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만나고 싶었습니다 - 대담 / 본지 편집주간 임 애 월
詩와 참선과 한 잔의 술에 관하여
김 윤 한 시인
- 무려 2년 동안이나
사람들을 꼼짝 못하도록 옥죄었던
전염병도 사그라져가던 5월 하순 무렵
김윤한 시인님을 만나러 안동엘 다녀왔다.
오랜만의 만남이라 더 반갑고 진지하였다. -
임애월 : 김윤한 시인님, 안녕하세요? 정말 반갑습니다.
김윤한 : 예. 참 오랜만이네요. 못 뵌 지가 몇 년 된 거 같네요. 부족한 저를 불러주셔서 송구스럽기도 하고요. 어쨌든 반갑습니다.
임애월 : 지난 2년 동안은 코로나를 핑계로 대담을 비대면으로 진행했었는데 이렇게 직접 만나 뵈니 오랜만에 현장감도 느껴지고 숨통이 트이는 것 같아 저는 참 좋습니다.
김윤한 : 예. 그러네요. 코로나가 좀 진정이 되고 사회적 거리두기도 완화되는 것 같아서 그나마 다행입니다. 앞으로는 예전처럼 문학행사도 할 수 있고 또 만나서 회포도 풀 수 있을 것으로 기대를 합니다. 그 동안 못 뵌 《한국시학》 가족들도 많이 궁금합니다.
임애월 : 요즘 어떻게 지내시는지 근황 좀 알려 주세요.
김윤한 : 2014년 퇴직 후에 특별한 일은 하지 않고 소일하고 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불교 신자인데 새벽 4시 반에 일어나서 인터넷으로 예불 틀어놓고 절을 하고 또 절까지 왕복 두 시간을 걷고 참선을 한 시간씩 합니다. 다시 집에 돌아와서는 불교 경전을 읽고 영어 공부 좀 하고 점심 먹고 낮잠 좀 자고. (웃음) 오후에는 시나 글을 생각하거나 쓰는 일을 합니다. 대단한 작품을 쓰려고 하는 것은 아니고 그저 생각하고 쓰는 것이 좋아서입니다.
그게 일상입니다.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오후 6시가 되면 일과 마치고 술친구가 연락 오면 술 마시고 그렇습니다. 다른 분들이 심심하지 않느냐고 하는데 시간표를 짜 놓고 놀다 보니 그렇지는 않습니다. 토요일과 일요일은 아무것도 안 하고 쉽니다. 대신 아내와 소주 한 병 사 들고 소풍을 갑니다. 경치 좋은 데 가서 한 잔 하는 분위기가 참 좋아요. 근황이 좀 길었네요.
임애월 : 아하, 여유를 그야말로 만끽하고 계시나 봅니다. 이곳 안동이 시인님의 고향인가요?
김윤한 : 예. 제 고향은 안동입니다. 안동 중에서도 월곡이라는 곳입니다. 어릴 때부터 그곳에서 살았습니다. 고등학교 졸업하고 한 이 년 정도 서울에서 떠돌 때와 경기도서 군대생활 할 때 빼고는 줄곧 안동에서만 살았습니다. 안동 토종입니다. (웃음)
임애월 : 네에, 안동 토박이시군요. 「수몰」이라는 시인님의 시를 읽은 적이 있어요. 혹시 고향집이 안동댐 속에 수몰되었나요?
김윤한 : 참 아픈 추억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고향이 변하기는 해도 돌아갈 수는 있지만 제 고향은 물속에 잠겨 있어서 가고 싶어도 돌아갈 수가 없습니다. “고향이 그리워도 못 가는 신세”라는 유행가 가사처럼요.
지금은 덜한데 고향이 수몰되고 한 이십 년 정도까지도 명절날 오후쯤이면 명치끝이 싸할 정도로 한없이 그리움이 치솟아 오르곤 했습니다. 어떤 것으로도 위로가 되지 않았습니다. 실향이라는 것은.
