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시학』이 주목하는 이 계절의 시인 / 대담 임애월 편집주간
짧게, 혹은 길게
김 창 희 시인
- 처서 무렵
수원의 어느 공원에서 김창희 시인님을 만났다
여전히 아름다운 모습이 아직도 소녀처럼 해맑았다
선생님의 그런 모습 뒤에 숨어있는 이야기들
어떤 모습일지 궁금해진다 -
임애월 : 김창희 선생님, 반갑습니다. 언제 뵈어도 참 아름다우십니다.
요즘 근황이 어떠신지 들려주세요.
김창희 : 네, 주간님 반갑습니다. 아직도 저를 아름답게 보아주시니 감사합니다. 그런데 오늘 주간님의 보이시한 생활한복이 더 멋진데요. 참 잘 어울리시네요.
저는 요즘 제 삶의 무게를 덜어내고 싶은 마음으로 지내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 속초에 거처를 마련했어요. 먼저 살던 일산에 일도 있고 해서 오며 가며 지내고 있습니다.
임애월 : 아, 그러셨어요? 아름다운 동해의 속초 바닷가에도 거처가 있으시다니 정말 부럽네요.
이제 여름도 끝인가 봐요. 아침저녁은 벌써 가을이 오는 느낌이 듭니다.
김창희 : 네... 그렇지요. 말복 지나니까 저녁이면 풀벌레 소리가 귓전을 간질이는군요. 선선한 바람맞이 산책을 나서면 그냥 마음이 행복해집니다.(웃음)
임애월 : 선생님 고향이 춘천인 줄 알았는데 사실은 봉평이라고요?
‘봉평’하면 메밀꽃, 물레방아, 달빛 등 아련한 느낌이 먼저 다가오는데요. 이게 바로 문학의 힘이겠지요.(웃음) 어릴 적엔 메밀꽃밭 속에서 뛰어다니며 놀았나요?
김창희 : 아~ 아니요. 아쉽게도 고향에 대한 추억이 별로 없습니다. 3살 때 엄마 등에 업혀 아버지의 임지로 따라갔으니까요. 방학 때나 명절에 큰집에 가서 사촌들과 놀던 기억이 전부예요. 그것도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지요. 아버지가 경찰공무원이셨기 때문에 전근도 잦았고 비상근무도 많았어요. 몇 달씩 출동하는 일이 다반사였을 시절이었죠. 그리고 고향의 메밀꽃밭은 본적이 없지만(지금은 가산 이효석 소설가 덕분에 메밀꽃을 볼 수 있네요.) 봉평 가면 늘 메밀음식을 먹었던 기억이 납니다. 아버지가 유독 메밀음식을 좋아하셔서 집을 나서면서부터 모든 식사는 메밀로 하셨어요. 당시 메밀가루는 도정이 거칠어 껍질이 모래알처럼 씹히기 일쑤였어요,(어릴 적 식감으로요) 그래서 저는 메밀음식을 좋아하지 않았는데 고향 마을 사람들은 아버지가 좋아하는 메밀국수에 메밀전, 메밀만두 등 갖가지 메밀음식을 대접하곤 했지요.(웃음) 집집마다 메밀국수를 뽑는 국수틀이 가마솥 위에 얹혀있던 모습도 생각납니다.
임애월 : 아하, 봉평이 출생지이긴 하지만 추억이 없어서 고향이라고 하기엔 좀 아쉬운 부분이 있네요.
김창희 : 네, 무늬만 고향이랄까요. 그냥 출생지인 셈이죠. 그래도 아버지와 함께 걸었던 고향 가는 길은 아련하고 좋은 추억으로 남아있어요. 아마 8~9세쯤 되었을 때였나 보름달이 환한 달밤이었어요. 봉평 시내에서도 한참을 걸어 덕거리 생가를 찾아가는데 드넓은 논에는 연둣빛 개구리밥이 가득 떠 있고 개구리 합창소리는 달빛 길을 가득 채우고 있었지요. 얼마를 더 가야하느냐고 아버지에게 자꾸 되묻곤 했지만 그 환한 달빛을 받으며 걷는 기분은 참 좋았어요. 예전에 이순원 소설가의 『아들과 함께 걷는 길』을 읽으면서 아버지와 고향 가던 길속의 내 모습을 떠 올리곤 했죠.
풀어놓은 먹빛이 번져가지 못해서
겨울의 산허리 움푹 패어지고
몇 번의 붓질 농담(濃淡)에도 한 풍경 떠오릅니다
해발 700m 평창의 3월은
아직도 한겨울 폭설로 열두 폭 수묵 병풍을 펼치고
숱한 마음꽃, 눈 위에 쏟아냅니다
아버지의 아버지, 그 아버지의 아버지였을 어른이
이름 석 자 가슴에 묻고 넘어온 고갯길,
강릉 바다에 묻고 온 어린 아들의 몸이
구불구불 마음에 접혀 고개를 이루었다는 길
대관령 옛길을 찾아 나섰다가
나는 눈 속으로 빠져 듭니다
바람이 쓸고 간,
더는 길이 아닌 곳에서
눈꽃 하나씩 일으켜 등을 켭니다.
-「오래된 길을 찾다」 전문
임애월 : 그래도 고향에 대한 소담한 추억들이 남아있긴 하군요.
해발 700미터면 그야말로 높은 산이잖아요? 그곳에 사람들이 거주하고 있다는 얘기고요?
김창희 : (웃음) 제가 그 700m 고지에 살았드랬어요. 정선군과 평창군의 진부면 경계 골짜기인 가리왕산 장전골에 황토집을 짓고 기거한 적이 있었어요. 한 10여년 쯤 들락거렸지요. 남편의 건강 때문이었는데 그곳에서 만난 봄 풍경이 설경이었어요.
임애월 : 저는 강원도의 명물은 눈(雪)이라고 생각합니다. 병풍 속 수묵화 그림 같은 강원도 겨울의 설경은 정말 명불허전이지요.
김창희 : 네~ 맞는 말씀이에요. 눈 덮인 겨울산은 생각만 해도 가슴이 뛰어요. 강원도는 어디를 가든 산으로 둘러싸여 있잖아요. 그 거대한 몸집이 겨울이면 흰 눈 속에 흠뻑 빠져선 붓질한 듯 간간이 경계를 내비치지요. 한 폭의 장엄한 수묵화죠. 제 부족한 어휘력으론 너무 벅차 그림으로 그리고 싶다는 유혹을 가끔 받게 된답니다.
임애월 : 이사를 자주 다녔다고 하셨는데, 청소년기를 붙박이로 살아 집을 떠나본 적이라고는 없어서 잘 모르겠지만, 그 이사를 자주 다니던 시기에 일어났던, 기억에 남는 마음의 갈등이나 에피소드가 꽤 많으실 것 같아요.
김창희 : 네, 제 유년 시절의 기억은 한 컷 한 컷으로 잘려져 있어요. 열 살 이전이 가장 이동이 심했던 시기였어요. 떠났던 곳으로 다시 간적도 여러 번 있어서 마치 퍼즐을 맞추듯 기억해 보는 거죠. 주로 강원도 영동지역의 북단인 고성군의 대진과 거진, 간성 그리고 속초와 양양 지방이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경찰이셨던 젊은 아버지의 부임지라 최전선 쪽이 아니었을까 싶네요. 한 네 살쯤이었던 것 같아요. 이전에 살던 동네를 갔는데 함께 놀던 친구를 만났어요. 무척 반가웠는데 아는 체를 못했어요. 만나지 못했던 시간들에 대한 어색함 때문이었죠. 그런데 그 친구도 마찬가지였을 것 같아요. 그때 눈빛만 서로 교환했거든요. 부모와의 애착관계가 친구로 바뀌는 시기에 오랜 친구를 사귀지 못하는 아쉬움이 제일 크지 않았나싶어요. 초등학교 입학을 대진국민학교에서 하고 여름 무렵 거진국민학교로 전학을 갔어요. 여름방학이 끝나고 간성국민학교로 또 전학을 갔다가 2학년 초에는 속초 영랑국민학교로 전학을 가고 하는 생활이 4학년까지 이어졌어요. 방학 전에 전학인사하고 방학 후 2~3주 후 또 전학을 간 경우도 있어요.(웃음) 4학년 가을쯤이라 기억되는데요. 양양국민학교에서 속초의 중앙국민학교로 전학을 갔어요. 그 해에 세워진 신생학교였는데 영랑호와 근접한 곳에 있었어요. 공설 운동장과 붙여 지은 학교는 언덕을 한참 내려가야 했는데 산을 깎아 내린 거라 들었어요. 그래서인지 으스스하게 귀신 이야기가 유독 많았어요. 다행히 초등학교 시절을 가장 길게 보낸 그곳에서 졸업을 하게 되었고 많은 추억을 만들 수 있었답니다.
