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만나고 싶었습니다 - 대담 / 본지 편집주간 임 애 월
혼돈의 시대를 건너는 진정성의 詩
문 정 영 시인
- 태백산맥 영남줄기에는 한 계절 내내 눈이 내리지 않았다.
아직도 끝나지 않은 바이러스와의 전쟁,
오미크론 확진자가 10만을 넘나드는 이때, 만나 뵙고 싶었던
문정영 시인님과의 대담도 비대면 E메일로 진행하였다. -
임애월 : 문정영 시인님, 안녕하세요?
늦었지만 2022년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문정영 : 새해가 어느 사이 두 달이 지나고 있습니다. 저는 계획 세우는 것을 좋아합니다. 올해에는 소식(小食)과 여유(餘裕)라는 화두를 저의 머리맡에 잘 두었습니다. 그리고 적지만 가진 것들 여러분들과 많이 나누었으면 합니다.
임애월 : 지난겨울은 추위가 좀 길었다고 생각되는데 시인님께서는 어떻게 지내셨는지요? 요즘 근황 좀 알려 주세요.
문정영 : 겨우내 코로나라는 긴 터널을 지나왔습니다. 우리 자신이 만든 어둠 속에서 존재감을 상실하기도 하였고 그와 반대로 미래에 대한 고민도 많이 하였습니다. 그럴수록 ‘지금 여기’를 잘 살겠다는 생각으로 가득 찼지요. 홀로 있는 시간이 많아질수록 내가 개발한 책읽기, 운동법, 식사법 등 나름의 습관을 다져온 것 같습니다. 그래서 건강은 오히려 좋아졌어요. 틈틈이 시도 많이 썼구요. 하하
임애월 : 네, 역시 꼼꼼하신 분이시라 시간 활용을 잘 하고 계시는군요. 저는 그런 핑계로 게으름과는 이제 친구로 지낸답니다.(웃음)
문 시인님께서는 전남 장흥에서 출생하셨는데 시인님의 유년시절이 궁금합니다. 고향마을이 수몰되었다는 게 사실인지요?
문정영 : 제 고향집 앞을 흐르는 탐진강은 어머니의 젖줄이었지요. 거기서 저는 탯줄을 자르고, 일찍 광주로 유학을 온 것이니까요. 하지만 탯줄은 자른다고 끊어진 것은 아니지요. 제 시의 모천인 탐진강은 유년의 절반을 끌어안고 있으니까요. 물론 강둑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는 고향집은 자주 물에 잠기기는 하였지만, 그 물길 가두어 댐을 만든 것이 1997년이었고 준공은 2006년이었습니다. 지금은 고향사람들이 뿔뿔이 흩어져 삽니다. 고향을 지키고 있는 것은 선산과 읍내에서 사는 막내 동생뿐입니다.
임애월 : 물속에 잠긴 고향,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아립니다.
남도는 왠지 제게는 고향 같은 생각이 들어서 향수를 느끼곤 하는데 시인님께서는 청소년기를 어떻게 보내셨는지도 살짝 들려주세요.
문정영 : 남도로 가는 길 중 장흥은 광주에서 화순 영암 강진 보성에 닿아 있고 해남으로 가는 길목에 있습니다. 사실 장흥은 위의 지명들보다 잘 알려지지 않은 아주 조용하고 청정한 지역입니다. 그냥 아득하다고 할까요. 그 안에 갇히면 바깥 소리가 들리지 않을 것 같은……. 저는 일찍 고향을 떠나 온 덕분에 조금 빨리 조숙하였고, 생활의 모두를 제가 스스로 결정하였던 것 같습니다. 지금은 그것이 제 삶의 추진력으로 바뀌기는 하였지만요. 남도는 지금도 어느 곳을 가든지 제게 순수한 서정을 끝없이 수유합니다.
임애월 : 탯줄을 자르기도 했지만 그 탯줄이 고향에 묻혀있기 때문이겠지요. 1997년 《월간문학》으로 등단하셨는데 시를 쓰기 시작한 동기와 등단배경에 대한 말씀도 듣고 싶어요.
