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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석 - < 진리의 열정에서 해방되기 1>

작성자별아저씨|작성시간08.07.11|조회수139 목록 댓글 0

고종석 -< 진리의 열정에서 해방되기 1> 文人(男)

 

고종석 - < 진리의 열정에서 해방되기 1>

붉은 악마, 그리고 <빵과 장미>

게으름 때문에 기권해서야…

한국과 조선 그리고 노무현

살아남은 자의 부끄러움

노동절의 몽상 ‘무위도식’

문화적 소수파’에 거는 희망

장정일의 자유도 소중하지만…

사진으로 생각해 본 국가보안법

사이버 주소의 ‘평등’과 ‘개성’

신을 안 믿을 자유를 달라

정말 하기 싫은 ‘전라도’ 이야기

나의 <인터내셔널> 청취기

미국에서 목격한 ‘날것의 가난’

 

붉은 악마, 그리고 <빵과 장미>


“붉은 옷을 걸치고 우리 축구단의 승리에 열광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팔레스타인 사람들이나 거리의 청소부들을 포함해 모든 아웃사이더들에게 건넬 장미를 마련하기 위해 지금 이 붉은색 정열을 조금 여투어 두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지적했듯, 이번 월드컵 축구 경기가 우리 사회에서 엉겁결에 감당하고 있는 문화적 실천 가운데 하나는 붉은색 금기의 해제이다. 전대미문의 규모로 흡수되고 배출되는 열정의 역학 속에서 붉은색은 대한민국을 뒤덮고 있고, 사람들은 그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다. 붉은색이 제 상징의 정원에 공산주의를 처음 맞아들인 것이 언제인지 나는 모른다. 붉은 옷을 걸치고 우리 축구단의 승리에 열광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팔레스타인 사람들이나 거리의 청소부들을 포함해 모든 아웃사이더들에게 건넬 장미를 마련하기 위해 지금 이 붉은색 정열을 조금 여투어 두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아무튼 마르크스는 취향을 묻는 딸의 애교스러운 질문지에 대답하면서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빛깔로 빨강을 꼽았다. 붉은색이 들어가는 표현들에서 이 빛깔은 흔히 공산주의(자)의 빛깔이다. 공산주의자 사냥을 뜻하는 레드 퍼지, 중국 문화혁명 시기의 홍전(紅專) 논쟁, 1970년대에 악명을 떨치던 이탈리아 테러리스트 조직 ‘붉은 여단’, 일본 공산당 기관지 <아카하타(赤旗)>, 북한 중등학생들의 예비군 조직이라는 ‘붉은 청년 근위대’가 그 예다.

 

‘붉은 물결’의 열정은 제대로 소비되고 있는가

당연히, 분단 이후 오래도록 남한에서 붉은색은 금기에 속했다. 초등학교 운동회에서 청군의 맞상대는 색상표의 배치로 보아 자연스러운 홍군이 아니라 백군이었다. 노동자들이 쟁의 때 이마에 두르는 빨간 띠는 곧잘 언론으로부터 팔매질을 당했다. 공산주의자에 대한 경멸적 표현인 ‘빨갱이’는 모든 이성적 토론을 중단시키는 마법의 주문이었다. 그런데 이런 빨강 콤플렉스가 적어도 외양으로는 일거에 사라지고 있다. 그리고 그 금기 해제 작업의 중심에 ‘붉은 악마’가 있다. 사실 붉은 악마라는 도발적 이름이야말로 레드 콤플렉스에 대한 치명적 조롱이다. 이들이 만들어낸 붉은 물결 덕분에 이제 이 정열의 빛깔은 대한민국을 상징하는 빛깔이 되었다. 한국은 ‘적화’했다. 붉은색에 경기를 일으키던 극보수 언론도 이 적화 현상에 대해 딴죽을 걸지 못하고 있다. 반공의 최전선에 서 있다고 자부하는 한 언론사의 건물 벽에는 ‘대한민국’이라는 네 글자가 놀랍게도 빨간색으로 씌어 있다.

그러나 나는 텔레비전 카메라가 비추어 주는 이 붉은 물결에 마음이 편치 않다. 이 붉은 물결이 실질적으로는 레드 콤플렉스 해체와 무관하다는 판단 때문만은 아니다. 한국 경기가 있는 날이면 거리로 쏟아져 나오는 수백만 인파는 유사 이래 한반도에서 터져 나온 최대의 열정을 증명하지만, 이 파천황의 열정은 과연 제대로 소비되고 있는 것일까? 열정이라는 것도 무한한 재화는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이 제한된 재화의 소비에 적절한 오리엔테이션을 주는 것은 열정 생산 못지않게 긴요할 것이다. 거리를 가득 메운 온갖 사회적 배경의 수백만 군중에게서 ‘대~한민국’말고 아무런 정치적 구호가 나오지 않았다는 것은 나를 안심시키기는커녕 불안하게 한다.

<창작과 비평> 여름호에는 팔레스타인 시인 마흐무드 다르위시의 연설문이 하나 실려 있다. 지난 3월 말 국제작가회의(IPW)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연대를 표하기 위해 월레 소잉카를 비롯한 대표단을 라말라에 보냈다. 요르단 강 서안 팔레스타인 자치 지역 가운데 하나인 라말라는 그 직전 이스라엘군이 팔레스타인 민간인들을 무차별로 학살한 곳이다. 다르위시는 이들 동료 작가에게 고마움을 표하며 ‘우리에게는 희망이라는 치유할 수 없는 병이 있습니다’는 제목으로 연설했다. 복스러운 병이랄 수도 있는 이 희망의 내용은 자식들이 안전하게 등교할 수 있게 되는 것에 대한 희망, 임신부가 군 검문소 앞에서 죽은 아기를 낳는 것이 아니라 병원에서 살아 있는 아기를 낳게 되는 것에 대한 희망, 팔레스타인 땅이 사랑과 평화의 땅이라는 원래의 이름을 되찾게 되는 것에 대한 희망이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피가 아니라 장미에서 빨간색의 아름다움을 느끼게 될 날에 대한 희망이었다.

로스앤젤레스를 배경으로 건물 청소부들의 애환을 그린 켄 로치 감독의 영화 <빵과 장미>에서 장미는 단지 먹고 사는 문제를 벗어나 인간의 존엄이 보장되는 삶을 상징한다. 붉은 옷을 걸치고 우리 축구단의 승리에 열광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이 붉은색 열정이 합리적 수준에서 우리 사회를 통합하는 그런 열정이기를 바란다. 그러나 팔레스타인 사람들이나 거리의 청소부들을 포함해 모든 아웃사이더들에게 건넬 장미를 마련하기 위해 지금 이 붉은색 정열을 조금 여투어 두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02.7.4)


게으름 때문에 기권해서야…

“우리처럼 사회 보장의 그물이 허약한 사회에서는 서유럽보다 진보 정당의 필요성이 오히려 더 크다. 그러나 우리 정치권의 두 주류는 극보수와 온건보수 정당이다. 이 지형을 한꺼번에 바꿀 수는 없겠지만, 바꾸려는 노력을 시작할 때는 된 듯하다.”

코앞으로 다가온 지방 선거가 월드컵의 열기 속에 파묻히고 있다. 투표율이 사상 최저가 되리라는 우려가 현실화할 것 같은 기세다. 월드컵이 워낙 큰 정열의 축제이므로, 그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 그러나 누구도 정치 바깥에 서 있을 수는 없다는 사실을 떠나서도, 요즘처럼 한 사회의 정열이 오직 한 곳으로만 쏠리는 것은 건강한 일이 못 된다. “우리처럼 사회 보장의 그물이 허약한 사회에서는 서유럽보다 진보 정당의 필요성이 오히려 더 크다. 그러나 우리 정치권의 두 주류는 극보수와 온건보수 정당이다. 이 지형을 한꺼번에 바꿀 수는 없겠지만, 바꾸려는 노력을 시작할 때는 된 듯하다.” 투표율이 낮을 때, 선거로 뽑힌 대표의 대표성은 그만큼 낮아질 수밖에 없다. 유권자의 반 이하가 참여한 선거에서 뽑힌 대표가 그 공동체를 대표하겠다고 나서는 것은 쑥스러운 일일 것이다. 물론 지금 월드컵 열기를 풀무질하는 국민적 동원이 그렇듯, 동원이라는 것은 늘 공동체의 의사를 왜곡할 위험을 지닌다. 좁은 의미의 정치적 동원, 구체적으로 선거로 동원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그것은 높은 투표율이 반드시 바람직한 현상은 아니라는 뜻이다. 실제로 가장 높은 투표율은 가장 억압적인 사회에서 나온다. 비교적 자유로운 사회에서도, 높은 투표율은 집단적 부화뇌동의 결과일 수 있다.

