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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세개골, 영신대(영신사) - 26.06.11(목요일)

작성자꺼비|작성시간26.06.14|조회수14 목록 댓글 2

# 언제: 2026년 06월 11일 목요일

# 산행지: 지리산에서 가장 영험한 기도처 영신대(靈神臺) 찾아 지리의 품속으로...ㅎㅎㅎ

# 산행시간: 19.3Km   08시간 58분

# 산행루트: 의신마을 - 큰세개골 - 영신대 - 영신봉 - 창불대 - 음양수샘

 

큰세개골 산행난이도 - 고급

큰세개골 : 물줄기가 영신봉 주변에서 시작되고 대성폭포가 있음

나바론계곡 : 물줄기가 영신봉과 창불대 사이에서 시작되고 매우 협곡임  

나바론계곡우골 : 매우 협곡이며, 직벽이 많고 물이 적으며, 등산하기 매우 힘듬

창불대-자살바위 : 낙남정맥1구간에 위치해 있으며, 주변 배경이 매우 아름다움

음양수샘-음양수골 : 마른 너덜지역이 대부분이며, 하류지역에 물이 조금 흐름

음양수골 : 물줄기가 음양수샘 주변에서 시작되며, 마른너덜지역이나 등산하기 좋음

 

지리산(智異山)

지은이= 김돈중(金敦中)

 제(오를 제)擧直上最高峰(제거직상최고봉) 산을 올라 곧바로 최상봉에 이르러,

 回首塵寰一片紅(회수진환일편홍) 풍진 세상을 돌아보니 한 조각 구름일세.

 徙倚烟霞得幽趣(사의연하득유취) 연하 속 배회하여 그윽한 정취 얻으니,

 風流不愧晉羊公(풍류불괴진양공) 풍류는 진나라의 양공에게 부끄러울 것 없네.

 

 김돈중(金敦中,  ?-1170) : 고려 의종 때 명신.

 

큰세개골

큰 대성골(세개골)은 오지 중의 오지지만, 오랜 옛날부터 기도처로 소문이 자자하여 대성골 가장 깊숙한 자리에 위치한 영신대(靈神臺)는 지리산에서 가장 영험한 기도처로 통한다. 무속인들이 치성을 드린 제단과 좌대의 흔적이 아직도 여기저기에 남아 있다한다.

 

영신대(靈神臺)
'지리산 최고의 기도처'라고 입을 모으는 명당이 곧 영신대이다.
지난날 영신사란 사찰이 자리했던 이 곳은 영신봉(1,651m) 바로 남쪽 사면 대성계곡 본류가 발원하는 곳에 위치하고 있다.

 

김종직_유두류록

유람록에 대부분 영신사를 경유해가거나 숙박을 하고간다.
김종직 선생과 유몽인 선생은 이곳을 경유해가면서 주변을 상세하게 묘사해놓았다


김종직_유두류록 1472년 8월 17일, 신사일(양력 9월29일)
(전략)
영신사(靈神寺)에서 머물렀는데 여기는 승려가 한 사람뿐이었고, 절 북쪽 비탈에는 석가섭(石迦葉) 한 구(軀)가 있었다. 세조 대왕(世祖大王) 때에 매양 중사(中使)를 보내서 향(香)을 내렸는데, 그 석가섭의 목에도 갈라진 곳이 있는데, 이 또한 왜구(倭寇)가 찍은 자국이라고 했다. 아! 왜구는 참으로 도적이로다. 산 사람들을 남김없이 도륙했는데, 성모와 가섭의 머리까지 또 칼로 베는 화를 입혔으니, 어찌 비록 아무런 감각이 없는 돌일지라도 사람의 형상을 닮은 까닭에 환난을 당한 것이 아니겠는가? 그 오른쪽 팔뚝에는 마치 불에 탄 듯한 흉터가 있는데, 이 또한 “겁화(劫火)에 불탄 것인데 조금만 더 타면 미륵(彌勒)의 세대가 된다.”고 한다. 대체로 돌의 흔적이 본디 이렇게 생긴 것인데, 이것을 가지고 황당하고 괴이한 말로 어리석은 백성을 속여서, 내세(來世)의 이익을 추구하는 자들에게 서로 다투어 돈과 베를 보시(布施)하게 하고 있으니, 참으로 가증스러운 일이다.
가섭전(迦葉殿)의 북쪽 봉우리에는 두 바위가 우뚝 솟아 있는데, 이른바 좌고대라는 것이다그 중 하나는 밑은 둥

글게 서리었고 위는 뾰족한 데다 꼭대기에 네모난 돌이 얹혀져서 그 넓이가 겨우 한 자 정도였는데, 승려의 말에 의하면, 그 위에 올라가서 예불(禮佛)을 하는 자가 있으면 증과(證果)를 얻는다고 한다. 이 때 종자인 옥곤(玉崑)과 염정(廉丁)은 능란히 올라가 예배를 하므로, 내가 절에서 그들을 바라보고는 급히 사람을 보내서 꾸짖어 중지하게 하였다. 이 무리들은 매우 어리석어 거의 콩과 보리도 구분하지 못하는데, 능히 스스로 이와 같이 목숨을 내거니, 부도(浮屠)가 백성을 잘 속일 수 있음을 여기에서 짐작할 수 있겠다.
법당(法堂)에는 몽산 화상(蒙山和尙)의 그림 족자가 있는데, 그 위에 쓴 찬(贊)에,

頭陀第一(두타제일) 두타 제일이
是爲抖擻(시위두수) 이것이 두수인데
外已遠塵(외이원진) 밖으로는 속세를 멀리하였고
內已離垢(내이리구) 안으로는 마음의 때를 벗었구나.
得道居先(득도거선) 앞서 도를 깨치고
入滅於後(입멸어후) 뒤로 적멸에 들었으니
雪衣鷄山(설의계산) 설의와 계산이
千秋不朽(천추불후) 천추에 썩지 않으리라.