문정영 : 저의 시의 습작은 홀로 견디던 청소년기에 시작했지요. 중고등학교 다닐 때 학교에 시인 선생님이 계셨던 것도 작은 영향이기는 하였지만, 그냥 외로움이 시의 밥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 후 은행에 근무하면서 국문학과를 가려하였으나 직장을 다니면서 갈 수 있었던 곳은 건국대학교 영어영문학과였습니다. 사실 영미시를 아주 조금 알 듯 배웠지만 시쓰기에는 큰 도움은 되지 못하였지요. 1991년 은행에서 진급하여 광주로 배치 받았는데, 금남로에 있는 은행 앞 카톡릭회관의 창작교실 플래카드가 시인의 길로 들어서게 하였습니다. 저의 첫 스승은 곽재구 선생님이었지요. 누구를 통해 시의 길을 들어서느냐가 참 중요하다는 것을 지금사 깨닫습니다. 따듯하고 인간적인 정서를 시의 밑바탕에 둔 것은 선생님의 덕분이었습니다. 그 후 서울로 다시 전근을 와서 인사동에서 홍신선 선생님을 뵈었고, 진정성 있는 시에 눈을 뜨게 되었지요. 그때의 문우들인 이덕규 시인, 권영준 시인은 지금도 혈맹입니다. 그 시절에는 문예지가 몇 개 없었어요. 몇 번의 낙선 후에 겨우 입문한 기억이 납니다.
임애월 : 아하, 곽재구 시인님이 문학의 첫 스승님이시군요. 등단 무렵 문 시인님께 시는 어떤 의미로 다가오던가요?
문정영 : 그때 저는 은행에서 중견 간부로 있을 때인 만큼 엄청나게 바쁘고 스트레스가 많았습니다. 주말에 문우들과 함께하는 시공부가 나를 살아 있게 하였지요. 저를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숨통이었어요. 숫자로 난무하는 은행과 시는 잘 이어지지는 않았지만, 어쩌면 시의 길을 가야 하는 난해한 운명의 시작점이라는 것을 어렴풋이 알았던 시기라고 그때를 기억하네요.
임애월: 아, 알 것 같아요, 그 숨통이라는 의미요. 어디 하나 숨 쉴 곳이 필요했을 테니까요. 1998년 첫 시집 더 이상 숨을 곳이 없다를 상재하셨지요? 벌써 20년이 훨씬 지났는데……. 첫 시집에 대한 기억들을 다시 불러낼 때 맨 처음 다가오는 느낌은 어떠신가요?
문정영: 습작기간이 길었던 만큼 시의 분량은 많이 있었습니다. 등단이 그 무렵에는 조금 늦은 30대 후반이었고, 그때 IMF가 특히 제일은행을 수몰시키는 시점이라서 직장생활도 어려웠지요. 그 난국을 건너가는 방법으로 첫 시집을 내었던 것 같습니다. 누군가에게 어떤 조언도 받지 않고 그냥 있는 원고 그대로 시집을 내었는데 시집 제목처럼 ‘더 이상 숨을 곳이 없’었던 시절의 산물이라 봅니다.
자르지 않은 생각은
더 이상 크기를 멈춘다
달력에 매달려 있는 무거운 숫자를 떼내듯
내게서 단조로운 기억은 없애지만
그대가 보내준 겨울 선물의
두툼한 껍질을 벗기면
어제와 다른 일상이 내 마음가에
서 있는 것을,
그것이 고드름처럼 햇빛에 예민한 사랑이라고
녹아서 두 눈을 젖게 하는 작별이라고
길 가운데서
해 지는 산을 바라보는 것은
너의 침묵을 배우기 위해서다
신발 뒤축에 담아 가지고 간 괴로움
살얼음 깨고 개울 속에 맨발로 서 있다 보면
뼈끝까지 스미는 발시름으로 사라지겠지
자운영 흔드는 꽃바람 앞에서
이제 더 이상 숨을 곳이 없다
- 「더 이상 숨을 곳이 없다」 전문
임애월 : 첫 시집의 표제시 「더 이상 숨을 곳이 없다」를 가져와 봤어요. 과일나무를 키우는 제가 요즘 하는 일 중에서 중요한 부분이 가지치기라서 그럴까요? “자르지 않는 생각은/더 이상 크기를 멈춘다”라는 첫 구절에서 오래 머물게 되네요. 생각도 가끔씩은 가지치기를 해줘야 쑥쑥 자라나나 봅니다.
문정영 : 하하 30여 년 전에 쓴 작품이라 가물가물하네요. 그 무렵 30대를 넘기기가 쉽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직장이며 시와의 열애이며 삶의 진통이 깊었던 시기라서 무언가에 부딪치고 깨어지고 아팠던 기억이 아련하네요. 절망도 더 이상 자랄 수 없는 어떤 젊은 날의 초상화 같았어요. 자를 것도 없는데, 자꾸 잘라야만 하는 머리칼 같은.
임애월: 사실 제가 문 시인님 팬이거든요. 그래서 시인님과 작품을 같이 읽어보는 이 시간이 참 좋습니다. 두 번째 시집의 표제시도 가져왔어요.
