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만나고 싶었습니다 / 대담 한국시학 편집주간 임애월
치열한 삶의 현장에서
빛나는 詩의 원석을 채굴하는 시인
임 영 석 시인
- 원주에 살고 계시는 임영석 시인님과 《한국시학》 봄호 인터뷰 약속을 잡고
두 달을 기다렸지만 코로나19는 아직도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참 많이 아쉽지만 대담은 비대면 지상 인터뷰로 선회하였다 -
임애월 : 임영석 시인님, 안녕하세요?
참으로 아쉽게도 이렇게 지면으로 만나 뵙게 되는군요.
임영석 : 네, 안녕하세요. 코로나 시국이 참 많은 아쉬움을 가져다주네요.
임애월 : 코로나 국면이 진정되면 핑계에 원주로 꼭 찾아가 뵈려고 했는데... 그게 쉽지가 않네요. 시인님께선 요즘 어떻게 지내시는지 궁금합니다.
임영석 : 책 읽고 글 쓰고, 시 메일링 보내고 매일 똑같은 일상을 반복하며 삽니다. 특별한 것은 없습니다. 코로나19 때문에 무엇을 하겠다는 엄두를 낼 수가 없네요.
임애월 : 그렇지요. 그래도 곧 백신 접종을 시작한다니 그나마 다행입니다.
시인님 고향이 금산군 진산면이라고 알고 있는데 태어난 마을과 어렸을 적 이야기 좀 해 주시지요. 기본적으로 궁금한 부분이거든요.(웃음)
임영석 : 제가 태어난 고향은 아주 깊은 산속의 산골마을이었죠. 어느 시골 아이들과 다를 바 없이 평범하게 살았지요. 중학교를 마치고 논산공고를 입학하여 3년을 논산에서 지냈습니다. 좁은 산골에 살다 넓은 들판을 보면서 꿈을 가지게 되었지요. 그때 참 많은 책을 읽었던 기억이 나네요.
임애월 : 인터넷을 통해 시인님의 자전적 시론 <그저 무식하게 살았다>를 읽었어요. 아버지의 초상화 한 점을 그리기 위해 초상화 공부를 1년 넘게 하셨다고요? 초상화를 그려주는 곳이 많은데도 1년을 바쳐 직접 그려드리고 싶었던 건 어릴 때 돌아가신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의 크기가 그만큼 컸기 때문이겠지요.
임영석 :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전에서 1년 정도 지내면서 낮에는 일하고 주말에 초상화를 배웠어요. 다섯 살에 돌아가신 아버지를 가슴에 담아보기 위해서였죠. 기억에 없던 아버지를 가슴에 채우고 나니 허전함이 좀 채워졌습니다. 다른 이유는 없었던 것 같아요.
임애월 : 그 시론에서 “가난한 외로움을 이기기 위해 시를 썼다”고 하셨어요. 6~70년대의 가난과 궁핍은 보편적(?)이 아니었나 싶을 정도로 가난에 대해 무디어지고 익숙했던 것 같은데 유독 그 무게를 더 많이 느끼는 사람들이 있지요. 어렸을 때부터 글쓰기에 관심이 많으셨나요?
임영석 : 좀 감수성이 예민한 시기에 그림을 좋아했고, 시나 소설을 읽는 것을 좋아했지요. 1980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500여권의 소설책과 시집을 헌책방에서 사서 읽었어요. 노트에 낙서처럼 글을 쓰다가 노산문학회에서 주최한 전국시조백일장 예선을 통과하고 10월에 경복궁 본선에 참여하면서 시를 제대로 써보고 싶은 욕심이 생겼지요.
임애월 : 금산에는 언제까지 사셨나요? 그곳에서 문학 활동을 시작한 걸로 알고 있어서요.
임영석 : 금산에서 중학교 졸업하고 고등학교를 논산서 다녔고, 고향에서 방위 근무를 스물다섯 살에 마쳤으니 그때까지 살았다고 보면 됩니다. 그 후는 먹고 살기 위해 직장을 구해 일을 했습니다.
임애월 : 아, 그러셨군요.
1985년 《현대시조》 2회 천료하셨는데 약관의 나이로 등단을 하셨네요.
시를 쓰기 시작한 동기와 등단 배경 등을 직접 듣고 싶네요.
임영석 : 앞에서 언급했듯이 노산문학회에서 주최하는 전국백일장에 2년 정도 예선을 통과해 서울에 가서 본선 대회에 참여하면서 시조라는 것을 공부하게 되었지요. 방위 근무를 하면서 습작으로 썼던 작품을 현대시조에 응모해 84년 가을호에 초회추천을 받았고, 이듬해 봄호에 천료를 받았지요. 이때 금산 시림문학회(현, 좌도시) 그리고 대전 도가니문학회(현 오늘의문학) 그리고 <시도>에 가입해 활동을 했습니다. 유년시절을 빼면 나머지 삶은 다 타향살이죠. 고향에 대한 그리움의 향수병을 안고 살아온 사람입니다. 하하
임애월 : 수구초심이라는 말도 있듯이 자신이 태어나고 태를 묻은 고향은 누구에게나 향수병을 앓게 하지요.
노동은 인간의 생존을 위해 누군가는 꼭 해야 하는 가장 숭고하고 수고로운 활동이라고 생각합니다. ‘노동자 시인‘이라는 별칭이 있으시잖아요? 관련 이야기도 좀 해주세요.
임영석 : 먹고 살기 위해 안양 박달동에 있는 <만도기계>에 취직을 했습니다. 1987년 당시 입사를 하니 6.29선언으로 우후죽순처럼 노동조합이 만들어지고 있었어요, 노동조합 노보 편집에 참여하면서 노동조합에 대한 자료 등을 찾아 읽고 노동자의 권익과 노동인권 등의 소중함을 느껴 현장노동자의 삶을 모토로 작품들을 썼습니다, 그때 첫 시집을 발간하면서 얻은 별명이 ‘시인’이었는데 자연스럽게 ‘만도 노동자시인’이라 불리게 되었어요.
임애월 : 사실 저도 요즘 적게나마 농사를 지으며 육체노동을 즐기고(?) 있답니다. 육체적으로는 정말 힘들지만 그럴수록 오기가 발동해서 그런지 정신은 더욱 짱짱해지는 것 같다는 착각이 들기도 하고요. 평생을 밭고랑에 엎디어 사시다가 가신 우리시대 어머니들의 노동에 비하면 그 차원이 다르기 때문에 이런 말을 하는 것 자체가 죄스럽지만요.