하였고, 그 곁의 인장(印章)은 청지(淸之)라는 소전(小篆)이었으니, 이것이 바로 비해당(匪懈堂)의 삼절(三絶)이었다.
그 동쪽 섬돌 아래에는 영계(靈溪)가 있고, 서쪽 섬돌 아래에는 옥천(玉泉)이 있는데, 물맛이 매우 좋아서 이것으로 차를 달인다면 중령(中泠), 혜산(惠山)도 아마 이보다 낫지는 못할 듯하였다. 샘의 서쪽에는 무너진 절이 우뚝하게 서 있었는데, 이것이 바로 옛 영신사이다. 그 서북쪽으로 높은 봉우리에는 조그마한 탑(塔)이 있었는데, 그 돌의 결이 아주 곱고 매끄러웠다. 이 또한 왜구에 의해 넘어졌던 것을 뒤에 다시 쌓고 그 중심에 철(鐵)을 꿰어놓았는데, 두어 개의 층은 유실되었다.
 
유몽인_유두류산록 1611년 4월 5일 갑술일(양력 5월16일)
(전략)
이어 만 길이나 되는 푸른 절벽을 내려가 영신암()에 이르렀는데, 여러 봉우리가 안쪽을 향해 빙 둘러서 있는 것이 마치 서로 마주보고 읍을 하는 형상이었다. 비로봉은 동쪽에 있고, 좌고대는 북쪽에 우뚝솟아 있고, 아리왕탑()은 서쪽에 서 있고, 가섭대()는 뒤에 있었다. 지팡이를 내려놓고 기다시피 비로봉 위로 올라갔지만 추워서 오래 있을 수 없었다. 암자에는 차솥, 향로 등이 있었지만 살고 있는 승려는 보이지 않았다. 흰 구름 속으로 나무를 하러 가서인가? 아니면 속세 사람을 싫어하여 수많은 봉우리 속에 자취를 감추어 버린 것인가? 청명하고 온화한 계절이어서 두견화가 반쯤 핀 것을 비로소 보았고 산 속의 기후도 천왕봉보다는 조금 따뜻하게 느껴졌다. 

-퍼온굴- (출처:도솔산연소재)

 

석가섭

 

영신대에 숨어있는 마하가섭 이야기

선인들의 유람록을 읽다보면 빈발암, 가섭전, 영신암이 등장한다. 빈발(賓鉢)은 가섭(迦葉)이 출가하기 전의 속명 핏발라(Pipala), 가섭(迦葉)은 출가 후의 법명 가사파(kā-śyapa)를 음차하여 한역한 것이다. 영신(靈神)은 가섭이 열반에 들기 위해 선정(禪定)에 들어간 후의 이름이다. 빈발(賓鉢)과 가섭(迦葉), 영신(靈神)은 마하가섭(Mahākā-śyapa)의 출생과 출가, 적멸(寂滅)의 시점으로 구분한 것으로 이해한다. 가섭의 출생부터 적멸까지의 이야기가 세석평전과 영신대에 담겨있다. 1487년 추강 남효온은 지리산일과에서 촛대봉은 빈발봉으로, 영신봉은 계족봉으로, 영신대에 영신암과 빈발암, 가섭전이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비해당 안평대군이 영신암 법당에 있는 몽산화상이 그린 가섭도 족자에 쓴 찬(贊)을 읽어보면 이해가 쉽다. 요약하여 말하면 마하가섭존자가 설의 계산(계족봉) 아래 영신대 바위 속에 깃들어 적멸의 경지(선정)에 들어가 미륵불을 기다린다는 내용이다.

 

蒙山畫幀迦葉圖贊 (몽산화상이 그린 가섭도의 비해당 贊)

 

匪懈堂 李瑢(안평대군)

 

頭陁第一。是爲抖擻。: 마하가사파존자께서는 두타 수행인 두수를 바르게 실천하시어

外已遠塵。內已離垢。: 밖으로 이미 번뇌를 떨치시고, 안으로 離垢의 경지에 오르셨네

得道居先。入滅於後。: 앞서 道(아라한과)를 깨달으시고 뒤에 적멸의 경지에 드셨으니

雪衣雞山。千秋不朽。: 눈 덮인 계족산에 깃들어 천추에 사라지지 않고 길이 전하리라

 

몽산 : 원나라 고승 몽산화상. * 贊(讚) : 다른 사람의 書畵를 기리는 글. * 匪懈堂 : 안평대군의 호, 三絶 ; 시서화. 雞山 : 계족산 영신봉을 가리킴.

