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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과 근대-이성복을 찾아서 -이인화(본명 류철균)

작성자별아저씨|작성시간08.07.22|조회수327 목록 댓글 0





동성로 거리 성대한 장례행렬처럼 붐비는 사람들 속에서 나는 때때로 이성복이 보고 싶었다. 4년 전 그를 처음 만났을 때 나는 겨우 학부 2학년의 평론가 지망생이었고 그는 이미 80년대를 상징하는 대시인이었다.



1.근대적 삶의 시인


서울의 하재봉 선배로부터 마침 대구에 내려가 있으니 이성복 시인을 만나보고 대담을 써주지 않겠느냐는 전화가 왔다. 방위병으로 보내는 지겹고 더딘 나날에 불현듯 이성복을 만나보라는 제의는 정말 신선하게 들렸다. 이런 경박한 흥분은 내가 아직 젊음을 주체하지 못하는 탓이리라. 반복되는 하얀 밤들은 내게 얼마나 무겁고 힘겨운 것인지. 저녁 먹으면 자고 새벽 1시쯤 일어나 이 책 저 책 뒤적이다가 6시에 출근하는 생활이 벌써 네 달째 접어들고 있었다. 그러나 실상 더 힘겹고 무거운 것은 고향의 무게가 아닐까. 비로소 이타카에 돌아온 오딧세우스의 절망을 알 것 같았다. 손바닥처럼 빤한 거리와 거리, 후배들이 바글바글한 부대, 부모가 있는 평일과 애인이 기다리는 주말 누구라도 이런 처지에서는 도리가 없는 것이다. 그저 진지한 인간의 얼굴을 하고 돼지처럼 살쪄 가는 것이다. 나는 조이스의 레오폴드 브룸, 아니 걸어가는 시체다.

동성로 거리 성대한 장례행렬처럼 붐비는 사람들 속에서 나는 때때로 이성복이 보고 싶었다. 지금 이성복은 내가 철들 무렵부터 줄창 탈출을 꿈꾸었던 이 분지 盆地도시의 대학에서 밥벌이를 하고, 시를 쓰고, 공부를 하고, 자식을 키우고 있는 것이다. 생활인으로서의 이성복, 그것은 나에게 무척 실망스럽고도 못견디게 궁금한 주제였다. 실망스럽다는 말을 오해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나는 자기 자신은 잘 먹고 잘살면서 너(시인)는 고독과 가난 속에 살고 고통받다가 매독에나 걸려 죽어라, 하고 은근히 강요하는 그런 통속적인 독자가 아니다. 넋두리를 하자면 나에게 <문학>이란 언제나 <생활>의 저 편에 펄럭이는 보헤미안의 깃발이었기 때문이다. 모던한 것, 더 새로운 것, 자신의 내부에 결핍된 것, 반 反고향적인 것, 그런 것이 문학이었고 따라서 나의 <문학>은 곧 <근대 die moderne>에 다름 아니었다.

<근대>가 부르는 소리를 따라갔다가 결국 시인이 못되고 평론가가 되어 돌아왔지만 나는 아직도 결혼을 하고 아이를 키우며 늙어갈 자신이 없고, 더구나 그러면서 <문학>을 할 자신이 없다. 인생에 성실하고 한 여자에게 성실하고 자식에게 성실하면서 작품에도 성실하다는 것이 도대체 말이 되는가. 그렇게 할 것 다하고 작품을 쓸 수 있다면 나도 쓰겠다. 작품이 그렇게 쉬운 것이라면 누군들 작가가 못되고 시인이 못되랴. 이같은 오기는 나의 내부에 각인된 미학적 근대성(모더니티)의 표징이며, 그토록 극복하려 해도 스스로 어쩔 수 없는 열등감의 흔적이다. 그렇다면 그런 오기를 한 특정한 시인에 대해 적용하고 실망스러워하는 것은 파렴치한 일이 아닌가. 나는 왜 이성복 앞에서만 <인생에 대한 성실과 작품에 대한 성실은 절대로 양립할 수 없다>는 명제를 강요하는가.

이같은 억지는 이성복의 제 1시집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가 그의 뒤를 잇는 80년대 시인 모두에게 제시했던 시작 詩作의 방향성에 관계된다. 실상 『뒹구는 돌 』만큼 내가, 우리 세대 전체가 자기 자신의 가능성에 대해 압도적인 회의와 열등감을 느낀 시집이 또 있었을까. 어느 20대 시인의 시집 첫머리가 다음과 같은 절규로 시작하는 것도 너무나 자연스런 풍경이 아닐까. <나, /나에게서/이성복 김정환 황지우의 천재를/기대 말라! [ ]아, 왜 유행가 속에는 / '아무런 말도 하지 말라'는 귀절이 자꾸 나오나.>이성복의 『뒹구는 돌 』은 바로 이런 시가 씌어져야 한다는 거부할 수 없는 감동으로 우리 비재 非才의 딱딱한 피딱지를 쥐어뜯었다. 그때 우리는 아픔과 절망 속에서 우리가 이성복의 매혹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최소한 십 년이 걸릴 것을 예감하며 새로운 시작 詩作의 방향성을 배웠다.