고향이 그리워서 고향 안동댐을 내려다보면 물만 가득합니다. 옛적 고향 하늘 위로는 모터보트가 한가롭게 지나가고 있습니다. 고향을 생각하면 슬프지만 이런 상실의 아픔들이 시로 다시 살아나니까 시인들에게는 아픔도 시를 쓰는 데는 자산이 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임애월 : 에구구~ 물속에 잠긴 고향집이라니... 생각만 해도 마음이 아리네요. 김 시인님 어릴 때는 어떤 소년이었을까요?
김윤한 : 참 착했다고 해요. 착했다기보다도 선생님이 하라는 일은 완벽하게 해 놓아야 안심이 되는, 그런 성격이었지요. 그래서 그런지 공부도 잘 했습니다. 아버지가 엄해서 국민학교, 지금의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에 천자문을 다 배웠습니다. 그것이 바탕이 되어서 학교공부가 수월했지요. 그래서 학교 갔다가 오면 맨날 산으로 들로 개울로 돌아다니며 놀았습니다. 시골에서 촌스럽게 성장한 것이 오히려 도시에서 자란 사람들보다 시적 감성이 더 풍부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임애월 : 역시 제 예상대로 모범생이셨군요. (웃음)
중·고등학교도 안동에서 마치셨나요? 요즘과 달리 그때는 중·고등학생 때가 사춘기였잖아요. 혹시 세상에 대해 반항 같은 것도 해보셨는지요? 너무 모범생이라서... (웃음)
김윤한 : 제가 잘 밝히지 않는 이야긴데 우리 집은 무지하게 가난했습니다. 중·고등학교도 간신히 다녔습니다. 고등학교는 장학금 아니면 다닐 수 없을 정도로. 돈이 없어서 고등학교 때 수학여행도 못 갈 형편이 되었는데 그때부터 수십 일을 학교에 안 간 적도 있었습니다. 고등학교 다닐 때도 다른 집에 가정교사를 하면서 숙식과 약간의 용돈을 해결했습니다. 사람은 왜 이렇게 불공평하게 태어나야하는가 하는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지금은 그렇게 많이 생각하지는 않지만 사회적 불평등에 대해 많은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중·고등학교 시절은.
지금은 살기가 많이 좋아졌다고 하지만 상대적 불평등은 아직까지 여전히 해소해야 할 중요한 사회적 과제이기는 합니다만.
임애월 : 네, 가난 때문에 사춘기의 반항 같은 어설픈 행동을 할 만한 여유가 없었다는 의미로 들립니다. 물론 세상의 불평등에 대한 항변은 꾹 참으셨겠군요.
1995년 《자유문학》으로 등단하셨는데 시를 쓰시게 된 특별한 동기가 있었나요?
김윤한 : 지금은 초등학교지만, 국민학교에 다닐 때 그림도 곧잘 그렸고 작문도 잘 했습니다. 그런데 함께 그림대회를 나가기로 한 여자애와 매일 방과 후에 그림 연습을 했는데 시내에 있는 미술대회 가기 전날 선생님이 저더러 너는 다음에 가기로 하고 그 여자애만 데리고 대회에 나가는 거예요. 선생님은 제일 잘 하는 애를 데리고 갔겠지요. 어려운 시절이니까 여비도 부족했을 거고. 그때부터 아, 나는 그림보다는 시를 쓰는 것이 낫겠구나 해서 계속 시를 썼습니다. 백일장에서 상도 자주 탔고요. 하여튼 어릴 때부터 그렇게 시를 쓰기 시작했고 특히 고등학교 때는 강윤수 선생님이라고 현대문학을 통해 시로 등단하신 선생님이 계셨는데 그 선생님께 사사를 받으면서 시를 계속 쓰게 되었어도 여태까지 놓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1980년대 말부터는 안동의 글밭이라는 시 동인지로 활동을 했는데 어느 날 《자유문학》의 신세훈 대표께서 동인지에 있는 제 작품을 보시고는 작품 몇 편 추려서 보내라고 하셔서 보냈더니 얼떨결에 등단이라는 것을 하게 되었습니다. 《자유문학》은 그 이후로도 제가 속해 있는 《글밭》 동인회와 함께 제 시문학의 뿌리 깊은 토양이 된 곳입니다.