 

인도의 동북부 비하르(Bihar)주에 있는 꿋꾸따빠다산(屈屈吒播陁山:Kukkuṭapāda-giri)이 있다. '꿋꾸따'는 '꼬꼬댁'하는 닭울음 소리의 의성어이고, 산스크리스트어로 '빠따(pāda)'는 발(足), 기리(giri)는 산이라는 뜻이다. 실제로 산의 모양이 닭 발의 모양을 닮았다고 한다. 석가섭은 '마하가섭존자가 석가모니 부처님의 가사를 가지고 미래에 오실 미륵불께 전하기 위해 꿋꾸따빠다산(계족산)의 바위 동굴에서 선정(禪定)에 들어갔다.'라는 이야기에서 유래하였다. 불교가 중국에 들어오면서 계족산으로 한역(漢譯)되었고, 인도에 있는 계족산을 지리산 영신대에 옮겨다 놓은 것이다. 다시 정리하면 마하가섭이 석가모니 부처님의 가사를 미륵불에게 전하기 위해, 영신대 바위 속에서 적멸의 경지(선정)에 들어 미래에 도래할 미륵불을 기다린다는 이야기가 들어있다. 영신대는 미륵신앙의 성지인 것이다.

 

2017년 석가섭을 찾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최석기 교수님의 '황준량의 지리산 기행시에 대하여(遊頭流山紀行篇을 중심으로)'라는 논문이다. 금계(錦溪) 황준량(黃俊良)은 1545년 4월 지리산을 유람하고 장편고시(176韻, 352句, 2516字)를 남기는데 석가섭을 이렇게 노래한다. '천 길의 가섭상은 햇빛에 그림자 드리웠는데/흉악한 섬 오랑캐의 칼날에 상처를 입었구나.' 나는 황준량의 시를 읽고 2017년 9월 3일 영신대에서 가섭의 형상을 보았다. 햇빛에 드리운 바위가 가섭이 깃든 자연불(가섭상)로 보인 것이다. 이후에 여러 차례 영신대를 찾았으나 가섭의 형상은 보이지 않았다. 2020년 10월 25일 아침 영신대 석문 기도터를 지나 암봉 위에서 영신대를 바라보았다. 이곳에서 마음의 문을 열면 석가섭의 형상을 친견(親見)할 수 있다. 이 위치는 점필재가 창불대에서 영신대 석문으로 내려오는 지름길의 암봉에 있다. 창불대에서 영신암으로 내려오며 석가섭을 보고 석문을 통해 영신대로 들어온 것이다.

 

김종직의 영신암 시 1연 '전괄(창불대)과 거상(나바론계곡)을 둘러보고 돌아오니/노선사의 방장(영신암)은 석문이 열려있네.'

 

황준량(黃俊良, 1517~1563): 본관은 평해(平海). 자는 중거(仲擧), 호는 금계(錦溪). 사온서주부 영손(永孫)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효동(孝童)이고, 아버지는 치(觶)이며, 어머니는 교수 황한필(黃漢弼)의 딸이다. 이황(李滉)의 문인이다.

퍼온글 - 출처: 도솔산연소재

 

창불대(唱佛臺) 

예불에서 오분향례를 염송하거나 부처님을 찬양하는 노래를 뜻하니 곧 구도에 정진함을 이르는 말이다. 김종직은 영신대 부근의 바위를, 김일손은 영신사 앞에 있다고 적었다.

 

낙남정맥은 신령하다는 영신봉에서 시작해서 남쪽으로 299Km를 벋어내려 김해 분산까지 이르는 산 줄기이다.

창불대는 그 낙남정맥 정수리에서 능선따라 500m쯤에 아래에 위치하고 있다.
주변으로 극락바위(자살바위), 우천 선생기도터, 병풍바위가 있다.
발아래로 천길 낭떠러지 이고, 천왕봉, 반야봉을 볼수있어며 낙남정맥과 남부능선을 한눈에 조망할수 있는 지리산 최고의 조망터 중에 한곳이다.

 

이런 곳을 옛사람들이 알았다면 반드시 답사를 했을 것이다. 그중에 김종직 선생이 쓴 유두류록에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증봉(甑峯,촛대봉)을 지나 진펄평원(세석평전)의 초막을 경유해 창불대에 올라 경치를 감상했다.

 

유람록 - 김종직 - 유두류록 1472년

"저물녘에 창불대(唱佛臺)를 올라가 보니, 깎아지른 절벽이 너무 높아서 그 아래는 밑이 보이지 않았고, 그 위에는 초목은 없고 다만 철쭉(躑躅)두어 떨기와 영양(羚羊)의 똥만이 있을 뿐이었다. 여기에서 두원곶(荳原串_고흥)여수곶(麗水串)섬진강(蟾津江)의 굽이굽이를 내려다보니, 산과 바다가 서로 맞닿아 더 기이한 광경이었다.
해공이 여러 산골짜기가 모인 곳을 가리키면서 신흥사동(新興寺洞)이라고 하였다. 일찍이 절도사(節度使) 이극균(李克均)이 호남(湖南)의 도적 장영기(張永己)와 여기에서 싸웠는데, 장영기는 개나 쥐 같은 자라서 험준한 곳을 이용했기 때문에 이공(李公) 같은 지략과 용맹으로도 그가 달아나는 것을 막지 못하고, 끝내 장흥 부사(長興府使)에게로 공(功)이 돌아갔으니, 탄식할 일이다.