임애월 : 전학 온 지 3주 만에 다시 전학을 가기도 했었다니... 정말 놀랍습니다. 어린 시절 그런저런 일들이 선생님의 삶에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미쳤을 거란 생각이 듭니다.
김창희 : 삶의 형식에는 어떤 것이 최상이라고 말할 수 없는 부분이 많은 것 같아요. 마치 풍선효과라 할까요. 어느 부분이 취약하면 다른 면으로 채워지는 그런거요. 어린 시절의 잦은 이동으로 정착에 대한 동경과 부러움이 있는 반면 어쩔 수 없는 유목민 기질은 생긴 것 같아요.(웃음) 새로운 환경에 대한 두려움은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임애월 : 그러네요. 분명 좋은 점도 많았을 겁니다.
모든 분들께 여쭤보는 질문인데요, 선생님께서 문학의 길로 접어드신 계기가 궁금합니다.
김창희 : 제 인생의 선명한 발자국 같은 것이 있지요. 속초 중앙국민학교 5학년 때 담임선생님이 사범학교를 졸업하시고 첫 부임한 학교 첫 담임반이 저희 반이었어요. 존함이 전 태자 규자로 기억됩니다. 크지 않은 키에 둥근 얼굴형이셨던 것 같아요. 문학적 열정이 많으셨던 선생님은 시대를 앞서간 교육방법을 실행하셨어요.
임애월 : 아하, 어떤 방법이었는지 당연 궁금해집니다.
김창희 : 그 당시에는 보기 힘든 그룹 수업을 하였죠. 토론수업이라고 할까요. 그림수업도 큰 도화지에 그룹인원이 나누어 색칠을 하라 하셨고, 국어수업도 배운 내용을 이야기해 보는 방식으로 하였어요. ‘프란다스의 개’를 역할극으로 시연했던 기억이 나네요. 일기 쓰는 방법을 가르쳐주시곤 매일 종례 시간에 최우수 작품을 선정하여 발표하게 하셨어요. 요즘 같으면 사생활 보호 때문에 지탄을 받겠지만 그 당시엔 배움에 대한 목마름이 우선이던 때였죠. 발표기회를 갖는다는 건 자랑이었어요. 그리고 집에 있는 책들을 가져와 학급문고를 만들게 하셨지요. 사실 부잣집 아이들이 아니고서야 당시 집에 동화책 한 권 이상 가지고 있는 아이들이 별로 없었어요. 그래도 학급문고는 모양새를 갖추고 아이들은 책을 빌려 읽고 독후감을 쓰기 시작했지요. 또 학교 교실에는 금붕어를 키우는 어항이 있었는데 어느 날 보니 금붕어가 죽어 있었어요. 아이들은 슬픈 마음으로 기도를 하고 양지바른 곳에 정성스레 묻어주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리고 그해 추위가 시작된 어느 날 아침이었어요. 학교에 가보니 학급물품이 모두 사라져버린 거예요. 커튼과 주전자, 컵, 양동이 등 생활 물품이 하나도 보이지 않는 겁니다. 아이들은 야단법석 웅성거리며 선생님께 알렸지요. 그때 선생님 말씀이 지금도 잊히지가 않아요. “얼마나 추웠으면 커튼을 가져갔겠니. 얼마나 돈이 없었으면 컵 하나 주전자 하나 사지 못하고 너희들에게 꼭 필요한 줄 알면서도 몰래 가져갔겠니. 우리보다 더 힘든 사람이 가져갔다고 생각하고 용서해 주자.” 선생님 말씀이 끝나자 아이들은 조용해졌어요. 당시 학교 주변에는 움집 같은 걸 짓고 동냥으로 끼니를 이어가는 사람들이 꽤 있었고 가난이라는 말, 아이들은 너무 잘 알고 있던 시절이잖아요.
임애월 : 정말 특별하신 선생님이시네요. 당시엔 작은 물건 하나하나가 다 귀해서 누가 가져갔는지 색출해 내자고 법석을 떨었을 텐데 말입니다.
김창희 : 네, 그런 선생님이 방과 후에 특활 문예반을 지도하고 계셨어요. 저는 당시 미술반과 학교 합창단 활동을 하고 있었는데 고민 끝에 문예반으로 옮겼지요. 그 무렵 마음에 찍힌 화인 하나가 있었는데 ‘글쓰기(문학)라면 다른 걸 포기해도 좋아’하는 심정이었어요. 매일 수업 후에 교실에서 지도를 받았어요. 사물을 관찰하려면 마음의 눈을 가져야 한다는 걸 그때 느꼈지요. 주로 동시를 썼는데 다른 친구들 보다 재능이 있지는 않았나 봐요. 산문 쓰는 친구가 전국백일장에서 상을 받아 오는 동안 저는 상상력의 한계를 느끼고 있었어요. 속초가 바닷가다보니 부모의 생업이 그 쪽과 이어진 친구들이 대부분이었지요. 바다와 배와 거기서 얻어지는 생선을 소재로 한 이야기들이 많이 쓰여졌었죠. 제가 읽어봐도 재미있었어요. 반면 저의 일상은 단조로움의 나날이었죠. 그래도 5학년이 끝나고 새 학기가 시작될 무렵부터는 제 작품이 소년조선일보와 소년한국일보에 실리기 시작했지요. 그 동안 책도 많이 읽었는지 학교도서관의 책을 거의 다 읽었다는 자부심이 들었고 ‘내가 모르는 동화는 없어’하는 깜찍한 생각도 하게 되었어요.(웃음) 돌이켜보니 동화구연과 웅변도 5학년 때 시작하였군요. 글 읽기를 잘 하니 웅변대회에 나가보라는 선생님의 권유로 참가해서 동상을 받았습니다. 한창 글쓰기에 재미를 붙인 6학년 때 선생님은 군 입대를 하셨고
학창시절 문학수업은 그것으로 끝이 났지요. 6학년 때는 입시공부가 발등의 불이라 다른 걸 생각할 여유가 없기도 했고요.
임애월 : 문학적 DNA를 타고나셨나 봅니다. 그리고 중요한 시기에 어떤 선생님을 만나는가도 정말 중요한 것 같습니다.
김창희 : 그렇지요. 성장기에는 부모와 스승, 그리고 어떤 친구를 만나느냐에 따라 인성과 진로, 평생을 살아갈 자세가 달라지는 것 같습니다. 그런 면에서 선생님께 늘 감사한 마음으로 살고 있습니다.
임애월 : 이사를 자주 다니셨는데 주로 강원도에서 옮겨 다니셨다고요?
김창희 : 네, 유년시절은 백두대간 동쪽인 영동지방에서 청소년기를 걸친 이후로는 영서지방인 춘천과 그 근방 지역에서 살았어요.
임애월 : 춘천에서 살기도 하셨군요. 그래서 춘천이 고향이라고 제가 착각했나 봅니다. 그럼 춘천에서 중·고등학교를 다니셨나요? 그 시절 이야기도 풀어놔 주세요. 어떤 소녀였을까 궁금합니다.