임영석 : 노동현장에서 일을 한다는 건 참 힘든 일입니다. 지금이야 노동시간과 근무 여건이 많이 좋아졌지만, 당시 잔업이나 철야는 회사에서 원하면 반 강제적으로 해야 할 만큼 고됐습니다. 노동현장도 작은 정치판이라고 보면 됩니다. 활동가로 일하며 노동조합이 바로서야 한다는 마음에 노동조합법, 근로기준법 등을 알지 못하면 현장노동자를 상대해 노동조합을 바로 알리는 게 힘들었지요, 그래서 안양 노동 상담소에서 노동조합 교육도 받았고, 이것 때문에 평생 회사의 미움도 받았고 동료들로부터 많은 따돌림도 받았고, 힘든 회사 생활을 했습니다. 회사에서 노동조합에 관여하는 일을 껄끄럽게 생각해 현장 활동이 쉽지 않았거든요.
임애월 : 그랬었지요. 당시에는 노동운동을 하는 근로자들을 무슨 불순분자처럼 취급했었으니까요.
1987년에 첫 시집 『이중 창문을 굳게 닫고』를 출간하셨지요? 첫 시집 관련해서는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으실 텐데... 저도 듣고 싶고요.(웃음)
임영석 : 시집을 낼만큼 여유롭지 않았는데 시도(詩圖) 동인지를 주관하던 지광현 시인께서 시집 한번 내보라는 권유로 70여 편의 졸작을 묶어 시도시인선집 12번째로 시집을 냈습니다. 지금 읽으니 참 엉성하고 볼품없는 작품집입니다. 자의식이 강했던 시기였던 만큼 자의식을 찾아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많이 내포된 작품들을 썼던 것 같아요. 그렇게 작품집을 내고 보니 어느덧 지금까지 시를 손에서 놓지 못한 인연을 맺었던 것 같아요.
임애월 : 「가난론」을 연작으로 쓰셨던데 그만큼 현실적으로 절박한 상황이었겠지요. 그런데 그럴수록 정신세계는 더욱 단단해지고 자유로워지는 건 아닐까요?
임영석 : 「가난론」은 제 삶의 일기 같은 시간을 기록한 것들이지요. 가난하지 않았다면 그 많은 시집이나 책을 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 시간들을 기억 속에 담아놓고 싶어서 썼던 시들이지요. <시도> 동인지에 발표를 했던 작품들이지요.
나는 빈 항아리를 보면 소금을 담아놓고 싶다
우리들의 조상들이 눈물을 흘리며
진실하게 사는 동안
빈 항아리 속에
가난을 지혜로 이기는
하얀 마음을 담아놓고
요즘 그 흔한 통조림보다도
부패되지 않는 맛을 냈는데
나는 빈 항아리 속에
고통을 담아놓고 있다
누님은 나에게 詩를 쓴다고
詩를 팔아서 가난을 면한다면야
백 번 천 번 詩를 쓰라 하지만
詩가 힘이 될 수 있다면
진실하게 사는 것일 뿐,
진실하게 살고 싶어서
진실하게 살고 싶어서
나는 빈 항아리만 보면
소금을 담아놓고 싶다
- 「가난론 5 – 빈 항아리를 보며」 전문
임애월 : 그렇게 절박한 가난의 경험을 지나왔기 때문에 나중에 「소뿔」 같은 걸작이 탄생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임영석 : 「소뿔」은 외국인 노동자가 취업기한을 넘겨 불법으로 숨어 몰래 일을 하다보면, 참 많은 부분이 부당한 대우를 받지요. 월급을 떼인다거나 신고를 하면 잡혀서 출국을 당하기 때문에 임금을 줄인다거나, 노동조합 활동을 하다보면 그런 친구들 소식을 접하지요. 아이러니 하게도 비정규직이란 말이 김대중 대통령 시절에 만들어진 말입니다. 외국인노동자들을 제도권 안으로 끌어들여 그들의 권익을 보호한다는 차원이었는데, 그 법에 내·외국인 구분 없이 비정규직이란 말로 표현해 놓으면서 내국인도 똑같이 2년 동안 근무를 하게 되었고, 2년이 지나면 해고시키는 모순이 발생된 것이죠, 당시 여의도 상경투쟁도 참 많이 참여했는데, 비정규직 노동법을 막지는 못했지요.
임애월 : 노동현장에서 투쟁도 많이 하셨군요. 그래서 <노동자 시인>이란 당당한 별호를 받으셨고요. 대단하신 이력입니다.
2009년에 출간하신 시집 『고래 발자국』은 문화예술위원회의 창작기금을 지원받으셨는데 그걸 “정직한 시를 쓰지 않은 벌”이라고 하셨어요. 어떤 은유인지요?
임영석 : 솔직히 시단에 많은 문예지가 있지만, 인맥이 없는 사람들이 글을 써 발표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인터넷이 없던 시절에는 더 더욱 힘들었지요. 시조로 등단을 하고 시와 시조를 썼기 때문에 문예지에서 청탁 한번 받는 일이 없었거든요. 문단에 줄 서려는 그런 마음도 없었고, 좋은 작품을 쓰지 못한 내 탓이라 생각했습니다.
임애월 : 그 외에도 창작지원금을 자주 받으신 편이군요.
임영석 : 시집 한 번 내는데 자비 출판 외에 시집을 내주는 곳이 거의 없다고 생각합니다. 판로가 개척된 명성 있는 시인들이나 자비 출판을 면할 정도라 생각합니다. 그러니 가난한 내게는 문화재단의 기금을 받아야만 시집을 낼 수 있었습니다. 2009년 이후 출간된 시집 4권, 시조집 3권 모두 창작지원금을 받아 발간했습니다. 12년 동안 7권의 시집을 냈으니 시 쓰는 일 외에는 다른 생각은 하지 않았다고 보면 될 것입니다.
임애월 : 12년 동안 창작지원금을 일곱 번이나 받은 이력도 대단합니다. 3년 이내에 재 지원을 받는 일은 좀 드물거든요.