해공이 또 악양현(岳陽縣)의 북쪽을 가리키면서 청학사동(靑鶴寺洞)이라고 하였다. 아! 이곳이 옛날에 신선(神仙)이 산다는 곳인가. 인간의 세계와 그리 서로 멀지도 않은데, 미수(眉叟) 이인로(李仁老)는 어찌하여 이 곳을 찾다가 못 찾았던가? 그렇다면 호사가가 그 이름을 사모하여 절을 짓고서 그 이름을 기록한 것인가?
해공이 또 그 동쪽을 가리키면서 쌍계사동(雙溪寺洞)이라고 하였다. 세속에 얽매이지 않았던 고운 최치원이 일찍이 노닐었던 곳으로 각석(刻石)이 남아 있었다. 기개를 지닌데다 난세를 만났으므로, 중국에서 불우했을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에서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마침내 고고하게 속세 밖에 은둔함으로써 깊고 그윽한 산천은 모두 그가 노닐며 거쳐간 곳이었으니, 세상에서 그를 신선이라 칭하는 데에 부끄러움이 없겠다"
[원문]
暮登唱佛臺. 巉巉斗絶. 其下無底. 其上無草木. 但有躑躅數叢. 羚羊遺矢焉. 俯望荳原串,麗水串蟾津之委. 山海相重. 益爲奇也. 空指衆壑之會曰. 新興寺洞也. 李節度克均. 與湖南賊張永己戰于此. 永己. 狗鼠也. 以負險故. 李公之智勇. 而不能禁遏其奔逬. 卒爲長興守之功. 可嘆已.
又指岳陽縣之北曰. 靑鶴寺洞也. 噫. 此古所謂神仙之區歟. 其與人境. 不甚相遠. 李眉叟何以尋之而不得歟. 無乃好事者慕其名. 構寺而識之歟. 又指其東曰. 雙溪寺洞也. 崔孤雲嘗遊于此. 刻石在焉. 孤雲. 不羈人也. 負氣槩. 遭世亂. 非惟不偶於中國. 而又不容於東土. 遂嘉遯物外. 溪山幽闃之地. 皆其所遊歷. 世稱神仙. 無愧矣.
 
靈神菴(영신암)
 
箭筈車箱散策回 : 전괄(창불대)와 거상(대성폭)을 산책하고 돌아오니,
老禪方丈石門開 : 방장(주지승)의 노선사가 석문을 열어주네.
明朝更踏紅塵路 : 내일 아침이면 속세의 길 다시 밟으리니,
須喚山都沽酒來 : 모름지기 촌장(은둔선비)을 불러 술이나 받아오게.
 
영신암 주변을 산책하며 '창불대는 하늘로 통하는 석문으로 올라가고, 대성폭포는 험해서 한번 내려가면 올라올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두보의 '望嶽詩망악시' [車箱入谷無歸路 箭筈通天有一門]“거상의 골짝에 들어서니 돌아갈 길이 없고 전괄로 하늘을 통하는 문 하나가 있구려"의 전괄과 거상 시어를 인용함.
출처 : 도솔산연소재

 

유람록 - 김일손 - 속두류록(續頭流錄) 1489년

영신사(靈神寺)에서 묵었는데, 이 절 앞에는 창불대가 있고 뒤에는 좌고대가 있는데, 천 길이나 솟아 있어 올라가면 눈으로 먼 곳까지 바라볼 수 있었다"
[원문]
(二)十四日壬子. 宿靈神. 前有唱佛臺. 後有坐高臺. 突起千仞. 登而目可及遠. 得以久留也.

 