『뒹구는 돌 』이 우리에게 가르쳐 준 것, 그것은 가장 근대적인(모던한)정신을 가장 탈근대적인(포스트모던한)형식으로 표현하는 방법론의 힘이었다. 내가 다른 글에서 지적했듯이 『뒹구는 돌 』의 처절한 고통의 체험들을 지탱하고 있는 것은 전형적인 모더니스트의 정신적 고립주의이다. 시인이 썩고 병든 세상을 살아가면서도 세상의 악마성에 굴복하지 않고 자신의 고결함을 지킬 수 있었던 근거는, 자신의 주의에 소용돌이치는 사건들을 모두 <완벽하게 거짓된 삶>, 유적 流謫의 삶으로 바라보는 고독한 모더니스트의 자의식이었던 것이다. 세상에 본래부터 강한 인간이란 없다. 이성복이 그토록 생생한 치욕과 수모, 갈등, 상처, 고통들을 신화공간이나 상징으로우회하지도 않고 철저히 은유의 정공법으로 대결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처럼 세계와 나 사이의 근본적인 단절을 상정하는 고립주의의 버팀목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모더니스트였고, 김수영에 필적하는 탁월한 모더니스트였다. 우리가 『뒹구는 돌 』의 이성복으로부터 일상 생활과 습관적 인식의 속박들에서 절연되어 파편화된 주관의 명민한 감각으로 경험한 여러 가지를 표현하는, 전형적인 근대적 삶의 시인을 연상한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더욱 문제적인 것은 그렇듯 세계와 나 사이의 근본적인 단절을 상정하는 이성복의 모더니즘이 결코 무력한 주관주의나 자족적인 엘리티즘으로 전락하지 않았던 이유가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물론 그 가장 직접적인 이유는 정과리가 <문법과 비유의 싸움>이라고 정의한 80년대 초의 특수성이 될 것이다. 즉 현실을 현실로 합법화하는 정치의 논리에 대항하여 현실을 다시 추악의 늪으로 던지기 위해서는 먼저 현실을 비현실로, 시인 자신의 주관에 의해서는 용납될 수 없으며 자신의 내적 본질과는 무관한 것으로 규정하는 목소리가 요청되었다는 것. 그러나 그의 후배들에게 더욱 의미심장했던 또 하나의 이유는 그가 시집 전체를 통해 예시했던 탈근대적, 탈근대시적 형식에 있었다. 『뒹구는 돌 』은 동시대의 숨가쁜 삶에 비해 시가 너무나 작다는 느낌, 시에 대한 전시대의 묵시적인 동의 아래 깔려 있던 그 막연한 회의감을 전면에 노출시켰다. 이성복은 개개의 시가 주는 파편화된 주관의 발화에 의해 단속적인 <감동의 엄습>을 의도하던 기존의 시집 구성방식을 일변시켰다. 그는 개개의 시편들을 자서전적이고, 성장소설적인 시집 전체의 이야기구조 속에 배치시킨다. 그리하여 43편의 서정시가 모인 한 권의 시집이 <1959년 유년시절을 벗어나 세상에 눈뜬 한 아이가 병과 아픔의 악마적인 세계를 유적하며 괴로워하다가 다시 인생을 긍정하고 세상에 대한 때늦은 사랑을 시작한다>는 이야기구조를 통해 한 시대의 집단적 삶이 %껴안고 있는 <전체의 조망>을 보여 줄때, 이미 그 각각의 시편들은 이제까지 우리가 알고있던 그런 <시>일 수 없었다.

이성복의 시는 세계에 대한 미메시스적 관심을 포기하고 언어 자체가 갖는 의미론적 힘과 역동성에 관심을 집중하는, 이른바 <근대시>의 좁은 울타리를 거부한다. <아버지, 아버지 씹새끼, 너는 입이 열이라도 말 못해> (「그해 가을」)에서 보이는 부성 父性에 대한 격렬한 부정은 바로 이성복 자신에 선행하는 기존의 시에 대한 부정과도 흡사하다. <가난한 몸은 고결했>다고 말하는 (「정든 유곽에서」)그의 언어 자체는 결코 고결하지 않았다. 그는 일상어에 대한 시어의 존재론적 우위성이라는 이제까지의 고정관념을 비웃으며 서슴지 않고 일상적 담론의 비속한 차원으로 뛰어든다. 일견 시 자체의 문제에만 집중된듯한, 매우 기교적으로 보이는 현란한 묘사와 자유연상의 이미지들, 기괴한 오브제들은 오로지 기교를 부정하기 위한 기교를 의도하는 초현실주의적 충동에서 발원하고 있다. 그의 오브제들은 일체의 형이상학적 의미확산을 포기한다. 그가 말하는 <감옥>은 현실의 그 <감옥>이며, <초식민족 사내들>은 현실의 그 <초식민족 사내들>이다. 또 일정한 서사구조를 형성하는 시집 전체의 지향성은 이성복의 시 하나하나를 일반적인 서정시의 모습에서 일탈하게 한다. 다시 말해 시적 화자의 정조를 순간적인 체험의 강렬한 직접성에 일치시키기 위해 내용에 관계없이 현재시제를 갖는 보통 서정시와 달리 그의 시들은 체험을 주로 과거시제, 완료상의 상황으로 형상화하는 회상의 형식을 갖는 것이다.

이처럼 근대적인 정신을 탈근대적인 형식으로 표현하기, 가난한 몸이 고결했음을 결코 고결하지 않은 방식으로 말하기는 80년대 시의 방향성을 선도하는 것이었다. <시어/일상어>라는 진부한 이분법의 파괴, 정교한 자유연상의 이미지에서 역설적으로 나타나는 초현실주의의 충동, 시집 전체를 관류하는 간텍스트적 서사구조 이 모든 것이 이른바 <해체시><형태파괴><형식 실험>등의 에피세트로 묶여 지는 수많은 이성복적 경향들을 낳았음은 물론이다. '83년 <나는 파괴를 양식화한다>는 황지우의 명제가 출현했을 때 이같은 탈근대시적 방향성은 이미 80년대 문학의 거스를 수 없는 혁명이 되고 있었다.

그렇다면 우리의 이같은 이해에 대해 지금의 이성복은 어떤 생각을 갖고 있을까. 이성복이야말로 근대시의 발생론적 토대를 철저히 내면화한 모더니스트이며 동시에 근대시의 편협한 울타리를 넘어서고자 했던 포스트 모더니스트라는 인식을 그 자신은 인정할 것인가. 시인 자신이 동의하고 안하고는 별개의 문제이지만 아무튼 그를 만나 그것을 물어보고 싶었다. 시인의 집에 쌀독이 어떻더라는 것, 자식이 어떻고 아내가 어떻더라는 것 연애가 어떠했다는 것, 나는 그런 것에 관심이 없었다. 나에게 절실한 것은 사상, 사상의 표정이었다. 자기 내부의 결핍 부분을 메우기 위한 <이럴 수밖에 없음 Es muss sein>의 표정이었다. 나는 자신의 콤플렉스와 싸우는 인간의 불행한 모습이 보고 싶었다. 안타깝게도 그것만이 나에겐 <문학>이다.


2. 근대성이란 무엇인가


성서 城西로 가는 길은 멀었다. 시의 동쪽 교외에 있는 부대에서 버스를 두 번 갈아타고 성서까지 가는 길은 족히 90분이 걸렸다. 그 곳에는 이성복이 '82년부터 불문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는 계명대 성서캠퍼스가 있다. 계명대는 50년대 중반 기독교장로회 경북노회의 <계명기독대학>으로 출발한 학교다. 그후 미국 북장로선교회의 파격적인 지원을 얻은 신태식 총장이 대명동과 성서에 각각 수려한 캠퍼스를 가진 오늘날의 매머드 대학을 만들었다. 말하자면 철저한 기독교 자유주의신학 계통의 학교라는 것. 그러나 북장로선교회의 후원을 입은 다른 여러 대학들과는 달리 토착의 뿌리가 대단히 강하다. 6월항쟁 이후 자율화의 입김이 서리자마자 교수협의회는 신태식 박사의 아들 신일희 전 총장을 다시 총장으로 추대한 바 있다. 여기에는 부자 2대에 걸쳐 쌓아올린 인망, 신일희 교수의 학자적인 기품 외에도 멋대로 자기 총장을 쫓아냈던 서울의 정권에 대한 지역사회의 반감이 응숭깊게 숨어 있을 터였다.