고진하 시인은 『고래 발자국』 작품해설에서 “여전히 어린왕자 같은 때 묻지 않은 동심을 간직하고 있다”고 하셨어요. 사진으로만 뵈었지만 외모도 소년처럼 참 해맑으시네요.
임영석 : 고진하 시인이 행구동 치악산 밑으로 이사를 와서 살게 되었습니다. 창작기금을 받고 해설을 맡아달라고 부탁한 것도 고진하 시인과 틈틈 만나 살아가는 방법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나누었습니다. 저를 아는 분한테 제 시의 해설을 맡겨 진실로 제 삶의 방법을 찾아보고 싶었습니다. 하느님이 많은 사람의 마음을 구원한 것처럼 저도 시를 통해 제가 구원 받은 그런 삶을 살았다고 봅니다. 희망퇴직을 하고 여차저차 못 뵈었는데, 고진하 선생님 여식(女息) 결혼식이 다음 달에 있다고 해서 그때나 한번 뵙겠다고 답을 해 놨습니다. 그리고 강원문화재단은 2년이면 새로운 지원이 가능합니다.
임애월 : 표제시 「고래 발자국」 전문을 읽어볼게요.
시간을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면
고래들의 발자국을 보고 싶다
고래가 발을 버리고 왜 지느러미를 갖게 되었는지
무슨 아픔이 있어 바다로 몸을 숨겼는지
발자국을 보면 그 의문이 풀릴 것만 같다
새끼를 낳고 젖을 물리는 고래들의 발자국을
고고학자들은 왜 아무도 찾지 않을까
바닷속 어딘가는 두 발로 혹은 네 발로 걷던
발자국 무덤들이 가득히 있을 것인데
수천 년 동안 고래 발자국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다
사람이 역사(歷史)를 발로 쓰고 다닐 때
고래들은 천 리 밖에서 들을 수 있는 소리를
바닷속 가득 풀어놓고 낙엽처럼 밟고 다녔을 것이다
그 발자국 따라 오늘도 새우 떼를 쫓을 것이다
- 「고래 발자국」 전문
포유동물인 고래는 분명 발이 있었을 테고...... 또 왜 바다로 숨어야 했을까요...... 대단한 상상력입니다. “바닷속 어딘가는 두 발로 혹은 네 발로 걷던/발자국 무덤들이 가득히 있을 것”이라는 구절에서는, 전설 속의 비밀한 것들을 찾아내고 싶은 동심이 비집고 들어와 이제부터라도 넓은 바다 속을 헤집고 다녀야 할 것 같은 호기심이 발동합니다.
임영석 : 이 시도 노동자들에 대한 삶의 답을 찾다가 얻은 상상력입니다. 일제 강점기에 러시아로 삶의 터전을 옮긴 고려인들이 연해주로 강제 이주된 기사를 읽고, 또 외국인 노동자가 강제 출국되는 것을 보고, 또 일용직 노동자가 2년 기간이 끝나면 해고가 되고 다시 계약을 써서 취업을 하고 이런 반복되는 세상과 포유동물인 고래가 땅 위에 발을 딛고 살았는데 자신들의 삶을 지켜내기 위해 바다로 숨어들은 삶이 공통된 모습으로 내게 보였습니다. 그 공통분모를 찾다가 쓰게 된 작품입니다.
임애월 : 아하, 그런 공통의 모티프가 있었군요.
“시인은 유용성의 세계에서는 쓸모없는 존재로 취급당하지만, 노자의 말처럼 ‘無用之用’을 추구하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숱한 억압에서 자유로운 것이다. 억압에서 자유롭기에 상상의 꽃을 피우고 새로운 우주를 열어갈 수 있다” “진정한 시인은 존재의 이면까지 꿰뚫어본다. 그래서 시인은 구태의연한 삶을 전복하고 새로운 세계를 향한 창을 뚫어주는 존재인 것이다. 시인이 위험한 존재로 여겨지는 이유이다”라고 하신 고진하 시인의 작품평이 가슴에 와 확 꽂힙니다.
임영석 : 고진하 시인은 목사이면서도 다른 종교를 이해하려는 노력을 참 다양하게 합니다. 인도를 방문하여 그들이 섬기는 많은 신을 보고 느낀 점을 글로 쓰고, 불교적 입장을 이해하는 동서양의 사상이 따로 구분되지 않다는 생각을 견지하고 있다고 봅니다. 무용지용(無用之用)이란 말은 시가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서 아무 쓸모가 없어 보이지만, 그 시의 정신이 바로 우리 삶의 기둥을 받쳐주는 주춧돌이란 생각을 말했다고 봅니다. 삶이 정신의 기둥이 우선시 되는 게 아니라 물질의 가치로 사람을 바라보고 평가하는 세상에 대한 아픔을 지적한 말이라 이해합니다.
임애월 : 2018년에 상재하신 시집 『고양이 걸음』은 시조선집인가요?
임영석 : 『고양이 걸음』은 5부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시조집으로는 단행본으로 『배경』이 유일한 시조집입니다. 여기 저기 흩어진 작품을 정리하는 차원에서 1부는 신작으로 하고, 나머지 작품은 발표작으로 구성하여 시조선집을 꾸며 봤습니다. 등단 작품부터 제가 써온 시조의 흐름을 알기 쉽게 구성을 해서 펴낸 시조선집입니다
임애월 : 아, 신작들도 섞여있었군요.
이 시집의 <시인의 말>을 읽다가 “학벌도 인맥도 없는 내가 기댈 곳은 나 자신뿐이다”라는 대목에서 먹먹해서 눈길이 잠시 멎었어요. 인간은 누구나 찬바람 부는 벌판에 홀로 선 존재이지만 잠시 기대어 쉴 언덕 하나도 없는 이들의 고단함이 불쑥 튀어나와 저의 눈앞을 출렁이게 했습니다.
임영석 : 시인이라는 사람은 참 가슴이 따뜻한 사람들이라 생각하고 살았습니다. 처음 등단시에는 이우종, 이태극, 정완영, 박재삼, 임영창, 김어수 등등의 시인들께서 격려도 많이 해 주시고 어린 나이에 열심히 하라는 동기부여로 응원도 많이 받았습니다. 하지만 고졸 노동자가 학력이나 인맥이 없는 처지라 쉽게 문단에 작품을 들이밀 방법이 없었겠죠? 문학인의 다수는 문학작품보다는 문학을 앞세우는 권위주의자이고, 자기 밑에서 배운 제자들 챙기기도 바쁘다는 것을 알게 되었죠. 작품성보다 인맥이 우위에 있다는 현실에 봉착해서 시인에 대한 기대감이 무너져 실망감이 많았습니다. 지금도 그 괴리감이 너무 커서 문단 행사 등에 자주 참석하지 않고 있습니다. 할 말은 많지만 문단의 폐단이 한두 가지가 아니기에 생략하겠습니다.