그래서, 정치적 무관심이나 투표 기권 그 자체를 비판할 수는 없다. 그것은 어느 정도 개인적 선택의 영역이다. 게다가, 정치적으로 무관심한 사람이 마지못해 투표를 할 때, 그 행위는 공동체의 의사를 수렴한다는 선거제도의 존립 근거를 해칠 수 있다. 예컨대 이 사회가 이런 식이었으면 좋겠다는 10의 욕망을 가진 개인의 한 표가, 사회가 저런 식이었으면 좋겠다는 1의 욕망을 가진 개인의 한 표나,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다는 생각을 지닌 개인의 한 표에 의해 상쇄되는 것은 매우 불공정하다. 이것이 뜻하는 것은 사회 운행이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고 판단하는 사람은 굳이 투표장에 갈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지방 선거는 진보 정당 키울 좋은 기회

문제는 제 나름으로 또렷한 정치적 지향을 지닌 사람들이 단지 게으름 때문에 기권을 하는 경우다. 나는 이런 유형의 기권 행위가 사회에 대한 배반일 뿐만 아니라 유권자 자신에 대한 배반이라고 생각한다. 정치적 의견이 희미한 사람의 동원된 투표 행위와 마찬가지로, 특정한 정치적 지향을 지닌 사람의 기권은 그와 다른 정치적 지향을 지닌 사람의 투표 행위의 효과를 실제보다 크게 만들어 공동체 전체의 의사를 왜곡한다. 엄격히 말해서, 공적으로든 사적으로든 정치에 대해 아무런 발언도 하지 않는 사람만이 떳떳하게 투표에 기권할 자격이 있을 것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그 정도의 순정한 정치 혐오자나 정치 무관심층은 못 되어서 6월13일에 투표장에 나갈 생각이다. 우리 정치 지형을 정상화하고 싶기 때문이다.

정상적인 정치 지형은, 유럽에서처럼 온건 보수 정당과 온건 진보 정당이 주류가 되어 있는 상태일 것이다. 우리처럼 사회 보장의 그물이 허약한 사회에서는 서유럽에서보다도 진보 정당의 필요성이 오히려 더 크다. 그러나 우리 정치권의 두 주류는 극보수 정당과 온건보수 정당이다. 이 지형을 한꺼번에 바꿀 수는 없겠지만, 바꾸려는 노력을 시작할 때는 된 듯하다. 대통령 선거처럼 큰 선거에서 이것을 시도하는 것은 우리 정치의 지금 단계에서 바람직하지 않아 보인다. 이런 시도는 필연적으로 온건보수 정당의 표를 갉을 터인데, 적어도 내게는 민주당 출신 대통령 치하의 대한민국과 한나라당 출신 대통령 치하의 대한민국이 서로 맞바꿔도 좋을 만큼 ‘그게 그거’로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진보 정당을 키우려는 노력의 첫걸음은 국회의원 선거 때나 지금 같은 지방 선거철에 내딛을 수밖에 없다.

나는 소극적 민주당 지지자가 이번 선거에서 민주노동당을 비롯한 진보 정당을 지지하는 것이 자가당착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은 오히려 격려해야 할 진취적 선택이다. 지방 의회 선거나 기초단체장 선거에서만이 아니라 광역단체장 선거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적극적 민주당 지지자들은 내 말에 눈살을 찌푸릴지도 모른다.

나는 그들에게 이런 제안을 하고 싶다. 지난 2월 말 개정된 선거법에 따라 이번 선거부터 광역 의회 의원을 뽑을 때 1인2표제가 도입된다. 즉 이번 선거에서 유권자들은 처음으로 후보 개인에 대한 투표 이외에 정당에 대한 투표를 통해 비례대표 광역 의회 의원을 뽑는다. 그 두 투표를 분산해 진보 정당에 힘을 실어주는 것은 어떨까? 그것은 궁극적으로 민주당을 정치 지형의 중앙으로 끌어당기는 긍정적 효과를 낳을 것이다. (02.6.20)


한국과 조선 그리고 노무현

“노무현 민주당 대통령 후보는 ‘dj 정권이 남북 정상회담 개최 사실을 2000년 4·13 총선에 이용하려 했던 것은 유감스러운 일’이라고 말했다. 노씨의 이 발언은 대통령 후보로 뽑힌 뒤 그가 보여준 일련의 유감스러운 언행의 점정(點睛)이라고 할 만하다.”

남한의 정식 이름은 대한민국이고, 북한의 정식 이름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다. 즉 남은 한국이고 북은 조선이다. 평양 언저리에 들어선 한반도의 첫 부족 국가 이름이 조선이었고 그보다 좀 뒤늦은 시기에 한강 이남에 흩어져 있던 부족 국가들이 마한이니 변한이니 진한이니 하는 한국이었다는 데 생각이 미치면, 땅에도 무슨 팔자가 있나 보다 하는 미망의 유혹을 받는다.

그러나 14세기 말부터 5백년간 반도 전체를 강역으로 삼았던 왕조 이름은 조선이었다. 그 조선을 고스란히 계승한 대한제국이 존재한 것은 1897년부터 1910년까지 고작 13년 간이었다. 그리고는 나라가 무너졌다. 1919년 중국 상하이에 공화제로 수립된 우리 임시정부의 이름은 대한이었지만, 일제 강점기 내내 대다수 한국인들은 자신을 한국인이라기보다 조선인이라고 생각했다. 1919년 반도 전체에 울려 퍼진 구호는 대한독립만세가 아니라 조선독립만세였고, 1945년에 우리들은 한국 해방이 아니라 조선 해방을 자축했다.

한국에 대한 조선의 우위는 미군정 시기 남한에서도 여전했다. 1947년 6월3일 미군정청은 민정화의 예비 단계로 제 이름을 남조선과도정부로 바꾸었다. 미군이 실권을 쥐고 다수 한국인들이 참여한 이 과도 정부가 ‘남한 과도정부’가 아니라 ‘남조선 과도정부’로 불렸다는 것은 그 시기 삼팔선 이남의 한국인들에게도 ‘대한’이나 ‘한국’보다 ‘조선’이 국호나 민족명으로 더 익숙했음을 시사한다. 좌파 평론가 김동석이 대한민국 정부 수립 직전에 쓴 수필 <조선과 대한>은 조선과 대한 사이에 생기기 시작한 이데올로기적 긴장 위에 얹혀 있다.

김동석에게 대한과 조선은 각각 우리 민족의 과거와 미래를 표상했다. 대한이 우리가 결별해야 할 과거인 것은 그것이 ‘일제가 조선을 점령하기 전 그 옛날의 청춘 없는 노폐국(老廢國)’의 이름이기 때문이다. 그 글의 마지막 문장은 이렇다. ‘우리의 살길은 오로지 새로운 조선 건설에 있는 것을 그래 대한인들은 모른단 말인가?’

우리는 김동석이 틀렸다는 것을 안다. 오늘날 한국이라는 말은, 많은 굴절과 시련을 딛고 이루어낸 정치적 민주화와 상대적인 풍요를 상징한다. 그리고 조선이라는 말은 무지막지한 전체주의와 가난을 상징한다. 조선이라는 말의 이 슬픈 운명은 한국인인 내게도 유감스럽다. 내가 조선인의 후예이기 때문이다. ‘유감’이라는 말을 하고 보니 또 다른 ‘유감’이 꼬리를 문다.

민주당 대통령 후보 노무현씨는 지난 5월17일 한 토론회에서 “현정부의 대북 정책에서 유감스러웠던 대목은 2000년 4·13 총선을 며칠 앞두고 남북 정상회담 개최 사실을 발표해 국내 정치에 이용하려 한 것이다”라고 말했다. 노무현씨의 이 발언은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뽑힌 뒤 그가 보여준 일련의 유감스러운 언행의 점정(點睛)이라고 할 만하다. 나는 정상회담 발표에 대해 그 즈음 어느 작가가 독재 정권 시절과 똑같은 행태라며 분개하는 것을 보고 어안이 벙벙했었다. <한겨레>와 <조선일보> 사이의 차이를 모르겠다고까지 공언한 분의 발언이어서 이해하려고 애쓰기는 했지만.

개인적 이해로 원칙을 대체하려 하는가

그러나 민주당 대통령 후보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는 것까지 이해해줄 마음은 없다. 한조(韓朝) 정상회담은 군사 정권 시절 선거철마다 터져 나왔던 간첩 사건처럼 조작된 것이 아니다. 그것은 또 총선에 대비해서 비밀리에 추진된 것이 아니라 그 해 3월의 베를린 선언 이후 반(半) 공개적으로 추진되어 온 것이다. 이런 공개적 정책의 성과를 선거 전에 공표해 유권자들에게 지지를 호소하는 것은 극히 정상적인 정치 과정이다. 게다가 나는 노무현씨가 유감스럽게 생각하지 않을 발표 시기가 언제인지 가늠할 수 없다.

총선 이후에 정상회담을 공표했다면 야당이 비난을 덜 했을까? 나는 아니라는 쪽에 걸겠다. 그 경우에는 정상회담 발표가 선거에 불리하게 작용할까 봐 쉬쉬했다고, 마치 정상회담이 무슨 범죄라도 되는 양 다그치며 비난을 퍼부었을 것이다.

정상회담 발표가 영남 지역 보수적 유권자들의 단결을 유도해 자신의 낙선을 거들었다는 노무현씨의 판단은 이해할 만하다. 그러나 개인적 이해로 원칙을 대치하는 것은 우리가 아는 노무현씨답지 않은 태도다. 부산에서의 낙선이 오늘의 노무현씨를 만들었다는 결과론을 떠나서도 그렇다. (02.6.6)


살아남은 자의 부끄러움

“갑오년 농민군의 좌절을 생각하며 식욕을 잃는 한국인이 얼마나 될까? 권인숙의 모멸감이나 박종철의 공포를 상상하며 치를 떨 수 있는 감수성이 이 사회에 얼마나 남아 있을까? 그들을 일상의 의식 바깥으로 밀어내는 내 건망증과 불감증 앞에서 나는 절망한다.”