임애월 : 그림을 그리거나 작문 등이 때로는 결핍을 위로하는 방법이 되기도 하지요.
안동에 좋은 시 쓰시는 시인님들이 많으시던데 재미있는 에피소드 있으면 들려주세요.
김윤한 : 안동은 퇴계 선생과 농암 선생의 고향이시고 또 근대에는 이육사 선생님도 이곳 출신이셔서 안동 사람들, 특히 시를 쓰는 사람들은 안동은 문향이라는 자부심이 굉장히 강해요. 시를 쓰는 일도 그런 자부심의 연장이기도 하고요.
《한국시학》을 발행하시는 임병호 선생님하고 동명인 분이 저희 안동의 글밭동인회에 계셨습니다. 2003년에 돌아가셨지만. 나중에 임병호 발행인께도 여쭈어보니까 두 분이 서로 인사도 나누었던 사이라고 하시네요. 동갑이시고. 생일을 따져 보니까 임병호 발행인님이 좀 더 빨랐다고 합니다.
생전에 거의 하루가 멀다 하고 동인들이 함께 모여서 술을 마시곤 했습니다. 그분과는 전국을 함께 떠돌며 여인숙 신세도 많이 졌습니다. 생전에 ‘시를 읽자 미래를 읽자’라는 소책자를 매월 발행하고 길거리에서 시낭송도 했습니다. 물론 그 날은 시를 쓰는 분들이 함께 모여 밤이 늦도록 술을 마시는 날이었습니다.
예전에는 동인회에서 시화전도 많이 했었는데 그때는 전시실 한구석에 막걸리를 한 말씩 가져놓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그곳에서 시를 이야기하며 술을 마시곤 했습니다. 시화전이기도 하지만 술판이었지요.
에피소드라고 하면 주로 《글밭》 동인인 안동의 임병호 시인과 관련된 게 많습니다. 끝이 없을 정도로요. 그분은 술에 취하면 밤새도록 혼자서 ‘자동기술’을 하는 버릇이 있어서 함께 숙소에 들면 대꾸해 주느라 밤을 꼴딱 새기 일쑤였습니다. 그런데 저는 하도 많이 같이 다녀서 익숙해졌지요. 2003년에 그분이 돌아가시고 2019년에 시비를 세워드렸습니다.
임애월 : 저도 그분의 생전 기행을 전해들은 적이 있습니다. 후배들이 그분의 문학 정신을 오래 기억하려고 시비를 세워드린 건 참으로 귀감이 될 만한 일이네요.
시인님께서는 생애 첫 번째로 쓴 시를 혹시 기억하시는지요? 저는 중3 졸업을 앞두고 학급문집 만든다고 한 편 썼었는데 지금까지 그 내용이 생각나거든요.(웃음)
김윤한 : 생애 첫 번째 시를 기억할 수 있으면 좋겠는데 그렇지 못합니다. 어릴 적에는 동시를 썼겠지요. 그건 물론 너무 오래 되어서 알 수 없는 일이고 현대시도 고등학교 때 문예반 선생님 지도로 하도 많이 써서 어떤 것이 첫 번째로 쓴 시인지는 전혀 기억이 없습니다. 그리고 저는 시를 많이 쓰는 편입니다. 영감에 의해서라기보다는 정기적으로 써야하는 강박 같은 것이 있어서 매주 또는 매달 써야 합니다. 지금은 매주 한 편씩 씁니다만, 그리고는 나중에 읽어보고 마음에 안 들면 잘 버리는 스타일입니다.
