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아버지와 아들의 전선야곡
그렇지만
시대와 지역을 부정하는 그런 정치는 않았으면...
<전선야곡>은 유호와 박시춘 콤비가 만들어낸 노래 중 하나다. 전쟁 시기 공전의 히트를 쳤던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 앞으로 앞으로”는 9.28 수복 후 우연히 서울 거리에서 만난 유호와 박시춘이 회포를 풀며 술을 먹다가 뚝딱 만들어낸 노래였다. 그런데 유호는 이 노래 때문에 곤욕을 치르게 된다. “이기고 개선해야 될 군인이 왜 화랑 담배 연기 속에 사라져? 왜 전우의 시체를 넘어? 인민군 시체가 아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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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호는 서슬푸른 군 수사관 앞에 끌려간다. 한참을 들들 볶이던 중, 네가 이 노래를 하루만에 지었다고?에 꽂힌 수사관이 종이를 내민다. 그렇게 노래를 잘 만든다니 가사 한 번 써 봐. 지금, 당장. 삼국지에 등장하는 이야기, 조비 앞에서 7보시를 읊는 조식의 심경이 그랬을까. 유호는 다급한 마음에 머리 속에 떠오르는 대로 가사를 적기 시작한다. 후다닥 1절을 완성해서 건네 주고 2절까지 써 내려가는데 갑자기 느낌이 이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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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개 들어 특무대원을 보니 수사관이 눈물을 철철 흘리고 있었다. 가사를 보고 절절하게 공감했던 것이다. 아무리 후방에서 불순분자나 때려잡는 특무대원이나 기관원이었다고 해도 그도 군인이었다. 전쟁은 계속되고 있었고, 그의 친구들, 이웃들은 속절없이 포탄밥 총알밥이 돼 죽어가고 있었다. 그런 그의 심기를 찔러 피를 낸 노래. 그게 후일의 <전선야곡>이 된다. “가랑잎이 휘날리는 전선의 달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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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바닥만한 땅, 야트막한 고지 하나에 수천 명의 목숨이 갈아넣어졌다. 병력은 양쪽 다 무작정 필요했다. 트럭에 실려, 또는 군가 부르며 행군하며 태어난지 스무해도 안된 청년들이 죽음을 향해 나아갔다. 그때 그들에게 <전선야곡>은 글자 그대로 눈물샘을 터뜨힐 수 밖에 없던 노래였다. 가수들의 전선 위문 공연에서 이 노래가 울리면 중대장부터 이등병까지 꺼이꺼이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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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로도 이 노래는 군인들의 애창곡이었다. 경계를 서면서 흥얼거렸고, 회식 뒤에 구성지게 불렀고, 뜨거운 열기의 베트남 전선에서도 읊조렸고, 오들오들 떨면서 이 노래로 추위를 녹였다. 이 노래를 18번 삼은 군인 중에는 1937년생 공군 예비역 중령도 있었다. 아버지가 늦게 본 자식인 덕에 고등학교도 졸업하지 않고 장가를 가서 아이를 낳았고, 고등하교 졸업 후 공군 하사관이 된다. 1968년에는 공군 간부 후보생으로 갈매기 대신 다이아몬드를 군복에 달았다. 능력도 있어서 승진도 잘 됐다. 그런데 일찍 본 아들이 문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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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은 서울대학교 정치학과 76학번이었다. 아버지는 법대 가서 사법고시를 보기를 원했지만 아들은 정치학과를 택했다. 한국의 민주공화정이 최악의 막장으로 치닫던 유신 시대였다. 이를 용납할 수 없던 정치학도는 데모에 가담했다. 2학년 때 벌써 빵잽이가 된 아들을 두고 아버지는 펄펄 뛰었지만 도리가 없었다. 현역 군인 신문에 면회도 가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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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서울의 삭막한 봄, 아버지는 보안대에 끌려가서 계급장 없는 피 묻은 군복으로 갈아입혀진 채, ‘아들 잘못 가르친 죄’를 추궁당한다. 아버지가 보안대에 끌려갔다는 말을 들은 아들은 머잖아 자수한다. 얄짤없이 옷 벗을 위기였지만 주변 동료들의 도움으로 군복을 더 입었던 아버지는 아들에게 엄청나게 화를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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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미 아들은 머리가 클대로 커 있었다. 아들을 나무라는 아버지도 아들의 정의를 부인할 도리는 없었다. 아버지는 예비역 중령으로 군복을 벗는다. 간부후보생 출신이니 별 달기도 어려웠겠지만 운동권 괴수 아들 둔 아버지가 그 이상 바라보기도 힘들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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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차이가 스무살도 나지 않는 큰형 같은 아버지는 이후 아들의 정치적 후원자가 된다. 빨갱이 어쩌고 하는 노인들 앞에 나서서 나 공군 예비역 중령이고, 가는 내 아들이요 부르짖었고, 아들의 출마 지역인 경기도 군포에 가서 노인들과 함께 게이트볼을 쳤다. 그러나 또 한 번 아들이 아버지의 속을 뒤집는다. 그냥 그 지역에 있으면 4선 5선 편안히 갈 텐데 굳이 대구로 오겠다는 것이었다. 경북 상주에서 대대로 살았고, 대구에서 터잡은지 오래인 아버지 보기에 말도 안되는 일이었다. 