1980년 5월에 나는 스물두 살이었다. 지금 나는 꼭 그 갑절의 나이가 되었다. 그 해 5월에 대학 졸업반이었던 나는 지금 한 인쇄업체의 계약직 사원이다. 그 5월의 기억들이 또렷하지는 않다. 5월1일에 교정에서 계엄령 철폐를 촉구하는 시위가 시작되었던 것 같다.

한두 차례 학교에서 밤을 새운 기억이 아렴풋이 떠오른다. 13일부터인가 사흘간 서울 시내를 누빈 학생 시위대에 나도 뇌동자로 끼어 있었던 듯하다. 차가 다니지 않는 서울역-남대문 일대를 구호와 노래 속에서 걷는 것은 불안하면서도 유쾌한 경험이었다. 그 날이 아마 15일이었을 것이다.

계엄령이 제주도에까지 확산되고 전국 대학에 휴교령이 내려진 17일이 일요일이었다는 기억은 엉클어진 회상 속에서도 비교적 또렷하다. 그 날 조간 신문을 읽으며 불편한 예감으로 ‘피의 일요일’이라는 말을 떠올렸으니까. 그리고는 곧 광주와 관련된 흉흉한 소문이 나돌았고, 이내 그 소문이 사실로 확인되었다. 1979년 10월26일 저녁 서울 궁정동에서 시작된 ‘서울의 봄’은 1980년 5월27일 새벽 광주 금남로의 전남도청에서 끝났다. 어쩌면 그 봄은 1979년 12월12일 저녁 서울 한남동에서 이미 바스러져버렸는지도 몰랐다. 사실 그 해 봄은 매순간 바스러질 것 같았던 위태위태한 봄이었다. 이어진 여름은 길고 추웠다.

지난 22년을 나는 소박한 하층 프티브루주아로 살았다. 나는 결혼을 했고, 아이들을 낳아 길렀고, 단속적으로 직장 생활을 했다. 서울이 지겨워져 외국을 떠돌기도 했다. 내가 어디에 있든,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것은 내 가장 큰 관심사였다. 그렇게 세월이 흘렀다. 어느덧 내년이면 큰아이가 스물두 살이 된다. 지난 22년동안 내가 몇 차례나 그 해 5월의 광주를 정녕 아프게 되돌아보았을까를 생각하면, 내 몸에 들러붙은 이기주의에 구역질이 난다. 내가 내 큰아이의 나이였을 때, 4·19는 이미 내게 까마득히 먼 역사였다.

그것이 내가 태어난 뒤의 역사인데도 그랬다. 제가 태어나기도 전에 있었던 광주의 5월은 내 큰아이에게 훨씬 더 까마득하게, 그래서 저와 무관하게 느껴질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그 일은 이미 지난 세기의 역사다.

1987년 6월 이전까지 5월 광주는 대학 교정이나 자취방 안에서만 전수되는 외경(外經)이었다. 제6공화국이 들어선 뒤 그것은 ‘광주민주화운동’이라는 밋밋한 이름으로 ‘오피셜 스토리’에 편입됐다. 그러나 그것의 실질적 복권이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그것을 오로지 ‘지역’이라는 코드 안에 가두려는 집요한 노력은 꽤 성공적이었다. 게다가 망각은 인간의 본성에 속한다.

타인의 불행을, 또는 앞선 세대의 불행을 자기 것으로 느낄 수 있는 상상력도 인간에게는 턱없이 부족하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비참을 생각하며 잠을 설치는 한국인이 얼마나 될까? 갑오년 농민군의 좌절을 생각하며 식욕을 잃는 한국인이 얼마나 될까? 아니, 더 가까이는 권인숙의 모멸감이나 박종철의 공포를 상상하며 치를 떨 수 있는 감수성이 이 사회에 얼마나 남아 있을까? 그들을 일상의 의식 바깥으로 밀어내는 내 건망증과 불감증 앞에서 나는 절망한다.

5월 광주의 그림자에서 벗어나려면

때로, 역사는 탐구되는 것이 아니라 구성되는 것이라는 의사(擬似) 허무주의의 유혹을 받는다. 모든 역사는 기록하는 자의 역사라는 생각, 또는 적어도 주류의 역사라는 생각 말이다. 그 생각은 누구도 어떤 당파성의 자장(磁場)에서 벗어나기는 어렵다는, 차라리 벗어나서는 안된다는 생각이기도 하다.

5월 광주에 아직 그림자가 드리워 있다면, 그것은 5월 광주가 아직 충분히 많은 벗들을 못 만났기 때문일 것이다. 그 벗들을 늘리기 위해서는 망각과 싸워야 하고 무심과 싸워야 한다. 이것은 역사 일반에 적용되는 말이다. 비판자들을 간첩으로 몰아 교수대로 보낸 자가 박정희라는 것을 우리가 잊어버릴 때, 전두환의 삼청교육대에서 짐승처럼 학대받았던 사람들이 나와는 무관하다고 생각할 때, 그래서 망각과 무심의 각질 속에서 박정희와 전두환의 협력자들에게 사람 좋은 미소를 보낼 때, 역사는 또 다른 도살자의 손을 통해 반드시 우리에게 보복할 것이다. 이것은 다른 누구에게 앞서 나 자신에게 건네는 자경(自警)의 말이다. 겁 많아 살아남은 자의 부끄러움으로 삼가 5월 영령들의 명복을 빈다. (02.5.23)


노동절의 몽상 ‘무위도식’

“‘노동 사회’에서 ‘문화 사회’로의 이행을 주장하는 이들의 궁극적 목표는 노동 시간이 제로로 수렴되면서도 사람의 삶이 위엄을 갖추는 상태이다. “일하기 싫다. 그래도 생활은 보장해 달라.” 메이데이를 맞아 꾸어보는 꿈이다.”

최근에 사귄 한 젊은 친구가 내게 “선배는 파티 오거나이저시라면서요?”라고 물었다. 이 사람 저 사람 불러내 술자리를 만드는 것이 내 취미라는 이야기를 누군가에게 들었다는 것이다. 파티 오거나이저? 당(黨) 오르그? 정당 조직책? 그 친구가 민주노동당 당원이라는 데 생각이 미친 나는 “파티 오거나이저는 그 쪽이지 뭐” 하고 웃으며 되받았다.

그 얼마 뒤 나는 파티 오거나이저라는 신종 직업이 정말로 있다는 걸 알았다. 파티의 기획에서부터 진행까지 전과정을 처리하는 게 그 사람들의 일이라고 한다.

파티 오거나이저랄 것까지는 없지만, 노는 물이 서로 다른 친구들을 한자리에 모아 놀이판을 만드는 짓을 내가 곧잘 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놀자는 전화질에 내가 능동적인 것은 사람을 묶는 데 특별한 취미가 있어서가 아니라, 친구들에 견주어 그나마 한가하기 때문이다. 벌이가 시원찮은 직장에 밥줄을 대고 있는 탓도 있겠지만, 나는 받는 임금만큼만 일하자는 주의이고, 하루 먹을 만큼만 하루에 번다는 주의이다. 갑자기 몹쓸 병에라도 걸린다면? 상상하기도 싫다.

그런데 이 정도의 헐거운 일도 이젠 하기가 싫다. 팔순이 다 된 대통령이 정사를 관장하고 있는 이 노년 사회에서 40대 중반은 팔팔한 청춘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만, 나는 벌써 은퇴를 생각한다. 은퇴? 뭘 했다고 은퇴? 스물다섯에 첫 직장이라고 잡은 게 신문사이고, 지금까지 줄곧 신문사·잡지사 변두리에서 글이나 팔아먹고 살았으면서, 노동다운 노동이라고는 해 본 적이 없으면서 무슨 은퇴? 그렇지만 나는, 일답지 않은 이 일에서도 이젠 은퇴하고 싶다. 할 수만 있다면.

놀고먹고 싶다는 것이 비윤리적 욕망일까

은퇴 뒤의 내 꿈은 거실에 추리소설과 영화 테이프를 쌓아놓고 그것들을 야금야금 소비하는 것이다. 아내와 재잘거리며 산책을 하고 소풍을 가는 것이다. 자고 싶으면 아무 때나 늘어지게 자는 것이다. 그리고 물론, 건강이 허락하는 한 친구들과 술을 마시는 것이다. 나는 이 말을 하며 헤밍웨이의 소설 <해는 또다시 떠오른다>를 떠올린다.

그 소설 속 인물들의 메마른 허무감과 절망적 쾌락을 곱씹어본다. 그들의 술 마시기와 여행과 연애를 선망한다. 나도 그들처럼 일을 멀리하고 감정을 소비하며 살고 싶다. 물론 나는 그들의 허랑방탕 덕분에 문학사적 광휘를 얻게 된 ‘길 잃은 세대’가 아니다. 나는 1920년대의 그들보다 열 살은 더 먹은 ‘돈 없는 계급’일 뿐이다. 그런데도 나는 그들처럼 놀고먹고 싶다. 그것은 비윤리적 욕망일까? 일하지 않는 자는 먹지도 말아야 할까?