성서 인터체인지로 접어드는 버스 속에서 나는 서울 문단의 가치평가에 태무심한 저 기독교적이고 토착적인 대학이 이성복에게 참으로 좋은 직장이라고 생각했다. 서울 쪽의 대학에서 평론가들의 무수한 찬사를 접하는 동료 교수들과 이성복을 거의 반신 半神처럼 숭배하는 학생들에 둘러싸인 이성복 <교수>를 상상해 보라. 지옥이 따로 없을 것이다. 버스를 내려 그의 연구실이 있는 인문관으로 들어섰을 때는 4시가 넘어 짧은 해가 뉘엿뉘엿 기울고 있었다.

처음 가보는 인문관 안은 종잡을 수가 없었다. 복도에 불도 켜지 않아 컴컴했고 현관에는 몇 층에 누구의 방이 있다는 패찰도 없었다. 창문이 없는 복도를 따라 연구실이 줄지어 있는 모습은 『장미의 이름』에 나오는 14세기 수도원의 그 장서각처럼 음산했다. 방마다 한 명의 사제와 천여 권의 정신의 시체들이 들어 있는 복도를 헤매는 것처럼 기분나쁜 일이 있을까. 연구실 문마다 코를 들이대다시피 더듬거리고 있을 때 마침 안면 있는 국문과 교수 한 사람이 반가워하며 이성복의 방을 가르쳐 주었다.

방에 들어서자 책상에 붙어 앉아 무엇인가 쓰고 있던 이성복 교수가 웃으며 맞아 주었다. 4년 만에 다시 보는 그의 인상은 별로 변한 것이 없었다. 4년 전 대구 동아백화점 옆의 카페 <시인>에서 김용락씨의 소개로 그를 처음 만났을 때 나는 겨우 학부 2학년의 평론가 지망생이었고 그는 이미 80년대를 상징하는 대시인이었다. 그때 그가 자신의 제자보다도 어린 대학 후배에게 보여 주었던 겸허함을 나는 아직 잊지 못한다. 그는 내가 1학년때 써서 계명문학상을 받은 『황지우론』을 기억해 주었고, 동숭동 학림그룹 시절의 황지우에 대해 친절한 회상을 들려 주었다. 돌이켜 보면 내가 그에게서 받은 인상은 황지우와 대비되어 더욱 각별해진다.

황지우라는 이름은 부드러운 불길처럼 나에게 각인되어 있다. 그의 존재가 다른 사람에게 안겨 주는 생기발랄함과 따뜻함은 그의 후배들에겐 친밀한 전설과 같다. 어느해 여름 새벽 두 시가 넘도록 신림동의 카페 <베리>에서 같이 술을 마시고 미적미적 집으로 가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옆에 있던 어떤 친구가 「아! 서른이 넘어서도 사람이 저렇게 착할 수 있다니!」하고 망연자실하던 것을 기억한다. <깃들데라곤 몸뿐이니/추운 소리여/잠시 나한테 머물다 가소/정이 많아 세상을 뚫고 나가지 못하니/ 내가 세상에서 할 일은 /세상을 죽어라 그리워하는 것이려니/혹시 사람이 오나/빗자루 들고 길 밖으로 나간다>의 시인 황지우는 언제나 우리 세대의 은밀한 불길이었다. 서로 죽이고 싶도록 미워하고 머리를 몇 바늘 꿰맬 만큼 싸운 뒤에도 우리는 어눌하게 <지우형>의 근황을 나누며 화해의 커피를 데우지 않았던가.

그에 비해 이성복의 성격은 얼마나 담백한 것인가. 그에겐 황지우의 그 악의 없는 허세나 순진하리만큼 직접적인 애증의 표현은 약에 쓸래도 찾아볼 수 없다. 이성복에 대한 나의 첫인상은 낭만적 우수를 감추기 위해, 그리하여 세상과 우중 愚衆으로부터 자기를 지키기 위해 고도의 자기절제를 획득한 당디의 그것이었다. 한 인간의 미의식은 대개 그의 외모에서 숨길 수 없이 드러나는 법이다. 왜냐하면 사람은 결국 자기가 되고자 하는 바를 닮기 때문이다. 미에 대한 관념은 하도 끈끈한 것이라서 옷차림이나 헤어스타일, 심지어 표정이나 손짓에까지도 미묘하게 스며드는 것이다. 예컨대 김병익 선생의 유행에 한참 뒤진 테가 굵고 검은 안경은 신문사와 출판업계라는 저널리즘의 세계로부터 자신의 고전주의적인 열정을 지켜 내려는 방패 같은 것이 아닐까. 서영은의 짧은 머리에서 엿보이는 소녀적 정결성에의 집착, 늘 야전적 野戰的 감수성이 보는 이를 압도하는 박영한의 두툼한 털스웨터, 『가끔은 주목받는 생이고 싶다』로 증명된, 와이셔츠 위에 조끼를 받쳐입고 안으로 화려한 머플러를 부풀리는 오규원의 스타일리스트적 자기이해, 29세의 나이를 16, 17세로 보이게 하는 장정일의 앳된 표정 스포츠머리 운동화 그리고 거기에서 찾아지는 피터 팬 지향성 이런 예들에 비하면 이성복의 외모는 어떤가.

그의 모습은 앵그르와 드라크로아가 공존하는, 신고전주의와 낭만주의의 터치가 교차하는, 그런 묘한 인물화를 보는 듯하다. 깨끗하게 정돈된 연구실, 정장은 아니지만, 줄을 세운 바지와 구두, 단색의 셔츠는단정하고 담백한 인상을 준다. 그런데 그 셔츠 위엔 대조적인 얼굴이 있다. 셸리의 초상화를 연상시키는 길고 짙은 눈썹, 우수와 감동이 쉽게 명멸할 것처럼 큰 눈동자, 도툼한 아랫입술, 손짓보다도 주로 눈과 고개짓에 의존하는 제스처 이 갈 데 없는 낭만주의자의 얼굴을 결정짓는 것은 기름을 발라 <올백>으로 넘기면 적당할 만큼 긴 앞머리이다.

