(도제적)인 문학수업에서 黃선생님이 붉은 볼펜으로 꼼꼼하게 교정보듯 표시해 놓곤 하는 것이 맞춤법과 띄어쓰기였다. 그 만남 속에는 잊혀지지 않는 이야기가 많다. 어느 날 사당동 댁으로 찾아간 내게 선생님이 불쑥 말씀하셨다.
 
  『너 연애 잘 못하지?』
 
  갑작스런 물음에 『네』하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선생님이 즐겁게 웃으며 내린 진단이란 실로 가공할 것이었다.
 
  『내 그럴 줄 알았다. 이런 소설을 쓰는 네가 연애를 잘 할 리가 없지. 연애를 잘 못하니까 이런 소설을 쓰는 거야』
 
  선생님은 재미있어 못 견디겠다는 표정이셨다.
 
  참담한 시간도 있었다. 이게 정말 내가 쓴 글이란 말인가. 한국문학사에 길이 빛날 명품이 아닌가. 습작소설을 선생님께 드리고 온 후 일주일 내내 나는 기고만장해서 들떠 있었다. 다음 주 약속한 날 연구실로 찾아간 내게 작품을 내밀어 주면서 선생님이 말씀하셨다.
 
  『이런 거나 쓰려면 소주나 한 병 먹고 말아』
 
  그 표정이 아주 엄격했다. 그뿐 더 말이 없으셨다. 연구실 바닥을 내려다보고 말없이 앉아 있다가 밖으로 나왔다. 직사각형 모양을 하고 있던 연구실 문이 왜 그렇게도 멀게 느껴졌던지. 밖으로 나와 문을 등지고 섰을 때의 암담함, 다리가 후들거리던 참혹한 절망감. 그때 내 손에 칼이 들려져 있다면 안으로 달려 들어가 선생님을 찔러 버렸으리라.
 
  선생님의 「소주 한 병」이 무엇을 의미했는지를 알기에는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내가 희대의 名作(명작)을 썼노라 기고만장했던 그 소설을 몇 주 뒤에 다시 읽어 보니, 「메밀꽃 필 무렵」의 치졸한 번안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글은 쓰는 게 아니라 고치는 것이다
 
1998년 재일교포 작가 양성일씨와 함께 재일교포 문학에 대해 대담하는 한수산.

  어느 날 선생님은 자신이 쓰고 있던 소설 「움직이는 城」의 초고 노트를 펼쳐놓고 정확한 강원도 사투리 표현을 묻기도 했다. 그때 본 선생님의 초고는 글자를 알아볼 수 없이 고쳐져 있었다. 아, 이런 琢磨(탁마)를 거쳐 선생님의 문장이 나오는구나.
 
  이 말없는 가르침은 그 후 20여 년을 이어져, 나는 워드프로세서가 나오기 얼마 전까지도 초고를 연필로 노트에 적어, 고치고 또 고쳤고, 그것을 다시 원고지에 옮겨 적는 작업방법을 버리지 않았다. 그리고 생각한다. 글은 쓰는 것이 아니라, 고치는 것이라고.
 
  연말이 왔을 때 나는 16편의 습작소설을 가지고 있었다. 네 곳의 신춘문예에 투고를 했다. 그리고 12월30일 밤늦은 시간, 내 신춘문예 당선작이 실린 동아일보 새해 신문을 들고 처음 찾아간 곳은 원효로 4가 5번지 朴木月(박목월) 선생님 댁이었다.
 
  고등학교 때 특활시간에 내가 속했던 부서는 신문반이었다. 이름이 그랬을 뿐 고등학교 내내 단 한 번도 신문을 만든 적이 없는 신문반이었다. 그때 반장을 맡고 있던 노화남 선배(現 춘천 「도민일보」 논설위원)가 어느 봄날, 2학년 교실로 나를 찾아왔다.
 
  선배는 『나는 내일 大入 모의고사가 있어서 못 나가니, 나 대신 네가 춘천고등학교를 대표하여 도내 백일장 詩부문에 나가도록 하라』는 것이었다. 게다가, 학교는 물론 출석으로 해 주고 점심도 백일장에서 공짜로 다 준다는 것이 아닌가.
 
  그 무렵의 고교 시절, 점심까지 주면서 학교를 빼먹도록 해 준다니 그만한 환희가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다음날, 멀리 대관령 너머 강릉을 비롯, 원주에서 온 학생들로 그득한 백일장 자리에 가 앉았을 때는 현기증이 날 정도였다.
 