계간지 <문화과학> 그룹은 몇 년 전부터 앙드레 고르나 안토니오 네그리 같은 유럽 이론가들의 작업에 기대며 ‘노동 사회에서 문화 사회로의 이행’이라는 주제에 풀무질을 하고 있다. 그들은 노동 예찬이 초역사적으로 자명한 윤리가 아니라 특정한 역사적 시기의 이데올로기라는 점을 지적하고, ‘우리는 일하고 싶다.

그러니 일자리를 달라’는 요구를 ‘우리는 일하기 싫다. 그래도 생활을 보장해 달라’는 요구로 바꾸자고 주장한다. 이들이 ‘노동 거부’ 테제를 통해 궁극적으로 도달하고자 하는 문화 사회는 삶이 노동에 전적으로 포획되지 않는 사회, 자아를 실현하는 예술적 창조적 표현 활동이 만개한 사회이다.

과학 기술 혁명에 바탕을 둔 자동화가 급격히 진전해 ‘노동의 종말’이 거론되고, 고루 나누기만 한다면 세상의 모든 사람이 충분히 먹고 살 만큼 생산력이 확보된 시점이어서, 이들의 전망을 잠꼬대로 치부할 수만은 없다. 나는 다만, 이들의 ‘문화 사회’라는 말을 더 급진적으로 ‘놀이 사회’라는 말로 바꾸고 싶다. 문화 사회든 놀이 사회든 노동 배제가 소득의 감소로 이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각 부문의 사회 운동·문화 운동을 통해 시장 메커니즘과 국가 장치들에 대한 시민 사회의 통제를 확보해야 한다는 것이 노동 거부론자들의 주장이다. 결국 파티 오거나이저가 되기 위해서는 우선 운동 오거나이저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노동절의 기원이 된 1886년 시카고 헤이마켓 시위는 8시간 노동제, 곧 노동 시간 단축을 위한 것이었다. 그것의 궁극적 도달점은 노동 시간이 제로로 수렴되면서도 사람의 삶이 위엄을 갖추는 상태일 터이다. 메이데이를 맞아 꾸어보는 꿈이다. (02.5.9)


‘문화적 소수파’에 거는 희망

“지금 ‘노풍’이라고 불리는 현상의 한 측면은 우리 사회에서 양적으로 다수파이면서 문화적으로 소수파였던 집단과 그 동조자들이 제 몸집에 걸맞은 문화적 몫을 요구 하는 것이다. 이들은 지금 낡은 가치의 사다리를 손질하고 싶은 것이다.”

우선 군걱정으로 몇 마디 얹는다. 나는 <시사저널>의 스태프가 아니다. 그렇다는 것은 이 글이 <시사저널>의 문화적·정치적 입장과 무관하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나는 <시사저널>의 오랜 독자로서, 이 글이 지닌 정치적 편향이 이 잡지의 문화적 음역(音域) 바깥에 놓이지는 않으리라고 판단했다.

누가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가 될지 단정하기는 아직 이르다. 그러나 나는 개인적으로 노무현씨가 후보로 뽑히기를 바란다. 그리고 나아가서 올 12월에 그가 이 나라의 다음 대통령으로 뽑히기를 바란다. 그 이유는 많다. 그것을 한 문장에 구겨 담자면 노무현씨가 우리 사회의 문화적 소수파를 대표하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문화적 소수파라는 말로 가리키는 것은 사회 통념과 관행의 질서 속에서 불이익을 받고 있는 집단이다. 기존 가치 체계의 변두리에 자리 잡은 집단이라고 바꾸어 말할 수도 있겠다.

문화적 소수파는 양적(量的) 소수파와 포개질 수도 있고 어긋날 수도 있다. 예컨대 우리 사회에서 이른바 명문대 졸업자들은 양적 소수파이면서 문화적 다수파다. 여성은 양적으로 남성과 엇비슷하지만 문화적으로 소수파다. 노동자는 양적 다수파이면서 문화적 소수파다. 장애인이나 외국인 노동자는 양적으로도 문화적으로도 소수파다. 지금 ‘노풍(盧風)’이라고 불리는 현상의 한 측면은 우리 사회에서 양적으로 다수파이면서 문화적으로 소수파였던 집단과 그 동조자들이 제 몸집에 걸맞은 문화적 몫을 요구하는 것이다. 이들은 지금 낡은 가치의 사다리를 손질하고 싶은 것이다.

문화적 소수파의 주장이 오히려 정당할 수도

흘끗 보아도, 노무현씨의 삶과 주장에는 문화적 소수파의 흔적이 짙다. 그의 정규 교육은 상업 고등학교에서 끝났다. 그래서 한나라당의 최 아무개라는 사람으로부터 ‘교육을 제대로 받지 않은 사람’이라는 말도 들었다. 노무현씨는 고등학교 졸업 이후의 이력을 통해서 한 사람의 최종 학력은 그의 지적 능력과 별 관련이 없다는 것을 명쾌하게 입증했지만, 그것이 최 아무개씨에게 깊은 인상을 준 것 같지는 않다.

최근 한나라당의 대통령 후보가 되겠다고 나선 그 최 아무개씨는 서울대 법대를 나왔다. 나는 민주당 경선에서든 대통령 선거에서든, 자기 교육 배경이 특별히 자랑스럽지 않은 사람들은 모두 노무현씨를 지지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물론 최 아무개씨만큼 ‘교육을 제대로 받은 사람들’ 가운데 노무현씨를 지지하는 사람이 있으면 말릴 생각은 조금도 없다.

노무현씨는 한반도에 평화를 정착시키기 위한 대북 화해 정책이 계속되기를 희망한다. 그는 또 공기업의 민영화나 정리 해고가 너무 섣불리 이루어져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그는 국가보안법을 없애고 굳이 남겨두어야 할 조항이 있다면 형법에 흡수시키는 것이 좋겠다고 말한다. 이 모든 주장 때문에 그는 민주당 안의 경쟁자와 한나라당으로부터 ‘좌파’라는 소리를 듣고 있다.

물론 나는 그가 좌파라는 주장에 전혀 동의하지 않는다. 그의 주장 대부분에 공감하는 내가 스스로를 우파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나는 혁명을 꿈꾸지 않는 좌파는 좌파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또는 적어도 시장 경제를 옹호하는 좌파는 좌파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노무현씨는 혁명과 거리가 먼 사람이고, 시장 경제를 옹호한다고 분명히 밝혔다.

그러나 만약에 그의 정적들이 주장하듯 노무현씨가 구태여 좌파가 되어야 한다면, 그 좌파는 우리 사회에서 비록 문화적으로는 소수파이겠지만(왜냐하면 ‘좌파’라는 낙인은 통념과 관행에 매개되어 불이익을 낳으므로) 양적 다수파인 것이 확실하다. 노무현씨의 ‘좌파성’은 평화 애호, 복지 중시, 인권 존중 같은 요소들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런 지향은 우리 사회의 구성원 다수가 공유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우리 사회의 ‘좌파’가, 곧 전쟁에 반대하고 복지와 인권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노무현씨를 지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지금 노무현씨는 우리 사회의 문화적 다수파와 유기적으로 연결된 몇몇 특권적 신문들로부터 십자포화를 맞고 있다. 그리고 거기 의연히 맞서고 있다. 그 의연함이 지속될까? 정녕 그러기를 바란다. 일관성은 그의 또 다른 매력이었다. 그러나 늘, 희망은 흐릿하고 불안은 또렷하다. (02.4.25)


장정일의 자유도 소중하지만…

“예술이나 예술가, 학문이나 학자들을 치외법권 지대에 두려는 성스러운 노력은 일반적 수준에서 자유에 대한 법의 제재를 줄여가려는 세속적 노력으로 바뀌어야 한다.”

베르나르 프랑크라는 프랑스 문학평론가가 있다. ‘갈리그라쇠이유’라는 말을 만들어 저널리즘에 널리 유통시킨 사람이다. 갈리그라쇠이유는 프랑스 출판 시장을 손아귀에 넣고 문학상을 쥐락펴락하는 갈리마르·그라세·쇠이유 세 출판사 이름의 앞부분을 따 만든 말이다. 그래서 이 말은 프랑스의 출판 권력을 상징한다.

프랑크는 시사 주간지 <르누벨옵세르바퇴르>의 고정 칼럼니스트인데, 그의 최근 칼럼을 읽다가 재미있는 주장을 발견했다. ‘내가 이번 선거에서 시라크도 조스팽도 찍지 않겠다고 마음먹은 이유 가운데 하나는 대통령 직과 총리 직을 맡고 있는 그들 치하에서 사강이 금고형을 선고받았기 때문이다. 드골이나 퐁피두나 미테랑 치하에서라면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은 독서인이었다. 나는 사르트르에 대해 드골이 한 말을 기억하고 있다. 나는 퐁피두가 기자회견 중에 암송했던 시를 기억하고 있다. 나는 딱 한번 미테랑과 함께 헬리콥터를 탔는데, 그 때 그는 그라크의 책을 읽고 있었다.’

잠깐 배경 설명을 하자. 프랑스 유권자들은 이 달과 내달에 걸쳐 새 대통령을 뽑는다. 현직 우파 대통령 자크 시라크와 좌파 총리 리오넬 조스팽이 결선 투표에서 맞붙을 가능성이 거의 100%다. 19세의 소르본 학생이었던 1954년에 <슬픔이여 안녕>이라는 세계적 베스트 셀러를 쓴 소설가 프랑수아즈 사강은 지난 2월 조세포탈죄로 금고 1년 집행유예 1년형을 선고받았다.