唱佛臺(창불대)_1543년 황준량의 기행시
 
靑山起層雲 : 청산에는 뭉게구름 층층이 일어나고
嵌竇瀉急瀨 : 깊은 골엔 세찬 물이 쏟아져 흐르네.
一徑入窈窕 : 오솔길 따라서 깊은 곳에 들어가니
寒翠飛晻蕩 : 비취빛 차가운 기운 자욱이 서렸네.
有臺自天成 : 태초에 절로 만들어진 대가 있는데
聳立出空外 : 허공 위로 우뚝하게 솟아 있구나.
滄溟擬盃潦 : 넓은 바다는 술잔 속에 물인 듯하고
積皺如曹鄶 : 겹겹의 산줄기는 조나 회처럼 작네.
眼盡杳不窮 : 아득히 멀어서 잘 보이지도 않는데
山氣此交會 : 산의 기운은 여기에서 서로 모였네.
天王自無對 : 천왕봉은 상대할 다른 산이 없나니
萬絶靑丘最 :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고 우뚝하구나.
巖前千仗壁 : 바위 앞에 펼쳐진 천 길의 절벽은
水墨訝新繪 : 수묵화를 새로 그려놓았나 의아했네.
氷雪蟄花木 : 눈과 얼음 속에선 꽃나무들 꿈틀대고
嵐霧困松檜 : 운무 속에선 솔과 전나무가 고생하네.
輕風動衣袂 : 가벼운 바람이 옷소매를 흩날리는데
鶴羽時翽翽 : 학이 마침 날개 짓하며 날아오르는 듯
遺矢認羚羊 : 배설물을 보아 영양이 사는 줄 알았고
有草類書帶 : 서대초 비슷한 약초도 자생하고 있네.
登臨盪塵胸 : 산에 올라 세속의 찌든 마음 씻어내고
淸嘯起靈籟 : 맑게 읊조리니 신령한 소리 일어나네.
自慙管仲小 : 관중처럼 국량이 작아 부끄러우나
猶嫌伯夷隘 : 백이처럼 속 좁은 것도 싫어한다네.
府歎人宸卑 : 굽어보며 인간세상 비천함을 탄식하고
未信天地大 : 천지가 얼마나 큰지는 믿지 못하겠네.
逸興躡飛仙 : 호방한 흥취 일어나는 신선을 따르고
吟思濕靑靄 : 시상을 떠올리다 구름에 흠뻑 젖었네.
累號自緇流 : 누차 부르는 소리는 승려가 날 찾는 것
胡僧語荒昧 : 승려들 황당하고 어리석은 말을 하였네.
遊人幾古今 : 고금에 이곳을 찾은 이가 몇이나 되는지
懷舊愁無奈 : 옛일을 생각하니 수심을 어쩔 수 없네.
浮生足優游 : 뜬 구름 같은 인생 여유 있게 살아야지
吉凶誰卜蔡 : 길흉을 뉘라서 미리 알 수가 있겠는가.

 

퍼온 글

 

음양수 샘

대성골을 거슬러 능선을 타고 한참을 오르니 집채만 한 바위가 나타난다. 음양수샘이다. 옛날 연진이란 여인이 아이를 갖기 위해 이물을 마셨다가 산신령의 노여움을 사서 평생 세석철쭉밭을 일궈야하는 벌을 받았다는 전설이 있는 곳이다. 음양(陰陽)의 조화를 갖춘 신비한 물이라 하여 과거에 많은 사람들이 찾았다고 한다.

 

행복

지리산에 오르는 자는 안다
천왕봉에 올라서는
천왕봉을 볼 수 없다는 것을
천왕봉을 보려거든
제석봉이나 중봉에서만
또렷이 볼 수 있다는 것을
세상 살아가는 이치도 매한가지여서
오늘도 나는 모든 중심에서 한발 물러서
순해진 귀로 살아가고 있다.
그래서 행복해 하고 있다.


허형만,시인, 1945-

 

 

# 산행지도

 

# 산행사진

지리  화개, 의신마을 산행 기점으로 잡으면 들리는 곳이다.

삼신동(삼신동각자, 하동범왕리 푸조나무, 세이암,洗耳岩), 새벽에 출발 도착해 여유로운 혼자만의 시간을 즐긴다.

 

삼신동(三神洞)

지명의 특징 중 하나는 바로 신(神) 자가 들어간다는 것이다. 영신대(靈神臺), 신흥사(神興寺), 의신사(義神寺)에 모두 신(神) 자가 들어간다고 해서 삼신동(三神洞)이다. 삼신동이라는 이름은 고운 최치원이 붙여놓았다.

 

하동범왕리 푸조나무

푸조나무는 고운 최치원이 신라 말기 혼탁한 세상을 등지고 지리산으로 들어갈 때 꽂아둔 지팡이가 움을 내어 자란 나무라고 전해지고 있다. 최치원이 이 나무가 살아 있으며 나도 살아 있고 이 나무가 죽으면 나도 죽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는 전설도 있다.

 

신라 말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 선생이 세속의 비루한 말을 들은 귀를 씻고 신선이 되어 지리산으로 입산했다는 이야기가 전하고 있다. 그 귀를 씻었다는 곳이 바로 세이암(洗耳岩)이며, 여기서 최치원(崔致遠) 선생이 목욕을 하는데 게가 최치원(崔致遠) 선생의 발가락을 물었다고 한다. 최치원(崔致遠) 선생 은 이것을 고약하게 여겨 그 게를 잡아 멀리 던지면서 다시는 여기서 사람을 물지 말라고 했다 한다. 그 이후 이 근처엔 바위가 많아 게가 서식할 만한 적지인데도 불구하고 게가 없다고 한다.

 

세이암(洗耳岩)

「세이암 전설」은, 하동군 화개면 신흥리의 의신쪽에서 흘러오는 냇물을 따라가면 절벽에 ‘세이암(洗耳岩)’이란 글자가 새겨져 있는데, 신라 말에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 선생이 여기서 귀를 씻고 신선이 되어 지리산으로 입산했다는 지명유래담이다.

 

하동군 화개면 신흥리 세이암 근처 물은 유리알처럼 맑아 잔잔한 흐름을 이루고 계곡마다 바위를 휘돌아 흐른다. 주변에는 기암과 괴석이 울창한 수림과 어울려 아기자기한 풍치가 선경(仙境)을 이룬다. 의신쪽에서 흐르는 냇물을 따라가면 마을 건너편에 절벽이 이루어져 있는데, 이 절벽에는 ‘세이암(洗耳岩)’이란 글자가 새겨져 있다.