한쪽 팔이 저리는 이유는 내가 그를 미워하기 때문이다
미워하다 미워하다 어느 사이 피가 돌지 않은 사랑을 한 것이다
그가 어두워지고, 내가 붉어지지 않는 날들은
물관이 잘린 나무의 꽃이 피지 않은 가지와 닮을 뿐이다
聖금요일, 내게 눈설게 다가오는 神의 이름을 불러본다
神은 내게 낯선 금요일이다, 말을 듣지 않는 한쪽 날개를
부러뜨리고 억지 고해성사를 시키는 그는 사실 미움의
대상이 아니다 유행을 이끄는 누드의 사진, 거기에서 벌거벗고
뛰쳐나오는 이 시대의 얼굴인 것이다 그런데 내가 그를 믿고
피 멈춘 사랑을 하고 있다니, 어제 내가 거울을 보고 한 행위는
무엇이란 말인가
- 「낯선 금요일」 전문
이 시에서 화자는 서로 사랑하고 또 미워하는 평범한 인간 군상들 속에 묻혀 그들과 똑같이 살아가는 자신을 문득 발견했을까요? “내가 그를 믿고/피 멈춘 사랑을 하고 있다니“를 읽으며 제가 느낀 감상입니다만.
문정영 : 이 작품은 1990년대 말이나 2000년 밀레니엄 시대를 건너는 혼돈의 시기에 썼을 것입니다. 내가 믿고 행하던 사랑의 본질에 대한 의구심, 성스러운 행위에 대한 배반도 적나라한 시기였지요. ‘낯선 금요일’은 아마 내 존재에 대한 목마른 성찰이 필요한 그런 즈음에 내가 거울을 보고 행한 자위(自慰)의 또 다른 이름이었을 것입니다.
임애월 : 문 시인님의 작품들은 사유의 폭이 넓고 신비로운 이미지로 가득 차 있기 때문에 독자에 따라 여러 가지 의미로 다양하게 읽을 수 있는 흡인력을 지녔다는 생각이 듭니다.
문정영 : 감각과 사유의 깊이를 생각하며 시를 씁니다. 다만 제가 가진 시적 기질상 감각보다는 사유의 폭에 좀 더 의미를 주었지요. 다만 새로운 소재와 그 소재를 통하여 삶과 사랑과 이별 그리고 인간의 원초적인 에로틱한 감성을 다루었기 때문에 조금은 쉽게 다가왔을 것이라 봅니다. 그게 흡입력인지는 잘 모르겠네요.(하하)
임애월 : 이 작품 끝부분의 질문은 눈감은 자아에 대한 반성으로 저는 읽었어요.
문정영 : 반성이기도 하지요, 늘 제 안에 하루하루의 질문을 던져놓고 반성을 합니다. 여린 성정 탓이기도 하지만 이 시대를 살아가기 위한 저만의 방식이기도 하구요. 40대 초반에는 생활 속에서 서투른 행위나 내면으로의 실수를 자주 하였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임애월 : 신도 완벽하지 못하잖아요? 다만 자기반성을 하느냐 마느냐는 살아가는데 있어 매우 중요한 가치의 포인트가 되겠지요. “연상이야말로 의미를 은폐하고 세계를 내부로 끌어들이는 유효한 방법이며 모든 세계를 한 곳으로 끌어 모으는 힘”이라고 어느 인터뷰에서 문 시인님이 말씀하셨던 걸 읽은 기억이 나는데요, 시를 쓸 때 시인님만의 특별한 연상방법이 있으실 것 같은데 살짝 공개해 주실 수 있으신지요?(웃음)
문정영 : 우리가 가진 세계는 이미 익숙한 채로 다가오지요. 시는 새로운 인식을 통한 이미지를 만들어가는 작업이라고 늘 제 자신에게 다독였구요. 되도록 체험을 바탕으로 구체적인 이미지를 만들려고 합니다만 가끔은 영화나 책 그리고 인접예술에서 낯선 이미지들을 훔쳐오기도 해요. 제가 가닿을 수 없는 지점에 있는 것들이지요. 하하
너는 나비처럼 웃는다. 웃는 입가가 나비의 날갯짓 같다. 열흘쯤 웃다 보면 어느 생에서 어느 생으로 가는지 잊어버린다. 너를 반경으로 빙빙 도는 사랑처럼 나비는 날 수 있는 신성을 갖고 있다. 아무도 찾지 못할 시간 속으로 날아가는 나비를 본 적이 있다. 죽음을 보이기 싫어하는 습관 때문이다.
