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석영은 무단 방북하여 감옥도 다녀오고 한국에 빨리 들어오지 못하고 독일과 미국에서 지인들의 보살핌으로 살았던 적이 있다. 나름 한국의 통일을 위해서 노력했건만 아직도 우리 나라는 통일에 다가가지 못하고 있는 현실이다. 미국에서는 한인들과 민족혼을 일깨우는 살풀이 춤도 추며 교민들에게 영향력을 주려고 노력하며 광주사태의 책임자 윤한봉 같은 이들과 어울려 북한과의 교류에도 힘썼다.
그 와중에 <김명수>라는 무용가를 만나 협의를 하고 한인단체와 민족혼을 깨우는 무용도 시도하던 중에 그녀와 눈이 맞아 같이 살게 되고 아이도 하나 낳게 된다.
광주에는 황석영의 본부인이 두 아이를 키우며 자신을 위해 지역민들과 함께 자신의 활동을 뒷바라지 하고 있었다. (92-93쪽)에 본부인과 헤어지는 장면이 잘 묘사되어 있다.
어려운 상황을 글로 남긴 이 글을 읽으며 역시 작가는 작가다라는 생각을 하며 옮겨본다.황석영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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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 돌아와 본부인을 만나 그 무용가와의 관계에 대해 솔직하게 털어 놓았다. 소문이 아니라 나에게서 사실을 확인하게 된 그녀는 슬프고 절망적인 표정이 뚜렷해졌다. 나는 참으로 어리석었거나 아니면 될대로 되라는 자포자기의 심정이었을 것이다
아이들은 오랫만에 집에 온 것을 너무 기뻐하였다. 홍희윤(본부인)은 나에게 말을 걸지 않았고 끼니 때가 되면
말없이 밥상을 차려주고 방으로 들어가버리곤 했다. 아이들도 금새 우리의 어색한 분위기를 눈치챘다.
나는 점점 견딜 수가 없게 되어 그녀의 제안을 받아 들이기로 했다.
그때 나는 좀더 그녀의 마음을 헤아렸어야 했다. 배신감과 분노, 원망감이 격렬하게 들끓는 내면을 침묵으로 다스릴 수밖에 없었던 그녀의 성품을 나는 잘 알면서도 오히려 내가 더 못 견뎌했다. 당시 가장 큰 수입원이었던 <장길산> 인세를 가족 몫으로 주기로 하고 나는 맨몸으로 집을 떠나기로 했다. 홍희윤은 간단한 짐을 꾸리는 내게 서울 가서 거처가 정해지면 내 물건과 책들을 보내주겠다고 했다. 그녀는 애써 냉정한 표정이었지만 내가 대문을 나와 골목길을 걸어나가다 돌아보니 문 앞에서 고개를 내밀고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그렇게 가족의 품을 떠났다. 결혼한지 십오 년째 되던 1986년 여름이었다. 한달 후 전해져 온 내 짐 속 앨범에서 떼어지거나 사진이 잘려나간 빈자리를 발견하고 한동안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그렇게 그녀는 내 기억 속에서 사라져버리기를 원했고 나는 그때부터 또다른 삶을 살아가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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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글을 읽으며 그때의 상황을 가감없이 적은 작가의 필력과 세심한 정서에 대해 놀랐다.
외국을 떠돌아 다니니 똑소리 나는 예쁜 무용가가 눈에 들어왔을 것이고 그렇게 엮여서 아이까지 낳았지만 결국 그녀와도 헤어졌다. 그녀와의 사이에서도 아들 하나를 두었다.
요즘 황작가의 <수인>이란 책을 보고 있는데 생생하고 리얼한 장면들이 책장을 잘 넘어가게 한다.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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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댓글 작성자고샅에핀들꽃 작성시간 24.03.20 저도 노안으로 책을 못읽어요.
아직 현역이라 직장에서
컴터로 업무 작성 하고 나면
책읽기는 무리 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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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댓글 작성자수명이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24.03.20 고샅에핀들꽃 네..그런 친구 많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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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고샅에핀들꽃 작성시간 24.03.20 감사히 잘 봤습니다
2편 기대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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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댓글 작성자수명이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24.03.20 고샅이 고어인데 좋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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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이쁜이모 작성시간 24.03.20 황석영씨는 자기밥 해주던 아줌마와 세번째 결혼한걸로 알고있어요.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