 

의신마을 도착

 

의신마을

의신마을은 대성리의 중심 마을로 화개에서도 사찰이 가장 많았던 불교의 요람지였다.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의신사, 의신 암자에서 도를 닦은 의신조사에서 이름을 따 온 것으로 보고 있다. 의신 윗마을 삼정은 삼각등, 말안장터 등 세 곳의 길지가 있어 이곳에 묘를 쓰면 세 사람의 정승이 나올 것이라 하여 삼정 혹은 삼점이 되었다 한다.

 

남부쪽 조망

 

멀리 광양 백운산을 보고

화개동천에 맞대어

좌론 그 악명높은 지네능선이

우론, 멀리 불무장등이 화개장터에 닺는

황장산 끄트머리가

앞으론 범왕능선이 치달아 내리고

 

소나무 연리지

경남 하동군 지리산 인근의 의신마을에서 2023년 3월 11일 오후 1시20분경에 산불이 발생으로 대성주막 가는 길에 소나무 연리지 소실 앞으로 볼수 앖을 것 같다.

 

언제나 이 자리를 지키는 노송

노송도 약간의 산불에 소실 되었지만, 앞으로 지리 들어오면 자리를 지키고 있어 볼수 있는 아름다운 노송

 

대성주막 아래 살림집 은 소실되지 않음 - 어르신 거주하고 있다.

 

2023년 3월 11일 산불 피해로 소실된 대성주막

막걸리 한잔 기울리며 쉼을 하는 곳이였는데 안타까울 따름

 

대성동 대성주막

대성동 대성주막 대성동마을은 이곳에서 1km 정도 더 들어간 산골에 원 대성마을 있었는데 1968년 울진 삼척 무장간첩 침투사건 이후 정부에서 마을을 산 아래로 내려오게 하여 이곳에 정착하였다고 한다.

 

문바위

문바위를 들어서면 신선이 사는 곳이라고 옛 어른들은 말 했다 전해 내려곳...ㅎㅎㅎ

 

원 대성마을

조선말 마을과 지형을 알 수 있는 1918년도 지형도에 보면, 지금의 대성주막이 있는 곳에는 아무 표시가 없고 현재의 원대성에 [大成(대성)]으로 표기되어 있다. 즉, 대성마을의 원래 위치는 현재의 원대성이다. 그래서 [원]대성이라 부르고 있다. 

1918년도 지형도 (현재의 원대성에 대성 마을 표시가 되어 있다.

 

작은세개골 초입

작은세개골 :  백두대간 칠선봉과 덕평봉 주변에서 발원되며 선비샘골이 합쳐져 대성골에 합수됨

 

산행길 큰세개골 진입

 

큰세개골

큰 대성골(세개골)은 오지 중의 오지지만, 오랜 옛날부터 기도처로 소문이 자자하여 대성골 가장 깊숙한 자리에 위치한 영신대(靈神臺)는 지리산에서 가장 영험한 기도처로 통한다. 무속인들이 치성을 드린 제단과 좌대의 흔적이 아직도 여기저기에 남아 있다한다.

 

대성폭포

대성폭포 하단부

 

대성폭포

대성폭포 중단부

 

대성폭포

대성폭포 최상단

 

영신대로 바로 오르는 큰세개골

 

나바론골

대성폭 최상단에서 10여분 오르면 우측에서 나바론골

 

영신사(영신대) 아리왕탑 위치

 

1611년 유몽인 선생의 유두류산록

4월 5일 갑술일. <중략> 이어 만 길이나 되는 푸른 절벽을 내려가 영신암(靈神菴)에 이르렀는데, 여러 봉우리가 안쪽을 향해 빙 둘러서 있는 것이 마치 서로 마주보고 읍을 하는 형상이었다. 비로봉은 동쪽에 있고, 좌고대는 북쪽에 우뚝솟아 있고, 아리왕탑(阿里王塔)은 서쪽에 서 있고, 가섭대(迦葉臺)는 뒤에 있었다. 지팡이를 내려놓고 기다시피 비로봉 위로 올라갔지만 추워서 오래 있을 수 없었다.

 

영신사(영신대) 옥천

 

영신사 터

지리산 최고의 기도처'라고 입을 모으는 명당이 곧 영신대이다.
지난날 영신사란 사찰이 자리했던 이 곳은 영신봉(1,651m) 바로 남쪽 사면 대성계곡 본류가 발원하는 곳에 위치하고 있다.

 

영신대(靈神臺) - 영신사터

 