말하자면 얼굴이 주는 강렬한 낭만주의자의 인상을 단정한 옷차림과 조용한 말씨가 감추고 있었던 것. 이 부조화에는 자기 내부의 무엇과 대화하고 대결하는 자의 고독이 서려 있어서 어쩐지 쉽게 친할 수 없을 것 같은 느낌을 주는 것이었다. 본래 말주변이 없는 나는 그의 근황에 대한 상투적인 질문으로 대화를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두 손을 배 앞에서 깍지 끼고 내년 봄에 인쇄될 박사 논문의 마무리로 바쁘다는 이야기를 한다. 프랑스 상징주의의 선구적인 시인이며 프루스트에 깊은 영향을 끼친 소설가 네르발이 논문의 테마. 그는 요즈음의 근황이란 그저 공부하는 것이라고 재삼재사 강조한다. <공부>라고 발음할 때마다 그의 입가에 잠깐 미소가 머무는 것을 나는 본다. 그 때문일까. 우리는 실제로 공부 이야기를 시작한다. 김수영, 보들레르 30분이 후딱 지나간다.

그때 문에서 노크 소리가 들리고 리포트를 든 여학생이 하나 들어왔다. 잠시 이성복은 그 여학생을 불러 며칠 전의 기말고사 이야기를 하며 꾸중을 한다. 기말고사장에서 뭔가 탐탁지 않은 일이 있었던 모양. 어느 대학에서나 있는 그런 익숙한 풍경에 쓴웃음을 지으며 나는 꾸중듣는 여학생 보기가 민망스러워 창문 쪽으로 몸을 돌린다. 창 밖의 어두워 가는 포도 鋪道는 내가 아직 그렇게 궁금했던 <근대적 삶의 시인> 이라는 주제에 대해 한마디도 꺼내지 못했음을 환기시켜 준다. 마음 한쪽이 썰렁했다.

이것저것 훈계하는 이성복, 저 엄격한 <교수>의 모습 어디에 내가 생각했던 <근대적 삶의 시인>이 깃들어 있을 것 같지 않다. 이 곳에서의 이성복은 정말 잘 어울리는 한 사람의 선생님(생활인)이다. 내가 처음부터 잘못 생각한 것인가 아니면 그가 변한 것인가. 아니 더 혼란스러운 것은 내가 왜 이토록 <근대>라는 문제에 집착해야 하는지 나 자신도 모르겠다는 것이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80년대 전반에 걸쳐 <생은 다른 곳에!>를 외쳐온 우리의 영혼이 이제는 형식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80년대가 끝난 지금 우리가 꿈꾸던 혁명의 불빛은 희미해졌고 절대성에의 열망은 갈피를 잃었다. 동구권의 개혁이 말해 주는 국제사회주의의 흐름은 그동안 변혁운동의 주류를 형성했던 N.L론의 몰락을 확실히 예견케 하고 있지만 어떤 진리가 다시 우리를 고양시켜 줄는지 아무도 모른다.

돌이켜 보면 우리는 근대가 형성한 이 세상으로부터의 탈출을 열렬히 갈망했고 그 탈근대의 형식을 문학에서 찾기도 한다. 그러나 나는 『태백산맥』이나 『남부군』처럼, 과거의 역사에서 야만(빨갱이)이라 규정되었던 패배한 사람들의 운명에 대한 우리의 메시아적 책무를 <회상적 보상>의 형식으로 취급하는 데 반대해 왔다. 그런 형식으로는 다국적 자본주의와 마주친 이 시대의 주인공, 바로 우리의 고뇌를 담을 수 없다. 여기에 이성복과 황지우로 대표되는 80년대 시의 의미심장함이 있다. 거기에는 과거의 패배와 이어져 있으면서도 정확히 지금 여기를 보여주는 <근대>가 있었다. 그렇다면 도대체 근대란 무엇이며 근대적 삶의 시인이란 무엇인가.

이 물음이야말로 보들레르의 『근대적 삶의 화가』(1863)에서 최초로 제거되어 근대예술의 자기이해를 가능케 했던 바로 그것이다. 헤겔을 사로잡았고, 아도르노에겐 헤겔 비판의 요지가 되었으며, 하버마스의 방대한 종합을 낳은 테마. 이광수의 삶을 그토록 문제적이게 하고 김윤식 비평의 독보적인 위치를 지배하며, 이제 김현이 신양身恙의 몸을 기울여 대결하고 있는 바로 그 테마가 아닌가.

여기서 문제되는 근대die moderne란 근대, 현대를 나누는 시대구분의 개념이 아니다. 근대의 정신사적 에토스로부터 분리되는 또 다른 시대로서의 현대란 아직까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자기가 사는 이 시대가 제일 어렵고 문제적이며, 선행하는 모든 시대와 변별되는 것 같다는 동시대인의 환상만이 존재할 뿐이다. 이미 여러 글에서 반복했던 대로 현대란 당대의 contemporary근대인 것이다.

근대는 생산양식의 자본주의적 변화와 더불어 시대의식으로서의 계몽주의 정신에 의해 형성된다. 근대 부르주아사회를 완성하려는 <계몽주의의 계획>을 막스 베버의 『종교사회학』은 다음과 같은 과정으로 설명한다. 첫째 종교나 형이상학에 의해 이룩된 중세의 통일적 세계상(유일신의 세계)을 진 선 미라는 세 개의 자율적인 분야들로 분리시킨다는 것. 둘째 분리된 각각의 인지적 잠재력을 해방시킴으로써 일상의 사회생활을 무지와 미신으로부터 구원한다는 것. 이에 따라 객관주의적 근대과학(진), 보편주의적 도덕 및 법이론(선), 자율화된 예술(미)이 출현한다. 셋째 이렇게 분리되어 미시적으로 탐구되고 탈인격화된 가치영역들은 생활세계의 합리적인 조직화를 통해 행복하고 풍요로운 세계를 창조한다는 것.

그렇다면 이토록 밝고 투명했던 계몽주의의 이상으로부터 어떻게 지금처럼 악마적인 형상의 자본주의 사회가 창출되었는가. 그것은 유일신의 세계로부터 해방되어 점점 더 미분화되고 정밀하게 탐구되는 가치영역들이 서로가 서로에 대해 간섭할 수 없는 <전문가들의 왕국>, 다신교 多神敎의 세계를 이루었기 때문이다. 진리의 신(근대과학)은 아름다움의 신국에 들어갈 수 없고 아름다움의 신(자율화된 예술)은 선함의 신국에 들어갈 수 없으며 선함의 신(보편주의적 도덕과 법)은 진리의 신국에 들어갈 수 없는 세계, 이같은 근대적 삶의 정신적 하부구조를 대변하는 것이 『악의 꽃』(1857)이다. 선하지도 참되지도 않으면서 아름다운 것, 선하지도 참되지도 않기 때문에 아름다운 것이라는 명제가 반사회적인 시편들 속에 꿈틀거리고 있는 이 시집은 근대의 미학적 정화精華와 사회의 상식적 합의가 도저히 화해할 수 없음을 보여 주는 비평적 거울이다. 결국 가치영역들의 분화에 의한 생활세계의 합리적인 조직화는 일상의 상식적 의사소통적 해석학으로부터 유리되어 매일매일의 일상적 실천에 하등의 즉각적이고 필연적인 도움을 주지 못하는 <파편화된 문화>를 낳은 것이다.

