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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박골(실비단이끼폭포), 묘향암, 폭포수골(박영발비트) - 26년06월06일(토요일)

작성자꺼비|작성시간26.06.07|조회수21 목록 댓글 1

# 언제: 2026년 06월 06일 토요일

# 산행지: 함박골(실비단이끼폭포), 묘향암, 폭포수골(박영발비트), 지리의 품속으로...ㅎㅎㅎ

# 산행시간: 16.8Km   07시간 24분

# 산행루트: 와운마을 - 함박골(실비단이끼폭포) - 묘향암 - 폭포수골(박영발비트)

 

지리산 산행 - 뱀사골에서 

거침없이 흘러가는 계곡물 소리에
멀어져 간 귀가 열리고
반짝이는 푸른 물빛에
어두워진 눈을 씻는다
젖은 몸 낮추어 물살 헤치고
무거운 그림자 끌고 다닌 발 담그면
몸 속 깊이 박혀있던 독소들 하나씩 빠져나와
흐르는 물 따라 줄행랑친다
아, 무릉도원이 여기던가
산이 좋아 산 찾아 길을 나서지만
산다는 것은 높은 산을 오르는 것과 같다
오르막, 내리막 크고 작은 고개를
몇 개씩 넘으며 가뿐 호흡을 고르는 것이다
앞만 보고 조급한 마음으로
정상을 향해 바삐 걸었다면
이제는 숲도 나무도 눈여겨보고
숲에서 나는 작은 소리도 귀담아 들어
무수히 많은 발자국 아래
힘없이 스러져 간 작은 미물들도
다 살아가는 이유가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김경숙·시인)

 

뱀사골 유래

옛날 뱀사골에 있던 송림사라는 절이 있었다.
그런데 이 절의 주지스님들은 해마다 칠월 칠석만 되면 어디론가 사라졌다.
그러자 사람들은 주지스님이 부처가 되어 승천했다고 믿었다.

서산대사는 이 소식을 듣고 뭔가 미심쩍은 부분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돌아오는 칠월 칠석. 그는 주지 스님의 장삼 속에 비상(극약) 주머니를 달아 주고
예년과 똑같이 독경을 하도록 했다.

새벽이 되자 요동치는 소리가 들리더니
큰 뱀이 송림사에 왔다가 계곡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다.

서산대사가 뱀을 쫓아가 보자 용이 못 된 이무기가 뱀소에서 죽어있는 것이다.
뱀의 배를 갈라보니 그 속에는 죽은 주지스님이 있었다.

이후 이곳을 뱀이 죽은 곳이라고 해 뱀사골이라 불렀다고 한다.

 

와운리 (臥雲里)

전라북도 남원시 산내면에 속하는 행정리.

해발 800m의 고산준령에 위치하여 구름도 누워 간다는 뜻으로 와운(臥雲)이라 하였으며 일명 눈골 또는 누운골이라고도 한다.

 

1595년경 영광정씨와 김녕김씨가 임진왜란을 피해 깊은 계곡을 찾아가다 공기가 맑고 산세가 좋아 이곳에 정착하였다고 한다. 본래 운봉군 산내면 지역이었으나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때 반산리, 미동, 와운리, 하부운리, 개선리가 병합되어 부운리에 속하여 산내면에 편입하였다.

1951년 빨치산 토벌 작전 시 지리산이 공비의 소굴이 되자 전 주민이 피난, 이주하였으며, 1954년 서울 수복과 함께 다시 입주하였다. 1958년 뱀사골의 산림을 베어내기 위해 통나무로 가교를 설치하고 벌목을 운반하기 위한 산판 도로가 개설되었으며, 인가가 드문드문 떨어져 사람이 거주하기도 하였다.

1969년 덕동초등학교 와운분교가 개설되었으나 1984년에 폐교되었다. 1976년 새마을 사업으로 와운교를 가설하였으며, 1977년 11월 23일 지리산전적비 및 기념관을 개관하였다.

1993년 요룡대에서부터 와운리에 진입하는 세월교 2개소와 진입로를 개설하였고 1994년부터 1997년까지 진입로와 마을 안길의 포장사업이 완료되었다. 1995년 남원시·남원군 통합으로 남원시 산내면 와운리가 되었다.

 

지리산 국립공원 뱀사골 산 중턱에 위치한 해발 800m의 고지대로 기암절벽과 깨끗한 물, 계곡, 수목 등의 경치가 수려하다.