김종직_유두류록

유람록에 대부분 영신사를 경유해가거나 숙박을 하고간다.
김종직 선생과 유몽인 선생은 이곳을 경유해가면서 주변을 상세하게 묘사해놓았다


김종직_유두류록 1472년 8월 17일, 신사일(양력 9월29일)
(전략)
영신사(靈神寺)에서 머물렀는데 여기는 승려가 한 사람뿐이었고, 절 북쪽 비탈에는 석가섭(石迦葉) 한 구(軀)가 있었다. 세조 대왕(世祖大王) 때에 매양 중사(中使)를 보내서 향(香)을 내렸는데, 그 석가섭의 목에도 갈라진 곳이 있는데, 이 또한 왜구(倭寇)가 찍은 자국이라고 했다. 아! 왜구는 참으로 도적이로다. 산 사람들을 남김없이 도륙했는데, 성모와 가섭의 머리까지 또 칼로 베는 화를 입혔으니, 어찌 비록 아무런 감각이 없는 돌일지라도 사람의 형상을 닮은 까닭에 환난을 당한 것이 아니겠는가? 그 오른쪽 팔뚝에는 마치 불에 탄 듯한 흉터가 있는데, 이 또한 “겁화(劫火)에 불탄 것인데 조금만 더 타면 미륵(彌勒)의 세대가 된다.”고 한다. 대체로 돌의 흔적이 본디 이렇게 생긴 것인데, 이것을 가지고 황당하고 괴이한 말로 어리석은 백성을 속여서, 내세(來世)의 이익을 추구하는 자들에게 서로 다투어 돈과 베를 보시(布施)하게 하고 있으니, 참으로 가증스러운 일이다.
가섭전(迦葉殿)의 북쪽 봉우리에는 두 바위가 우뚝 솟아 있는데, 이른바 좌고대라는 것이다그 중 하나는 밑은 둥글게 서리었고 위는 뾰족한 데다 꼭대기에 네모난 돌이 얹혀져서 그 넓이가 겨우 한 자 정도였는데, 승려의 말에 의하면, 그 위에 올라가서 예불(禮佛)을 하는 자가 있으면 증과(證果)를 얻는다고 한다. 이 때 종자인 옥곤(玉崑)과 염정(廉丁)은 능란히 올라가 예배를 하므로, 내가 절에서 그들을 바라보고는 급히 사람을 보내서 꾸짖어 중지하게 하였다. 이 무리들은 매우 어리석어 거의 콩과 보리도 구분하지 못하는데, 능히 스스로 이와 같이 목숨을 내거니, 부도(浮屠)가 백성을 잘 속일 수 있음을 여기에서 짐작할 수 있겠다.
법당(法堂)에는 몽산 화상(蒙山和尙)의 그림 족자가 있는데, 그 위에 쓴 찬(贊)에,

석가섭

 

영신대에 숨어있는 마하가섭 이야기

선인들의 유람록을 읽다보면 빈발암, 가섭전, 영신암이 등장한다. 빈발(賓鉢)은 가섭(迦葉)이 출가하기 전의 속명 핏발라(Pipala), 가섭(迦葉)은 출가 후의 법명 가사파(kā-śyapa)를 음차하여 한역한 것이다. 영신(靈神)은 가섭이 열반에 들기 위해 선정(禪定)에 들어간 후의 이름이다. 빈발(賓鉢)과 가섭(迦葉), 영신(靈神)은 마하가섭(Mahākā-śyapa)의 출생과 출가, 적멸(寂滅)의 시점으로 구분한 것으로 이해한다. 가섭의 출생부터 적멸까지의 이야기가 세석평전과 영신대에 담겨있다. 1487년 추강 남효온은 지리산일과에서 촛대봉은 빈발봉으로, 영신봉은 계족봉으로, 영신대에 영신암과 빈발암, 가섭전이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비해당 안평대군이 영신암 법당에 있는 몽산화상이 그린 가섭도 족자에 쓴 찬(贊)을 읽어보면 이해가 쉽다. 요약하여 말하면 마하가섭존자가 설의 계산(계족봉) 아래 영신대 바위 속에 깃들어 적멸의 경지(선정)에 들어가 미륵불을 기다린다는 내용이다.

 

영계(靈溪)

영계() - 영신사 동쪽 섬돌 아래에는 영계()가 있고, 서쪽 섬돌 아래에는 옥천()이 있는데, 물맛이 매우 좋아서 이것으로 차를 달인다면 중령(), 혜산()도 아마 이보다 낫지는 못할 듯하였다. 샘의 서쪽에는 무너진 절이 우뚝하게 서 있었는데, 이것이 바로 옛 영신사이다. 그 서북쪽으로 높은 봉우리에는 조그마한 탑()이 있었는데, 그 돌의 결이 아주 곱고 매끄러웠다. 이 또한 왜구에 의해 넘어졌던 것을 뒤에 다시 쌓고 그 중심에 철()을 꿰어놓았는데, 두어 개의 층은 유실되었다....'라고 기록하였다.

 

영계(靈溪) 아래 조망처

 

우천 허만수(宇天 許萬壽)의 기도처

지리산에서 가장 신령스럽고 영험한 곳이라는 영신대는 기(氣)가 세어 사람이 거주하기 힘든 곳이라고도 한다. 영신대를 돌아보고 우천 선생의 영신대 기도터로 향한다. 이곳 기도터는 여타와 달리 꽁꽁 숨겨진 비밀 기도터다. 계곡을 조금 내려서서 좌측 석벽의 석문을 통과하면 숨어 있던 기도터가 나타난다. 마치 절진을 펼쳐놓아 사람의 접근을 쉽게 허용하지 않는 듯한 느낌이다.