김창희 : 글쎄요. 결혼 전까지 춘천에서 살다 서울로 왔지만 제 고향을 춘천으로 기억하고 계신 건 책임질 수 없습니다.(웃음) 중학교 이후에는 전학이 여의치 않았지만 여전히 입학한 곳과 졸업한 곳이 달랐어요. 중학교 1학년 2학기 초에 아버지가 다시 고성으로 발령이 나셨는데 그때 부모님도 저도 고민이었죠. 저는 속초를 떠나고 싶지 않아서 친구네 집에 하숙하겠다고 고집을 부렸고 어린자식을 떼어놓을 걱정에다 하숙비를 내줄 형편이 안 되었던 부모님 입장은 난감했지요. 중학교 입시제도가 있던 시절이라 치열한 경쟁 끝에 최상위권 성적으로 입학한 학교를 떠나기 싫었지만 결국 10월 하순쯤 전학을 했어요.
임애월 : 아하, 다시 또 전학을 하셨군요.
김창희 : 네, 2학년이 되면서 사춘기가 시작되었는지 인간 존재에 대한 회의와 죽음에 대한 사유가 깊어져서 셰익스피어나 헤르만 헷세의 작품을 탐독하기도 했었죠. 반면에 장난끼 많은 말괄량이기도 했어요. 속초에서 나처럼 전학 온 친구가 둘 있었는데 아버지가 사업에 실패해서 이사 온 친구와 초등학교 교장선생님인 아버지를 따라 온 친구였어요. 셋은 금방 친해져서 또 다른 친구 두어 명과 몰려 다녔는데, 제가 수학선생님을 골려주자고 자주 모의를 했어요. 사실은 엇나가는 행동으로 제 첫사랑이자 짝사랑인 선생님의 시선을 끌려고 했던 거죠.(웃음) 심한 경상도 사투리에 스포츠머리를 한 수학선생님의 무뚝뚝한 말씨와 짧은 머리가 멋져보였고, 사투리 때문에 국어선생님이 되고 싶은 걸 포기했다는 말에 더욱 마음이 쏠렸어요. 국어가 문학과 동일시 생각될 때였으니까요. 『타고르의 명상』이라는 책이었나... 내용 중에 공부를 열심히 할 필요가 없다는 부분이 짧게 나오는데 전체적 맥락은 무시하고 타고르가 공부하지 말라했다며 해명해 달라고 짓궂게 따라다니고, 수업 중 선생님 말씀에 말꼬리 잡고 늘어져 난처하게 만들기, 선생님이 칠판에 글씨를 쓸 때 일어나 춤추다 돌아서면 멈추기, (이 사건은 거의 단체 행동으로 번지는 바람에 주동자로 색출되어 5명이 창보기, 벽보기로 면벽 벌을 섰네요. 하하) 교실 출입문 꼭대기에 백묵가루 잔뜩 묻힌 칠판지우개를 걸어 놓았다가 선생님이 문 열면 떨어뜨리기, 선생님의 양말 뒤꿈치에 난 구멍을 보고 큰소리로 “선생님 양말님에 구멍님이 나셨습니다”하고 반 아이들을 선동하여 합창하게 만들기 등 유치한 장난을 많이 했어요.
임애월 : 전혀 상상이 안 되는데요. 굉장히 얌전한 소녀였을 거란 생각을 했거든요.
김창희 : 그런 선생님을 고등학교 때 우연히 만나 짝사랑의 종지부를 찍었답니다.(웃음) 중3 때 담임선생님이 저를 잘 챙겨주셨는데 고등학교 때 춘천고등학교에 재직하신단 소식을 듣고 가까우니까 뵈러 간 적이 있었어요. 그 학교에서 수학선생님을 만났어요. 너무 반갑기도 하고 부끄러웠는데 그때 사실은 담임선생님이 시켜준 짜장면을 먹고 있었거든요. “야! 이눔아야 여기서 뭐하노” 싱글싱글 웃던 그 선생님은 반가움의 표시였을 텐데 저는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었어요. 먹는 모습을 보인 것이 수치스럽게 느껴졌던 거죠.(웃음)
임애월 : 먹는 게 수치는 아닌데... 어린소녀였으니 그럴 수도 있었겠네요.
김창희 : 중3 때는 담임선생님 속도 많이 썩혀드렸어요. 1학기 기말고사였는지 기억이 가물거리는데요. 수학시험 시간이었어요. 여선생님이 감독관으로 들어오셨는데, 시험요강에 대한 잔소리가 너무 심하다 싶어서 순간적으로 백지동맹을 생각해 내었어요. 눈짓과 쪽지로 반 아이들을 규합했는데 모두 합류했더라고요. 그 일로 학교가 발칵 뒤집혔죠.
임애월 : 네? 그렇게 당돌한 짓을?(웃음)
김창희 : 일을 저지르고 보니 담당 수학선생님께 너무 죄송하고 담임선생님께도 정말 미안했어요. 2학년 때 수학선생님은 아닙니다.(웃음) 의리를 소중히 여기는 여전사 5명이 함께 갔지요. 순간적으로 경솔하게 행동했다고 수학선생님께 용서를 구하고 반성문 쓰고 일단락 지었어요. 징계 없이 졸업한 게 신기할 정도예요. 그 사건 후 저는 학교 영어선생님 딸인 정인이라는 친구에게 마음의 빚을 지게 되었어요. 공부를 아주 잘하는, 성격이 차분한 아이였는데 백지동맹 때 수학답안지 답을 모두 적었다가 다 지우고 백지를 내었거든요. 수학은 보통 만점 받던 친구였죠. 친하게 지내다가 저는 졸업 후 아버지가 계신 영서로 그 친구는 속초인지 강릉인지 중소 도시의 고등학교로 진학했다고 들었어요.
임애월 : 외모와는 다르게 정말 말괄량이 소녀였군요.
김창희 : 그 사춘기 말괄량이 짓도 내륙지방인 영서로 옮겨가면서 줄어들었어요. 그래도 고1 때인가 고등학교 진학에 부침이 있어 재수를 하려고 하다가 뒤늦게 입학한 학교생활이 시들해서 여름방학 때 엄마 심부름을 핑계로 고성엘 간적이 있어요. 내륙 아이들의 소극적인 모습이 답답하던 차에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은 반가웠죠. 당시는 방학 중이라도 기념식 참석하고 도장을 받아야 결석처리가 안되었죠. 광복절 기념행사를 운동장에서 하는데 시작 시간이 좀 남았어요. 누구랄 것도 없이 근처 과수원엘 가서 원두막엘 올라갔지요. 참외를 따다 달라고 주인께 부탁을 하고 잡담을 하고 있는데 한 아이가 농구공만한 잘 익은 수박을 하나 들고 올라와서 주먹으로 내리쳐 깼어요. 그리곤 모두 서둘러 나누어 먹곤 수박밭을 향해 껍질을 내 던졌죠. 잠시 뒤 눈치를 못 챈 주인은 참외를 따가지고 왔어요. 참 저는 가슴이 콩닥콩닥 했지요. 어느새 저는 내륙 아이가 되었구나 생각했죠. 학교로 돌아와 보니 기념식은 다 끝나고 모두 돌아가려던 참이었어요. 변죽 좋은 친구들이 담당 선생님께 일찍 왔는데 피치 못할 사정이 있었노라 변명하고 출석 도장을 찍었죠. 저도 물론 출석증명서를 받아 왔고요. 사춘기 객기를 제대로 부리고 지나간 셈이죠.
임애월 : 수박 서리도 다 해보고... 들을수록 점점 재미있는데요.(웃음)
어디서 들었던 기억이 떠오르는데 춘천방송국 아나운서로 근무했었다고요?