현황

지리산 뱀사골 반선(半仙)을 따라 3㎞ 정도 들어가서 왼쪽 편에 위치한 작은 마을로, 뒤쪽의 영원령을 분기점으로 경상남도 함양군 마천면과 경계를 이룬다. 2007년 기준 면적은 103.3㏊이며, 2014년 12월 31일 현재 총 38세대에 92명(남 47명, 여 45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농가는 27호, 비농가는 40호이다. 경지 면적은 55.4㏊로 밭이 20㏊, 논이 35.4㏊이다. 고지대로 농업 수확량은 저조하며, 특산물로는 오미자, 뱀, 표고버섯, 고사리, 산채 등이 있다.

1980년대 한봉(韓蜂)으로 농가소득을 올리기도 하였으나 1990년대 한봉은 사양길로 접어들었으며 대신 지리산 국립공원을 중심으로 한 관광 사업을 활발히 추진하고 있다.

1994년 지원을 받아 간이상수도 보수 사업을 실시하였고, 1995년 이후 마을을 휴양촌으로 가꾸기 위하여 주택 개량 사업을 전개하였다. 1996년 1억 원을 투입하여 남원시 주택과에서 마을 오수 처리 시설을 추진하여 오수 시설이 현대화되었다.

 

와운(臥雲)마을

천년송을 품은 와운마을( 臥雲里)은 전라북도 백두대간 줄기 끄트머리에 머물며, 해발 800m로 고산 준령 아래다. 구름도 쉬어 간다는 뜻이며 일명 눈골, 누운골로도 불린다. 1595년경 영광정씨(靈光丁氏)와 김녕김씨(金寧金氏)가 국난을 피해 피난처로 삼은 곳이라 전해 온다.

 

구름이 누워 간다고 해 '와운(臥雲)'이다. 첩첩산중 고지대라 구름마저 곧추서 넘지 못하나보다. 이 마을 참 고요하고 운치 있다. 사람들 터 잡고 산 지 1,300년이 됐다. 뒷동산 우람한 소나무는 1,000년이나 마을을 굽어보고 섰다. 연봉이 병풍처럼 에둘렀고 계류는 유리처럼 맑다. 후미져 인적마저 드무니 여름 한철 푹 쉴 요량으로 찾아들기 딱 좋다.

 

1,300년 역사의 산중마을

와운마을은 행정구역상 전북 남원 산내면 부운리에 속한다. 지리산에서 찾자면 와운골 들머리다. 뱀사골 왼쪽 옆으로 뻗은 골짜기가 와운골이다. 뱀사골을 따라 요룡대 방향으로 오르다 와운교에서 길이 갈린다. 다리 왼쪽으로 난 길이 마을로 이어진다. 요룡대에서 약 20여분 걸으면 닿는다.

 

'구름이 누워 간다'고 한 데는 이유가 있다. 지리산국립공원북부사무소 관계자에 따르면 와운마을은 해발 650~700m의 고지대에 위치한다. 구례 상동면에 속한 심원마을(해발 약 750m)을 제외하면 지리산 자락에서 이처럼 고지대에 자리 잡은 마을을 찾아보기 어렵단다.

 

심원마을은 지리산 일대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어 '하늘 아래 첫 동네'로 불린다. 와운마을은 '하늘 아래 두 번째 동네' 쯤 되지 않을까 싶다. 살기는 괜찮았나 보다. 이 마을 정판석(58) 이장은 "서리가 와서 밑에 동네는 호박잎이 다 죽는데 이곳은 그럴 일 없다"고 했다. "옛날에는 이 마을 땅 한 마지기를 팔면 아랫마을 땅 다섯 마지기를 살 수 있었다"고도 했다.

 

와운마을은 후미져서 무서움을 느낄 만큼 고요하다. 첩첩산중인 터라 정착 초기 호랑이와 마주친 얘기들이 지금도 주민들 사이에서 회자된다. 여순사건이나 한국전쟁의 여파로 마을사람들이 피해를 당하기도 했다. 요룡대 인근에 '석실'이라는 지명을 가진 곳이 있다. 큰 바위들이 자연 동굴을 형성한 이곳은 빨치산들이 신문, 기관지 등을 인쇄하던 곳으로 알려졌다. 어쨌든 마을 사방으로 반야봉(1,732m), 명선봉(1,586m), 형제봉(1,115m) 등 연봉이 에둘렀다. 연봉은 문명을 차단한다. 대신 바람소리 선명하고 물소리 참 또렷하게 들린다.

 

와운마을에는 모두 열 세 집이 있다. 이 가운데 일곱 집에 사람이 살고 나머지는 외지인들이 별장처럼 쓴다. 마을 상주 인원이래야 열 네 명이 전부다. 그렇다고 마을로 들고 나는 사람이 많지도 않다. 관광객 대부분은 뱀사골만 오르내리다 돌아간다. 애써 20~30분씩 옆길로 빠져 마을까지 들르기 쉽지 않다. 이러니 피서철이라도 마을이 시끌시끌 할 일은 적다.