임애월 : 뭐...... 다들 알고 있는 이야기지요. 시인들의 영혼은 별처럼 맑고 숭고할 것이라는 존경심에서 출발하여, 시인도 결국 그저 인간의 한 부류일 뿐이라는 사실을 아는 데는 시간이 그리 많이 걸리지는 않으니까요.
그 사이의 작품들을 하나하나 다 못 읽어봐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이전의 작품들에 비해 시집 『고양이 걸음』 속의 작품들은 표면적으로는 한결 부드러워진 것 같습니다. 물론 숨겨둔 발톱은 더욱 날카롭게 벼리어 놓으셨고요.
임영석 : 제 작품의 구분은 2016년을 기점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기준이 달라졌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노동자 생활을 하다가 2016년에 희망퇴직을 하면서 노동자의 관점을 버리게 되었거든요. 세상에는 수많은 사람이 살아갑니다. 이전에는 노동자라는 억압감, 그리고 투쟁으로 세상의 부정을 이겨내야 한다는 내면의 양심 등이 저를 지배하다가 그 우물을 벗어나니 새롭고 또 다른 세상이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물질에 억압당하던 시간을 벗어나니 자유롭게 세상을 날아야 하는 삶의 공간이 보인 것이죠. 이후의 작품이 부드러워졌다는 말을 많이 듣습니다. 지금도 날카로운 삶의 발톱을 숨기고 따뜻한 눈빛을 더 많이 갖으려고 노력중입니다.(웃음)
고양이가 살금살금 숨 막히게 걷고 있다
날카로운 발톱 속에 本色을 감추고서
포획의 사정거리를 좁혀가는 저 고양이.
잡을까 놓칠까 내가 더 초조한데
고양이가 걸어갈 때 흐르는 無心地境,
얼마나 참고 참는지 눈도 깜박 않는다.
저 집중의 눈화살이 내 갈 길을 가로막고
덤으로 담아주는 발밑의 민들레꽃
눈화살 천 번을 쏴도 빙그르르 웃고 있다.
- 「고양이 걸음」 전문
임애월 : “날카로운 발톱 속에 本色을 감”춘 고양이처럼 시인님도 겉으로는 발소리 하나 들리지 않지만 “포획의 사정거리”권에 들어서는 순간 “집중의 눈화살”로 목표를 단번에 명중시키실 것 같습니다. 아, 이미 여러 번 명중시키셨겠지요.(웃음)
임영석 : 무엇이 삶의 과녁인지 모르겠어요. 지금까지 살아온 삶의 방법이 올바로 쏜 화살이었는지, 아니면 잘못 쏜 화살이었는지, 그러나 제 삶 그 자체가 이미 이 세상의 과녁을 향해 날아가는 화살이라는 생각은 변함없습니다. 삶이란, 세월을 화살처럼 날아가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고 봅니다. 지금까지 쓴 시들은 스쳐가는 바람 소리쯤 되지 않을까 봅니다. 인생 우여곡절도 많았습니다. 이혼을 하고 혼자 아이를 대학까지 키워냈고, 지금 만난 아내와 정말 행복감을 다 채워주지도 못하며 살고 있다는 죄책감, 내 욕심만 채우려고 글만 쓰겠다고 희망퇴직을 했던 일, 하고 싶은 일 마음껏 하며 살겠다는 생각으로 내 삶의 포획 거리를 좁혀 가는 중이라 봅니다.
임애월 : 아하, 저는 詩의 과녁을 말씀드린 건데...... 아무튼 포획의 거리가 좁혀지고 있다니 그건 다행이라고 봅니다.
「고양이 걸음」처럼 온갖 역경과 혼란과 분노를 다 넘어서고 결국 “無心地境”에 들 때 비로소 명작이 탄생하나 봅니다.
임영석 : 무심지경이란 말은 생각하지 않아도 제가 거울 속에 들어 있는 모습처럼 제 생각이 담겨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많은 시인들의 작품을 보면 자신의 생각을 담아 놓지 못한 작품이 너무도 많습니다. 감정과 감각만 앞세우는 작품들을 보면 삶의 그림자가 없는 허영심만 가득하다는 느낌입니다. 그러다보니 상상력에 의존한 작품들이 홍수를 이루는 시대입니다. 삶의 경험보다는 지식의 경험을 앞세우고, 글을 위한 글들이 많다보니 무심지경으로 담아야 할 삶의 배경이 보이지 않습니다. 저는 제 작품에서라도 꽃 속의 꽃향기 같은 마음을 담아야 한다고 봅니다, 그림으로 화려하게 그린 꽃보다는 들에 핀 야생화 같은 꽃으로 살아가는 모습을 보이고 싶을 뿐이죠. 그래서 명작이란 말은 제 작품에 붙이기가 부끄럽고 어울리지 않는 말이라고 봅니다.
임애월 : 작년이죠. 2020년 가을에는 9월에 『참맛』, 10월에 『나, 이제부터 삐딱하게 살기로 했다』 등 두 권의 작품집을 간행하셨는데, 이제 전업시인이 되셨지만 쉽지는 않은 일이거든요. 배경 설명 부탁드릴게요.