  노화남 선배가 무슨 생각에서 나를 찍는 실수를 저질렀는지는 몰라도 나는 그때까지 단 한 편도 완성된 詩를 써 본 적이 없었다. 결국 나는 「에라 모르겠다」는 심정으로 한 편의 詩 「같은」 것을 써낸 후, 대회 측에서 주는 식권을 받아들고 시내 식당에서 설렁탕을 맛있게 먹은 다음, 발표 따위는 아랑곳없이 하숙집으로 돌아와 낮잠을 자 버렸다. 그런데 저녁 무렵 학교에서 돌아온 친구가 들떠서 소리치는 게 아닌가.
 
  『야, 너 뭐하고 있어. 네가 고등부 장원이래. 담임선생님이 오후 5시에 시상식이 있다고 너 빨리 가야 한대』
 
  그것이 문학과의 엇갈린 첫 만남이었다. 그때 나는 微·積分(미·적분)을 공부하고 있던 이과생이었다. 이 황당함은 그 후 또 다른 황당함을 낳았다.
 
  몇 달 후, 훗날 한국일보 기자가 되는 옆 반 친구 황원갑은 이 詩를 나를 대신해서 몰래 「학원」에 투고를 했고, 작품이 朴木月 선생의 평과 함께 실리는 불상사(!)를 만들어 낸다. 個人史(개인사) 속에서 朴木月이라는 이름과의 첫 조우였다.
 
 
  불화살을 맞은 밤
 
  그 후, 나는 대학 진학을 포기한 채 농사꾼이나 되어 보자는 생각에서 한 해를 강원도 내지의 깊은 산골에 있는 할아버지 댁에서 머물게 된다. 그러나 이 허황된 꿈은 할아버지와 아버지 사이의 불화 속에 무너져 버리고, 나는 정처 없이 떠돌 듯 춘천교육대학에 진학하게 된다.
 
  교육대학에 들어가서, 무슨 기연인지 거기도 또 노화남 선배를 만나게 되었다. 그에게 포섭되어 학교신문을 만드는 학생기자가 되었고, 그때 대학신문 지도교수가 朴東奎(박동규) 교수였다. 후에 서울大로 옮겨간 朴교수는 그때 20代 후반의 젊디젊은 전임강사였다.
 
  당시 춘천교육대학 신문은 사전으로 유명한 출판사 「민중서관」에 맡겨 편집과 인쇄를 하고 있었다. 학생기자 한 명이 매달 편집대장과 원고를 가지고 2박3일 정도 서울로 출장을 가, 교정까지 마치고 OK를 놓고 내려오는 일이 이어졌다.
 
  그 일을 노화남 선배와 내가 주로 맡았다. 촌놈들이 서울에 와서 여관방에 자는 것이 안쓰러웠던지 朴東奎 교수는 이따금 우리를 댁으로 데려가 재우곤 하셨다.
 
  나는 언젠가 그날 밤을, 내 가슴에 「불의 화살이 박히는 것 같았다」고 표현한 적이 있다. 전차가 땡땡거리며 효자동에서 원효로까지 다니던 시절이었다. 朴東奎 교수는 나를 데리고 효자동에서 전차를 타고 원효로 집으로 데려가 주셨다. 원효로 4가 5번지, 시인 朴木月의 집이었다.
 
  존경하는 大시인의 집. 모든 것이 충격이었다. 훗날 생각하면 조그만 2층 적산가옥이었던 그 목조주택이 왜 그렇게도 커 보였던지. 그리고 계단까지 넘쳐나던 책들, 남편을 「우리 朴선생님」이라고 부르시던 사모님. 문학을 한다는 것이 이렇게 아름다운 삶이란 말인가.
 
  내 가슴 깊이 불의 화살들이 박히고 있었다. 처음 뵙는 大시인은 인자하고 소박했다. 쇳소리가 나는 짙은 경상도 사투리의 朴木月 선생님 목소리를 그때 처음 들었다.
 
 
  한 여인과의 운명적 만남
 
1972년 문단에 데뷔할 당시 경희大 중앙도서관 앞에서 黃順元 선생과 함께. 한수산은 黃順元 선생으로부터 徒弟的인 문학수업을 받았다.

  그렇게 2년을 朴木月 선생님 댁을 드나들었다. 연필로 노트 한 권에 詩 한 편을 쓰시는 朴木月 선생님의 창작과정을 지켜볼 수 있었다. 『문학을 하겠다고 꼭 서울로 올라오려 하지 말라』고 하는 말씀도 해 주셨고, 『시골의 아름다움을 그리며 詩에 정진해 보라』는 말씀도 해 주셨다. 『東奎 선생에게 문학 이론서를 한 15권쯤 소개해 달라고 해서 열심히 공부해라』고 하셨던 말씀은 오래오래 가르침으로 남았다.
 