 

와운마을이 형성된 것은 통일신라시대의 일이다. 주민 이완성(49) 씨에 따르면 현재 지리산북부사무소 자리에 송림사가 들어서며 사람들이 모여 살기 시작했단다. 송림사는 남원의 대표 고찰인 실상사보다 100여 년 전 앞서 창건한 것으로 전한다. 암자를 네 개나 거느릴 만큼 규모도 컸다. 실상사 창건연대가 828년, 이러니 송림사는 적어도 700년대에 지어진 셈이다. 이렇게 따지면 와운마을 유래는 약 1,300년 전으로 거슬러 오른다.

 

잠깐 송림사에 얽힌 재미있는 이야기 하나 짚고 넘어간다. '뱀사골'이란 지명이 송림사와 관련 깊다. 당시 송림사에는 해마다 칠월칠석날 법력이 높은 승려 한 명을 뽑아 선인대에서 불공을 드리게 하는 행사가 있었다. 이렇게 하면 승려는 신선이 된다고 믿었다. 그런데 이 행사를 이상하게 여긴 한 고승이 그 해에 뽑힌 승려의 옷자락에 독을 묻혀 올려 보냈다.

 

다음날 마을 사람들과 선인대에 가보니 이무기가 승려를 반쯤 삼킨 채 죽어 있었다. 송림사에서 해마다 승려 한 명씩을 이무기에게 제물로 바쳐 온 것. '이무기가 죽은 골짜기'라 해 이때부터 일대 계곡이 '뱀사골'로 불렸다. 억울하게 죽은 스님의 넋을 기리기 위해 '절반의 신선'이란 의미를 닮아 뱀사골 들머리 마을을 '반선(半仙)'이라 불렀다.

 

함박골

함박이란 통나무 속을 파서 바가지처럼 만든 그릇을 말한다. 그런 의미라면 함박골은 그러한 형태의 옴팍한 지명을 말하는 곳이다. 따라서 반야봉을 통나무로 가정한다면 함박골은 우묵한 함지박일 것이다.

 

우선 이끼폭포가 있는 계곡은 마천사람들이 함지박을 만들던 곳이라 "마천함박골"이라고 불리었다합니다.(반선 산채식당 주인아저씨 왈) 덕이아빠님의 이야기로는 계곡이 반야중봉에서 묘향대로 내려서는 초입부로 이어집니다.

 

이끼폭포

지리산 뱀사골의 숨겨진 명소
태고의 신비로 가득 찬 실비단 폭포.
계곡을 가득 덮은 파릇한 이끼 사이로 실비처럼 미끄러지는 폭포수.

 

智異山 - 묘향암(妙香臺)
묘향대는 행정구역은 전북 남원시 산내면 부운리이다.
지리산의 큰 골짜기 뱀사골을 모두 발 아래에 둔 장대한 풍광을 간직한 절 집 묘향대는 신라 때 창건돼 1천년이 넘는 역사를 간직한 대형사찰인 화엄사의 말사에 해당되며 지리산 반야봉 신록이 감춰둔 한국불교의 마지막 전설이 묘향대이다. 지리산 10대(?)에 해당하는 묘향대는 현존하는 암자와 수도하는 분이 머물고 있다.
수도처답게 지리산 깊숙한 곳에 위치하며 氣를 느낄 수 있고 영험한 느낌이 든다.
주변에 반달곰이 서식하고 있다.

 

묘향대는 수백년 동안 토굴로 이어져 왔다.

 

시작은 정확히 언제인지 모른다.
다만 조선시대에도 묘향대에 관한 얘기가 회자되었다고 한다.
지금의 모습으로 증축한 것은 70년대 초반이다.
화엄사를 새롭게 일으킨 도광 스님이 주변의 도움을 얻어 토굴에서 절 집의 모습으로 가꾸었다.
근처에 금강굴이 위치하고 있는데 이곳 또한 스님들에게는 유명한 수행처이다.

묘향대(妙香臺) 이름 ; 문수를 한역을 하면 묘수(妙首), 묘덕(妙德), 묘길상(妙吉祥) 등이 된다.
다시 말하면 문수의 체(體)는 바로 묘유(妙有)라는 것으로 향상 변함이 없는 자성(自性)자리를 가리키는 것이니 이 묘유를 묘향(妙香)이라 일컬은 것이다.