김창희 : 제 직업 실패담이라 드러내기 쑥스러운 부분이네요. 고등학교 재학 시절에 웅변으로 지역에서 이름이 알려졌어요. 그 당시는 반공웅변대회, 불조심웅변대회, 학생의 날 웅변대회 등 일 년에 10여회 정도 웅변대회가 있었는데 지역에선 경쟁자가 없다보니 상품을 제가 받지 않은 것으로 선정하도록 기관끼리 의논했다는 이야길 전해 들었어요. 그때 받은 상품이 처음엔 국어사전, 영어사전이 대부분이었는데 어느 때부턴가 전기스탠드도 있고 반상기도 있었어요.(웃음)
임애월 : 잘 한다고 오히려 역차별을 당하신 거네요.
김창희 : 그러면서 지역 홍보 방송에 많이 불려 나갔죠. 고 3때 학교에서 방송국에 가 보라 하여 갔더니 목소리 테스트 후에 바로 ‘정오의 한나절’이라는 프로그램 진행을 맡겨 주었어요. 독자로부터 엽서에 사연과 신청곡을 받아 들려주는 프로였지요. 굉장한 특채인 셈인데 그 무렵 한시적으로 학력제한이 해제 되었었고 지방방송국은 간혹 고졸도 채용이 되었던 사례가 있었나 봐요. 강원도는 산이 많아 그 당시 전파 사정이 좋지 않았던 관계로 국영인 KBS춘천방송국은 이를 타계하기 위해 중계소를 두었는데 화천중계소에 제가 근무하게 되었지요. 뉴스를 비롯한 모든 프로그램을 혼자 진행하게 되었어요.
임애월 : 와우~ 어린 나이에 방송 프로그램 진행을 혼자 맡다니 대단하시네요.
색다른 경험을 미리 하셨는데 특별히 남는 그 당시의 기억이 있으신가요?
김창희 : 그때 대북 방송 녹음을 여러 번 했었는데 야간 음악방송 같은 감미로운 멘트에 향수를 자극하는 노래를 선곡하여 들려주었던 기억이 납니다.
임애월 : 와우~ 대북방송이라니... 한편으론 굉장히 낭만적(?)으로 들리네요.
그런데 왜 그만 두셨는지도 궁금합니다.
김창희 : 위에서 제가 직업 실패담이라 말씀드렸었죠. 그때까지만 해도 미래에 대한 간절한 꿈이 없었어요. 공부는 계속하고 싶었는데 꿈은 막연했지요. 여자는 결혼하면 그 이전의 경력이나 꿈은 소멸되는 거라는 사회적 분위기도 그랬고, 여자가 똑똑하면 피곤하다는 소리도 많이 들었던 시절이었어요.
임애월 : 아이구~ 말해 무엇하나요. 그 시절의 정서로는 그게 당연하다는 인식이 일반화되어 있었지요.
김창희 : 우리집은 봉건적인 가정 분위기는 아니었지만 딸자식이 타지 생활하는 걸 경계하셨던 아버지는 방송국 생활을 그만 두라 하셨어요. 대신 은행에 취직하라고 하셨지요. 아버지와의 불화는 지속되었고 집안 분위기도 냉랭해졌어요. 아버지 주변 분들도 딸의 재능을 키워주라 하셨다는데 아버지는 고집을 꺾지 않으셨지요. 방송국 관계자가 설득을 하여도 당장 근무지를 옮겨달라는 조건을 내걸으셨다고 해요. 아버지와의 관계가 불편하다 못해 괴롭기까지 해 사표를 냈어요. 그리고 2년 후 쯤인가 방송국에서 다시 연락이 왔는데 그땐 제가 거절해 버렸어요. 아버지와의 갈등이 큰 상처가 되어서 반항심도 작용했던 것 같아요. 반대하니까 치사해서 안 한다 뭐 그런... 도전하지 않은 걸 지금도 후회하고 있답니다.
임애월 : 후회하지 않는 인생이 어디 있겠습니까... 시대적인 탓도 한 몫을 한 거지요.
타고난 문학적 소질을 생각하면 사실 1999년 등단은 다소 늦은 감이 있는데요?
김창희 : 많이 늦었지요. 아나운서의 길이 잘 한다고 주변에서 추천해 밀어 준 길이라면 작가의 길은 제가 좋아 마음에서 키운 길이지요. 중·고등학교 시절 문학적 스승을 만나지 못해 외로웠는데 그 점을 독서로 채웠었어요. 방학 때는 학교 도서관에서 독서 구간을 정해 놓고 내리 읽었네요. 고2 때부터는 학생 사서로 매일 도서관에서 생활하게 되어 행복했어요. 습작도 했는데 시를 좋아하면서도 독서는 대부분 소설이 많아서 그랬는지 성인이 된 후에 들여다보니 유치하기만 하더라고요. 그래도 그때는 펜을 들면 그저 술술 무슨 문장이든 흘러 나왔어요. 학교에서 예술제 행사에 시화를 한다고 시를 출품하라고 해서 써서냈는데 10분도 안 걸렸던 것 같아요.(웃음)
임애월 : 대단한 재능입니다.(웃음) 아마 시 쓰기에 갈증이 났던 모양입니다.
김창희 : 그랬나 봐요. 참 어이없죠. 그래도 선배의 멋진 그림 속에 제 시가 실렸더군요. 소설 구상도 하곤 했는데 친구들 앞에서 이야기로 풀어내고 정작 글로 완성 시키지는 못했었어요. 그렇게 청춘 시절을 보내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키우면서 문학은 제게서 멀어졌는데 멀어진 사건이 하나 있었어요. 작가로 등단하는 길이 오직 신춘문예라는 길만이 전부라고 생각했던 견문이 좁은 아이는 작품 구상을 하다가 심한 가슴 통증을 느끼기 시작했어요. 그때까지 겪어보지 못한 짜르르한 통증이었는데 가슴을 에는 듯한 아픔이랄까요... 생각을 접으면 바로 통증이 사라졌어요. 내 길이 아닌가보다 하고 그때부터 글을 쓰지 않게 되었죠. 일기만 간결하게 썼던 것 같아요. 그런데 천형이랄까요. 30대 후반에 접어들면서 삶을 이렇게 끝내면 안 될 것 같은 절박함이 나를 괴롭혔어요. 다시 글을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 거예요. 그런데 당시의 생활환경은 녹록치 않았어요. 시할머니, 시아버지에, 지병이 있는 남편의 뒷바라지와 아직 초등학생인 딸아이를 돌보는 일 등,,, 무엇보다 힘들었던 건 바깥출입을 원치 않는 시댁의 분위기였어요. 남편은 아이 다 키워놓고 활동하라고 했지만 안 했으면 좋겠다는 의사표시였죠. 그때 아버지와의 갈등으로 후회했던 일을 생각하고 굽히지 않기로 마음을 먹었어요. 詩보다 먼저 수필을 배웠는데 시 강좌는 압구정동으로 가야해서 시간이 허락지 않았어요. 집 부근인 강남 삼성동의 현대문화센터에 등록을 하고 문우들을 만나기 시작했어요.
임애월 : 살맛이 나셨겠는데요?
김창희 : 네, 정말 살맛이 났죠. 그런데 남편과의 사이가 힘들어졌지요. 글 쓸 시간도 부족하구요. 하지만 끈은 놓지 않기로 마음을 먹고 버텨나갔어요. 당시 문학평론가 임헌영 선생님의 지도를 받았는데 수필 등단 작품을 정리해 제출하라는 걸 미루다 분당으로 이사를 했어요. 분당에서는 수필가이자 시를 쓰시던 지연희 선생님의 지도를 받고 성춘복 선생님의 추천으로 『시대문학』에 시로 등단하게 되었구요. 그런데 저는 등단 직후부터가 본격적인 습작기라는 생각이 들어요.
임애월 : 옳으신 말씀입니다.
등단은 하나의 과정일 뿐 문학적 완성이 아니니까요.