너는 나비처럼 운다. 여름 끝자락에서 열흘을 다 산 것이다. 나는 너를 보기 위하여 산으로 가는데 가을이 먼저 오고 있다. 너에게 생은 채우지 못하여도 열흘, 훌쩍 넘겨도 열흘이다.
한 번 본 너를 붙잡기 위하여 나는 찰나를 산다. 열망을 향해 날아가는 너를 잡을 수 있는 날이 열흘뿐이나 나는 그 시간 밖에 있다.
- 「열흘나비」 전문
임애월 : 문 시인님의 네 번째 시집 『그만큼』(2014년)에 수록된 작품입니다. 욕망을 가진 인간이라면 “열흘”이라는 짧은 시간적 한계에 갇힌다 해도 “날 수 있는 신성”한 황홀을 한번쯤 꿈꾼 적이 있을 것 같아요. 여름의 끝자락쯤에요.(웃음)
문정영 : 한때 나비를 소재로 시를 자주 쓴 적이 있었네요. 열흘 나비는 열흘을 산다는 그러나 존재하지 않은 시적 대상입니다. 아마 이루지 못한 사랑이나 그런 사랑에 대한 염원이 있었을 것입니다. 누군가와 사랑할 수 있는 시간이 열흘뿐인데도 그 대상에 다가가지 못한 순간이 다들 한 번쯤 있지 않았을까요.
임애월 : 이 시를 읽다보면 “너”가 “나비”가 되고 “나비”는 “나”가 되고 결국 “너”가 바로 “나”인 것 같거든요. “한 번 본 너”가 상징하는 이미지는, 욕망이 우글거리는 인간사회 속에서도 삶의 진정성을 추구하려는 화자의 지독한 외로움으로 제게는 읽힙니다.
문정영 : 그렇지요. 사회란 구성원 간의 밀접한 관계 속에서 형성되니까요. 내가 나비가 될 수도 있고, 누군가가 나의 나비가 될 수 있는, 그래서 욕망이라는 전차를 우리는 타고 종착역까지 가는 것이 아닐까요?
임애월 : 2020년에 상재하신 다섯 번째 시집 『꽃들의 이별법』 해설에서 강경희 평론가는 ‘문정영의 언어는 동적이지만 요란하지 않고 어두워지지만 침잠하지 않는다’면서 ‘열정과 절제를 동시에 포섭하는 시적 엄격성으로 가슴을 긁는 문장들을 일구어낸다’라고 평하셨어요. 작품만이 아니라 삶에 있어서도 치열하면서도 묵직한 페이스를 유지하시는 것 같아보이세요.
문정영 : 늘 새로운 일이 생길 수는 없지요. 그래서 스스로 새로운 생각을 하고 새롭게 살려고 해요. 자신의 삶에서 어떤 일에 열정이 꽃핀다면 다른 일에도 그 꽃은 전염됩니다. 무수히 피어나는 하루하루를 자신만의 열정으로 새롭게 사는 일, 이것이 제가 지향하는 방향이며 그렇게 살려고 노력합니다. 그러면서 조금씩 내려놓는 법, 시에서는 자르는 힘이지요, 하나의 조사라도 쉽게 쓰지 않는 절제와 생활의 염결성에서 시와 삶은 같아야 하지요.
임애월 : ‘시와 삶은 같아야’ 한다는 그 말씀에 저도 무조건 동의합니다.(웃음) 코로나 팬데믹으로 요즘은 우울증 같은 심리적인 문제로 고생하는 사람들이 많잖아요. 문 시인님께서는 시의 기능 중에서 서로 소통하고 상처를 치유하는 <시 치료>에도 관심이 많으신 것 같던데 관련 말씀 좀 해주시지요.
문정영 : 그렇지요, 막막하다는 말, 건너도 건너도 끝이 없는 건넘에서 가끔은 좌절하기도 하고, 물속에 빠져 허우적거리기도 하지요. 시를 쓰는 시인은 자신의 고통과 상처를 언어로 써내면서 스스로 침잠해지고, 독자는 시인의 통증과 공유하면서 자신의 아픔을 치유 받습니다. 그게 상처의 소통이라고 보는데요. 그게 막힌다면 시는 제 기능을 못하는 것이지요. 시인 자신의 내면의 체증에만 관여한다면 독자는 치유 받지 못하고 시에서 멀어질 것입니다. 진정성이 있는 작품은 그 막힘을 뚫고 독자 가까이 다가갈 수 있을 것이라 봅니다.
임애월 : 자신의 고통에만 함몰되지 말고 ‘독자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진정성이 있는 작품’을 쓰라는 말씀 잘 들었습니다.
아버지는 집 앞 강물로 쓰면 싱겁고
한낮의 햇빛으로 지우면 파랬다.