이같은 근대의 문화로부터 <근대성>이라는 부르주아적 주관성의 악무한적 진동이 시작된다. 파편화된 문화는 <나는 이렇게, 내 식대로 살겠다>는 주체의 자기주장을 조장하며 주체의 자립화된 자기의식은 파편화된 문화를 강화한다. 이제 안티고네로 하여금 생매장당해 죽을 것을 알면서도 국법을 어기고 오빠의 장례를 치뤄주지 않을 수 없게 했던 <지하의 힘> <너는 반드시 이러이러한 도리를 다하고 살아야 한다>는 인륜성 der Sittlichkeit의 체계, 모든 이들이 인식하는 법칙과 현존하는 관습 Sitte이 갖는 보편성의 형식은 존재하지 않는다. 지상에서 개인이 반드시 귀속해야 할 신의 법칙은 사라졌다.오직 고독하게 보고 생각하고 결단하는 주체중심적 이성만이 참되지도 도덕적이지도 않은 예술, 가치중립성을 고수하는 학문, 보편주의의 휘장 아래 사회의 계급적 실재성을 은폐하는 도덕, 이 모든 근대의 문호를 추동해 가는 것이다. 말할 것도 없이 근대시는 이같은 근대성의 기능적 일부이며 모더니즘은 그것의 가장 명료한 미학적 반영이다.

80년 5월 우리 모두는 형식적 민주주의의 최소한의 가면마저 벗어버린 부르주아 세계의 광폭함을 목도했고, 경악과 분노, 그리고 죄의식 속에서 <시는 먼저 시 자체로 읽혀야 한다>는 전시대의 정식을 파기했다. 비로소 시 자체의 미적 완결성에 집착하는 사고들 자체가 <서울의 봄>이라 표현되었던 억압 없는 의사소통에의 열망과 억압 없는 의사소통을 통한 사회적 합의에의 열망을 분쇄시킨 바로 그 독선적인 이성의 형제임이 확실해졌다. 그렇다. 80년 5월과 제 5공화국은 결코 우발적인 폭거도 군부독재도 아닌, 1960년대 이래의 후기 후발자본주의적 근대화를 통해 이룩된 물질적 복지를 수호하겠다고 주장하는 주체중심적 이성의 자기진행이었다. 소위 <안정의 철학>을 내세운 그 이성---이성의 얼굴을 한 야만 앞에 자신을 제외한 다른 모든 주체의 담화 구성체는 <혼란>이었다. 제5공화국이 폴리스적 윤리학으로부터 분리된 정치 지배기술로서의 정치학, 마키아벨리 이후의 근대정치학으로부터 자신의 담론을 발견하고 자기이해에 도달했듯이, 도 근대화를 통해 완성된 자본주의적 경영체와 관료주의적 국가기구 사이의 기능적인 결합에 의해 자신의 체제를 유지했듯이, 그것은 또한 진리와 도덕의 영역에 눈을 감고 오직 미학--언어의 문제에 관심을 집중하는 근대시에 의해 체제의 정당성 위기를 은폐했다.

80년대의 시인들은 특유의 날카로운 직관으로 이같은 막후의 주인공, 근대성을 포착했고 80년대 시의 의미 있는 전사全史는 <근대시의 부정>에 다름 아니었다. 이른바 <비시非詩>라는 개념 속에 함축된 탈근대를 향한 그들의 의지는 한 시대를 선도해야 할 시인의 예언자적 소명에 부응하는 것이었다. 80년 5월 이후의 시에서부터 차관 도입과 관료 주도로 특징지어지는 60년대 이래의 근대화와 그 자본주의적 전일화 과정 속에 정립된 한국 사회의 근대적 삶과 문화가 최초로 와해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것은 돌이킬 수 없는 정신사의 실험이었다.

한 시대가 가고 새 시대가 시작하는 길목에서 늙은 비평가들은 80년대의 실험을 한때의 정치적 폭압에 의해 나타난 반동 형성으로 규정하려 하고 있다. 이제 세상도 조용해졌으니 다시 순정한 서정시로 돌아가자는 것이다. 나도 정말 그러고 싶다. 정지용과 백석을 배우고 김종삼과 황동규와 정호승을 사랑하는 어떤 젊은이가 고백컨대 그런 시들을 보고 싶지 않겠는가. 그러나 이같은 심정의 부름이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1980)와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1983)의 지식인 문학으로 새로운 시의 형식을 선취한, 나아가 『노동의 새벽』(1983)과 『만국의 노동자여』(1988)의 노동 문학에서 새로운 서정적 주체를 자각한 한국문학사 앞에서 얼마만큼의 설득력을 가질 수 있을까. 지금 내 앞에 바로 그 80년대 시의 주인이 앉아 있다.


3.반근대주의의 표정--인생론적 시론


여학생이 나가자 나는 이성복에게 그의 제1시집 『뒹구는 돌 』과 제 2시집 『남해 금산』사이에 나타난 변화에 대해 물어봄으로써 근대성의 문제로 들어가고 싶었다. 나는 이미 「유적과 회상--이성복론」에서 정리한 바 있는 내 생각을 그에게 피력했다. 그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내 말을 부정했는데 자신은 한번도 모더니스트였던 적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시를 사는 사람>에게 <생활을 사는 일>이 밥벌이 이상의 의의를 가질 수 있을까 하는 나의 전제에 대해서는 더욱 강력히 부정했다. 「아니, 아닌데 나로선 생활이 전부지 뭐. 시는 별거 아닌데 .」

말문이 막힌 나는, 그러나 소위 <생활>에 대한 그런 태도는 제1시집의 세계와 거리가 멀다는 사실, 적어도 『뒹구는 돌 』은 고통과 수모와 치욕의 세상을 살아가는 고독한 모더니스트의 자의식을 담고 있었지 않느냐고 항변할 수밖에 없었다. 이 점은 도저히 양보할 수 없었기에 나는 막스 베버를 들먹이며 열을 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근대적 정신의 본령으로서의 모더니즘, 보들레르의 「악의 꽃」, 근대적 삶의 파편성과 근대적인 미의 일시성 잠정성 등을 운운하다 보니 슬그머니 공자 앞에 문자 쓰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었다. 내게 많은 영감을 주었던 이성복의 논문, 보들레르의 이원성에 대한 이성복의 석사논문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내가 잠잠해지자 잠시 어색한 침묵이 깃들었다. 이성복은 자세를 고치며 제1시집과 제2시집의 차이는 이렇게 생각할 수 있다고 말문을 연다. 즉 시가 세계와 인생을 이해하는 유일한 통로라고 생각하던 시기와 시가 세계와 인생을 이해하는 많은 통로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하는 시기의 차이라는 것. 한때 그는 시만이 인생과 세계의 비의를 보여 줄 수 있다고 확신했으며 시에 인생의 승부를 걸었었다. 그러나 지금 시에 대한 그의 사랑은 변했다. <시에 대한 사랑은 삶에 대한 사랑의 방법적 표현>이 되었다. 시는 그것 자체로 의미를 가지는 것이 아니라 삶에 대한 사랑을 받아 내는 그릇으로서 의미를 갖게 되었다. 이제 시의 의미는 삶 앞에서 시가 스스로를 부정함으로써 얻어진다는 것이다.