김창희 : 1999년도에 중앙대학교대학원에 ‘문예창작전문가과정’이 생겼는데 고심 끝에 2000년도에 지원을 해서 합격 후 입학을 하였죠. 상상되시나요. 분당에서 흑석동까지 일주일에 2번, 온전히 하루를 소비해야 하는 주간부를 다니기 시작한 후폭풍을요. 남편과의 사이가 살얼음판이 되어갔어요. 그리고 그때는 문학공부와 더불어 행사의 사회를 맡는 일이 빈번해졌는데 사회를 보기로 하고 남편 때문에 약속을 못 지킨 일도 더러 있었네요. 이야기하다보니 제 사설이 너무 길어졌군요. 죄송합니다.
임애월 : 아우~ 아닙니다. 다른 분의 이야기를 듣는 일이 참 재미있습니다. 그리고 오늘은 선생님께서 이야기를 풀어놓으시는 날이잖아요.(웃음)
첫 시집 『짧게, 혹은 길게』가 <문학아카데미> 시선으로 2010년에 출간되었지요?
등단 11년 만에 첫 시집이면 그야말로 잘 익히신 것 같아요. 고명수 시인도 “김창희 시인은 상당한 연마와 내공을 거친 듯하다”라고 말씀하셨거든요.
김창희 : 과찬의 말씀이지요. 사실 첫 시집에는 등단 작품이 한 편도 실리지 않았어요. 쓰는 대로 활자화하지는 않기로 애초에 마음먹었던 터라 시집 2권 분량은 버려진 셈이에요. 아무리 그래도 게으른 건 확실해요. 부끄럽습니다.
눈부시게 밝아진 감나무 사이로 길이 보였다
그 길을 걸어 가 보았다
감나무의 푸른 잎들이 감꽃이 떨어진 꽃자리에서
푸른 등을 밝히고 있었다
푸른빛을 품어내던 등 하나가
잘랑잘랑 소리를 내며 내 몸에도 빛을 심었다
먼 우주로부터 달려 온 푸른 별의 태몽이
짧게 혹은 길게 느껴졌다
푸른 별의 모태에서나 느끼던 태동이
그림자를 걷어 올리던 가을볕을 따라와 내 안에서
점점 뜨거워졌다
지상의 푸른 잎들이
감꽃이 떨어진 자리에다 나를 매달기 시작했다
눈부시게 밝아진 나를,
만삭이 될 나를,
혼자 묻고 혼자 대답하는
타로카드의 십이 운성 속 나를,
눈 저리도록 깊은 가을 볕 속에서
짧게 혹은 길게
심지를 돋운 별들이 붉게 타오르고 있었다
-「짧게 혹은 길게」 전문
임애월 : 첫 시집의 표제시를 가져와 봤어요. 감꽃은 너무 작고 수수해서 눈 밝은 사람들에게만 보이는데... 저는 늘 마당 가득 감꽃이 떨어진 후에야 감꽃이 보이거든요.(웃음) 선생님께서는 섬세하게도 잘랑거리는 소리까지 들으시고… 그를 통해 우주 속 푸른 별의 태몽까지 엿보는 시인의 상상력이 놀랍기만 합니다.
김창희 : 하하하... 제가 제일 좋아하는 과일이 감이에요, 가을이면 엄마가 감나무 있는 집에 가서 자루 채 사 오시는데 한자리에서 20개쯤은 거뜬히 먹었거든요. 물론 지금은 아니지만요. 감에 얽힌 추억도 참 많아요. 그러다보니 감에 대한 상상력이 발동 되었나 봐요. 실제로 감꽃이 필 때면 감꽃을 주워서 목걸이를 하고 다녔던 적이 있어요.
임애월 : 그러게요. 저는 떨어진 감꽃에 대한 추억만 있어요.(웃음)
김창희 : 그런가요... 그때의 기분은 무어랄까 은은한 감꽃 향의 소담스럽고 앙증맞은 꽃송이에 마음이 녹아드는 그런 아늑함? 뭔가 무장해제 되는 그런 기분 있잖아요. 그리고 이건 좀 묘한 경험의 여운인데요. 양양 시내에서 살 때의 일이에요. 학교친구는 아닌 것 같고 병원집 아이였는데 친하게 잘 놀았어요. 양양 남대천 다리를 건너면 월리라는 마을이 있었는데 감나무가 많은 곳이었어요. 그 아이의 큰집이 있다고 해서 놀러 갔는데 큰엄마라는 분이 참 인자하게 잘 대해 주셨어요. 농사를 많이 짓는 집이었는지 번듯한 기와집에 넓기도 했는데 큰엄마는 일만 하고 계셨지요. 동네 어른들 말이 그 분이 본처이고 동네친구인 그 아이의 엄마가 첩이라고 했어요. 간호사로 있다가 그리 되었다고 하더라고요. 어른들 일을 다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우리가 감꽃이 필 때면 감꽃을 줍고 풋감이 열릴 때면 방울만한 감을 치마폭에 주워오던 그 월리 마을의 큰엄마라는 분 모습이 애잔하게 뇌리에 남아 있어요. 어느 작품에서인가 형상화되지 않았을까 싶어요.
임애월 : 그러네요. 일만하시던 그 큰엄마의 모습이 떨어진 감꽃처럼 참으로 애잔합니다.
어떻게 보면 이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들은 하나의 떠돌이별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만 별은 너무 멀어서 아득하고 그래서 특별한 존재인데 감꽃이 떨어진 그 아주 작은 자리에‘나를 매달’고 스스로 붉은 별이 되는 꿈을 꾸시는 선생님은 천생 시인이십니다.
김창희 : 감사합니다. 천형을 살고 있는 천생 시인이라면 극찬이신데,,, 세상의 모든 생명체가 결국 한 우주 아닐까요. 인간만하더라도 손바닥에 인체의 모든 장기가 연결되어 있고 발바닥에도 귀에도 그리고 얼굴에도 그뿐인가요 심지어 눈에도 신체의 모든 비밀이 숨어 있다지요. 생명체 하나가 소우주이고 별이겠지요.
임애월 : 박제천 시인은 이 시집을 “언어를 붓으로 사용한 칼라 화첩과 같다”고 평하셨는데 마티스나 훈데르트 바서, 클림트 같은 화가들의 그림을 불러내어 그 색채의 향연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가는 듯한 분위기의 작품들이 보이거든요. 사실 클림트의「늪」은 그 신비한 색채의 늪 속으로 빠져 들어가고 싶어지긴 합니다.(웃음)
김창희 : (웃음) 그림 감상하는 걸 좋아합니다. 감상법은 이래요. 전 제가 감상을 끝내기 전에는 도슨트적인 어떤 해설이나 약력에 대한 이해를 구하지 않아요. 오로지 그림과 나를 날것 상태로 마주합니다. 그러면 그림과 내가 대화를 나눌 수 있어요. 서로 말을 걸지요. 그래서 여럿이 미술관이나 갤러리에 가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 편입니다. 이론 공부나 서적은 따로 보아요. 특히 클림트의「늪」은 이야기를 많이 담을 수 있는 요소를 가지고 있잖아요. 인상파적인 빛과 점묘 기법의 그림이 주간님의 말씀처럼 신비한 이야기를 깊이 담고 있는 듯해 시제로 택하였어요.
달빛을 불러들이는 갈대밭이 보였다 정미소에서 그녀가 흔들거리며 걸어 나왔다 갈대밭 속으로 비껴있던 늪의 물줄기가 둥그렇게 휘어졌다 그녀 앞으로 다가오던 물결이 달 속으로 발을 뻗었다 갈대밭에 그녀가 몸을 뉘였다 밀려드는 빛, 빛 속에 잠긴 그녀의 머리칼이 올올이 물속으로 풀어졌다 바람에 떠밀려- 물빛이 차오르고 달빛에 젖어드는 그녀, 그녀의 몸속에 숨어있던 색감들이 꿈틀거렸다 그녀가 정미소 안의 씨앗들을 불러내었다 내가 사랑한 별처럼 달려오는 씨앗들, 늪이 흔들렸다 나도 흔들렸다 클림트의 늪에서 나, 그녀의 색 속에 빠져버렸다.