이른 저녁이면 뜨거워진 공기가 탐진강 은어들처럼 파닥거렸다.
아버지는 조용히 흔들리는 물결을 2층 옥상에서 바라보셨다.
가문 날에 아버지를 부르면 독한 담배 냄새가 났다.
어린 나는 아버지와 익숙해지지 못했다.
아버지를 배워 아버지가 되었으나
그 사이 강가의 돌멩이들은 혼자 머무는 법을 익히기도 했다.
아버지는 얼굴이 검었다.
눈을 감았다가 뜨면 아버지를 닮았다고 했다.
아버지와 몸이 닿아도 아픈 곳이 먼저 닿았다.
초봄에 붉은 저녁이 걸려 있던 오동나무를 잘라냈다.
잘린 밑동에서 자라는 새잎처럼 나는 키가 커갔다.
누군가를 가려줄 수 있도록 넓어지라고 하셨으나
마음은 금이 간 사기그릇처럼 소심했다.
아버지는 거름을 준 텃밭의 단감나무였다.
무언가를 더 줄 수 있다는 듯 주렁주렁 해를 매달았다.
아버지를 쓰고 싶었으나 읽는 법을 알지 못했다.
-「아버지를 쓰다」 전문
이 시의 마지막 행 “아버지를 쓰고 싶었으나 읽는 법을 알지 못했다”를 읽고 한참동안 그 구절에 머물렀었다는 어느 시인이 쓴 감상평을 읽은 적이 있어요. 저도 공감이 확 가더라고요. 자신과 가장 가까운 피붙이인 아버지에게 우리는 왜 친숙하게 다가가지 못했을까요? 서로 먼저 다가가는 사랑법을 왜 알고 싶어 하지 않았을까요?
문정영 : 이 시는 2014년에 발간한 네 번째 시집에 실린 작품인데 현실적인 면에서 독자에게 가까이 다가간 것 같습니다. 자주 언급된 작품인데, 어릴 적에 도시로 유학을 간 저는 특히나 아버지와 쉽게 가까워지지 못했어요. 그 후로 아버지가 되고나서야 아버지를 이해하였으나, 배우는 것은 참 쉽지 않았지요. 그러나 결국 아버지를 닮아가는 것은 어쩔 수 없어요. 나도 아버지의 역할을 해야 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 시는 저에게도 오래 2층에서 바라보았던 탐진강의 강물처럼 내내 가슴으로 흐릅니다.
임애월 : 대놓고 시원하게 속마음을 표현하지 못했기 때문에 결국 떠나고 난 뒤에 더욱 서러워지는 것이겠지요. 우리들의 아버지는 그런 대상이었거든요.
작년에 출간한 여섯 번째 시집 두 번째 농담을 읽었어요. 표제시 「넷플릭스」의 첫 행, “꽃을 꽃으로만 보던 절기가 지났다”라는 이 한 구절이 급속하게 들이닥친 메타버스시대를 대변해 주는 것 같네요. “새로운 채널에 가입해야” 하고 “사랑을 자막처럼 읽는 시절이 왔”는 데도 저처럼 굼뜬 사람들은 발 빠른 적응은 고사하고 “자꾸 시간을 겉돌”기만 하고 있고요.
문정영 : 이번 여섯 번째 시집은 의도적으로 4차혁명에 대한 것들이 많습니다. 넷플릭스를 통하여 이제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안방에서 내다볼 수 있게 되었지요. 그 빠른 변화만큼 사랑도 새로운 채널에 가입하거나 다른 채널로 바꾸든 쉽게 체인지하는 시대가 온 것입니다. 어쩌면 인간이 아닌 로봇(AI)과 살아야 할 시대가 10년 이내로 다가올지도 모릅니다. 인간성이란 언어를 찾는 퀴즈가 나올지도 모르겠어요. 그때 시인들은 어떤 감성으로 시를 써야 할지, 그래도 순수 서정은 시의 꽃으로 활짝 피어났으면 합니다.
임애월 : 어떻게 보면 못다꾼 꿈이 이루어지는 공간이 되기도 하겠지만, 또 다른 공간에서 아바타로 살아가야 하는 그 삶이 과연 행복할 수 있을까요?
문정영 : 아하, 앞에서 언급한 내용과도 이어지네요. 4차 5차 혁명의 도래는 이번 코로나 19와 같은 바이러스로 훨씬 앞당겨질 것입니다. 코로나 19보다 더 독한 바이러스가 침범한다면 인간관계는 어떻게 단절될 것인지, 아득합니다. 그 시기에는 사는 방식이 완전히 달라질 것이네요. 그리고 행복과 불행의 고리가 확연할 것이라 봅니다. 5프로 이내의 행복을 가진 사람과 95프로의 불행을 가진 사람이 공존하는 세상은 결코 오지 않았으면 합니다.