임영석 : 작년에 시조집 『참맛』과 시집 『나, 이제부터 삐딱하게 살기로 했다』 두 권의 작품집을 출간했습니다. 시조는 동양화 같은 시라면 시집은 서양화 같은 시라고 보면 적절할 듯합니다. 제 욕심이죠. 두 장르를 다 아우르겠다는 욕심, 『참맛』에서는 임영석의 시조다운 작품을 보이려고 했습니다. 허공에 있는 삶의 맛을 찾아내기 위한 욕심, 그래서 참깨가 참깨 꽃을 피워서 참맛을 낚아내는 낚시질이라는 생각을 해 냈죠. 그리고 진정한 삶의 맛은 가슴으로 먹는 맛이 최고의 맛이라 생각했습니다. 또 시집 『나, 이제부터 삐딱하게 살기로 했다』는 이 지구의 기울기만큼 23.5도 기울어진 세상에서 아무리 바르게 살아도 바르게 살아지지 않는다는 제 삶의 방법이 과연 올바른지를 반성해 보았습니다. 4년 넘게 아무것도 하지 않고 글만 쓰고 살고 있습니다. 시를 쓰는 직업이니 작품으로 결과를 드러내야 한다고 봅니다. 2018년에도 똑 같이 두 권의 작품집을 냈습니다. 일주일에 시와 시조 각각 한 편의 작품을 써야 가능한 일이지만, ‘일하지 않는 자여 먹지도 마라’는 노동가의 가사에 충실한 삶을 살기 위해 시를 씁니다.
임애월 : 작품 쓰는 일도 절대 게을리 하지 않으시는군요.
“참맛은/뼈 있는 말을/가슴으로 먹는 거다”라고 하셨는데, 뼈 있는 말도 다 받아낼 수 있는 가슴이 마련되었다는 의미로 제게는 들립니다.
임영석 : 뼈 있는 말이 무엇이겠습니까, 나를 욕하고 험담하고 비판하고 손가락질해도 그 말에 연연하지 않고 내 삶의 방식대로 무심하게 살아가는 방법일 것입니다. 세상 꽃들이 제 아름다움을 아름답게 봐 달라고 피지 않습니다. 운명적으로 싹을 틔우고 꽃을 피워 씨를 남기는 책임을 다하는 것뿐이죠, 이 세상에 태어났으니 제 삶의 방식대로 살아가는 삶의 꽃을 시로 남기고 싶을 뿐이죠, 그러한 시를 읽고 알리며 살아가고 싶어 시메일을 쓰고, 읽은 시에 해설을 써서 원고료도 없이 지역신문 등에 연재를 해 오고 있습니다. 단 한 사람이라도 제가 소개하는 시와 해설을 읽고 삶이 아름답다는 마음을 갖기를 바라는 마음이죠.
임애월 : 『참맛』의 작품해설에서 공광규 시인은 “임영석은 언어유희를 통한 희언적 방법, 극적대비를 통한 맑은 심상의 구현, 자신의 근원을 들여다보고 바라보는 자아성찰, 사람의 운명이나 인생의 비의를 암시하는 진술, 추상적 언술을 통한 상징성을 강화하는 다양한 방식으로 시의 주제를 구현하고 있다”고 하셨어요. 이 정도면 시의 세계를 모두 섭렵했다는 뜻 아닌가요?
임영석 : 세상에 경험하지 않은 일들을 글로 쓰기 위해서는 많은 모순이 생깁니다. 지금까지 시조는 시적 요소가 채우지 못한다는 선입견이 많습니다. 시나 시조나 시적 요소를 만족 시키는 작품을 찾아보라면 그리 많지 않습니다. 제 시조작품은 그러한 시적 요소를 충족하기 위하여 경험적 삶의 모습을 작품 속에 담다보니 상징성이 드러나 보인다고 봅니다. 물도 물이 담기는 그릇이 있어야 물이 드러나고, 불도 불을 지피는 나무가 있어야 불길이 나타납니다. 시도 물과 불같은 마음이 없이는 써지지 않는다고 봅니다. 그 물과 불길을 경험적 사유에 담아내고 표현하다보니 제 시조작품을 바라보는 공광규 시인의 시의 주제를 구현하는 방법이 상징성을 강화하는 방식이라고 바라보았다고 봅니다.
임애월 : 아래의 시 「초승달을 보며」는 인터넷에서 시인님의 시를 검색하면서 찾아낸 작품인데요. 세상에는, 가난하고 고된 삶을 살아오신 어머니를 노래한 좋은 시들이 많고도 많잖아요. 그런데 슬픔과 궁핍함과 외로움과 그리움이 범벅처럼 뭉쳐진 이 작품은 뭐랄까요... 빈 부분을 그림자로 채운 초승달의 실루엣처럼 신비로운 슬픔의 시간들이 밤하늘에 둥둥 떠 있다는 느낌이랄까요. 아무튼 뭔가 식상하지 않은 특별한 감동을 받았어요.
괄호도 아니고 반 괄호로 달이 떠서
어떤 말의 의미들을 풀어줘야 할 것인데
앞 문장 깊은 여백에 품은 글이 사라졌다.
내 나이 다섯 살에 죽었다는 아버지는
콩깍지 속 콩들처럼 칠남매를 남겼지만
어머닌 육십 평생을 반 괄호로 살았다.
괄호()로 묶어내도 쭉정이가 많을 건데
어떻게 칠남매를 혼자서 키웠는지
반 괄호 달빛을 보니 그 의문이 풀린다.
둥그런 달빛 속을 파고 든 저 그림자
제 몸을 다 내주고 그림자로 채운 마음
서로가 품고 품어서 반 괄호가 되어 있다.
불혹의 내 나이도 반 괄호가 되었지만
자식의 숨소리에 쫑긋 세운 내 두 귀는
언제나 초승달처럼 앞 괄호를 열어둔다.
- 「초승달을 보며」 전문
임영석 : 이 작품은 2011년 제1회 ‘시조세계문학상’을 수상한 작품입니다. 《시조세계》에 발표한 작품 중에서 선정하여 주는 작품상인데 초승달의 모습과 어머니의 삶의 모습을 비유시켜 바라본 작품이지요, 콩깍지는 콩을 키워내면 쓸모없는 존재이지요, 달의 모습도 누군가의 마음을 키워내는 콩깍지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제 어머니가 칠남매를 홀로 키웠던 삶이나, 제가 혼자 지식을 키워보니 자식을 키우는 마음이 무엇인가 뒤늦게 깨달았지요. 고등학교 3년 내내 등하교를 시키며 야간학습을 하고 끝나는 시간에 맞추어 기다리다 보니 달의 모습을 매일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달을 바라보며 느낀 마음을 담았는데 문학상까지 받았고, 2012년 강원문화재단 창작기금을 받아 수상 작품집을 낸 것입니다. 사모곡이라 보아도 되고, 달이 뜨고 지는 시간, 초승달과 그믐달의 모습을 괄호로 읽어냈다는 것, 그 괄호 속에서 밝게 커가는 모습이 자식이라는 것을 그려낸 작품입니다.