-「클림트의 늪」전문
임애월 : 근데 저만 그런 건지 모르지만 이 작품 속 화자의 성(性)이 왜 남자일 것 같다는 느낌이 들까요? 굉장히 육감적으로 읽히거든요.(웃음)
김창희 : (웃음) 그렇게 읽으셨다면 성공적인데요. 저는 제 작품에 대한 작품 설명을 되도록 하지 않으려 합니다. 독자의 수용미학적 관점을 지지하는 편이죠. 비평론적 관점이 아니라 제 경험에 의한 소신 같은 거예요. 등단하기 훨씬 전인 것 같은데 조병화 시인의 시「후조」를 무척 좋아했어요. 그리고 조병화 시인께서 시 작품에 대한 창작 배경과 동기를 서술한 산문집을 발간해서 읽어보았는데 크게 실망하고 말았지요. 제가 전율하며 읽었던 시의 창작배경이, 동기가 너무도 사소하고 뜬금없었던 것에 대한 배신감 같은 느낌? 나는 시인이 되면 내 시에 대한 변호는 하지 않으리라 다짐했어요.(웃음) 제가 그림을 날것으로 보고자 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임애월 : 동감입니다. 작가의 손을 떠난 작품의 이해는 오롯이 독자의 몫이니까요.
고명수 시인은 “참신한 소재 발굴 능력과 섬세한 감각, 그리고 낭만적인 열정을 겸비한 시인”이라고 극찬하면서 “정신의 견고한 뼈대를 지닌 시, 명료한 직관에서 출발하여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시상의 전개를 보이는 시”들이 깊은 감동을 준다고 했지요.
김창희 : 과분한 덕담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제 시가 직관적이라는 평은 가끔 듣는 편이에요. 원래 이성적이기 보다는 감성적이고 과학적이기 보다는 직관적으로 행동할 때가 많아서 그게 시에도 나타나나 봅니다.
훈데르트 바서의 집은
굽이치는 물결이다
그의 집으로 가는 길은
한 굽이 돌 때마다 바람이 일고
한 고비 쉴 때마다 풀냄새가 짙어졌다
아무것도 꿈꾸지 않았던 나는
우주 밖으로 이어진
훈데르트 바서의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푸른곰팡이에 녹색 이끼를 입히면서
눈물에도 색깔이 있다는 걸 말하고 싶어졌고
수많은 창으로 이어진 소박한 거짓말에도
적의를 가져야겠다고 다짐하기도 했다
그 동안 너무도 많이 버려졌으므로,
황사 먼지에 가려져
꽃 피울 수 없는 날들을 생각하며
나는 울었다
나무 그늘로 차고 넘치던 물의 기원을
이젠 먼 날의 전설쯤으로 기록해야 할까
훈데르트 바서의 초록 물방울들이
그늘을 향해 뛰어 오른다
계단의 끝은 보이지 않았지만
계단 사이사이 그가 심어놓은 뿌리에선 막
새잎이 돋아나고 있었다
숨죽인 불꽃들이 푸르지 못했던
잠에서 깨어난 듯 뿌리를 뻗어왔다
날선 곡선들이 서서히 나를 감고 휘어졌다
- 「날선 곡선」전문
임애월 : 곡선이 날을 세운다는 제목부터 모순어법이고 역설적이네요, 훈데르트 바서의 그림은 얼핏 보았을 때는 꼭 동화 속 그림 같은 이미지거든요. 아기자기 동글동글한 곡선들이 어떻게 날을 세우는지… 거기 수많은 작은 창들은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그리고 훈데르트 바서는 어떤 화가인지 말씀해 주세요.
김창희 : 훈데르트 바서는 원래 건축가였어요. 인간이 살기에 가장 행복할 수 있는 집을 짓기 위해 평생을 설계하고 노력하였지요. 하지만 세상은 점점 쓰레기 더미로 변해가고 지구는 병들고 있죠. 세상을 향한 분노와 절망과 갈등, 그리고 화해의 손짓을 그는 수많은 창문과 빨강, 노랑, 파랑의 원색으로 표현하곤 하였어요. 어떤 면에서는 호소라고 봐야겠지요. 날선 것은 이런 것들의 이미지이지요. 곡선과 나선은 자연이라는 공간성을 가진 훈데르트 바서의 이상향이며 날선 것들은 이상향 속에서 화해되어야 하는, 다시 말해 부드럽게 무디어져야만 하는 필연성을 가지고 회복되어야 할 지구 위의 병든 환경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당신은 자연에 잠깐 들른 손님입니다. 예의를 갖추세요.” 훈데르트 바서가 세상에 남긴 말에 경의를 표합니다.
임애월 : 정말 가슴에 남는 명언이네요. 사실 작금의 현대인들은 자연을 너무 경시하는 경향이 있거든요. 그 참담한 결과가 결국 자신에게 돌아온다는 걸 모르고 말이죠.
이 작품 「날선 곡선」은 각 행의 시작점을 곡선으로 배치하여 시각적인 효과가 얼른 눈에 띄잖아요. ‘굽이치는 물결’인가요? 가끔 이런 시각적인 시도를 하는 시인들이 있긴 한데, 이 작품에서는 그 시각적 이미지가 더 부드러워 보이지 ‘날’은 전혀 안 보이는데요. ‘날’이 무디어진 건가요.(웃음)
김창희 : 훈데르트 바서가 한 말 중에 ‘자연에는 직선이 없다’라는 경구도 있습니다. 자연스럽다는 말의 뜻도 거슬림이 없는 본래의 모습을 이르고 있지요. 직시하셨다시피 물결이기도 하고 바람결이기도 하고 우리 내면의 순수한 마음결이기도 합니다. 이 시에서 만큼은 사실적 은유가 많아 말이 길어지네요. 곡선과 가까운 ‘날’은 머지않아 몽돌 같이 물결을 닮아가겠지요.
임애월 : 우리가 발을 딛고 사는 지구처럼 날 선 마음들이 모두 둥글어지기를 기대해 봅니다.
이유 모를 슬픔을 닮았다 내 눈은
천만리 먼 길 달아나는 바람을 닮았다
내 귀는
사하라 사막 남쪽의 플라니족 청년처럼
한나절 걸려 분칠을 한 얼굴에
타조깃털 장식으로 멋을 내고 춤을 추어도
들리지 않는 듯 보이지 않는 듯 너는 내게로 오지 않고
산허리의 붉은 그림자도 나를 비껴갔구나
바깥 잠으로 기다림을 견디는
사하라 남쪽의 플라니족 청년처럼
눈 감아도 환히 보이는 너를 기다리는 동안
물 먹은 지붕 아래
나, 비바람 드는 몸을 누이어 본다
늙은 바오밥나무 환한 속살을 따라갔다는
플라니족 청년의 그녀가
오늘은 왠지 너의 사하라를 데려올 것만 같은
데칼코마니,
그 중심을 덧칠한다.
- 「데칼코마니」 전문
지도에도 없는 골목
골목은 사소한 위치에서 나를 복제하기 시작했다
걷다보면 불쑥 나타나는
출구가 없는 골목들은
금세 수수께끼 거리가 되었다
날마다 늘어나는 나 아닌 나와 나인 내가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 골목에 갇혀서 울었다
그대 얼굴도 이젠 까마득한 전생이 되고만
더 이상 길이라 불릴 수 없는 저녁을 맞이하고
수많은 갈래 길 사이에서 점점 낯설어진 나는
복제되지 않는 골목의 끝을 꿈꾸기 시작했다
망망한 동해의 물빛 쉼표로 찍힌
지도에도 없는 금구도,
그를 보고 온 날
내 마음 속 수많은 골목들이 사라졌다
-「발견의 기술」 전문
임애월 : 「데칼코마니」의 화자는 호소력 짙은 허스키보이스를 가지고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듭니다. 이 작품 「데칼코마니」와 「발견의 기술」로 재작년에 <한국시문학상>을 수상하셨지요? 늦었지만 축하드립니다.