예술가의 ‘열외성 인정’은 매우 위험스러운 논리

드골이 사르트르를 두고 했다는 말은 이렇다. “그를 내버려두지. 볼테르를 잡아들일 수는 없잖아.” 알제리 독립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대 말, 사르트르는 알제리에 주둔한 프랑스 군경이 비판적 알제리인들에게 가한 고문을 격렬히 비판하며 알제리 민족해방전선과 연대했고, 장송으로 대표되는 프랑스 내 급진 좌파의 폭력 사용을 과감히 옹호했다. 그 때 드골은 사르트르를 반란죄로 잡아들이자는 측근의 제의를 거절하며 볼테르 운운했다고 한다. 미테랑이 헬리콥터 안에서 읽었다는 책의 저자 쥘리앵 그라크는 다소 비대중적인 소설을 쓴 20세기 작가다.

나는 프랑크의 발언에 담긴 생각이 무용할 뿐만 아니라 해롭다고 생각한다. 그의 발언은 강준만이 문화특권주의라고 부른 태도의 세련된 예다. 문화특권주의는 부르디외가 폭넓게 상징적 폭력이라고 불렀고, 강준만이 폭을 좁혀 지식 폭력이라고 부른 현상으로 이어지게 마련이다.

사실 한국의 지식인들도 프랑크류의 이런 생각에 깊이 감염되어 있다. 조정래의 <태백산맥>에 검찰이 관심을 보였을 때도, 장정일의 <내게 거짓말을 해봐>가 판사에게까지 읽히게 되었을 때도, 가수 전인권이 마약 복용으로 어려운 처지에 놓였을 때도, 지식인들이 그들을 변호하며 기댄 버팀목 가운데 하나는 예술(가)의 열외성(列外性), 예술(가) 존중이었다. 즉 <태백산맥>의 ‘좌경성’, <내게 거짓말을 해봐>의 ‘음란성’, 마약 복용의 ‘반사회성’은 관련된 예술(가)의 가치를 통해 상쇄될 수 있다는 생각이 부지불식간에 깔려 있었다. 이것은 사르트르가 비록 국사범이지만 볼테르만큼이나 위대한 지식인이니 그대로 놓아두자는 생각과 구조적으로 비슷하다. 나는 이것이 매우 위험스러운 논리라고 생각한다.

법은 누구에게나 일반적으로 적용되어야 한다. 법 적용의 예외는 법의 권위를 무너뜨린다. <태백산맥>이나 <내게 거짓말을 해봐>에 내려진 유죄 판결이 부당했던 것은 그것들이 빼어난 예술품이어서가 아니라(나는 지금 그것들이 빼어난 예술품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 판결이 대한민국 시민이면 누구나 누려야 할 표현의 자유를 부정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전인권에 대한 유죄 판결에 논란이 있을 수 있는 것은 그가 빼어난 뮤지션인 것과는 상관없이 그 판결이 자유의 한계에 대한 논의와 깊은 관련이 있었기 때문이다.

기실, 사강은 1995년 코카인 복용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은 뒤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한,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라고 말한 바 있다. 예술이나 예술가, 학문이나 학자들을 치외법권 지대에 두려는 성스러운 노력은 일반적 수준에서 자유에 대한 법의 제재를 줄여가려는 세속적 노력으로 바뀌어야 한다. 자유는 볼테르나 사르트르에게만 소중한 것이 아니다. (02.4.11)


사진으로 생각해 본 국가보안법

“김정일 사진을 벽에 걸어두는 행위는 처벌을 받는다. 게바라 사진을 컴퓨터 화면에 띄워두는 행위는, 이젠 별일 없이 넘어가는 일이 많지만, 역시 같은 죄를 구성한다. 두 행위는 똑같이 촌스럽다. 그러나 촌스럽다는 것이 형벌의 대상이 될 수는 없다.”

어느 누군가가 자취방에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사진을 걸어두고 아침저녁으로 문안 인사를 드리는 것과 컴퓨터 바탕 화면에 마르크스나 게바라의 사진을 띄워 두는 것 사이의 본질적 차이는 무엇인가?”

민주노동당에서 내는 <이론과 실천>이라는 잡지 최근호를 뒤적이다 맞닥뜨린 문장이다. 이 문장이 담긴 글은 민주노동당과 사회당의 통합 논의에서 걸림돌이 되고 있는 듯한 ‘반(反)조선로동당’ 문제를 다룬 특집에 포함되어 있었다. 나는 진보 정당의 당원이 아니다. 그리고 아마 진보 정당 지지자도 아닐 것이다. 그래서 두 당 사이의 통합 논의에 대해 아는 바도 거의 없다. 그러나 어쩌다가 읽게 된 <이론과 실천>에서 만난 그 문장은 내게 깊은 울림을 주었다. 나는 이 문장을 맥락에서 떼어내 읽고 또 읽었다.

위 문장은 의문문 형태를 취하고 있지만 설의법에 실려 있다. 다시 말해 이 문장은 자취방에 김정일의 사진을 걸어두는 것과 컴퓨터 바탕 화면에 마르크스나 게바라의 사진을 띄워두는 것 사이에는 아무런 본질적 차이가 없다고 말하고 있다. 나도 같은 생각이다. 그것은 그야말로 취향의 문제일 뿐이다. 위 문장의 필자는, 자취방에 김정일의 사진을 걸어두는 행위를 용납하지 않으면서 그 자신들은 컴퓨터 바탕 화면에 마르크스나 게바라의 사진을 띄워두며 그걸 자랑스러워하는 사람들을 힐책하고 있는 것 같다.

노파심에서 덧붙이자면,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사진 운운하는 그 필자의 말은 온전한 비유였을 뿐이고, 나 역시 지금 남한에서 김정일의 사진을 자취방에 걸어놓은 사람은 한 사람도 없거나 거의 없다고 믿는다.

그러나 설령 누군가가 정말로 자신의 자취방에 김정일의 사진을 걸어놓는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마르크스나 게바라의 사진을 컴퓨터 바탕 화면에 띄워두는 것과 본질적 차이가 없는 것은 여전히 사실이다. 마르크스-게바라파(派)는 물론 거기에 본질적 차이가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 머리 속에 있는 그 본질적 차이는 현실의 역장(力場) 안에서는 고작 지적 패션의 차이일 뿐이다. 왠지 세련되어 보이는 마르크스나 게바라와 왠지 촌스러워 보이는 김정일의 차이 말이다.

그런데 사실 내 눈에는 자취방의 김정일 사진과 컴퓨터 바탕 화면의 마르크스-게바라 사진이 똑같이 촌스러워 보인다. 말을 바꾸어, 마르크스-게바라파에게 자취방의 김정일 사진이 우스꽝스럽게 보이는 것만큼이나 내게는 컴퓨터 바탕 화면의 마르크스-게바라 사진이 우스꽝스러워 보인다. 누구의 팬이 되기에는 내가 너무 속되어 버린 탓이기도 하지만, 도대체 핀업이나 컴퓨터 바탕 화면으로 팬의 예를 갖추는 실천이 대뜸 내 미감을 거스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굳이 그 유행에 합류하자면, 나는 내 방 벽에 연기자 한혜숙씨 사진을 걸어놓거나, 내 컴퓨터 바탕 화면에 가수 이연실씨 사진을 띄워두겠다.

김정일·게바라 사진이든, 이연실 사진이든 ‘취향의 문제’

물론 김정일파나 마르크스-게바라파에게는 그것이 못마땅할 수도 있다. 여기서 다시 강조해야 할 것은 그것이 오로지 취향의 문제라는 사실이다. 김정일파든 마르크스-게바라파든 한혜숙-이연실파든, 자신들의 우상을 위해서 사람을 해치거나 강도질을 하지 않은 다음에야 숭배 행위 자체를 처벌하는 것은 우스꽝스럽다.

그런데 이 우스꽝스러운 일이 대한민국에서는 버젓이 일어나고 있다. 지금 김정일의 사진을 벽에 걸어두는 행위는 국가보안법 제7조가 규정하는 반국가단체 찬양고무죄를 구성해 엄중한 처벌을 받는다. 마르크스나 게바라의 사진을 컴퓨터 화면에 띄워두는 행위는, 이젠 별 일 없이 넘어가는 일이 많지만, 역시 같은 죄를 구성한다.

위에서 말했듯 나는 자취방 벽에 김정일의 사진을 걸어두는 행위나 컴퓨터 바탕 화면에 마르크스-게바라 사진을 띄워두는 행위나 똑같이 촌스럽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촌스럽다는 것이 형벌의 대상이 될 수는 없다. 김정일파나 마르크스-게바라파가 보기에는 분명히 촌스러울, 한혜숙씨나 이연실씨 사진을 간직하는 행위를 처벌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민주당 경선이 시작되기 전 날 MBC <백분 토론>에 당내 경쟁자들과 함께 출연한 노무현 후보는 <조선일보> 문제와 국가보안법 문제가 이번 경선의 중요한 쟁점이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나도 거기 동의한다. 사실 국가보안법 문제는 <조선일보> 문제의 한 원소다. (02.3.28)


사이버 주소의 ‘평등’과 ‘개성’

“내가 특별히 좋아하는 e메일 아이디 가운데 하나는 선배 언론인의 behappy다. 그것은 자신의 다짐을 표현한 것이기도 하겠지만, 독자에게 던지는 덕담이기도 할 것이다. 그 분의 글을 읽고 나면 조금 더 행복해지는 것 같다.”

