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김덕재(金德載) 병조판서공(兵曹判書公)

작성자유 당|작성시간07.04.11|조회수256 목록 댓글 0

 

김덕재(金德載) 병조판서공(兵曹判書公)
 
공의 이름은 덕재요 자는 도중(道重 : 어느 책에는 호를 벽송이라고 하였다.)이요
경주사람이니 신라의 경순왕 15세 손이다. (세대를 따라서 연대를 계산하면 판서공이 출생한 해는 고려조의 말년에 있었던 것 같다.) 관은 정헌대부 병조판서이다.

기탄없이 소신을 말하여 간하다가 임금의 뜻을 거슬려서 정평에서 귀양살이를 하게 되었다.(하나의 설에는 홍무명태조의 연호 무인 1398, 태조7년에 태조가 왕위를 피하여 함흥의 본궁에서 계실 즈음에 조정에서는 여러번 사신을 보내어 찾아가 뵈었지만 태조께서는 노하시고 모두 죽이었다.그때를 다하여 공이 병부상서로 자청하여 왕명을 나아가 뵙고 굳세게 간하였더니 태조께서 그의 간절한 충성을 아시고 중산에다 벼슬을 떨어뜨리고 귀양을 보냈다고 하는데, 지금 실록을 근거하여 보면 태조께서는 왕궁을 나와 다른 곳에서 놀으시었음은 신사 1401년, 태종1년 임오 1402년, 태종2년의 2년간에 있었으며 본궁으로부터 궁궐로 돌아오신 것은 바로 태종2년임오 1402년 겨울 12월이다.

이 먼저 홍무무인 1398년, 태조7년에는 태조께서 아직도 개성에 머물고 계시었으니 이른바 봉영사가 어떻게 북방에 먼저 들어간 자가 있겠는가? 그러므로 그 설을 믿기가 어렵다.).공이 처음에 주이사(朱伊社)의 큰 길 아래 중흥리에서 사시었지만 세대가 아득하게 오래되고 사람은 죽어 없고 옛 터만이 내버려두어 못쓰게 되었으며 손수 심었던 연지만이 아직도 남아있으니 옛날부터 지금까지 직형지라고 이름하였다.
공이 일찍이 지은시가 있어 이르기를 한번 관계를 떠난 지 10년을 지내니 경주의 옛 땅은 꿈속의 영혼만이 슬퍼하네, 수레를 돌려 옛 고향에 갈 날이 언제이던가?

이제부터는 중심이 이 나라 고향이라네. 하였다. (중산은 고려조의 정평의 옛 이름이며 같은 까닭으로 다시 정평이라고 개칭하였다.) 죄를 용서하는 특전을 받지 못하고 끝내 정평의 집에서 돌아가시니 조정에서 지사를 보내어 주이사의 우봉산에 금계가 알을 품은 형국의 감룡(坎龍)에 정향(丁向)의 언덕을 가려서 장례지냈다.배정부인 임씨의 묘도 같은 자리에 합폄하였다.

병판공묘소 - 함경남도 정평군 주이면 중흥리 중봉동

병판공모현사 - 함경남도 정평군 장원면 교항리(병판공외 22배위)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