임애월 : 삶의 현장에서 치열하게 살고 그 삶의 체험들을 치열하게 작품으로 쓰셨으니 좋은 상도 받으시는군요.
시집 『나, 이제부터 삐딱하게 살기로 했다』 서문에서 “내 몸에서 채굴된 시집이 10권”이라고 하셨어요. 시인님은 시를 정신이 아닌 “몸”에서 채굴하시는군요. 몸으로 직접 체험한 삶이 시 창작의 근원이라는 말씀이신가본데 그 표현이 제게 신선하게 다가왔습니다.
임영석 : 시인에게 시는 마음의 땅속을 뚫고 캐내는 보석이라고 봅니다. 그 보석이 어디에 묻혀 있는지 아무도 모르죠, 마음 깊이 숨겨져 있는 보석을 찾는 시인의 몫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도 그 보석을 찾고 있는 한 사람이고요. 마음속에 있는 보석을 찾았다고 해서 그게 좋은 보석은 아닐 것입니다. 그 원석을 잘 다듬고 가공하기 위해서는 보석을 찾는 일보다 더 중요한 가치 있는 작품으로 만들어 내는 일입니다. 아름다운 보석이 흔하다면 보석이 아니겠지요. 보석다운 보석을 찾고 다듬고 만들어 내는 그 삶의 시간이 없이는 좋은 작품이 태어나지 않을 것이라 봅니다. 아름답고 가치 있는 보석 같은 시를 찾아서 다듬고 가공하는 일이 시인의 일이라고 봅니다. 부족하지만 힘들고 어려워도 시 쓰는 일에 게으르지 않겠다는 다짐입니다.
임애월 : 무엇 하나 허투루 대강대강 살지 않으시겠다는 다짐이군요.
나, 이제부터는 반듯하게 살지 않기로 했다
좀 삐딱하게 살기로 했다
그간 허리 휘게 일하고 돈 벌어 꼬박꼬박 세금 내며 살았는데
백수건달 양아치처럼 살아가기로 했다
내가 반듯하게 살아간다고 세상이 반듯한 것도 아니다
벚꽃 피면 벚꽃 축제, 진달래 피면 진달래 축제,
갈대꽃 피면 갈대 축제, 해바라기 피면 해바라기 축제
눈이 오면 눈꽃 축제, 이 나라 축제란 축제 모두 즐기며 살기로 했다
이미 지구는 23.5도 기울어져 있다
기울어 있는 지구를 똑바로 세우고 살지 못할 바에야
내 몸을 기울여 살기로 했다
그래야 내 정신이 똑바로 서기 때문이다
그간 내가 바르게 살지 못한 것은
지구가 기울어 있는 만큼
내 몸을 기울여 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제부터 내 몸을 23.5도 기울여
삐딱하게 살기로 했다
- 「나, 이제부터 삐딱하게 살기로 했다」 전문
“그간 내가 바르게 살지 못한 것은/지구가 기울어 있는 만큼/내 몸을 기울여 살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핑계(?)는 정말 재치가 넘칩니다.
그런데 앞으로는 23.5도쯤 기울여 세상을 좀 삐딱하게 살아야 “내 정신이 똑바로 서기 때문이다”를 곱씹어보면 사실은 “삐딱하게”가 아니라 세상에 맞춰서 바르게 살겠노라는 선언 같은데요.
임영석 : 배가 앞으로 가기 위해서는 노를 젓는데 앞으로 젓지 않고 뒤로 젓습니다. 앞으로 저으면 뒤로 가겠죠, 바로 작용과 반작용의 원리처럼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좋은 사람, 나쁜 사람, 별의 별 사람이 다 있죠. 하느님이나 부처님만 있다면 참 황당할 것입니다. 누가 소를 키우겠습니까. 다 내가 대통령이 되겠다고 하면 누가 공장에서 일하고 들에 나가 농사를 짓겠습니까. 이 지구라는 별은 이미 23.5도 기울어 있을 때에는 그만큼 부정함을 안고 살아가야 된다는 의미입니다. 죄수가 없다면 감옥이 필요 없고, 경찰이 필요 없고, 법관이 왜 필요하겠어요. 법관이나 경찰들이 잘났다고 생각하지만 죄인들이 죄를 지어 만들어준 명예입니다. 죄수들에게 고맙다고 봉사하고 땀 흘려 일해야 할 사람입니다. 다 그런 원리로 세상을 살아야 한다는 부정함의 긍정을 역설로 말한 작품이지요. 삐딱하다는 마음은 바로 자기 자신의 잘못을 스스로 깨달아야 한다는 논리입니다. 소비자가 없이 기업 사장이나 회장님이 존재할까요? 환자가 없이 의사가 존재할까요? 국민이 없이 국회의원이나 대통령이 존재할까요? 내가 반듯하게 살기 위해서는 부족하지만 삐딱하게 사는 사람들을 감싸주고 안아주고 보듬고 이끌어 주어야 할 대상이지 배척할 대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느님도 부처님도 그 삐딱한 세상을 바로 잡으려고 살다고 못 잡고 가지 않았습니까. 하느님과 부처님을 대신해 수많은 교회와 절에서 말씀을 전하지만 얼마나 바람직하게 전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정말 세상이 삐딱한 것을 알고 살고 있는지 묻고 싶을 뿐이지요?
임애월 : 하하하...... 옳으신 말씀입니다. 삐딱한 세상을 제대로 살려면 삐딱하게 서봐야지요.
최종천 시인은 이 시집을 “임영석 시집의 시편들 중에서 어느 작품 하나 세련되지 않은 문체가 없다” “사는 동안의 체험을 통하여 익숙해진 사물을 보는 예리한 시선이 꾸밈없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그래서 기대가 되는 시집이다”라고 평하셨는데 제목마저도 사람들의 눈길을 사로잡기 때문에 판매가 많이 되고 있을 것 같아요.
