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사람과 소주를
개뿔, 영하 12도면 어때, 오대산에나 가자는 거야 동피골 골짜기에 가자는 거지 외딴 폐가 지나서 쩡쩡 터지는 고드름 소리, 얼어붙은 멧돼지 발자국 따라 따라서 얼음폭포 앞 눈사람 보러 가자는 거지 땅에서 솟아난 듯 찌그러진 머리, 눈도 삐뚤 입도 삐뚤한 그 앞에 미친 척 삼배 올리고, 올리는 시늉이나 하고, 소주 한잔하자는 거야 눈사람은 금세 얼굴이 벌게지겠지 요즘 사는 게 왜 이 모냥이냐, 투덜투덜 대겠지 연거푸 깡소주 몇 잔 들이켜고는 제길, 눈을 반쯤 감고서는 느닷없이 ‘모란동백’을 부르기도 하겠지 우리는 술 취한 척 벌러덩 눈밭에 누워버리는 거야 큰댓자로 누워 하늘 한번 쳐다보는 거지 무슨 잃어버린 물건을 찾듯 한참을 쳐다보다가, 마침내는 아무 생각 없이 쳐다보다가 아, 겨울볕이 첫사랑 같애, 첫사랑의 뺨 같애, 헛소리나 헛소리나 지껄이자는 거야
뒤집어진 신발
아이들 어릴 때 동네 슈퍼 심부름을 시키면 아홉 살 효은이는 소방차 불 끄러 가듯 골목길을 내달렸습니다 동생 소현이는 무슨 일인지도 모르고 죽어라 언니 뒤를 쫓았습니다 아이들은 신발이 벗겨져도 뒤도 안 돌아보고 달려갔습니다 어느새 아이들 커서 집 떠난 지 오래됐지만 이따금 나는 그 모습을 떠올리며 혼자 빙긋 웃곤 하는데요, 이 웃음의 끝자락에는 길바닥에 뒤집어진 작은 신발, 홀로 남겨진 신발 한 짝이 아직도 가쁜 숨을 쉬며 놓여 있습니다
내 눈길 닿을 때마다
유월 땡볕이 되어 타오르고
장대비 같은 적막으로 쏟아지고
부푼 돛이 되어 펄럭이는
신발
아이들 심부름은 어쩌면 그 신발이 이미 다 한 건 아닌지요?
그 신발이 나에게 영영 안 끝날 심부름을 시키고 있는 건 아닌지요?
봄날은 안 간다
-‘폭싹 속았수다’는 드라마 아이가, 드라마……
-그래도 관식이* 거튼 사람이 있으이 테레비에 나오지
당신은 그 반의반이라도 했나?
내한테 잘해준 게 머 있는데?
벚꽃잎 흩날리는 광안리 생대구집
창가 옆 탁자
티격태격
목소리 높이다가
아이고 참, 대구탕 다 식겠다,
남자는 얼른 두툼한 살 토막 하나를 여자 그릇에 넣습니다
여자는 못 본 척 고개 돌려 배시시 웃습니다
*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의 남자 주인공. 평생을 아내에게 헌신한 착한 인물.
이 작은 별에는 외 1편
밤에만 우는 새 카카포가 있지
일생동안 물을 먹지 않는 사막캥거루쥐
뿌리로 숨 쉬는 맹그로브 나무
초음파로 물고기를 잡아먹는 불독박쥐가 있지
씨앗에 독을 숨겨둔 주목
시체에만 알을 낳는 송장벌레
땅속에서 꽃을 피우는 오스트레일리아 난초도 있지
누가 뭐라던, 무슨 짓을 하든
초속 30km로 돌고 있는
이 작은 별에는
눈 덮인 국경을 넘는 취한 말
고삐를 당기는 소년의 언 손
벼랑 끝에 매달린 사원
늘 배고픈 밥그릇과
밥그릇들의 끝없는 싸움과
해 질 녘 숲길 걷는 사람
나뭇잎 한 장 들고 먼 하늘 우러르는 사람
삐뚜름한 모자
그 모자가 부르는 해맑은 노랫소리가 있지
전동균(全東均/JEON DONG GUEN)
1986년 『소설문학』 등단. 시집 『한밤의 이마에 얹히는 손』 『당신이 없는 곳에서 당신과 함께』 등. 김종삼시문학상, 백석문학상 등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