임애월 : “4차 5차 혁명에 우리는 AI와 어떻게 공존해야 할까?”라고 하신 문 시인님의 말씀처럼 이미 도래한 메타버스의 시대에 시는 어떻게 변해야 살아남을 수 있을까요?
문정영 : 계속 이어지는 답변입니다만, 인간은 생존을 위하여 인류로 분류된 칠만 년 전부터 투쟁적이었지요. 새로운 방식에 가장 잘 적응을 하는 것도 인간입니다. 물론 도태되는 인간도 수없이 많아질 것이며, 새로운 사피언스가 등장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 시대에는 감성을 울려주는 시가 살아남을 것이라 봅니다. 나의 아바타가 새로운 공간에서 다른 인간의 아바타를 만났을 때, 표정이 없는 아바타의 특성상 대화의 감성이 중요하지 않을까요? 좀 더 감동으로 공감할 수 있고 전달력이 뛰어난 시가 메타버스를 탈 것이라 봅니다.
임애월 : 그러니까 전달력이 뛰어나고 더 감성적인 시만이 살아남을 것이라는 말씀이시지요? 하긴 차가운 이미지의 아바타 세상에서는 그 메탈적인 감성도 녹여내야 하므로 더욱 더 감성적이어야 할 것도 같습니다.
거위로 다시 왔다
가볍지 않은 흰 날개, 짧고 두꺼운 부리로 울던 나는
세 개의 무서운 얼굴을 가문비 숲에 숨겨 두었고, 여섯 개의
긴 팔은 은사시나무가 되었다
나로 살려 할수록 뒤뚱거렸다
어느 날부터 수면 아래가 안락해졌다
가라앉은 나를 향한 수없는 발짓에
늪에서 피는 꽃은 지고 말았어
누구도 나를 아수라 부르지 않았고
더는 숨을 멈출 수 없을 때 아득히 저무는 꽃
부르르 떨리는 이름으로 태어나
무거운 의문이 날개를 달았을까
내 몸으로는 하루하루를 날아오르지 못했다
뜨거워질 만큼 부풀거나 무거워진 만큼 가라앉아
더는 지상에서 불러낼 이름은 없었다
소리구멍 다 열고 날마다 거위 울음으로 나는 울었다
- 「아수라」 전문
임애월 : “부르르 떨리는 이름으로 태어나/무거운 의문이 날개를 달았을까” 행마다 인간의 깊은 고뇌가 서려 있네요. “아수라”는 반신반인이라고 저는 알고 있습니다만, 이 시의 화자는 자신을 거위에 빗대어 날지 못하는 슬픔으로 행간마다 눈물이 가득 번집니다. 아수라의 세계는 생각의 수면 아래로 깊게 눌러놓고, “세 개의 무서운 얼굴”도 제각각 숨겨두고 인간들은 저리도 태평한 얼굴로 사랑을 속삭이고 평화를 이야기하고 있지요.
문정영 : 어쩌면 산다는 것이 아수라장 아닐까요? 날마다 고뇌하고 아프고, 가끔씩은 또 기쁘기도 하겠지만. 이 시는 아마 저의 내면세계가 아주 복잡하고 힘든 시기에 썼을 것입니다. 내면의 몇 개의 자아들이 충돌하고 서로를 경계하면서 하루하루가 지난할 때도, 타인과의 만남에서는 평온한 얼굴을 해야 하는 것이 삶이겠지요. 그냥 깊은 울음을 울어버릴 수 있다면 조금은 이 아수라에서 벗어날 수도 있을 것인데, 갈수록 울음이 좀 말라갑니다.
임애월 : 네, 아수라장 맞습니다. 그래서 시인들은 시를 써야만 하고요. 문 시인님께서는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창작기금도 여러 번 받으셨어요. 기발한 상상력과 개성이 돋보이는 시인님의 작품을 높게 평가한 것이겠지요.
문정영 : 하하, 제 시는 기발하지는 않아요, 요즘 젊은 시인들에 비해 개성이 돋보이지도 않구요. 아마 심사위원들에게 제 시가 읽혔을 것이라 봅니다. 시인이 갈구하는 서정이 인간적인 면이 많을 때 공감이 되니까요. 끊임없는 노력을 그리 잘 보아준 것 같습니다. 등단하고 3~5년마다 시집을 내었으니까요.