임영석 : 시집을 내면서 몇 군데 출판사에 문의 했는데 다 퇴짜를 맞았지요. 문정영 시인이 연락을 해와 시집 출간을 돕겠다고 하여 그간 시산맥에 작품만 발표하고 빚진 마음에 작품집을 출간했습니다. 최종천 시인은 노동자 시인으로 평소 안부를 전하며 지내는 사이이고, 노동자다운 면목을 살펴 해설을 정직하게 쓰는 시인이라 생각하고 해설을 부탁드렸습니다. 정직과 땀을 밑천으로 사는 제 삶을 좋게 바라본 시인이라 생각합니다. 시집 판매가 어떻게 되는지는 출판사 몫이라 봅니다. 많이 팔려서 출판사 운영에 보탬이라도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죠. 요즘 얼마나 시집을 읽겠습니까. 시집이 많이 읽히면 그만큼 사람들도 여유롭게 사는 세상일 것입니다. 시를 읽고 살 만큼 여유로운 사람이 넘쳐났으면 좋겠습니다.
임애월 : 네, 같은 마음입니다.
시인님은 자유시도 쓰시고 시조도 쓰시잖아요? 물론 양쪽 다 서로 그 맛이 다르겠지만 가끔씩은 어느 한쪽이 더 끌리기도 하시는지요?
임영석 : 어느 쪽이 더 매력이 있다 없다고 구분 짓고 싶지는 않아요. 시조는 정형의 틀에 맞게 풍기는 맛이 있고, 자유시는 자유로운 맛이 있거든요. 사람이 들판에서만 살수는 없잖아요. 집은 우리 몸을 가두지만 내 몸의 비밀을 지켜내는 공간이고, 들은 자유로움을 가져다주지만 내 몸의 자유를 보장해 주지 않는 장단점이 있잖아요. 시조가 집이라면 자유시는 들판이겠죠. 집과 들판을 구분해 살아간다면 안락한 삶을 어떻게 살겠습니까. 저는 그래서 정형의 억압에서 더 큰 자유를 바라보고, 자유로는 들에서 자라는 꽃처럼 한 발도 움직이지 않는 자유를 바라봅니다. 그 묘미가 자유시와 시조의 맛이 아닌가 합니다.
임애월 : 아하하, 우문에 현답을 하셨습니다.
《스토리문학》에서 부주간을 오래 맡고 계셨는데 시론집 『미래를 개척하는 시인』은 그때 집필하신 건가요?
임영석 : 스토리문학 부주간을 10년 가까이 맡아 편집을 도왔습니다. 생존 시인들의 작품을 읽고 그들의 시론을 제 방식으로 분석하고 이해하며 시를 이해하고자 쓴 글들입니다. 연재 형식으로 썼습니다만, 시인마다 고요한 시적 발산의 움직임이 어떻게 다른가를 짚어본 시론집이지요. 연재된 글들을 모아 묶어서 펴낸 책인데, 오자 등 문제점을 다 바로잡지 못하고 펴낸 아쉬움이 많습니다. 그러나 다양한 시인들의 시를 이해하고 공부를 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임애월 : 물론 다 귀하고 소중하시겠지만 마음속으로 가장 매력이 있다고 생각하시는 시인님의 작품은요?
임영석 : 다 부족하고 미흡한 작품을 숨길 수 없겠지만, 제 작품 중에 저는 「받아쓰기」라는 작품을 꼽고 싶습니다.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은 다 획일적이거든요. 그 획일적인 사고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말을 하고 싶었습니다. 종소리가 종을 때리지 않고는 그 아픔의 소리를 낼 수 없고, 물이 제 고인 자리를 벗어나지 않고는 흐를 수 없는 것입니다. 지구라는 땅은 태양의 조율이 빚어내는 연극무대라고 봅니다. 빛의 크기와 거리에 따라 계절이 바뀌고 남극 북극 열대지방, 온대지방 등이 구분 짓게 됩니다. 받아쓰기는 사람이 사람의 시각으로 바라보는 세상에서 자연의 섭리로 바라보아야 한다는 시각을 나타낸 작품입니다.
임애월 : 아, 그 작품을 이 대담이 끝나면 자선시에 꼭 올려주세요.
2017년에 <천상병귀천문학상>을 받으셨네요. 축하드립니다. 어떤 시인들에게 주는 상인가요?
임영석 : 천상병 귀천문학상은 산청군에서 후원하고 산청문인협회에서 시상하는 문학상으로 알고 있습니다. 해마다 전국 문인을 상대로 우수 작품집을 통해 작품을 선정에 주는데, 2016년 발간한 시집 『받아쓰기』의 표제작이 선정되어 우수상을 받았고, 대상은 이영춘 시인이 받았지요.
임애월 : 퇴직하셔서 시간이 좀 많으실 텐데, 시 쓰는 일 말고 다른 계획은 없으신가요?
임영석 : 우리말의 대부분은 한자어를 이해해야 하잖아요, 그래서 퇴직 후부터 한문 서예를 배우고 있어요. 지금은 코로나로 2월까지 쉬고 있지만요. 지역신문 주간지에 칼럼을 연재하고 있고, 원주교차로와 원주신문에 시 해설을 곁들인 시를 알리는데 열중하고 있기도 합니다. 그리고 한결 추천 시메일은 4,600회를 맞이하고 있답니다. 15년 넘게 다양한 시인들의 시와 시조를 읽고 그 느낌을 이해하기 쉽게 전달하려고 노력하고 있으며 건강하게 살려고도 노력중입니다.(웃음)
임애월 : 등단 35년에 시집 13권이면 사실 많은 양은 아닌데 앞으로 또 어떤 멋진 작품들이 생산될지 기대하겠습니다.
임영석 : 시집이 7권, 시조집이 4권, 시조선집 1권, 시론집 1권 합하여 13권의 개인 저서를 발간했죠. 앞으로 기회가 주어진다면 시메일을 써서 보낸 좋은 작품과 해설을 곁들인 해설집을 내고 싶습니다. 시다운 시는 내 마음에서 마음의 싹을 틔우는 꽃씨를 앙다문 시라고 봅니다. 그런 시를 찾아 많은 독자에게 전달하고 많은 사람들이 문학단체의 직위나 권위가 아니라 작품에 환호하는 문단풍토를 조성하는데 일조를 다하고 싶네요.
임애월 : 네, 저도 기대하겠습니다.
어쭙잖은 제 인터뷰에 흔쾌히 응해주셔서 대단히 고맙습니다.
