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라고? "
예전같았으면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했을 담화영의 살기가 일렁이는 얼굴을
상당히 건방진 표정으로 똑바로 쳐다보며 기연화가 다시 말했다.
" 앞으로 강호를 유람하고 싶다면 내 명령에 따라야 해요. "
" .... "
" 천하의 영웅이신 훤한랑께서 자신의 약속을 잊고,
힘없고 어린 계집아이를 협박하진 않겠죠 ? "
이어진 기연화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체내의 무형지기를 이용해서
어떻게 상황을 반전(反轉)시켜 보려던 담화영의 얼굴이 처참할 정도로 일그러졌다.
" 꼭 그래야만 하겠냐? "
발끈하려던 담화영이 말끝을 힘없이 축 늘어뜨리자
, 구개월동안의 동거(同 居)로인해
좋게 말하면 자유분방하고 천변만화하는 성격이지만,
정확하게는 점잖지 못하고, 무엇이든 자신에게 불리한 상황에 처하면
어떻게 해서라도 억지를 부리기 좋아하는 담화영의 성격을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던 기연화가 슬쩍 말의 강도를 낮췄다.
" 절대로 어르신의 위엄(威嚴)이 손상되는 명령은 하지 않겠어요.
단지 당신께서 강호를 돌아다니며 예전 같은 행패를 부리신다면
저와 검문의 입장이 곤란해지니까 저도 적당한 방수(防手)는 둬야 하지 않겠어요? "
".... "
오래전부터 이날만을 준비해 왔다는 듯
기연화의 설명은 사람이 바뀐 것처럼
담화영의 예상을 깨고 청산유수(靑山流水)처럼 이어졌다.
벙어리 냉가슴을 앓듯이 자신의 손녀뻘밖엔 안 되는 기연화의 설명에
세이경청하고 있던 담화영의 안색이 연신 붉으락 푸르락 거리고 있었다.
' 제기랄 멍청하게 검이나 휘두를 줄 아는 계집인 줄 알았더니,
저런 달변(達辯)을 감추고 있었다니... '
내심 투덜거리긴 했지만 자신을 대하는 기연화의 여유만만한 태도가
일종의 허장성세(虛張聲勢)란걸 담화영은 일찌감치 간파하고 있었다.
인간이란 흥분하거나, 긴장하면
평소와 다른 내음을 가진 식은땀을 흘리곤 하는데
여인의 내음에 정통했던 담화영은
기연화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옅은 땀 내음만으로도
기연화가 자신에 대한 공포를 간신히 억누르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던 것이다.
' 클클클 하지만 귀엽지 않은가? '
감히 자신을 협박(脅迫-불행하게도 이것은 담화영의 장기였다)하고 있는
눈앞의 기연화가 괘씸하다는 생각보다는
자신이 키운 제자가 자신 앞에서 귀엽게 재롱을 떠는 모습에
흐뭇함을 감출 수 없다는 게 담화영의 본심이었다.
본질적으로 담화영은 이미 청년시절에 가졌던 무림에 대한 패기(覇氣)가
많이 사라진 형편이었고,
말년(末年)에 얻어들인 기연화에 대한 애정(愛情)이 특이한 형태로 남달랐던 것이다.
" 그래서 내가 어떻게 했으면 좋겠냐? "
결국 담화영으로부터 항복선언(降伏宣言)을 받아낸 기연화의 얼굴 위로
그제야 엷은 화색(和色)이 돌기 시작했다.
' 이겼다! '
그리고 내심 환성(歡聲)을 내지르고 싶은걸 억지로 참아낸 기연화가
담화영을 향해 앞으로의 일들을 조목조목(條目條目) 설명하기 시작했다.
***
사실 기연화에겐 악귀신패가 하나 더 있었다.
담화영에게 무공을 전수받았 던 구 개월 동안,
옷을 풀어헤쳐봤던 담화영조차 찾지 못했을 정도로 은밀한 곳(?)에
꼭꼭 숨겨놓고 있었던 또 하나의 악귀신패로
막 나가려던 담화영을 제압(制壓)하기는 했지만,
본색이 사마외도인 담화영이 자신에게 아주아주 불리한 약속(約束)을 지키게 만드는 것은
오직 기연화의 수단(手段)에 달려 있었다.
그동안 유심히 관찰(觀察)해왔던 대로
무림에 다시 출동한 자신에게 고삐가 채워지려는 걸 깨달은 담화영은
순간적으로 무시무시한 살기를 뿜어내며 저항했던 것이다.
담화영의 지닌 바 촉급한 흉성(凶性)을 폭발시키지 않도록 하면서도
자신의 말을 듣도록 만드는 것!
그것이 지난 구 개월이 지나도록
기연화가 또 하나의 악귀신패를 꺼내 들지 않았던 까닭이었다.
각설하고, 그렇게 머리를 쥐 나도록 굴린 끝에
천하의 대마두인 담화영을 복종(服從)시킨 기연화는
일단 강서성의 검문으로 돌아가
두 달 후에 있을 영웅대연의 지역별 예선에 대비하기로 마음먹었다.
" 일단 저는 검문으로 돌아갈 거예요. "
지금이라도 기련산으로 돌아가라는 표정이 농후한 기연화의 표정에도 불구하고
담화영의 입가에는 벌써 음험한 상상으로 만들어진 게 분명한
가학적인 성향의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 흠. 강서성이라? "
멋모르는 여인들은 감탄을 자아낼정도로 매력적인 미소를
안면 가득히 떠올리고 있었지만,
담화영과 오랫동안 생활해 왔던 기연화는
너무나 감미로워 온몸이 녹아버릴 듯
달콤한 미소의 이면(裏面)에 숨겨져 있는
담화영의 음험한 상상을 능히 되짚어낼 수 있었다.