김창희 : 아이쿠 ~ 감사합니다. 과분한 상을 받았습니다.
임애월 : 데칼코마니는 독특한 미술기법으로, 좌우가 대칭이라 그림이 똑 같은 것 같지만 사실은 접어야 똑 같이 포개지는, 어쩌면 영원히 마주 바라보기만 할 것 같아서 슬픈 예감이 들기도 합니다.
김창희 : 어쩜 그리 잘 짚어내시는지요. 슬픈 사랑 얘기죠. 상사화 같은 운명의... 아프리카 플라니족 청년의 사랑을 위한 간절한 모습을 그려보았습니다. 기다림, 그리고 그 뒤엔 엇갈리는 삶을 연결하는 지점이 반드시 있다고 봐요. 데칼코마니의 중심선처럼...
임애월 : 애절합니다. 박제천 시인은 문학상 심사평에서 김창희 작품은 “깊은 사유에서 우러나오는 형이상학적인 질문을 함유하고 있어서” “삶의 바탕을 들여다보는 시인의 눈빛이 서늘할 정도로 깊다”고 하셨어요.
「발견의 기술」에서 ‘골목’이 상징하는 게 무엇일까 궁금해요. 골목은 큰길은 아니지만 세상과 내통하는 가장 가까운 출구잖아요. 그런데 ‘골목에 갇혀서 우’는 시적화자의 절망이 독자에게 전이되어 기존의 골목들이 그 숨구멍을 닫기 시작하거든요.
김창희 : 골목도 골목 나름으로 지도에 그려질 수 없는 사소한 골목의 복제입니다. 미로와 같은 것이죠. 골목을 벗어나야 소통이 이루어지는데 여의치가 않아요. 폐쇄와 개방의 중간에서 방황하는, 현대의 인간 심리를 응시해 보았습니다. 골목을 치유하는 대상으로 지도에도 없는 금구도가 등장합니다. 삶에 대한 깨달음은 거창하게 오는 것이 아니라 어느 순간 사소하게 불현 듯 우리를 깨울 때가 많은 것 같습니다.
임애월 : 그러고 보니 저도 요즘 들어 낯선 골목 어디쯤에 갇혀있는 것 같은 생각이 자주 듭니다. 빠져나가지도 못하고 되돌아올 수도 없는 혼란스러운 어디쯤이요.(웃음)
여행 중에 쓴 작품들도 많던데… 여행을 자주 다니신 결과겠지요? 이 부분은 사실 굉장히 부럽습니다. 두루 다니신 세계 여러 곳 중에 가장 끌리는 곳은 어디인지요?
김창희 : 해외여행을 많이 한 건 아니고요. 좀 특별한 곳으로 다니는 편입니다. 지난해에는 연길을 다녀왔는데 그곳 문화단체와 켈리그라피 시서전과 시낭송회를 가졌던 점이 뜻깊었습니다. 그래도 가장 기억에 남는 곳을 꼽으라면 저는 단연 몽골입니다. 지금은 제가 다녀 온 2005년에 비해 많이 도시화가 되었다고 들었습니다. 고비사막은 아직도 유효하겠지요.
임애월 : 저도 몽골의 초원은 꼭 가보고 싶어요. 콘크리트 건물이라고는 한 채도 보이지 않는 그곳에는, 더 넓은 하늘 속에 더 많은 별들의 이야기가 살고 있다고 들었어요.
김창희 : 고비사막을 꼭 횡단해 보시길 권유합니다. 초원과 사막을 모두 경험하실 수 있을 거예요. 밤이면 쟁반 같은 보름달이 바로 손에 잡힐 듯 가까이 다가와 있고 별빛은 누구의 표현대로 금방 쏟아져 내릴 듯 온 하늘에 가득 반짝입니다. 초원에서 시원하게 말을 달려보는 것도 좋은 경험입니다. 저는 2005년에 시인과 소설가로 구성된 6명이 울란바토르 국립대학교의 한국어 교수의 안내를 받으며 고비사막을 2주 동안 횡단했던 일이 두고두고 잘한 일 같습니다. 사막을 지나다 들른 겔(집)에서 여섯 살 소녀가 끓여주던 수태차를 마시며 마음이 찡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한창 뛰어 놀 나이인데 양 치러 나간 부모님 대신 할머니와 함께 집을 지키고 있었지요. 주변에는 인가도 없었어요. 몽골여행은 돌아와서 두고두고 생각나는 곳입니다. 그곳의 모든 것이...
임애월 : 아... 네, 그렇게 말씀하시니 더 가보고 싶어지네요.
올해로 등단 20년이신데 그 동안 묶은 시집이 한 권이면 너무 과작이신데요. 제가 만난 게으른(?) 시인들 중에서 정말 최강이네요. 당연히 그 이유를 여쭈어 봐야겠어요.(웃음)
김창희 : (웃음) 주간님 지금 저를 고문하시는데요. 그래도 할 말은 없습니다. 무슨 이유인들 가당키나 하겠어요? 첫 시집 발간하고 옳다구나 공부도 해야지 하고 대학원 석사과정에 들어갔는데 그해 딸아이 결혼하고, 한 2년 신혼생활 즐기라 했더니 임신하여 아기 낳고 지금껏 제 옆에 붙어살고 있네요. 문화센터 강의도 다니면서 우물쭈물하다보니 시간이 많이 흘러 저도 당황해 하고 있습니다.
임애월 : 작품 한 편 한 편 잘 익히시느라 늦었다고 이해할게요.
뜬금없는 질문인데요. 선생님께 ‘시’는 어떤 의미인가요?
시인들마다 의미가 조금씩 다를 수가 있거든요.
김창희 : 저에게 시는 불치병입니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내 삶을 치유하는 불치병인거죠. 재발이 잘 되는 고질병과 사이좋게 살아가는 방법을 생각 중입니다. 이제 남은 생 동안 얼리고 투닥거리며 정답게 어울려볼까 합니다.
임애월 : 불치병이요...그 자체는 치유불가이지만 삶을 치유하는...
시를 향해 식을 줄 모르는 뜨거운 갈증이 느껴집니다.
우문 하나 더 할게요. 인간들의 언어가 인간들의 생각을 얼마나 담아낼 수 있을까요?
김창희 : 언어는 인간의 생각을 표현하는 예술행위 중 가장 후발 주자인데요. 언어를 아는 자만이 소통할 수 있는 한계성을 갖게 되지요. 때문에 언어로 인간의 생각을 온전히 담아내기엔 무리라는 생각이 듭니다. 다만 언어가 구성하고 있는 형상이나 상황의 여백과 여운을 통해 독자는 유추를 할 수 있게 되죠. 많은 문학 작품들이 묘사를 통해 사물의 형태와 감정을 담아내려 애쓰지만 보편적인 반응을 끌어내기가 쉽지 않은 까닭도 여기에 있는 듯싶습니다.
임애월 : 그렇지요... 역시 제가 우문을 드린 게 맞네요.(웃음)
두 번째 시집은 언제쯤 만나볼 수 있을까요?
김창희 : 부끄럽습니다. 지켜봐 주세요.
임애월 : 바쁘실 텐데 이렇게 시간 내주셔서 대단히 고맙습니다.
긴 시간 동안 취조(?) 당하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웃음)
김창희 : 시인이라 이름 걸기도 부끄러운 저를 불러주셔서 민망하고 감사합니다. 그래도 시를 사랑하기에 시인답게 살라는 경종으로 알고 남은 생을 정진하겠습니다.
오랜 시간 제 이야기 들어주시느라 주간님 수고하셨어요. 멋진 사진 연출해 주신 최영선 시인님께도 감사드립니다. 결실 가득한 가을 보내시길 바랍니다.