임영석 : 변변한 시인도 아닌데 인터뷰를 요청해 주어 감사드립니다. 서로 얼굴도 보고 따뜻한 차도 마시고, 이곳 원주의 반계리 은행나무 넓은 품과 치악산, 섬강의 모습도 보여주고 싶었는데 참 아쉽네요. 차후 원주에 올 기회가 있겠지요. 그때는 인터뷰를 떠나 마음으로 원주를 보여주고 싶어요.
임애월 : 에구~ 감사합니다. 기회가 되면 꼭 한번 찾아뵙겠습니다.
임영석 : 《한국시학》이 항상 고귀한 지면을 담아주는 문예지로 발전하여 이 땅에 영원히 남는 작품들을 게재한 문예지로 우뚝 서기를 기대합니다. 문예지의 사명은 바로 좋은 작품을 게재하는 사명이 최우선이라 생각하거든요.
저도 최선을 다하여 좋은 시를 쓰는 시인으로 비추어지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임애월 : 마음 따뜻하고 진솔한 답변 오래 기억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노동운동가로, 노동자 시인으로 치열하게 살아오면서
삶의 현장에서 채굴해 낸 원석처럼 빛나는 작품들...
직접 만나 뵙지는 못했지만 E-메일로 보내주신 이야기들은
왠지 시인님의 육성으로 직접 들려주시는 느낌이었다.
진실한 그의 시간들이 타전하는 소리였나 보다 -
■□ 임영석 시인 약력
1961년 충남 금산군 진산면 엄정리 출생
1985년 《현대시조》, 1989년 《시조문학》 2회 추천 완료
1987년 첫 시집『이중 창문을 닫고』이후『사랑엽서』,『나는 빈 항아리를 보면 소금을 담아놓고 싶다』
,『어둠을 묶어야 별이 뜬다』,『고래발자국』,『받아쓰기』,『나, 이제부터 삐딱하게 살기로 했다』 등
시조집 『배경』,『초승달을 보며』,『꽃불』,『참맛』 등
시조선집 『고양이 걸음』, 시론집 『미래를 개척하는 시인』
시조세계문학상, 천상병귀천문학상, 강원문학상 등 수상
문화예술위원회 · 문화재단 창작지원금 7회 수혜
■□ 시인의 자선시 5편
받아쓰기
내가 아무리 받아쓰기를 잘 해도
그것은 상식의 선을 넘지 않는다
백일홍을 받아쓴다고
백일홍 꽃을 다 받아쓰는 것은 아니다
사랑을 받아쓴다고
사랑을 모두 받아쓰는 것은 아니다
받아쓴다는 것은
말을 그대로 따라 쓰는 것일 뿐,
나는 말의 참뜻을 받아쓰지 못한다
나무며 풀, 꽃들이 받아쓰는 햇빛의 말
각각 다르게 받아써도
저마다 똑같은 말만 받아쓰고 있다
만일, 선생님이 똑같은 말을 불러주고
아이들이 각각 다른 말을 받아쓴다면
선생님은 어떤 표정을 지을까
햇빛의 참말을 받아쓰는 나무며 풀, 꽃들을 보며
나이 오십에 나도 받아쓰기 공부를 다시 한다
환히 들여다보이는 말 말고
받침 하나 넣고 빼는 말 말고
모과나무가 받아쓴 모과 향처럼
살구나무가 받아쓴 살구 맛처럼
그런 말을 배워 받아쓰고 싶다
어둠을 묶어야 별이 뜬다
거미는 밤마다 어둠을 끌어다가
나뭇가지에 묶는다 하루 이틀
묶어 본 솜씨가 아니다 수천 년 동안
그렇게 어둠을 묶어 놓겠다고
거미줄을 풀어 나뭇가지에 묶는다
어둠이 무게를 이기지 못해 나뭇가지가 휘어져도
그 휘어진 나뭇가지에 어둠을 또 묶는다
묶인 어둠 속에서 별들이 떠오른다
거미가 어둠을 꽁꽁 묶어 놓아야
그 어둠 속으로 별들이 떠오르는 것이었다
거미가 수천 년 동안 어둠을 묶어 온 사연만큼
나뭇가지가 남쪽으로 늘어져 있는 사연이
궁금해졌다 무엇일까 생각해 보니
따뜻한 남쪽으로 별들이 떠오르게
너무 많은 어둠을 남쪽으로만 묶었던
거미의 습관 때문에 나무도 남쪽으로만
나뭇가지를 키워 왔는가 보다 이젠 모든 것이
혼자서도 어둠을 묶어 놓을 수 있는 것은
수천 년 동안 거미가 가르친
어둠을 묶는 법을 터득했기 때문이리라
거미는 어둠을 묶어야 별이 뜨는 것을
가장 먼저 알고 있었나 보다
똥을 싼 별
아름답기만 한 별들도
똥을 싼다
그 모습이 마치
참새가 제 새끼의 똥을 물어다가 버리듯
허공에 휙 버린다
순간의 일이다
똥을 싼 별
아무 일 없다는 듯
빛난다
참 바쁘다
밭둑에 심은 주목나무 가지 틈에
새가 집을 짓고 새끼를 낳아 기른다
틈틈 제 새끼의 똥도 물어다 버려야 하고
누가 올까 이리저리 망도 봐야 하고
네 마리 새끼의 배를 수시로 채워줘야 한다
바쁘기로 말하면 지금 저 새는 대통령이다
촌각을 나누어 새끼를 키우지 않으면
무슨 벌이라도 받는지
새의 그림자까지도 참 바쁘다
저 닮은 꽃을 피우려고
주어진 책임이 막중하다 못해
목숨을 건 싸움도 마다하지 않는다
지척이 저승인 허공을 울타리 삼아
네 마리 새끼가 커 갈수록
어미는 더 바쁘다
그러고 보니 들에 꽃을 피우려고
햇빛도 참 바쁘다
의자론
물에게 바닥이라는 의자가 없었다면
평등을 보여주는 수평선이 없었을 거다.
물들이 앉은 엉덩이 그래서 다 파랗다.
별빛에게 어둠이라는 의자가 없었다면
희망을 바라보는 마음이 없었을 거다.
별빛이 앉은 엉덩이 그래서 다 까맣다.
의자란 누가 앉든 그 의자를 닮아 간다.
풀밭에 앉고 가면 풀 향기가 스며들고
꽃밭에 앉았다 가면 꽃향기가 스며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