가볍게 온몸으로 달라붙어오는 오한(惡寒)을 떨치며
기연화가 자신의 증오를 이빨로 갈아붙이며 소리쳤다.
" 아시겠어요! 기련산을 벗어날 생각이라면 절대로! 절대로 제말을 따라야만 해요! "
" 아아! 강남(江南)의 여인들은 부드럽기가 능라비단과 같으니... "
" 제말 알아들을셨냐고욧! "
" 알았다. 알았어.
근데, 혹여 강서성에 너같이 사내새끼 같은 여아(女兒)만 득시글 거리는 건 아니렷다? "
' 으으윽. 이 더럽고 추잡하고 주책맞은 늙고 얍삽한 색마 녀석! '
담화영의 마지막 말에 얼굴을 딱딱하게 굳힌 기연화는
'흥'하며 콧방귀를 뀌고는 발걸음을 돌려 홍파진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앞으로 어떻게 자신을 상대로 장난질(?)을 칠지를 지켜보기 위해
기연화의 말에 따르는 시늉을 하기로 마음을 먹기는 하였으되,
천성적인 장난기를 억제하지 못하고
결국 기연화를 잔뜩 골내게 만든 담화영은
여유만만하고 멋들어진 발걸음으로 허겁지겁한 잰걸음의 기연화를 쫓아서
역시 홍파진을 벗어나기 시작했다.
홍파진을 벗어나 이십여 리가 넘도록,
홀로 경공을 펼쳐 달려가던 기연화는 일순 기가 막혔다.
' 저 망할 놈의 늙은이! '
***
담화영은 두 마리의 황마(黃馬)와 같이 있었다.
담화영의 모습을 보자마자 급하게 내달리던 발걸음을 되돌려
여러 갈래로 갈라져있는 관도의 다른 방향으로 뛰어가려던 기연화는
관도의 한곁에서 풀을 뜯어먹느라 여념이 없는 황마 위에
자연스레 몸을 기대고 누워 자신을 향해 한쪽눈을 깜박여 보이는
담화영의 느긋한 모습에 맥이 풀렸다.
' 분명 나보다 훨씬 늦게 홍파진에서 출발했을 텐데... '
백여 년이 넘는 본신진기를
구성에 이른 북해산음공에 완전히 융화(融化)시킨 기연화의 내공은
이미 무림에서 말하는 절정지경인 화경(化境)에 이르러 있었다.
당연히 기연화가 펼치는 신법이나 경공술의 빠름은
강호에 보기 드물 정도였다.
그런데도 그녀가 전력을 다해 펼친 경공술을 희롱하는듯한 담화영의 저 모습은
가히 경악(驚愕)이라는 말로도 적절히 표현할 수가 없었다.
세간(世間)의 공도(公道-모두가 인정하는 도리)가 전혀 통하지 않는
담화영을 상대하기 위해 난생처음으로 책 보는 걸 업(業)으로 삼는
문사(文士) 나부랭이들이나 좋아할 계획(計劃) 이란걸 세워보긴 했지만,
기연화의 성정(性情)은 원래가 단순무식! 그 자체였다.
그리고 단순무식한 사람들의 공통점(共通點)은
복잡하게 생각하는 걸 싫어하고, 체념(諦念)이 빠르다는 것이다.
더 이상 자신이 담화영에게서 어떤 방식으로든 벗어나는 게 불가능하다는 걸
어렵사리 인정한 기연화는
곧바로 지금의 상황을 자신에게 편한 방향으로 해석(解析)하기로 했다.
' 휴우~ 뭐 강서성까지의 길이 수천리가 넘으니, 말을 타고 가는 것도 좋겠지. '
담화영이 기연화를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가 내심이 그대로 얼굴에 나타나는 단순함이었다.
금방이라도 자신에게서 다시 달아날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던 기연화가
잠시 주춤거리더니, 자신에게로 입술을 잔뜩 내밀고 다가오자
반쯤 감겨있던 담화영의 두 눈이 활짝 떠졌다.
" 왔냐? "
'네까짓게 도망가봤자 부처 손바닥 위의 오공이 아니더냐'하는 표정이 역력한
담화영의 득의만만한 눈빛을 이리저리 피하고 있던 기연화의 얼굴이
억지로 딱딱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 어쨌든 약속은 지키세요. "
" 그러마. "
자신의 요구에 흔쾌히 답(答)을 준 담화영의 말을 천천히 곱씹어보던 기연화는
담화영이 건네준 황마의 말고삐를 잡으며 무심결에 중얼거렸다.
" 말을 또 어디서 구했어요? "
" 흐음. 별로 갈길이 바빠 보이지 않는 애들이 있어서 정중하게 빌려왔지.
장강의 하구까지 가기에는 제법 쓸만할 것 같지 않느냐? "
".... "
기연화는 담화영이 황마들을 구체적으로 어떤 방식을 사용해서,
어떻게 구했는지를 알고 싶었다. 아니 절대로 알고 싶지 않았다.
자신이 담화영의 흉측한 짓거리들을 알아본들
그것을 어떻게 제지할 수 있겠는가 말이다!
재빠른 동작으로 말위에 올라탄 기연화는 얄미울 정도로 재빨리
자신과 말머리를 같이하는 담화영의 빙글거리는 얼굴이 보기 싫어서
힘껏 말의 허리 부분을 발끝으로 찼다.
이이이힝 -
고통에 겨운 황마의 울부짖음과 함께 말은 달려갔다.
기연화의 뒤를 쫓아 담화영이 탄 말도 달렸다.
그리고 훗날 무림사(武林史)에 길이남을 일대사건(一 代事件)인,
검후 기연화와 훤한랑 담화영과의 오월동주(吳越同舟)가 그렇게 시작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