  춘천교대 2학년 가을이었다. 나는 그때 한 여자와 운명적인 연애를 하고 있었다(결국은 아내가 되어 함께 살며 두 아이의 엄마가 되어 준 여자와의 만남이었으니 이보다 더한 운명이 어디 있으랴).
 
  하루 종일 찻집에 앉아 수북하게 성냥을 부러뜨리거나, 소양강 가를 하염없이 걷는 것이 대부분이었던 그 「사랑의 벽돌쌓기」에서 어느 날 나는 朴木月 선생님 댁에서 본 그분의 創作法을 들려주고 있었다.
 
  그쯤에서 끝냈으면 좋으련만 나는 나도 모르게, 『이제부터 나도 노트 한 권에 詩 한 편씩을 쓰는 朴木月 선생님과 같은 방법으로 100편의 詩를 써 내겠다』는 꿈같은 거짓말을 해 버렸다.
 
  그리고 며칠 후였다. 언제 그런 말을 했는지 조차 잊어버리고 있던 날, 그녀가 내 하숙을 찾아왔다. 그녀의 손에는 100권의 대학노트와 몇 다스의 연필 그리고 지우개가 들려 있었다. 그것을 내게 건네며 그녀가 말했다.
 
  『그럼, 詩 100편을 써 봐』
 
  스스로 한 말의 족쇄를 끌고 나는 그녀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노트 한 권에 詩 한 편씩을 그렇게 써 나갔고, 아마 40여 편에 가까운 詩를 썼던 것 같다. 그리고 그해 연말 강원일보에서 신춘문예를 시작한다는 社告(사고)를 보았다. 노트에서 몇 편의 詩를 가려내 투고를 했고, 그것이 제1회 강원일보 신춘문예 詩부문의 당선작이 되었다. 그때 심사위원이 朴木月과 徐廷柱 선생이었다.
 
  세월이 흘러 朴木月 선생님이 돌아가신 날, 소식을 듣고 달려간 빈소에서 하얗게 밤을 새며 앉아 있을 때, 나는 소설가가 되어 있었다. 한양大 교정에서 열렸던 詩人의 영결식에서 눈물을 훔치며 시멘트 계단에 앉던 나는 여전히 선생님에게서 배운 대로 대학노트에 연필로 장편소설 「부초」를 쓰고 있었다.
 
 
  해는 산에서 뜨고 산으로 졌다
 
문청시절인 1967년 1월 한수산은 강원일보 신춘문예(詩 부문)에 당선됐다. 작가는『「연필로 노트 한 권에 詩 한 편」을 쓰는 열정을 시인 朴木月 선생에게 배웠다』고 밝혔다.

  아버지는 가난한 강원도 시골 초등학교 교사였다. 당시 초등학교 교사는 2년에 한 번씩 전근을 가야 했다. 그렇게 해서 나는 초등학교를 네 곳이나 다녔다. 정든 것과의 원치 않는 이별과 낯선 것과의 끊임없는 만남이 고리처럼 이어지며 소년 시절을 감쌌다.
 
  시골 초등학교는 언제나 마을과는 떨어져서 자리 잡고 있었다. 학교가 끝나면 아이들은 다들 집으로 돌아갔고, 학교 관사에서 생활해야 했던 나는 텅 빈 운동장 가에 혼자 남았다.
 
  잦은 이사가 만들어 낸 만남과 이별의 반복 속에 길들어져야 했던 시간의 켜와 마을과 떨어져서 텅 빈 운동장에서 혼자 공을 차거나 빈 교실에서 책을 읽어야 하는 공간에 대한 인식은 내 어린 시절의 두 가지 절대였다.
 
  가난한 초등학교 교사이었지만 집안에 읽을거리만은 많았다. 초등학교 6학년이 되었을 때는 나는 춘원 이광수의 역사소설을 거의 외다시피 하고 있었다. 이런 것도 영향이었다면, 내가 평생에 처음 써 보려고 했던 소설이 연개소문이 죽고 난 후 그의 세 아들이 겪는 갈등을 소재로 한 장편소설이었다는 황당함은 자연스럽다.
 