구조주의의 융성에 이바지한 유럽의 한 문필가는 일본의 번지(番地) 체계에 흥미를 보이며 그것이 유럽의 공간성에 대립하는 시간성의 표징이라고 지적한 적이 있다. 유럽에 살아본 사람들은 잘 알겠지만, 그 곳에서는 주소를 가지고 집을 찾기가 매우 쉽다.

좁다란 골목길까지 포함해서 모든 거리에 고유한 이름이 붙어 있고, 번지수는 좌우 홀짝 순으로 일련 번호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어느 건물에 매겨진 주소가 파리 라스파유 거리 222번지라면, 그 건물은 같은 거리 220번지와 224번지 사이에 있고, 그 건물 맞은 편에는 221번지나 223번지가 있을 것이라고 비교적 안전하게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일본은 그렇지 않은 모양이다. 그것은 일본의 주소 체계를 본뜬 우리 경우를 생각해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모든 거리에 이름이 주어지지도 않았을 뿐더러, 번지수가 기하학적 질서에 바탕을 두지도 않았다. 예컨대 222번지의 옆이나 건너편에 반드시 223번지가 있으리라는 보장이 없다. 실제로 그 두 건물은 아주 멀리 떨어져 있는 일이 흔하다. 일본이나 한국에서 222번지가 뜻하는 것은 그 번지의 건물이 223번지 건물에 공간적으로 인접해 있다는 사실이 아니라 시간적으로 인접해 있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 222번지라는 숫자는 그 건물이 221번지 건물이 들어선 이후에 그리고 223번지 건물이 들어서기 이전에 세워졌다는 것을 드러낸다.

그런 차이에도 불구하고 주소라는 것이 일종의 신분 증명서 구실을 하는 것은 유럽과 동아시아가 비슷하다. 파리의 몽파르나스에 주소를 둔 사람이 몽마르트르에 주소를 둔 사람보다 계급 사다리에서 위쪽에 있을 확률이 높은 것은 서울의 강남구 청담동에 주소를 둔 사람이 관악구 봉천동에 주소를 둔 사람보다 벌이가 나을 확률이 훨씬 높은 것과 마찬가지다. 사이버 세계의 민주주의를 예찬하는 사람들이 꼽는 그 세계의 장점 가운데 하나는 그 곳에서 주소의 평등이 이뤄지고 있다는 것이다. 사이버 세계에서는 연봉이 수억원에 이르는 변호사와 천만원이 채 못 되는 일용 노동자의 주소가 똑같이 unitel.co.kr일 수 있다. 물론 마거릿 버트하임이 harvard.edu라는 주소를 예로 들었듯 사이버 세계라고 해서 주소의 구별 짓기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경우도 예컨대 snu.ac라는 주소는 이 주소 소지자의 신분이 ‘고귀’하다는 것을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그렇더라도 사이버 주소가 현실 주소에 비해 민주주의라는 가치에 더 친화적이라는 지적은 대체로 옳은 것 같다.

현실 주소에 비해 민주주의라는 가치에 더 친화적

사이버 주소가 현실 주소와 다른 점은 발신자와 수신자의 이름에도 있다. 현실 주소에 딴 이름을 사용하는 것은 비교적 드문 일이지만, 사이버 주소에서는 그것이 조금도 별난 일이 아니다. 물론 이름 짓기에 취미가 없는 네티즌들은 자기 본명의 알파벳 이니셜을 e메일 아이디로 삼는 손쉬운 길을 택하기도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사이버 주소에 붙일 자기 이름을 새로 정한다. 그리고 그 딴 이름은 그 사람에 대해 무언가를 얘기한다. 흔한 관행 가운데 하나는 자기가 좋아하는 유명인을 딴 이름으로 삼는 것이다.

그런데 대중의 사랑을 너무 많이 받고 있는 유명인의 경우에는 그것도 쉽지 않다. 자기 주소지에 이미 그 이름이 등록돼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럴 때의 편법이 철자의 끄트머리를 바꾸거나 숫자(예컨대 자신의 생년)를 덧붙이는 것이다. <지옥의 한 철>의 시인을 좋아했던(이라고 과거형을 쓰는 것은 그가 죽었기 때문이다) 내 친구는 생전에 rimbaux를 자신의 딴 이름으로 삼았다. rimbaud가 이미 등록돼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아는 어느 문인의 e메일 아이디는 limage53이다. limage는 ‘이미지’를 뜻하는 프랑스어 단어에서 아포스트로피를 뺀 것인 듯한데, 이 문인 이전에도 이미지를 사랑하는 누군가가 그 이름을 등록해놓은 모양이다. 도발적인 극우 선동 발언으로 우리 시대를 주름잡고 있는 한 문필가의 e메일 아이디는 mongol이다. 그는 칭기즈칸과 그의 대제국을 숭앙하는 사람이다.

내가 특별히 좋아하는 e메일 아이디 가운데 하나는 선배 언론인의 것이다. 그의 딴 이름은 behappy다. 그것은 늘 행복하게 살겠다는 자신의 다짐을 표현한 것이기도 하겠지만, 자신의 글을 읽어주는 독자에게 던지는 덕담이기도 할 것이다. 그 분의 글을 읽고 나면 조금 더 행복해지는 것 같다. (02.3.14)


신을 안 믿을 자유를 달라

마틴 스코시즈 감독의 영화 <예수의 마지막 유혹>에 얽힌 한 바탕 소동은 우리 사회에서 종교가 행사하고 있는 힘의 성격에 대해 새삼 생각해볼 기회를 주었다. 그리스 작가 니코스 카잔차키스가 쓴 같은 제목의 소설에 바탕을 둔 이 영화는 미국에서 제작된 지 10년 만인 지난 1998년에 국내 수입이 허용되었으나 기독교계의 거센 반발에 부딪혀 등급 심의가 보류된 바 있다.

그로부터 3년여 뒤인 지난해 11월, 영상물등급위원회는 이 영화의 새로운 수입판권 소유자의 신청에 따라 작품의 내용을 다시 검토한 뒤 ‘18세 이상 관람 가’ 등급을 매김으로써 우리 영화팬들에게 이 말썽 많은 영화를 볼 길을 열어주었다. 그러나 그 즉시 한 개신교 목사가 <예수의 마지막 유혹>이 기독교를 모독했다며 서울지법에 영화상영금지 가처분신청을 냈고, 법원은 이 신청을 기각했다. 영화는 지난 1월25일 개봉됐으나 며칠 만에 간판을 내렸다. 이 영화의 단명이 주로 기독교계의 적대감 때문이었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예수를 겁 많고 신심이 부족한 범부(凡夫)로 묘사한 이 영화는 미국에서도 논란을 빚었다고 하니, 이번 소동이 꼭 우리 사회만의 별난 현상이라고 볼 이유는 없겠다. 문제는 차라리 종교에, 특히 기독교처럼 타자의 배제를 자신의 존재 근거로 삼는 유대교 계열의 종교에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오랜 기독교 전통을 지닌 사회들에 견주어도 지금 우리 사회의 기독교가 다소 중뿔난 것은 사실이다. <예수의 마지막 유혹>을 둘러싼 소동은 우리 사회에서 기독교가 휘두르고 있는 힘의 온건한 형태일 뿐이다.

지하철이나 길거리에서 고함을 질러대며 사람들에게 지옥불의 두려움을 주입하려 하는 활동가들부터 청와대에서 목탁 소리를 몰아내야 한다고 주장했던 개신교 목사들에 이르기까지, 우리 사회의 신자들은 전도 열정이 너무 크다. 그런 열정을 반영하듯, 서울에는 교회가 너무 많다. 어둠이 내린 뒤 남산에 올라가 서울을 보라. 이 도시의 밤하늘을 비추는 것은 교회의 붉은 십자가들이다. 그 십자가들을 볼 때, 나는 왠지 마음이 불편하다.

독자들도 짐작했겠지만, 나는 신자가 아니다. 나는 불가지론과 무신론 사이에서 동요한다. 신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 신이 기독교 신자들이 상상하는 전능하고 지선(至善)한 신은 아니기 쉬울 것이다. 그 전능과 착함으로 오랜 세월에 걸쳐 빚어놓은 세상이 고작 이런 꼴일 수는 없을 테니 하는 말이다.

그러나 그 신이 힘이 부족하거나 충분히 선하지는 않을 수도 있고, 또 전능과 지선을 갖추고 있더라도 이신론자들이 상상하듯 세상을 한번 빚어놓은 뒤에는 세상사에 간여하지 않기로 마음먹었을 수도 있으니, 신이 존재할 가능성을 아예 부정할 필요는 없겠다. 아무튼 나는 통상적 의미의 신자가 아니다.

그러나 기독교에 대한 내 생각이 어떻든, 나는 신교(信敎)의 자유를 지지한다. 누구든 신이 있다고 믿을 자유는 있는 것이다. 사실 역사적으로 신교의 자유는 양심 및 사상의 자유의 고갱이를 이루어왔다.