결사반대했지만 아들은 대구로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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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 떨어졌다. 그래 이제는 네 날개 펼 곳으로 가라 싶었다. 그런데 또 아들은 아버지의 속을 뒤집는다. “아버지 대구 시장 출마하겠십니더.” 아버지는 피가 거꾸로 돌았다. 어데 니는 벽을 문으로 알고 대가리를 박노. 안된다. 안되는 일을 와 그래 할라 하노.“ 부자간 연을 끊자는 말까지 나왔다. 다시 한 번 아버지는 경상도 사람이고, 상주 출신에 대구 사람이고, 그곳을 잘 알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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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운동 다니면 ”김부겸이 전라도 사람이라매“ 말에 허파가 뒤집힌 게 한두번이 아니었다. 1997년 대선 때 부산에 다니러 갔던 내게 아버지 고향, 어머니 고향, 출신 학교 다 묻다가 처가가 어디요?라고까지 물었던 택시 기사같은 사람들은 경상도에 널려 있었더. 천지빼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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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아들은 고집을 꺾지 않았고, 출마 선언 후 아버지는 묵혀 두었던 군복을 다시 입는다. 그리고 아들과 함께 대구 앞산 충혼탑을 찾아 참배한다. “부갬이가 250만 대구시민의 수장이 되려면 적어도 선배 호국영령께 먼저 참배하고 신고해야 한다고 말했다. 시장이 되려면 대구시민의 마음을 읽어야 하는데 밀알이 되고자 하는 마음이 중요하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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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는 낙동강 교두보의 최전선 도시였다. 정부는 부산에 피난수도를 차렸지만 대구 이하 낙동강 방어선이 돌파되면 그것으로 끝이었다. 앞산 충혼탑은 대한민국의 존망을 건 낙동강 교두보에서 산화해 간 영령들을 모신 곳이다. 공군 군복을 입고 아들과 함께 그 충혼탑 앞에 선 아버지는 조그맣게 읊조렸을 것이다. 평소에 불렀던 노래 <전선야곡>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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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이후로도 아버지는 여러 모습을 보았다. 아들이 대구에서 31년만에 ‘민주당쪽’ 국회의원으로 ‘등극’ (이 말이 어색하지 않다)하는 모습도 보았고 대한민국 국무총리가 되는 영광을 누리기도 했지만, 실패와 좌절도 함께 겪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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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역시 답답했을 것이다. 조상 대대로 뼈속까지 경상도 사람을 전라도로 호적을 바꾸는 사람들 앞에서. 또 대구에서 뭔가 해 보겠다고 이모저모 하는데 서울에 앉아 거만하게 깔아보며 “파란 옷 입은 국힘당” (이번에도 어느 진보적개신교 목사가 헛소리를 했다.)이라고 일갈하는 탈레반같은 민주진보들을 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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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아버지는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아들은 그 생애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대구 유세에서 아버지의 노래를 불렀다. 쉬어 버린 그의 목소리를 들으며, 자기도 모르게 떨어지는 두 갈래 눈물 줄기를 보면서 나도 가슴이 더워졌다. 어쩌면 그 아들은 대구의 양심과 상식의 낙동강 교두보였다. 나라를 팔아먹어도 00당이라는 야만의 동네에서 가냘프게 하지만 끈질기게 살아남았던 문명의 요새였다. 그가 치른 모든 전투는 지역주의라는 사악한 세력을 막아내기 위한 다부동 전투고, 가산 전투고, 신녕 전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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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아들은, 그리고 그를 지지하는 대구 시민들은 6.25때처럼 승리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결코 패배하지는 않았다. 전투에서는 승자와 패자가 명확하지만 전쟁의 승자와 패자는 다르다. 그보다 더 호흡이 긴 것이 역사의 승자와 패자이리라. 김부겸은 졌지만 이겼다. 수십년 철벽이 된 도시에서 50% 가까운 지지를 얻으며 균열을 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이 그 구멍을 넓히고 다른 틈을 만들어내리라. 김부겸은 그럴 용기를 주었다. 어쩌면 그게 군인 아버지가 일러주신 ‘장부의 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김부겸 후보. 고생하셨습니다.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은 당신에게 큰 빚을 졌습니다. 아버님 묘역에 가서 노래 한 자락 불러 드리십시오. “들려오는 총소리를 자장가 삼아 꿈길 속에 달려간 내 고향 내 집에는 정한수 더 놓고서 이 아들의 공 비는 어머님의 흰머리가 눈부시어 울었소. 아 쓸어안고 싶었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