임애월 : 겸손하시네요. “더는 지상에서 불러낼 이름”이 없을 때 저는 문 시인님의 시를 읽곤 했어요. 사실 개인적으로 위로를 많이 받았답니다.
현재 《시산맥》을 발행하시면서 한국문단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계신데 문예지 발간이 보람도 크시겠지만 결코 만만치는 않은 사업이잖아요. 어떤 부분이 가장 힘드신지요?
문정영 ; 저는 시스템을 만듭니다. 저의 하루도 삶도 그런 시스템 속에서 열리고 닫히네요. 그것은 결코 시적이지는 않아요, 하지만 경영을 하기 위해서는 그런 조직이 없으면 운영이 어렵습니다. 가장 힘든 것은 운영자금을 만드는 것이지요. 제가 진행하는 동주문학상, 기후환경문학상, 자체적으로 운영하는 시산맥작품상, 시산맥시문학상, 시산맥신인시문학상 등과 계간지를 발간하기 위해서는 매년 7천만 원 이상의 자금이 필요합니다. 아직 적자 없이 13년을 운영해온 것이 신통하지요. 그것은 인간관계와 연계된다고 보아요. 800여 명의 회원들을 식구처럼 보듬고 가는 것이 쉽지는 않지만 그것이 생활처럼 시스템이 되어있기에 가능하다고 봅니다. 이제는 그 흐름을 거스르지만 않는다면 잘 흘러갈 것이라 봅니다.
임애월 : 네, 그 안에서 많은 일을 하고 계신데 참으로 대단하신 능력자십니다. 등단 후 25년이 지난 현재 문 시인님께 시는 어떤 의미인가요? 등단 무렵과는 어떤 점이 달라졌을까요?
문정영 : 처음 등단할 무렵은 간절함이었지요. 목마름이었구요. 그러나 이제는 시는 탐구입니다. 미래를 현재로 끌어와 거기에 시공간을 두고, 행간에 여유를 가지는, 그게 어쩌면 멀리 바라볼 수 있는 눈이 생겼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시는 동반자이고 평생 한눈팔지 않고 열애해야 할 대상입니다. 더불어 문우들과 함께 나아갈 연결고리이지요. 불후의 명작을 남기는 것보다 지금 함께 시를 쓰고 있는 동시대의 시인들과 시를 읽고 논할 수 있는 원만한 동그라미 같은 것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임애월 : 아하, 간절한 목마름에서 탐구의 대상으로 의미가 많이 달라졌군요. ‘목마름’과 ‘탐구’ 그 사이에 객관적 시야를 확보한 여유로움도 좋아보입니다.
불후의 명작은 시인이라면 누구나 꿈꾸는 일일 텐데, 문 시인님께서는 현재의 시스템 안에서 동시대의 문우들과 함께 하는 시간이 더 소중하시군요. 좋은 말씀 잘 들었습니다. 여러 가지로 바쁘실 텐데 귀한 시간 내주셔서 대단히 고맙습니다.
문정영 : 이렇게 초대해 주셔서 저도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시산맥에서는 윤동주 시인을 기리고 지구의 기후환경 문제에 관심을 가질 것입니다. 그래서 제7회를 맞이하는 동주문학상(동주해외작가상, 동주해외특별상, 동주해외신인상 - 해외에서 우리글을 쓰는 시인들과도 함께 나아갑니다.) 그리고 금년 제정한 제1회 시산맥 기후환경문학상, 지리산문학회와 공동주관하는 제17회 지리산문학상, 최치원신인문학상에도 많은 관심주시기 바랍니다. 공정한 심사를 통하여 시단의 아름다운 귀감이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 좋은 시를 직접 시인과 함께 읽어보는 시간
“시와 삶은 같아야 한다”
문정영 시인님이 추구하는 작품 속 진정성은
앞으로 더욱 빛나는 가치를 지닐 것이다.
내가 아닌 아바타로 살아가는 새로운 세상
원하지 않아도 메타버스의 시대는 곧 도래한다.