나는 시만이 인생과 세상과 이해하는 유일한 통로라고 믿고 시에 인생의 승부를 거는 태도가 어째서 모더니스트의 그것이 아니냐고 따지고 싶었지만 그만두기로 했다. 김수영이라는 도저한 선배를 가진 한국문학사에서 <모더니스트>라는 말은 그 자체가 이미 부정적인 가치평가를 함축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보다도 나는 무엇이 그같은 시론의 이행을 초래했는가, 첫번째 시기와 두번째 시기 사이의 변화를 촉발시킨 시인의 실존적 체험은 어떤 것이었나 하는 의문이 훨씬 의미심장하게 느껴졌다. 그것을 묻자 그는 담담하게 프랑스 유학 이야기를 한다.

'84년 그의 아내가 김화영, 김치수, 곽광수 등이 수학했던 엑스 앙 프로방스의 장학금을 받고 떠나게 되자 그도 학교에 휴직계를 던지고 따라갔던 것. 지중해를 앞에 둔 남불의 그 대학에서 이성복은 프랑스적 삶의 방식이 자기 인생의 절대적인 척도가 될 수 없음을 자각하고 절망한다. 도대체 그의 절망이란 무엇이었던가. <나를 얼마나 몰라주는가> <저들 앞에서 내가 얼마나 왜소한가>하는 자괴감과 열등감이 그것이었다. 뼛속까지 불란서 정신으로 살았던 그가 막상 불란서에 갔을 때는 어디에도자신의 자리가 없다는 사실을 자각한 것이다.

어째서 그토록 당연한 일을 프랑스에 가서야 깨달았느냐고 하는 것은 바보 같은 소리가 될 것이다. 우리의 생을 뒤바꿔 놓는 것은 논리가 아니라 이미지이기 때문이다. 백 마디의 논리적인 문장보다 한마디의 비유가 인간을 격탕시키기 때문이다. 시「여름산」에서 보았듯이 그렇게 오래도록 동경하던 프랑스로의 유학, 그것은 그런 강렬한 이미지들과의 만남이었으리라. 셍 미셸의 포도鋪道가 우리 가난한 영혼을 부르고 오베르의 밀밭이 환각의 햇살을 출렁이는 곳, 이성복은 그곳으로 떠났고 또 절망했다.

이런 류의 절망은 하도 낯익은 풍경이라서 일종의 문학사적 유형학이 가능하지 않을까. 그대문학 성립기부터 있어 온 조선 문사들의 <유학>을 반추해 보면 이성복이 프랑스에 만난 이미지와 거기서 느낀 절망의 의미를 재구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먼저 제1유형 이광수의 경우를 생각해 보자. 그것은 바로 근대와의 만남이었다. 동경, 메이지학원의 전나무숲이 있고 와세다 대학이 있고 부국강병의 열기가 충만한 그 종주국의 수도에서 어떻게 하면 <그 나라와 의를 위해 희생>할 수 있을까를 생각하던 이광수가 만난 것, 그것은 근대화의 휘황한 이미지들이었다. 무지와 미신에 싸인 조국을 생각하면 가치영역의 분화를 통한 생활세계의 합리적인 조직화를 맹렬히 진행시키는 근대 일본의 이미지는 하나의 절대적인 척도였다. 한문문어문화권의 주자학적 통일상은 해체되어야 했고, 문文 사史 철哲을 모두 포괄하는 두루뭉수리한 <문文>개념 역시 분화되어야 했다. 그가 지知와 의意로부터 분리된 정情을 강조하고 육성하는 문학, 사史와 철哲로부터 분리된 문文Literature으로서의 문학을 주장하게 되는 것은 이같은 이미지의 내면화였으리라.

제2유형 임화의 경우. 그것은 운동과의 만남이었다. 박영희를 따라다니며 프로 문학을 배우던 스물 두 살의 청년 임화에게 일본공산당 검거령이 내려진 동경이란 무엇이었던가. 그것은 엄혹한 객관적 정세하에 철저한 비합법 투쟁으로 점철되는 조직 운동의 의미를 가르쳐 주는 곳이었다. 임화는 이북만의 <무산자> 그룹 속에서 뛰어난 조직 운동가로 변모했고 귀국 후 카프를 장악하게 된다.

이성복의 경우는 이 1유형과 2유형 어디에도 속할 수 없다. 제 1유형을 밟아가기엔 그가 떠나온 곳이 1980년대의 한국이었다는 것, 다시 말해 불문학의 계몽주의적 역할이 소중했던 6,70년대의 한국 문단이 아니었다는 것이 가장 중요한 제약이 될 터이다. 그가 단순히 <저들 앞에 내가 얼마나 왜소한가>하는 것에 충격을 받은 이유도 이성복 자신의 역량을 포함하여 이미 성숙한 한국 문학을 증거하는 것이다. 제2유형을 밟아가기에 그는 먼저 유평근 고수의 제자였다. 많은 유학생들이 체제에 비판적인 시각을 갖고 돌아오고 일부는 변혁운동에 몸을 던졌지만 이성복은 항상 그런 거친 지사의 목소리보다 조용한 현자의 숨결을 가르치는 스승을 닮으려 했다. 어떤 이해에도 움직이지 않고 매명賣名을 싫어하며 학자의 길을 성실하게 걸어가는 이 스승에게 그는 참으로 어울리는 제자이다.

