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주, 청평의 저쪽 – 정복선 제 8시집
정복선 | 문예바다 | 2023. 12. 20/108페이지 | 128×210㎜/값 10,000원/ISBN 979-11-6115-221-9
■ 책 소개
정복선 시인의 제8시집 『변주, 청평의 저쪽』이 도서출판 문예바다의 기획시선 여섯 번째로 출간되었다. 폭넓은 인문학적 교양을 바탕으로 전개되는 정복선 시인의 시에는 인문학의 향기가 흐른다. 그리고 응시와 직관의 시선으로 사물과 세상의 어둠을 생생히 그리고자 하는 시인의 결기는 온몸을 다해 시간과 공간의 극한을 향해 나아가며 옛집 뜨락과 같은 덧나지 않은 무위와 자연, 자유와 평화의 세계를 그리워한다. 그는 이 속에서 자신의 심연이 깊어지기를, 그의 정신이 백척간두 그 너머에 도달하기를 꿈꾼다.
오랫동안 이곳저곳 떠돌며 살아온 듯합니다.
오늘은 여기에 유르트를 짓고 생존하고 있으나
언제 이걸 거두어서 또 옮겨가게 될까요
청평, 이라는 경계를 넘어서,
유목의 맨 처음, 혹은 다른 차원의,
그 원형적인 시간과 공간을 향한,
저녁노을빛 연주를 들려주고 싶습니다.
2023년 감국향의 가을날
정복선
정복선의 시는 생의 절정으로서의 순수를 지향한다. 그의 시는 가장 순수한 의식의 순간에 발견되는 “원형질의 향기와 말씀”이며, 기나긴 유목의 길을 떠나서 많은 시련과 고통을 극복하는 가혹한 수행을 감내함으로써 매일 새로운 노래-변주變奏-를 들려주고자 한다. 그것은 원형의 꽃을 찾아내고, 가꾸고, 피우고, 바치려는 일련의 제의祭儀의 과정이다. 나아가, 시인은 안식과 휴식을 상징하는 유목의 끝에서도 그 경계 너머, “청평의 저쪽”을 바라보고 있다.
― 고명수(시인)
이 긴 밤이 지나면 타오르던 장작불꽃도 시들어
몇 날 며칠 헤맴 끝에서 태어난
첫 모험 한 점 만날 수 있겠지요
혹여 거친 눈빛 한 방울 떨어뜨리지 않았을까,
지나친 열망의 재가 원망願望을 휘덮지나 않았을까,
목욕재계하고 드디어 보름달을 만납니다
혹여 당신이 이미 길 떠난 후라면,
이 단심丹心이 발굴될 다른 생이 오겠습니까
남몰래, 접시 밑바닥에 그려 둔
들국화 한 송이의!
― 「보름달을 뒤집어 보세요」 전문
* * *
더는 떠돌지 않으리
구두에 흙 담고 꽃을 심어 대문 밖에 걸었지
섣부른 신발의 항해, 젖은 발과 타는 입술의 별자리들 따라
참을 수 없는 기항과 암초, 폭풍의 암전暗轉
오래 비추이던 불빛이 꺼지고 지구는 한참 늙었어도
흙과 풀이 쌔근쌔근 잠자는 곳
나란히 걸린 뭉그러진 구두에서 작은 꽃 흥얼거리지
마르세유 삼백 년 된 계단과 좁은 골목길
그만, 뛰쳐나가지 마,
떠도는 이들에게 풀꽃시간을 들려주려는 거야
― 「구두화분 한 켤레」 전문
* * *
몰랐구나
이리 많은 별들이 웅성거릴 줄
한꺼번에 몰려와서
한 줄로 꿰이려고 아우성칠 줄은
밤 내 뉴런으로부터 쏟아진 별들을
한 말 한 말 되다가 깜빡 잠들었다,
아침햇살에 빌려온 말을 돌려주었는데
밑바닥에 빛나는 별 조각 하나가 붙어 있었다니!
― 「알리바바 따라잡기」 전문
* * *
흥얼거림은 순간 날아가 버려
먼 훗날의 당신이 들을 순 없겠지
버들가지 나풀대는 고독의 답사 끝에 기록했어
얕고 깊은 이 지극한 아름다움을,
그 사투와 강물의 우울을,
첫 눈물, 태풍의 눈, 꽃잎의 마지막 춤을,
언제고 찾아올 먼먼 나의 후신後身이여
바위음반의 소리골**을 더듬어 이 노래를 불러 줄래?