우천 허만수 선생 기도터 좌선대-4

 

영신봉 주변 암벽

 

영신봉 해발1.652m

영신봉,靈神峰 - 지리산 영신봉은 높이 1,651.9m로 백두대간 낙남정맥의 출발점이다. 서쪽으로 칠선봉[1,576m]·삼각고지[1,470m], 동쪽으로 촛대봉[1,703.7m]·천왕봉[1,915m], 남쪽으로 삼신봉[1,284m]과 이어지는 주요 능선들이 영신봉에서 갈라지며, 남쪽 비탈면에 산청군 시천면 거림골, 하동군 화개면 큰세개골·대성계곡, 북쪽 비탈면에 함양군 마천면의 한신계곡이 있다.

 

창불대 가는길 주변 조망

 

자살바위

자살바위와 창불대(唱佛臺),
묘하게 둘은 나란히 마주보고 있다. 

인터넷 자료엔 
빨치산 여성대원들이 떨어져 죽은 바위 라고 나온다. 
30여명이 죽었다고 하는 자료도 있다. 

이런 ‘풍문’들은 어떤 근거도 없다

생각한다.

 

몇년 전 후배 칠성님 하고 전람회 길 산행하며, 앞으로 자살바위라 하지말고 극락바위라 명칭을 바꾸자 했다.

후배 칠성님은 건강이 좋지 못해 이제는 저 멀리서 편안한 시간을 보내고 있을 것이다.

후배 칠성님 하고 지리 산행 했던 시간을 생각 해본다.

 

자살바위에서 조망되는 창불대

 

창불대(唱佛臺) 

예불에서 오분향례를 염송하거나 부처님을 찬양하는 노래를 뜻하니 곧 구도에 정진함을 이르는 말이다. 김종직은 영신대 부근의 바위를, 김일손은 영신사 앞에 있다고 적었다.

 

낙남정맥은 신령하다는 영신봉에서 시작해서 남쪽으로 299km를 벋어내려 김해 분산까지 이르는 산줄기이다.

창불대는 그 낙남정맥 정수리에서 능선따라 500m쯤에 아래에 위치하고 있다.
주변으로 극락바위(자살바위), 우천 선생기도터, 병풍바위가 있다.
발아래로 천길 낭떠러지 이고, 천왕봉, 반야봉을 볼수있어며 낙남정맥과 남부능선을 한눈에 조망할수 있는 지리산 최고의 조망터 중에 한곳이다.

 

이런 곳을 옛사람들이 알았다면 반드시 답사를 했을 것이다. 그중에 김종직 선생이 쓴 유두류록에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증봉(甑峯,촛대봉)을 지나 진펄평원(세석평전)의 초막을 경유해 창불대에 올라 경치를 감상했다.

 

우천선생님 좌선대-5

 

병풍바위

 

자살바위

 

병풍바위

 

창불대(唱佛臺)

저물녘에 창불대(唱佛臺)를 올라가 보니, 깎아지른 절벽이 하도 높아서 그 아래로는 밑이 보이지 않았고, 그 위에는 초목은 없고 다만 철쭉[躑躅] 두어 떨기와 영양(羚羊)의 똥만이 있을 뿐이었다. 여기에서 두원곶(荳原串), 여수곶(麗水串)·섬진강(蟾津江)의 굽이굽이를 내려다보니, 산과 바다가 서로 맞닿아 더 기관(奇觀)이었다.

 

500년전 지리산 산행기인 겸재 김종직의 유두류록에도 등장하는 창불대 명칭그대로 이곳에 올라 소원을 빌거나 인근에 존재했다는 영신사 스님들의 기도처였다고 광할한 천혜의 은신터였을 세석고원일대와 멀리 상봉 반야봉 등등 조망이 가히 압권인 천하의 명당지.

 

창불대에서 세석평전대피소 저 멀리 천왕봉까지 조망

 

 

 

너럭바위에 우천 선생의 3기도터

 

너럭바위

너럭바위에 올라 기도터를 둘러보니 조망 좋은 명당자리에 있다. 발아래 거림골이 내려다보이고 우측으로 남부능선이 시원하게 뻗어 있다. 그 끝머리에 삼신삼봉이 나란히 자리하고 있고 좌측으로 낙남정맥이 흐르는 능선과 주산 줄기가 조망이될거고. 바로 아래에 우천 선생의 움막이 위치하며 아무래도 이곳이 우천 선생이 가장 많이 애용한 기도터로 보인다.

 

음양수 샘

대성골을 거슬러 능선을 타고 한참을 오르니 집채만 한 바위가 나타난다. 음양수샘이다. 옛날 연진이란 여인이 아이를 갖기 위해 이물을 마셨다가 산신령의 노여움을 사서 평생 세석철쭉밭을 일궈야하는 벌을 받았다는 전설이 있는 곳이다. 음양(陰陽)의 조화를 갖춘 신비한 물이라 하여 과거에 많은 사람들이 찾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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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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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소담 | 작성시간 26.06.14 아직 오염되지않은 지리산!!!소중하게 잘지켜가야할 우리들의 의무 인거 같습니다~~~멋진고 귀한영상 즐감합니다
  • 작성자무등거사 | 작성시간 26.06.15 대성골 막걸리 생각많이나네요ㅛㅛㅛㅛㅛㅛ
    화재후로는 못가봣는디 큰사님덕분에 사진으로 구경하네요ㅛㅛㅛㅛ
    음양수는 음용으로 안된다하든디~~~~~ㅋㅋㅋㅋ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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