그런데 신교의 자유는 신을 믿을 자유만이 아니라 신을 믿지 않을 자유까지를 포함한다. 우리 사회의 기독교인들 다수는 그걸 용납하지 않는 것 같다. 복음을 전파하는 것은 신자들의 자유다. 그러나 그 자유는 기독교적 믿음 체계에 적대적이거나 무관심한 사람들의 자유를 해치지 않는 선에서 행사되어야 한다.

사회 윤리의 기반이 반드시 종교일 필요가 있는가

사람이 종교를 발명해낸 것은 두려움 때문이다. 그리고 두려움은 잔혹함의 어머니다. 교회의 역사가 피로 얼룩진 것은 그래서 놀라운 일이 아니다. 십자군 원정이나 종교 재판은 그 피 묻은 역사의 좋은 표본이다. 역사에서 늘 그래 왔듯, 이 순간 한국에서도 교회는 자유와 관용의 확대를 가로막고 서 있다. 양심적 병역 거부의 합리적 실현 수단으로 받아들일 만한 대체 복무제에 가장 적대적인 목소리는 ‘정통’ 기독교계에서 나온다.

그 제도가 여호와의 증인이라는 ‘이단’에 이롭기 때문이다. 복음서에 대한 자유주의적 해석을 통해 기존의 기독교를 더 너그럽게 만드는 것도 중요하다. 그러나 주후(主後) 세번째 천년에 들어선 이제는 무신론의 체계적 보급도 생각해볼 만하다. 사회를 구성하는 윤리의 기반이 반드시 종교일 필요는, 다시 말해 두려움·잔혹함일 필요는 없을 것이다. (02.2.28)


정말 하기 싫은 ‘전라도’ 이야기

“소설가 이문열씨는 한 강연회에서 책 반환운동을 펼친 화덕헌씨에 대해 ‘부산 사람이 아닐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화씨를 만난 자리에서 당신의 부모님 고향이 전라도가 아니냐고 되풀이 캐물었다고 한다.”

한국 사회에서 전라도라는 기호가 함축하고 있는 문화적 뜻빛깔은 대체로 부정적이다. 그것은 속됨, 천스러움, 가난, 배덕, 너절함 같은 이미지를 걸치고 있다. 이런 이미지는 특히 중년을 넘긴 영남 사람들의 상상력 속에 짙게 새겨져 있지만, 그것은 다른 지역 사람들이나 젊은 세대에게도 있다. 이런 함의가 이른바 밥상머리 교육이나 술자리의 객담을 통해 종횡으로 퍼져왔기 때문이다. 주로 문화적 차원에 갇혀 있던 전라도의 이 부정적 함의는 1971년의 대통령 선거를 기점으로 정치적 차원으로 확산되었다. 그 선거에서 박정희 캠프가 선도한 지역주의 공작은 한국사에서 정치적 지역주의의 현대적 기원으로 기록될 만하다.

전라도라는 기호의 부정적 뜻빛깔이 1971년을 기점으로 문화적 차원에서 정치적 차원으로 비화했다는 것은 바로 그 시기부터 전라도라는 지역과 김대중이라는 개인이 몸을 합쳐 하나의 기호가 되었다는 뜻이다. 문화적 층위의 전라도와 정치적 층위의 전라도는 서로를 보완하고 강화하며 1970년대 이후 한국의 정치·문화 지형에서 매우 민감한 의미망을 구축해 왔다. 인격화한 전라도라고까지 할 만한 김대중씨가 1997년 선거에서 대통령으로 뽑힌 뒤에도 전라도가 지닌 문화적 뜻빛깔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물론 정치적 차원에서 이 기호는 새로운 부차적 시니피에(의미 구조)를 획득하게 되었다.

전라도에 들러붙어 있는 부정적 함의들을 논리적으로 격파하기는 쉽다. 그러나 편견이라는 것이 본디 그렇듯 전라도라는 기호를 구성하고 있는 부차적 의미 자질들도 논리 이전의 자발적 몽매 정서의 문제여서, 깔끔한 설명으로 그 그림자를 거두어내기는 어렵다. 그것은 특히 나 같은 전라도 사람에게 더 어렵다. 듣는 사람들이 내 목소리에서 보편적 이성보다는 전라도 사람의 방어 심리를 더 손쉽게 읽어내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 이 글을 쓰는 기분도 더럽기 짝이 없다.

내가 환기하려고 하는 것은 시민운동 단체들을 홍위병이라고 몰아쳤던 이문열씨와 거기 항의해 이문열씨의 책 반환운동을 펼쳤던 화덕헌이라는 이 사이에 있었던 어떤 장면이다. 화덕헌씨는 부산에서 사진관을 운영하는 37세의 남성이다. 벌써 석달도 훨씬 전에 일어난 일을 지금 다시 들추는 것이 궁상스럽기도 하다. 그러나 대부분의 언론이 이 사건에 대해 침묵을 지켰기에 이 사소하지만 의미심장한 에피소드를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이문열씨는 지난해 10월16일 부산의 한 강연회에서 “부산 사람들에게 일러바칠 것이 있다”며 화덕헌씨가 “부산 사람이 아닐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 이튿날 화덕헌씨를 만난 자리에서는 화씨의 부모님 고향이 전라도가 아니냐고 되풀이 캐물었다고 한다.

물론 이 사실을 밝힌 것은 화씨다. 그리고 이씨와 화씨 사이의 대화는 두 사람만 아는 것이다. 이씨는 화씨가 밝힌 자신의 발언에 대해 시인도 부인도 하지 않았다. 화씨의 말이 거짓이라면 이씨가 화씨에게 명예훼손죄를 물을 만하고 그 말이 참이라면 공개적으로 사과라도 할 수 있으련만, 그는 ‘대인(大人)’의 예로써 침묵을 지키고 있다.

이문열씨의 반사회적 발언에 문단과 시민은 왜 침묵하는가

사실, 이씨가 지난 십수년 동안 토해놓은 수많은 엽기적 언설들을 생각하면 그의 이 ‘전라도’ 발언에 놀랄 것은 없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술 단지와 잔을 끌어당기며>(<현대 문학> 2001년 10월)라는 문건이 드러내는 이씨의 사람됨은 그런 발언을 능히 예측하게 만든다. 그리고 그것은 한나라당 의원들이 유권자들 앞에서 대수롭지 않게 구사하는 지역주의 선동에 견주면 별 것 아니라고도 할 수 있다. 언필칭 단일 민족 사회라는 한국에서 지역적 소수파에 대한 차별적 발언은 예컨대 유럽 같은 곳에서의 인종적 소수파에 대한 차별적 발언에 견줄 만한 것인데, 대부분의 유럽 국가에서 그런 발언이 형사 처벌 대상이 된다는 지적도 한가한 소리일지 모르겠다. 나는 이문열씨에게 어떤 시민적 양식을 기대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씨의 이런 반사회적 발언을 두고 문단을 포함한 시민 사회 일반이 침묵하고 있는 것은 놀랍다. 이문열씨와 추미애 의원 사이의 다툼을 놓고 <조선일보> 지면에서 이문열씨를 거든 이청준씨께 묻는다. 문인까지 갈 것도 없이 한 시민의 처지에서, 이문열씨의 발언은 받아들일 만한가? 아니 전라도 사람으로서, 이문열씨의 발언은 받아들일 만한가? (02.2.7)


나의 <인터내셔널> 청취기

“요즘 나는 일자리에서, 잠자리에서 <인터내셔널>이 담긴 CD를 듣는다. 나는 비록 앞으로도 마르크스주의자가 될 일이 없겠지만, 이 노래는 내 눈길을 늘 사회적 소수파에게로 가 닿게 만들 것이다.”

<인터내셔널>을 처음 들은 것은 1980년대 초다. 직장 생활을 막 시작하며 대학원에 다니던 그 시절, 내 가장 큰 (그리고 어쩌면 유일한) 즐거움은 ‘민중 가요’를 듣는 것이었다. 그 야만적 세월에 욕지기를 느끼면서도 사회를 바꾸기 위해 뭔가를 해볼 의지도 용기도 없던 나는 그저 더 나은 세상을 그리는 노래를 남 몰래 듣는 것으로 내 겁 많은 영혼을 위로했다. 물론 그 시절에조차 나는 마르크스주의에 환상을 품지는 않았다. 나는 한 번도 마르크스주의자였던 적이 없다. 그것은 이중의 의미에서 그러한데, 집단의 폭력에 대한 공포가 내게 거의 생래적이었을 뿐만 아니라, 밑줄을 치며 <자본론>을 정독할 열의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집단적 선동성으로 가득 찬 민중 가요들을 즐겨 들었다는 것은 내가 생각해도 밉살맞을 만큼 모순적이었다.

그 시절 나는 몇몇 대학들 앞에 포진한 이른바 사회과학서점엘 자주 들렀다. 책을 사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불법으로 생산된 민중 가요 테이프들의 가장 일반적인 유통 경로가 사회과학 서점들이었기 때문이다. 그 때 사들인 테이프가 100개는 넘는 것 같다. 음질이 그리 좋지 않았던 그 테이프들에는 일제 시대 항일 운동가들이 불렀던 혁명 가요에서부터 1970년대 말 이래 청년의 정액처럼 힘차게 솟구쳐 나온 운동 가요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민중 가요가 담겨 있었다.