그렇다면 이성복과 가장 가까운 것은 제3유형, 이상의 경우다. 이상이 동경으로 건너가 간따의 간뽀마찌에 세든 것은 26세. 그 역시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였다. 결핵으로 찌든 그가 동경한복판에서 자주한 것은 고향이 아니었을까. 여기서 <고향>이란 자신의 원형질을 형성했던 것, 곧 자기 한계를 가리키는 비유다. 「오감도」에 항의하는 독자들을 욕하며 20세기식이어야지 19세기식으로 살다가는 남보다 십수 년 뒤진다고 강변하던 이상은 동경에 와서야 비로소 자기 자신이 19세기식 인간에 다름 아님을 실감하는 것이다. 열등감과 환멸이 교차하는 그의 동경생활은 그의 사신私信과 수필 「동경」에서 절절히 드러난다. <그들은 이상도 역시 20세기의 스포츠맨이거니 하고 오해하는 모양인데 나는 그들에게 낙망(아니 환멸)을 주지 않게 하기 위하여 그들과 만날 때 오직 20세기를 근근히 포즈를 써서 유지해 보일 수 있을 따름이구료!>라든지 <무수한 자동차가 영영히 20세기를 유지하노라 야단들이다. 19세기의 쉬적지근한 내음새가 썩 많이 나는 내 도덕성은 어째서 저렇게 자동차가 많은가를 이해할 수 없으니까 결국은 대단히 점잖은 것이렸다>같은 대목이 그것이다.

이성복의 절망 역시 이와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문학 수업기부터 그에겐 프랑스 근대시가 소중했고, 한국 근대시란 낯설고 이상한 것이었다. 실제로 그는 '82년까지도 김소월이 왜 좋은 시인인지가 전혀 이해되지 않았고 만해 한용운은 놓은 사상과 언어유희가 구별되지 않는 시인으로 여겨졌다고 한다. 그러던 그가 고향 밖에 나가야 고향이었다는, 프랑스에 가서야 소월과 만해를 갖게 된다는 인생의 아이러니를 겪는 것이다. 프랑스 유학을 전후하여 그의 시는 급격히 반근대주의의 길을 걷는다. 이제 그의 시는 고향으로 가는 길, 동양적이고 한국적인 세계로 가는 길이 된다.

그의 제2시집 『남해 금산』은 소월과 만해를 수용함으로써 고향에 도달하려는 시도를 보여준다. 소월의 심혼시와 만해의 정신시가 갖는 공통점은 무엇일까. 둘 다 일종의 연애시로 읽힐 수 있다는 것. 자기를 희생함으로써 님과 화해하는 소월과 만해의 지순한 사랑의 언어는 이성복의 시세계를 부성적인 세계와의 갈등에서 모성적인 세계와의 화해로 나아가게 한다. 『뒹구는 돌 』에서 이성복의 본령은 어디까지나 근대적 삶의 시인이었다. 그 때의 탈근대적 형식 속에는 지극히 근대적인 정신이, 현실의 제약과 맞싸우는 시인의 고독한 자의식이 또아리를 틀고 있었다. 치욕과 고통과 슬픔과 악몽을 수반했던 시인의 환원 불가능한 자기 세계는 독자를 <위안>하지 않았고 <경악>시켰다. 현실과 깨어있는 의식의 관계는 항상 적대적이었다. 그러나 소월과 만해는 이성복에게 인생에는 갈등만 있는 것이 아니라 화해도 있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었다.

만해와 소월의 영향이 가장 선명하게 드러난 예로서 우리는 시 「남해 금산」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소월의 「초혼」「무덤」「비난수하는 맘」등에서 나타난 무속적 요소는 <한 여자 돌 속에 묻혀 있었네/그 여자 사랑에 나도 돌 속에 들어갔네/어느 여름 비 많이 오고/그 여자 울면서 돌 속에서 떠나갔네/떠나가는 그 여자 해와 달이 끌어 주었네>와 같은 서사무가적 상황 설정에서 반영되며, 만해의 「님의 침묵」에서 절창을 이루었던 모순어법은 <남해금산 푸른 하늘가에 나혼자 있네/남해 금산 푸른 물 속에 나 혼자 잠기네>와 같은 이른바 <이별의 가와 속>에서 반영된다. 이렇듯 소월과 만해에 의지한 반근대주의로의 전환은, 그러나 이성복이 그들의 시대를 살 수 없는 이상 분명한 위험을 안고 있다. 나는 이 부분에서 『남해 금산』이후의 시작 詩作들에 대해 언급했던 예전의 비판을 그에게 환기시키지 않을 수 없었다.


이성복의 시가 갖는 가장 감동적인 영역은 바로 그의 시가 선시先詩적으로 머금고 있던 커다란 내부공간, 우리가 <악마적인 세계>라 규정했던 그 서사적 공간에 있다. 숱한 고통과 수모와 악몽과 치욕을 존재하게 했던 이성복 시의 그 지옥 같은 서사적 공간이 80년 5월과 함께 다가온 동시대의 지옥 같음을 환기시킬 때, <정든 유곽>의 체험들에 괴로워하는 시인의 목소리는 시인 자신의 심혼의 울림이자 한 시대의 울림이었던 것이다. 이같은 서사적 공간이 모성 원리에 기댄 화해와 인간과 세계 사이의 숙명적인 거리에 대한 달관에 의해 하나의 풍경으로 응고될 때 그의 시가 갖는 깊이는 단숨에 현시現詩적인 층위로 표피화되며 한갓된 기교시의 차원에 떨어지는 것이다. [ ]만해의 사랑이 그 서사적 공간의 무게로 인해 죽음마저도 넘어서는 의지를 보여줄 수 있었다면 이성복의 사랑이 갖는 상대적인 한계가 분명해질 것이다.

상실된 조국과 식민지의 현실을 함축한 만해의 사랑이 물러설 수 없는 심혼의 울림으로까지 육박해 간다면 이성복의 현시現詩적 사랑은 감성의 감미로운 동어반복에 그치는 것이다.


만해의 사랑이 어두운 식민지시대가 갖는 서사적 공간의 무게에 의해 님이 죽은 세계로부터 <피묻은 깃대>를 가져와 세우려는 결연한 의지를 보여줄 수 있었다면 이성복의 화해와 달관은 제5공화국의 어두운 서사적 공간을 <회상의 형식>에 의해 하나의 풍경으로 응고시킴으로써 그 선시先詩적인 깊이를 잃었다는 것. 나는 『남해 금산』이후 나와 당신의 관계를 노래하는 그의 연애시가 구체성을 상실하고 동어반복적인 추상성을 노정하는 이유를 여기에서 찾았다. 그러나 이성복은 이같은 비판을 대범하게 받아들이며 내가 말하는 그 <추상성>이란 근래의 자기 시가 보여주는 <이미지의 결여>일 것이라고 덧붙이기까지 한다. 그러면서 그는 자기 시가 이미지 없는 앙상한 연애시의 단계를 거칠 수 밖에 없는 필연성을 설명하고 일종의 인생론적 시론을 개진하는 것이다.