  나는 초등학교 6학년 때, 아버지 학교에서 등사해서 쓰다가 버리는 종이를 뒤집어서 두툼한 책으로 만든 후, 거기에 연개소문에 관한 이야기를 쓰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토록 쓸 이야기가 많을 것 같던 장편소설이 한 장 반을 쓰고 나자 더 이상 쓸 이야기가 없었다. 어느 날, 어딘가에 처박아 두었던 그 미완의 소설을 같은 방을 쓰던 세 살 위의 형이 들쳐보고는 『벼엉신!』 하며 키들거렸다.
 
  해방공간과 한국전쟁을 겪으면서도 강원도 오지마을에서는 이념이나 계급갈등을 거의 겪지 않아도 좋았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인간의 삶에 계급이라는 장애가 있고, 이념이라는 굴레가 있음을 아주 훗날에야 「지식」으로써 알았다. 내 성장기의 삶에는 그런 나이테가 없었다.
 
  어느 쪽을 향해 소리를 질러도 언제나 산울림이 있는 곳. 해는 산에서 뜨고 산으로 지는 곳. 집 가까이에 피라미가 뛰는 냇물이 흐르고, 가을이면 지붕에서 고추가 익어 가는 마을. 무엇보다도 다 같이 가난한 사람들. 그 강원도의 산골마을에서 자란다는 것은 자연을 스승으로 가질 수 있는 행운이었다.
 
  중학교 3학년 때였다. 신문에는, 「서울의 여학생 둘이 실존주의에 빠져서 자살했다」는 기사가 실렸었다. 그렇다면! 며칠의 결심 끝에 나는 춘천사범학교에 유학 중이던 형에게 편지를 썼다.
 
  「실존주의에 대한 책을 좀 사 보내 주실 수 없습니까」
 
  그때 형이 사 보내 준 책이 사르트르의 「실존주의란 무엇인가」라는 문고판이었다. 漢子(한자)투성이의 그 철학서적은 「실존주의란 무엇인가」라고 수없이 되묻게 하면서 나를 절망시켰고, 이런 한자투성이의 글을 읽고도 자살을 할 수 있었다는 「서울의 여학생」을 어느 다른 행성의 생물체처럼 경이로운 존재로 각인시키는 효과 이외에는 나에게 아무 「영향」을 주지 못했다.
 
 
  朴龍珠 교수님
 
  그리고 나를 견고하게 지켜 준 문학의 기둥에 朴龍珠(박용주) 교수님이 계신다. 내 데뷔작 「사월의 끝」과 중편 「타인의 얼굴」에는 선생님의 편린이 숨어 있다. 졸업 후에도 이따금 편지를 보내, 찾아오기를 재촉하던 분이시다. 편지를 받고야 겨우 찾아뵈면 『임마, 「수산아 다 용서한다, 돌아오거라」 뭐 그렇게 신문광고라도 낼까 했어』 하며 웃으셨다.
 
  『도시는 당의정이다. 문명이 덜 침윤된 곳에 더 큰 진실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 말로 내 소설 「流民(유민)」을 참 아껴주셨다. 『작가들이 작품이라는 고백을 하고 나니까 부끄러워서 술을 많이 마시나 본데, 지나친 음주는 상상력을 해친단다』 하며 내가 술 마시는 것까지 걱정해 주셨다. 필화사건으로 고문을 받고 나온 나에게 『미국 서부에 가서 몇 달 헤매다니면 어떻겠니? 거대한 자연 앞에 서서 상처를 치유받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며 안타까워하셨다.
 
  나는 어린 시절 작가가 되겠다는 꿈을 가진 적이 없다. 내가 꿈꾼 것이 있다면 무언가 이 세상에 쓰임새가 있는 물건을 만드는 사람이 되어 보면 어떨까 하는 것이었다. 어려서부터 글을 쓰겠다는 생각을 했다는 작가들을 보면 좀 경이롭다.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었을까. 그것은 조각이라고는 초등학교 운동장 가에 서 있는 충무공 동상밖에 본 적이 없는 사람이 대학 조소과에 진학하는 것을 볼 때와 비슷하다.
 
  내 恩師(은사)들이 나에게 보여 준 것은 문학의 향기였다. 투쟁도 도구도 방편도 아닌, 삶을 아름답게 하는 자양으로서의 문학이었다. 이분들의 향기가 없었다면, 나는 지금쯤 어딘가에서 「쓸모 있는 무엇」을 만들겠다고, 나전칠기를 쪼고 앉아 있거나 한옥을 짓는 大木(대목)이 되어 먹줄을 튕기고 있지는 않았을까.●

 

월간조선/2006년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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