나는 학교나 거리의 시위 현장에서가 아니라 그 테이프를 통해 <공장의 불빛>이나 <님을 위한 행진곡>이나 <5월> 같은 노래를 배웠다. <인터내셔널>도 그 가운데 하나였다. 제작처가 밝혀지지 않은 한 테이프에 <인터내셔널>이 영어로 담겨 있었다.

시절 바뀐 1980년대 말부터 ‘허밍’으로 읊조려

좀더 좋은 음질로 내가 <인터내셔널>을 듣게 된 것은 1980년대 말 비디오로 본 <레드>라는 영화에서였다. 미국 저널리스트로 러시아 혁명의 참여적 관찰자가 된 존 리드의 생애를 그린 그 영화에서 1917년의 10월 혁명 장면에 당연하게도 <인터내셔널>이 삽입되었다. 이 영화 속에서, <인터내셔널>의 소박 단순한 멜로디는 화면 속의 군중 모습과 포개지며 그 선동성을 유감없이 발휘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 즈음부터 나는 술이 약간 들어가면 <인터내셔널>을 허밍으로 읊조리는 버릇이 들었다. 물론 세월이 그만큼 좋아졌다는 뜻이겠다. 전두환 시절 같았으면, 아무리 술이 들어가도 내 집요한 자기 검열은 그런 호사를 방해했을 것이다. 아니, 노태우 시절이라고 하더라도, 현실 사회주의 체제가 완강히 살아있었다면, <인터내셔널>을 읊조리며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1992년에 난생 처음 파리에 가보았다. <인터내셔널>의 고향인 그 도시에서 나는 이 노래의 프랑스어 가사를 익혔다. 그 뒤로 <인터내셔널>은 내가 애창하는 ‘샹송’ 넘버에 끼게 되었다.

1990년대의 다섯 해 동안 파리에 살면서 나는 자주 페르라셰즈 묘지에 들러 <인터내셔널> 작사자 외젠 포티에의 무덤을 찾았고, 집에 돌아오는 길에는 그 노래를 부르며 혁명이 완전히 사라져 안전해진 시대를 비겁한 역설로 구가했다.

환란의 여파로 서울에 돌아와 살며 나는 한동안 <인터내셔널>을 잊고 있었다. 그런데 지난해 세밑에 한 젊은 친구가 내게 새해 선물로 CD 한 장을 주었다. 그 CD는 처음부터 끝까지 온통 <인터내셔널>로 채워져 있다. 내가 가사를 아는 프랑스어만이 아니라, 영어·스페인어·포르투갈어·독일어 그리고 내가 짐작할 수 없는 여러 언어들로 <인터내셔널>이 담긴 CD다. 요즘 나는 일자리에서, 잠자리에서 이 CD를 듣는다. 1980년대에 일자리에서, 잠자리에서 민중 가요 테이프를 들었듯. 나는 비록 앞으로도 결코 마르크스주의자가 될 일이 없겠지만, 이 노래는 내 눈길을 늘 사회적 소수파에게로 가 닿게 만들 것이다.

“대지의 저주받은 자들이여 일어서라/ 굶주린 도형수들이여 일어서라/ 이성이 그 분화구 안에서 천둥친다/ 이젠 끝이 왔다/ 과거를 백지 상태로 만들자/ 노예들이여 일어서라, 일어서라/ 세계는 근본부터 뒤바뀌리라/ 지금은 우리가 아무 것도 아니나 이제 모든 것이 될 터/ 이것은 최후의 투쟁이라네/ 단결하세 그러면 내일/ 인터내셔널이 인류가 될 테니.”(02.1.24)


미국에서 목격한 ‘날것의 가난’

“시장은 출라의 가난을 씻어내고 싶다고, 그래서 미시시피 주의 흑인 여성으로서 첫 공화당원이 되었다고 말했다. 그녀는 출라가 문맹률에서도, 청소년 범죄율에서도 미국 최고라고 덧붙였다.”

지난해 12월11일. 출라의 이본 브라운 여사 댁에 도착한 것은 약속 시각인 오후 3시를 5분쯤 넘겨서였다. 여사는 손에 카메라를 든 채 자기 집 앞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렉싱턴(무라카미 하루키 덕분에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보스턴 근교의 렉싱턴이 아니라 미시시피 델타에 자리 잡은 렉싱턴이다)에서부터 나를 에스코트한 마시 보안관은 여사에게 나를 인계하고 사람 좋아보이는 웃음을 남기며 일터로 돌아갔다. 내가 머물던 잭슨 시(미시시피 주의 주도다)의 크라운 플라자 호텔 앞에서 차에 몸을 실은 지 거의 2시간 만이었다. 여사는 나를 자기 집 앞에 세우고 사진을 찍었다. 나는 그녀의 손을 끌어 나란히 선 뒤 마침 길을 가던 한 여성에게 부탁해 여사와 함께 사진을 찍었다. 그 여성은 브라운 여사를 잘 알고 있었다. 하긴, 출라에서 여사를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51세인 그녀는 지난해 7월3일 출라의 첫 여성 시장(이라기보다는 읍장이라고 하는 것이 낫겠다. 출라는 인구 2만5천 남짓의 타운이니까)으로 뽑혔다.

브라운 여사의 집은 교회를 겸하고 있었다. 그녀의 남편인 로버트 브라운 씨가 그 교회의 목사다. 여사는 그 집에서 남편과 친정 부모와 딸과 살고 있었다. 그녀에게는 딸이 하나 더 있는데, 그 큰딸은 결혼해서 시애틀에 산다고 했다. 함께 사는 딸은 고등학교 영어 교사다. 여사는 그 딸을 매우 자랑스러워했다.

1970년대 새마을사업 연상시키는 여성 시장의 의욕

가족을 소개한 뒤 여사는 출라의 이 구석 저 모퉁이로 나를 안내했다. 출라는 그 곳에 살던 원주민들 말로 ‘붉은 여우’라는 뜻이라고 한다. 한눈에도 출라는 가난한 곳이었다. 여기가 세계에서 제일 부자 나라라는 미국일까 싶을 정도로 변변한 건물이 거의 없었다. 아니, 타운 인구의 5% 정도를 이룬다는 백인들의 거주 지역만은 그럴듯했다. 그러나 그 나머지 구역에서는 여사가 살고 있는 교회가 제일 반반한 건물처럼 보였다. 많은 흑인들이 트레일러를 임차해 살고 있었고, 그것마저 없는 노숙자들도 보였다. 우체국을 겸하고 있는 시청(이 아니라 읍사무소겠지) 건물도 초라하기 짝이 없었다. 여사는 미시시피 주 정부의 지원을 받아 새 청사를 짓고 있다고 귀띔해 주었다.

함께 걸으며 여사는 노예 시절부터의 자기 가계를 얘기했다. 그 가계는 미시시피 델타를 벗어나 본 적이 없었다. 그러니까 그녀는 진짜 미시시피 여자였다. 여사는 자신이 알기로는 내가 출라를 방문한 첫 한국인이라며, 출라의 시장으로서 그것을 명예롭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녀의 겸손에서 소박한 진심이 느껴져, 나 역시 진심을 담아 명예로운 것은 오히려 내 쪽이라고 대답했다. 그녀는 한국인 저널리스트가 출라를 방문하게 될 것이라는 말을 잭슨 시의 국제방문객센터로부터 듣고 몹시 놀랐다며, 어떻게 이 후미진 곳에 올 생각을 하게 되었느냐고 물었다. 나는, 다소 겸연쩍게, 미국의 마이너리티 사회를 보고 싶다는 뜻을 국무부 관리에게 비쳤는데, 아마 그것 때문에 국제방문객센터가 출라를 내 방문지로 골랐을 것이라고 말했다. 여사는 그렇다면 실망하지 않았느냐며 깔깔 웃었다. 출라에서는 백인 사회가 마이너리티 아니냐는 뜻이었다. 나 역시 껄껄댔다. 출라의 가난은 단순히 내 인상이 아니었다. 여사는 출라가 미국에서 네 번째로, 미시시피 주에서 세 번째로 가난한 곳이라고 확인해 주었다. 그녀는 출라가 문맹률에서도, 청소년 범죄율에서도 미국 최고라고 덧붙였다.

캣피시의 맛에 내가 넋을 놓았던 저녁 자리에서 여사는 출라의 가난을 씻어내고 싶다고, 그래서 미시시피 주의 흑인 여성으로서는 자신이 첫 공화당원이 되었다고 말했다. 부시는 거기 고무되어 그녀를 크게 격려했다고 한다. 여사의 남편은 공화당에 투표하는 흑인은 커널 샌더스(켄터키 프라이드 치킨 창업자)에게 투표하는 병아리와 같다는 객담이 흑인 사회에 있다며, 아내의 결정을 걱정스러워했다. 여사는 또 혹시 출라가 한국의 어떤 도시와 자매 결연을 맺으면 그 도시의 도움을 받을 수 있지 않겠느냐고 내게 조심스럽게 묻기도 했다. 1970년대의 새마을 사업을 연상시키는 그녀의 의욕에 나는 도리질을 칠 수가 없었다. 그 날것의 가난을 목격한 터였기 때문이다. 미시시피의 밤은 깊어가고 있었다. (02.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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