― 「바위에 새긴 노래-천전리 각석」 전문
* * *
동네 할머니들이 벽화 그리기에 도전 중이다
시골 담장 길에 줄지어 앉아
평생 농사짓고 자식 키우느라 담벼락 닮은 얼굴
마음속 부대끼는 바람을 붓에 듬뿍 찍는다
누가 더 우레에 시달렸나
누가 더 밤새우며 들창에 불 밝혔나
뒹구는 낙과落果들, 진창을 건너온 발자국들 무성해도
세상 그 무엇도 침범하지 못한 어머니의 등뼈
저, 부서질 듯한 슬픔의 잔금, 그 통증에 색칠을 한다
와 보라, 일찍이 집을 떠난 방랑자들이여
― 「벽화의 시간」 전문
해설 | 꽃의 원형을 찾아가는 유목의 시간 … 고명수
시의 형식적인 측면에서의 실험과 도전
폭넓은 인문학적 교양을 바탕으로 전개되는 정복선의 시에는 인문학의 향기가 흐른다. “문향배”에 한 잔의 차를 따라 마시며 낭만적 상상을 전개하고, 한 잔의 술을 앞에 놓고 “어르고 달랜 질펀한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마음을 피력한 「노각나무 꽃시회」는 그가 꿈꾸는 인문학적 풍요의 상징이 된다. 나아가 “동네 할머니”들의 “벽화 그리기”라는 모티프를 통해서 삶의 고통과 슬픔을 치유하는 예술의 효능과 본질을 제시하기도 한다.
또한, 응시와 직관의 시선으로 사물과 세상의 어둠을 생생히 그리고자 하는 시인의 결기는 온몸을 다해 시간과 공간의 극한을 향해 나아간다. 이러한 노력의 결실인 꽃을 시인은 필멸의 존재인 동시에 무상한 삶의 본질적 고통, 그리고 각종 사회적 재난과 참사로 희생되는 인류의 슬픔과 고통 앞에 바치고자 한다. “뜨거운 피”를 식히고 인식의 전환을 통해 평상심의 도에 이름으로써 탈속의 자유를 지향하는 시인은 삶의 진리가 결코 먼 곳에 있지 않음을 보여 준다.
정복선의 시는 생의 절정으로서의 순수를 지향한다. 그의 시는 가장 순수한 의식의 순간에 발견되는 “원형질의 향기와 말씀”이며, 기나긴 유목의 길을 떠나서 많은 시련과 고통을 극복하는 가혹한 수행을 감내함으로써 매일 새로운 노래-변주變奏-를 들려주고자 한다. 그것은 원형의 꽃을 찾아내고, 가꾸고, 피우고, 바치려는 일련의 제의祭儀의 과정이다. 나아가, 시인은 안식과 휴식을 상징하는 유목의 끝에서도 그 경계 너머, “청평의 저쪽”을 바라보고 있다.
향가는 향찰로 표기된 시가 형식으로 신라 때부터 고려 초기까지 존재하였던 우리나라 고유의 정형시로서 불교, 민요, 주술 등의 주제로, 찬가, 기원, 주사, 교훈, 서정 등의 내용을 포함한다. 『삼국유사』에는 가창적 성격의 향가와 그것과 연결되어 있는 설화가 기록되어 있다. 현재 25수의 향가가 남아 있어 전통의 시 문화를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향가의 형식에는 4구체, 8구체, 10구체가 있었는데, 10구체가 가장 대표적인 형식이라고 할 수 있다. 향가의 현대화를 추구하는 <현대향가> 동인의 일원으로 참여하고 있는 정복선 시인은 이번 시집에서도 4행시, 8행시, 10행시 등 나름대로 의도적인 형식 실험을 보여 주고 있다.
시의 형식적 측면에서 향가를 현대적으로 변용시키려는 노력은 시조와는 다른 새로운 전통시가 형식이 어떻게 전개될지에 대한 기대를 갖게 한다. 노익장을 과시하는 정복선의 시가 더욱 정교하고 깊어져서 과거를 잊고 사는 현대인들에게 삶의 본질과 전통 서정을 일깨워 주는 향기로운 서정시를 보여 주기를 기대한다.
■ 작가 소개
- 전주 출생
- 전북대학교 영문학과, 성신여대대학원 국어국문학과 졸업
- 1988년 『시대문학』 등단
- 시집 『변주, 청평의 저쪽』 『종이비행기가 내게 날아든다면』 『마음여행』
『여유당 시편』 등 8권
- 시선집 『젊음이 이름을 적고 갔네』
- 영한시선집 『Sand Relief』
- 평론집 『호모 노마드의 시적 모험』
- 한국시문학상, 한국꽃문학상대상 등 수상
- 서울문화재단(2023), 경기문화재단 지원금 수혜
- 한국경기시협부이사장, 한국시협회원, 국제PEN한국본부자문위원,
『한국시학』 편집위원
- <현대향가> <유유> 동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