- 이 지구상에 존재하는 개체 하나하나 그 자체가
또 하나의 우주이므로
한 시인의 역사를 들여다보는 일은
그 시인이 만드는 우주를 들여다보는 일이다
가을이 오는 길목에서 만난 김창희 시인님
문학에 대한 사랑과 소녀 같은 외모가 영원하시기를 빈다 -
■□ 자선시 5편
옥과미술관*
아주 가끔씩 인기척을 느낄 때마다
새떼들이 날아올랐다
엉킨 나뭇가지 사이로
조각난 하늘이 몸을 흔들었다
그 추임새에 깃털을 세우던 산비둘기가
구성진 가락으로 몸을 감추었다
오래도록 그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한 시간 속으로
숲속의 길은 가려지기 일쑤였다
오뉴월 햇살이 발갛게 익어 갔다
성숙의 의미를 놓치곤 했던 갈림길이 구구구
낮은 포복자세로 다가왔다
안내판도 없는 오르막길에서
가시 돋친 조각상 하나가 불쑥 가슴을 내밀었다
멈춰서야만 볼 수 있는 거리에 그가 있었다
먹먹해진 가슴으로 허릴 펴보았다
바라보기 좋은 그만치에
산그림자 깊은 적막이
단청에 휘감긴 집 한 채를 안고 서 있었다
기이한 침묵이 나를 손짓했다
색色과 묵墨이 오르내린 전시실 계단에서
숨 가쁘게 파랑새를 쫒던 눈먼 나를 만났다
실체는 없고 잔상만 남은
깊은 산속 구름에 휘감긴 새의 깃털을 보았다
숨 멎을 듯 잠깐씩 흘러가는 나는 어느 적막의 후예였던가
인기척이 사라진 전시실 한 복판에서
늦은 걸음을 재촉하던 나는
검은 휘장에 가려진 비밀의 방을 지나치지 못했다
그곳에선 끊임없이 열린 길의 속도와
수많은 밀실의 창이 떠밀리는 미러볼 영상이
터널 속으로 반복해서 이어지고 있었다
차마 발설하기 어려운 심장의 고동소리가 들려왔다
고요와 느림으로 이룩한 적막의 공식이
3평 남짓 공간속에서 출렁이고 있었다
옥과미술관 검은 휘장 속에서 헝클어지고 있었다
나는 미술관 문을 나서다 문득
적막의 온도를 재 보았다
오뉴월 햇살이 빛의 속도로 ‘묵언수행 중’ 팻말을 내걸었다
*옥과미술관: 전남 곡성군 옥과면 산속에 있는 미술관
딱 한 번의 오류
천지天池, 선연한 구름 아래
물빛 찍어 내 몸을 헹구어 보고
청정한 하늘빛 풀어내려
내 마음 문질러보고,
나는 이윽고 맑아졌다 사라질
한 점 옥빛으로
벌거벗은 태초의 산정 위에서
하얗게 떠오를 수밖에
저 티끌 없는 구름의 무게로
너에게 환히 스며들 수밖에
뿌리 깊은 길
뱃길을 등에 지고 걸어가는 이를 보았다
낙안 포구에 내려놓은 바닷물이 해조음 긴 사설을
쓸어 담고 산길을 오르고 있었다
어디든 쉬어가리라 따라 나섰더니
내 발길 들리지 않는 듯 그는 가벼이 몸을 떨치고 있었다
홀연하다는 말이 생각보다 먼저 튕겨져 나왔다
업혀 가는지 따라가는지 모를 가벼움이
내 몸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의 드러난 어깨 위로
끝 모를 길의 무지개가 흘러내렸다
미끄러지는 자유로움이 깊은 고요를 끌고 왔다
성덕산 관음사 앞마당에 내려놓은 길의 무게가
이제는 천만근 그리움으로
깊디깊은 무지개를 심는 것인가
해조음 긴 사설을 끝도 없이 읊어내는 세월 속으로
성덕은 뿌리 깊은 길이 되어 눕고
원홍장이 보내온 석조어람관음상 앞에
심청을 받아 안은 홍련은 피고지고
심봉사 눈 뜨는 대목에 이르러 아뿔사
나는 아버지 두 눈 감는 줄도 모르고
청사초롱 불 밝힐 수繡를 놓느라 날 새는 줄 몰랐네
이별노래 전하지 못한 불효의 넋을
성덕에게 풀어볼까 심청에게 한恨해 볼까
원통전 돌계단 아래
몇 천 년 기워야할 인연 자락 풀어 놓고
한 땀으로 떼 내고 두 땀으로 기워서
눈 감은 내 아버지 청안靑眼을 밝혀보면 하늘 길 푸른 물이
맑게도 비치리라
명동촌 표류기
회령 땅 두만강을 건너 삼합진 지나
윤동주 일가가 넘었다던 오랑캐령을 넘어 간다.
할머니 할아버지 삼촌 조카 오촌에 팔촌, 외가까지
저 끈끈한 식솔로 이어졌던 흙먼지 길을
정처 없는 나그네 봇짐을 이고 지고 끌며 걸었던 길을
우리는 에어컨 바람 솔솔 부는 버스에 몸을 싣고
2차선 아스팔트 길
코스모스 손짓에 답하며 넘어 가고 있다.
고향 떠나 이제 저 고갯길만 넘으면 오랑캐 땅이라고
그 고갯길에 이름 붙인 오랑캐령을
돌아오기 쉽지 않은 비장한 길을
눈물 바람 꾹꾹 눌러 담으며 넘었던 오랑캐령
국경의 밤은
달과 별을 데리고도
한 없이 낯선 아픔이었겠다
낯선 아픔 펑펑 쏟아져 내린 골짜기였겠다
끝없이 푹푹 빠져든 어둠이었겠다
오랑캐령을 넘어 첫 동네
나지막한 산자락 아래 짐을 풀고
학교 지어 가르치고 땅 일구어 농사지으며
동쪽의 조선을 밝게 하자 다짐했던 얼굴들
이제는 명동촌 낡은 처마 밑에 거친 숨결 틈틈이 묻어두고
물맛 좋던 수십 길 우물터에 수양버들 그림자만 길게 떨구고 있다
부끄럼 많던 동주 오라비도 좋아했을 백일홍이며 맨드라미 분꽃이
초가을 서늘한 바람을 맞는다
내 어린 시절에도 꼭 같던 꽃잎들
발자국 닳아진 골목길로 나비 한 쌍 뒤따라 보내고
솔깃해진 마음에 빈 담장 안으로 두런두런 말을 건넨다
나라 잃은 소용돌이에 수 없이 할퀴어진 시간들이
말을 심고 얼을 심어 키워낸 땅,
“내 조상말로 대 이어 살면 거기가 내 민족 땅이지요”
함께 시를 읊던 연변 시인의 말이
명동촌 미루나무 한 그루 내게 깊이 심어주었다
회령포에 눕다
외다리 건너 모래톱을 지나면
물빛 같은 여울마을 사람들이 모여 모닥불을 피우는
그런 곳이 있었어
송사리떼 발가락 사이를 간질이던 내 어릴 적 그날이
말간 얼굴로 내성천 굽이굽이 휘돌아 나가는
그런 봄날이 있었어
부질없다 하면서도 마음이 쏟아지는 걸
어쩌지 못해
물결 사이로 동그마니 밀려드는 시간들을 건져 올리겠다고
뜰채도 없이 나는 발을 동동 구르곤 했지
물길 350도,
장안사 고갯길을 넘어 네게로 온 날
휘몰이 장단에 늘어지도록 나는 돌고 또 돌아보았지
외다리 밑 강바닥으로
비룡산 골짜기가 토해놓은 내가
굽이굽이 잘도 흐르던 회령포였어
■□ 김창희 시인 약력
1999년 『시대문학』으로 등단,
시집『짧게 혹은 길게』외 공저 다수
한국시문학상, 숲속의시인상 등 수상
국제펜한국본부 이사, 한국동화스피치협회 부회장
문학아카데미시인회 고문, 문학아카데미 회장 역임
한국경기시인협회 부이사장 역임, 계간『문학과 창작』편집장
계간『한국시학』편집위원, 문학과사람 작가회 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