상대의 비판을 담담하게 수용하면서도 무리없이, 그러나 단호하게 자신을 옹호하는 칼날 같은 논변은 그 생각이 결코 어제 오늘의 것이 아님을 깨닫게 해주었다. 이성복은 먼저 시의 가장 확실한 매혹은 자기 구원의 불빛에 있지 않느냐고 반문한다. 그는 독자를 의식하고 세상을 의식하는 위인지학爲人之學으로서의 시에서 <나의 길>만을 응시하는 위기지학爲己之學으로서의 시로 이행했다. 시와 현실의 첨예한 갈등을 강조하는 시각에서 볼 때 그것은 한계가 될지도 모르지만 그는 자신이 세계(서사적 공간)를 선택할 수 없는 이상 자신은 자신의 길을 성실히 걸을 따름이라고 다짐하고 있었다. 자신의 길이란 곧 시의 길이다. 소월과 만해는 위대했지만, 그들은 시의 외줄기 길을 끝까지 걸을 수 없었다. 민족의 비참한 처지가, 가난이, 독립운동이, 요절이 그들을 시의 길에서 밀어 냈고 20년대 문화 전반을 지배한 감상주의와 일천했던 시작詩作수업이 그나마 짧았던 시인 생활을 길거리에서 싸구려로 팔릴 수 있는 언어들에 침윤시켰다. 그들의 빼어난 작품들은 이런 어려운 처지에서 겨우 피어난 연꽃이었다.

<내가 오래 산다면 끝까지, 속이지 않고, 성실하게 시의 한 가지 길을 갈 자신이 있다>고 이성복은 말했고 나는 그 말에 한숨을 쉬었다. 그가 말하는 시의 길은 분명 근대시의 길도 아니며 근대시의 통과제의를 거쳐 탈근대의 형식으로 가는 길도 아니다. 그것은 『논어』와 『주역』이 가르치는 인생, 수신修身의 철학, 수시안인 修己安人의 윤리, 반근대로 가는 길이다. 자신이 바라는 인생이란 <공자의 삶을 다시 사는 것>이라고 하는 이성복에게 나는 출세간 出世間의 도피주의로 가는 길은 아닐까 하고 반문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근대란 <인류가 통과해야 할 연옥>이라고 한 막스 베버의 정의는 아직도 나에겐 움직일 수 없는 진리였다. 천국으로 들어가지 못한 인류가 고통의 불길 속에서 자신의 영혼을 단련하고 정화하는 곳, 그것은 근대이며 동시에 나에겐 유일한 <문학>이었다. 그 불길 속에 몸을 태우며 탈근대를 모색하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이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논어』 『주역』이 표상하는 중세 한문문어문화권의 통일적 세계상은 파괴되었다. 나는 <근대>의 요람에서 자라 학교제도 속에 배우고 문화산업의 한 켠에서 이런 글을 쓰고 있지 않는가. 근대적 삶의 실재성을 인정하지 않는 시의 길이 가능할 것인가. 근대란 보이지 않는 미래(탈근대)의 기대지평 속에 부단히 자신을 갱신하는 시대이며 그것을 통해서만 삶을 살아낼 수 있는 시대가 아닐까.

이성복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러다가 지나가는 투로 불쑥 한마디를 던졌다. 당신이 말하는 근대의 길이란 <시를 씀으로 해서 인간을 망치는> 그런 길이라고. 『나는 그런 사람들을 너무 많이 보았다.』고 했다. 갑자기 머리가 아파왔다. 내가 입을 다물고 생각에 잠긴 것은 무엇 때문일까. 그것이 내가 가장 두려워하던 그런 말이었기 때문이다. 이성복이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논어』를 한번 읽어 보라고 권하는 것을 나는 질린 눈빛으로 보고 있었다.


연구실을 나올 때는 저녁 7시가 넘어 있었다. 어두운 복도를 함께 걸으며 이성복은 구광본 시인과 장정일 시인, 그리고 그의 옛제자인 장정일 씨 부인의 안부를 물었다. 내가 <구광본 씨>라고 했다가 도 경칭 없이 부르다가 한 탓일까. 그는 내 나이를 물었고 나는 스물 다섯이라고 대답했다. '52년생인 이성복과 14년이 터울지는 셈이다. 14라는 숫자가 묘한 침묵을 가져다 주었다. 이성복은 14년 연상인 선배 황동규 시인을 추억하며 먼 곳을 바라보았고 나 역시 이성복이 벌써 마흔 살이 가까웠음을 깨닫고 마음 속으로 놀라고 있었다. '90년, 이성복은 이제 결혼한 지 10년이 되며 이미 세 아이의 아버지가 되었다. 봄에는 박사 학위를 받아 20년이 된 <학생>시대를 완전히 청산할 것이다.

서른 살 이후의 생을 설계한 적이 없는 나는 마흔이 가깝도록 문제적인 시인이기를 포기하지 않는 이성복이 갑자기 아득하게 느껴졌다. 동시에 아직도 이성복에 필적할 만한 뛰어난 신인, 자기 세대의 가능성 있는 시인을 발견하지 못한 나의 불행만은 참으로 생생하게 느껴졌다. 허수경은 정 헤픈 남도 여인의 모성적인 세계를 바탕으로 집의 공간상징과 거리의 공간상징을 포괄하는 <저자 거리>의 세계에까지 나아가지만 「여의도 엘레지」연작이 보여주듯 그 농본주의적 비유체계가 거대 도시의 문화산업적 공간에 대한 재현력으로 전화될 수 없음이 거의 확실하다. 송찬호는 대단한 가능성을 갖고 있지만 아직 존재에 대한 언어의 반역이라는 자신의 인식을 완전히 공적인 이해수준에까지 끌어올리지 못하고 있다. 기형도는 죽었고, 구광본은 「내 슬픔이 비를 몰고 오진 않았다」가 입증하는 명민한 감성과 정직성에도 불구하고 소품성의 한계를 안고 있으며, 서열채는 아버지의 존재에서 촉발되는 진정한 자기 경험에의 강박관념 때문에 본연의 장점이 억압되고 있고, 윤중호는 사정은 이와 같다. 첫시집을 냈을 당시 이성복이 성취했던 새로움과 공감을 상기해 본다면 우리 세대는 아직도 이성복 이전에 있다.

이성복의 차로 시내 중심가에 들어와 갈매기살과 칼국수를 파는 <토방>에서 식사를 했다. 이런저런 문단 이야기를 하다가 이성복은 갑자기 웃으며 이제는 문단이 정말 <처가집>같이 느껴진다고 한다. 아주 발을 끊고 살 수는 없지만 가기도 싫은 곳. 그러면서 또 공부 이야기로 돌아가는 이성복은 한 사람의 표일한 은자隱者였다. 나는 더 이상 <근대성>의 문제를 꺼내지 않았다. 그의 앞에서 나는 어느 때보다도 무겁게, 내가 고향에 있다는 것, 고향의 무게를 느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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