금강굴의 전설을 간직한 반야봉 묘향암 (반야봉 묘향암 부처님 조성불사 및 점안식 안내문 중에서)
반야봉의 묘향암은 지혜제일의 문수보살님이 상주하는 도량이며 지리산에서는 유일무이하게 대자대비 관세음보살님이 항상 머무시는 관음도량이다. 태고의 원시림과 더불어 고승 대덕 선사님의 향기를 그대로 간직한 오로지 참선수행자 스님의 묘향암 이다.

 

박영발 비트

반야봉 북사면 산중턱, 해발 1330m 부근의 바위틈에 자리 잡은 박영발 비트. 주변 지형 지물상 감쪽같이 엄폐·은폐되어 발견하기 쉽지 않은 천연의 요새다. 이곳은 남로당 전남도당 위원장인 박영발이 1953년 10월부터 그가 최후를 맞은 이듬해 2월까지 4개월가량 지휘본부로 사용하던 곳이다. 오목한 바위지대, 약 2m 깊이의 좁다란 바위 홈이 보이고 사다리로 바위 홈으로 내려섰다가 다시 맞은편 사다리를 타고 올라야 비트인 바위 굴속으로 진입할 수 있다. 사다리가 없으면 출입할 수 없는 구조이며 바깥에서는 굴 입구가 보이지 않아 정말 감쪽같은 곳이다.

 

랜턴을 준비하고 사다리를 이용해서 비트 속으로 진입해 암굴을 살펴본다 바위 틈을 기어들어가야 하니 진입도 쉽지 않다. 암굴은 한 평 남짓한 크기로 설 수는 없고 서너 명 둘러앉을 수 있는 규모이다. 캄캄한 굴속을 랜턴으로 비춰보니 당시에 무전 등 통신용으로 활용하던 전선(일명 삐삐선)도 보인다. 암굴 속에 또 다른 암굴이 있다. 컴컴한 어둠 속에 무저갱 입구처럼 아가리를 벌린 암굴 입구, 선뜻 진입하기 망설여지지만 비좁은 통로로 겨우 몸을 뻗어 기어서 진입하니 또 다른 좁은 공간이 나타난다. 암굴 속에 내실과 외실이 있는 셈이다. 안쪽 암굴에는 당시에 쓰던 무전기 배터리도 보인다. 액이 흘러나와 허옇게 변한 모습이다.

 

62년 전 이맘때의 겨울, 백설로 하얗게 변한 반야봉 북사면 중턱의 이 비좁은 암굴 속에서 그들은 혹한의 겨울을 났을 것이다. 알려진 바에 의하면 그 당시 이곳에는 박영발 조선노동당 전남도당 위원장을 비롯해 연락병, 여성비서, 보위병, 무전사, 의사, 간호사 등 8명이 거주했다고 한다. 이들은 1954년 2월경 토벌대에 사살되며 파란만장했던 청춘을 지리산에 묻었다.

박영발은 경북 봉화 출신으로 1930년대에 봉화 지역을 중심으로 좌익 항일 운동을 했고 1940년대에는 만주에서 항일운동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해방 후 1946년에는 남조선 노동당 창당에 참여했고 1947년 남한에서 남로당 활동이 불법화되자 월북해 박헌영의 추천으로 모스크바 유학까지 다녀온다. 그는 1950년 6·25 때 남하해 전남도당 위원장을 맡지만 인민군 후퇴로 지리산에 고립돼 유격전을 펼치다가 지리산에서 고혼이 되고 만다. 평양의 애국열사릉에는 지리산 빨치산 총사령관 이현상을 비롯해 전북도당 위원장이었던 방준표와 그의 가묘도 설치돼 있다고 한다.

 

폭포수골

반야봉과 중봉사이 안부에서 시작되는 폭포수골은 해발 2~300m는 급경사로 떨어지다가 이후로는 비교적 완만해지고 작은 폭포가 아기자기하게 숨어있다. 

 

유유교 바로 윗쪽에서 갈라지는 계곡으로 묘향암 화장실쪽에서 흘러 내리는 계곡은 "폭포수골"이라고 불렸답니다.(반선 산채식당과 일출식당 아저씨 왈) 아마도 반질반질한 바위계곡 돌위로 흐르는 물길이 수많은 폭포를 만들어 내어 그렇게 불리었나 봅니다.

 

# 산행지도

 

# 산행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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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소담 | 작성시간 26.06.12 와~~~~후덜덜덜~~~
    무서운곳을 슬쩍슬쩍 다니셨네요~뱀사골의유래또한 잘 알게되었구요~~
    덕분에 숨어있어서 쉽게볼수없는 비경을 감상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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