메탈처럼 차가운 아바타의 감성을 녹여줄
따스하고 진정성 있는 작품만이 살아남을지도 모른다. -
■□ 시인의 자선시
두 번째 농담 외 4편
문 정 영
고백은 느린 랩 같았어
두 번째 농담이 있기까지
낯선 너의 웃음을 견디지 못하는 포노 사피엔스(phono sapiens)처럼
순간 뜨거운 공기 속으로 슬픔이 길어 올려졌고
상승과 몰락이 씻은 무처럼 하얬어
이제 말꼬리를 올려야지, 농담이 아닌 듯이
언제쯤 입술 주변의 공기가 말랑해질까
다른 표정 보이기 위해 얼굴을 감추었다 생각했는데
한 번의 농담은 농담이 아니었어
아직 불안한 눈빛의 나에게
이별은 어떤 논리로 세워둘 수 없었어
저 캄캄한 복도 끝이 절규를 감고 깊어지듯
어떤 농담은 울음 대신 꺼낸 두 번째 고백이야
너와 나는 공기 같다는 너튜브에서
서로 다른 알고리즘을 펼치며 놀고 있었을까
꽃들의 이별법
네 앞에서 꽃잎 위 물방울처럼 있는다
새벽이 지나간 자리가 빨갛다
작은 무게를 버티는 것이 꽃들의 이별법
한 발로 나를 짚지 못하고 너를 짚으면 계절 하나 건너기 어렵다
너를 다 건넜다고 생각했는데, 버티기가 쉽지 않다
한 발 내밀 때마다 하늘이 수없이 파랬다 검어진다
꽃술 내려놓고 그 향기 따라 건넜다, 어두웠다
수평으로 걷지 못한 날들이
물가의 신발처럼 가지런히 놓여 있다
해가 점점 부풀어 오르면 벌들은 일찍 떠난다
네 숨소리가 꽃잎 떨리듯
높아졌다 가라앉는 것을 내가 보고 있다
그만큼
비 그치고 돌멩이 들어내자
돌멩이 생김새만 한 마른자리가 생긴다.
내가 서 있던 자리에 내 발 크기가 비어 있다.
내가 크다고 생각했는데 내 키는 다 젖었고
걸어온 자리만큼 말라가고 있다.
누가 나를 순하다 하나 그것은 거친 것들 다 젖은 후
마른 자국만 본 것이다.
후박나무 잎은 후박나무 잎만큼 젖고
양귀비꽃은 양귀비꽃만큼 젖어서 후생이 생겨난다.
여름비는 풍성하여 다 적실 것 같은데
누울 자리를 남긴다.
그것이 살아가는 자리이고
다시 살아도 꼭 그만큼은 빈다.
그 크기가 무덤보다 작아서 비에 젖어 파랗다.
더 크게 걸어도
더 많이 걸어도
꼭 그만큼이라는데
앞서 빠르게 걸어온 자리가
그대에게 먼저 젖는다.
잉크
만년필에 잉크를 넣다가, 좁은 물관으로 물길을 뽑아 올리다가 아차, 푸른 물이 내 손등에 떨어졌다 떨어지자마자 엽맥을 타고 번지는 초여름의 잎새처럼 내 손의 잔잔한 길을 찾아 가는 저 잉크에 무슨 命이 있는지, 평소 보이지 않던 세포들이 살아 움직인다
내가 너에게 더듬어 가려는 길이 손가락의 마디처럼 파였던가 눈을 감고 걷듯 비틀거리던 생각들 잠시 멈추고 오래 푸른 물 흐르는 것 본다 만년필의 촉끝에서 떨어진 저 푸른 시간은 이 철이 지나면 단단한 열매를 맺을 것이다
내가 너에게 하지 않는 말들도 사실은 푸른 물이 흘러가는 길이다 굽어, 굽은 소리로 들리지 않았을 뿐, 굳이 내 손등에 떨어져 미처 알지 못했던 길을 알게 해준 저 푸른 물을 어찌 잉크라고만 이름 부를 수 있겠는가
가슴속에 등불을 켜면
가슴속에 등불을 켜고 보면
저만큼 지나가 버린 사람의 뒷모습도 아름답다
젊음의 서투른 젓가락질 사이로 빠져나간
생각들이 접시에 다시 담기고
사랑니 뺀 뺨처럼 부풀어 오른 한낮의 취기도
딱딱한 거리를 훈훈하게 한다
나무들도 나처럼 한 잔의 술로
등불을 켜는 것일까
겨울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여윈 저들의
어깨가 지나친 사람의 뒷모습처럼 아름답다
한때 와디가 흐르지 않는 사막처럼
모래성이 쌓이던
씹히지 않던 일상도 생각의 양쪽 어금니를 사용하면
잘게 부셔져 소화된다
입 속을 헹구워낸
한 모금의 수돗물로도 입내음이 향기롭다
가슴속에 등불을 켜고 보면
스쳐 지나간 사람의 옛모습도
종이학처럼 작게 접힌다
■□ 문정영 시인 약력
전남 장흥 출생
1997년 《월간문학》으로 등단
시집으로 『더 이상 숨을 곳이 없다』 『낯선 금요일』
『잉크』 『그만큼』 『꽃들의 이별법』 『두 번째 농담』 등이 있다
계간 《시산맥》 발행인
동주문학상 대표, 지리산문학상 공동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