임애월 : 아, 그러시군요.
2005년도에 첫 시집 『세느 강 시대』를 출간하셨는데 제목과는 달리 시의 현장무대는 안동의 저잣거리 같네요. 한별 평론가는 작품해설에서 “속됨과 성스러움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시인의 일상을 그대로 보여주는 “오기”가 보인다고 했는데 첫 시집 이야기 잠깐 들려주세요.
김윤한 : 지금은 하천이 복개가 되어 사라졌지만 1980년대까지만 해도 안동 시내를 동서로 가로지르는 소하천이 있었습니다. 그 소하천 양 옆으로 포장마차들이 즐비했습니다. 밤이면 가게마다 백열등 불을 밝혔습니다. 그 당시만 해도 환경에 대한 의식이 없어서 더러운 물을 마구 흘려보내서 하천의 물이 새까맣게 오염되어 있었습니다. 악취도 지독했습니다.
임애월 : 맞아요. 환경오염에 대해 무지했던 그런 시절이 있었지요.
김윤한: 그런데 그것을 달밤에 보면 오히려 새까만 물에 달빛이며 전등불들이 더 선명하게 비춰지는 겁니다. 그래서 밤이면 낮과는 반대로 물에 비치는 것들이 더 아름다웠습니다. 그 무렵에 안동에서 시를 쓰는 사람들이 그 하천변의 포장마차에서 즐겨 술을 마시곤 했습니다.
그 천변에 이상한 이름의 술집이 있었습니다. ‘5·10·시·5’라고, ‘오십시오’를 그렇게 쓴 겁니다. 거의 단골이었는데 우리는 거기에서 술을 마시면서 그 하천을 언제부턴가 ‘세느 강’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다 보니 시민들도 덩달아 그 하천을 ‘세느 강’이라고 불렀지요. 프랑스의 파리에 있는 세느 강에 비유한 겁니다. 물론 규모나 아름다움은 비교가 안 되지만 적어도 밤의 불빛만은 찬란했다고 할까요. 오래된 추억의 이야기여서 더 아련하기도 하고요.
임애월 : 시인들은 상상력으로 오염된 하천도 세느 강으로 변모를 시키는군요. (웃음)
김윤한 : 몇 해 전에 지역 방송국에서 그 시절의 사진과 함께 안동의 ‘세느 강’에 대한 아련한 기억을 상기시키는 TV 방송을 했는데 제 시집 제목과 일치해서 방송에서 이 시를 낭송한 적이 있습니다. 아련한 추억 속의 이야기입니다. 추억은 별 것 아닌 것 같아도 돌아갈 수 없는 것이기에 더 그립고 아름답게 남아 있습니다. 말이 좀 길었네요.
저무는 세느 강 까맣게 눈발 날아오르고, 외투깃 세우고 지나는 연인들 뒷모습 따습다.
카바이트 등 아래 빛바랜 브룩쉴즈가 액자 속에서 웃고 있는 포장마차 연탄불 위에는 한창 꽁치가 익고 있고
대폿집 ‘5·10·시·5’ 안줏감을 사오는 주인여자의 머리 위에는 함박눈꽃이 폈다.
밖에는 연신 우우 바람이 소리치고, 추운 날은 더 행복하여라, 벌겋게 달은 연탄난로 위 주전자에는 소란스레 물이 들끓고 있다.
술독에는 한창 막걸리 괴어오르고, 추운 만큼 탁자 위에는 늘 따스한 시들 가득했다.
겨울도 밤도 더 가라앉고, 시인들은 합창을 한다. 세느 강 시인들의 노래는 작은 어둠 한 조각 걷어내지 못할지라도, 세느 강 아름다운 물결 따라 밤이슥토록 반짝였다.
돌아가고 싶다. 세느 강- 낮에는 우울하고 칙칙한 오물들 흘러내리지만, 밤이면 오히려 물결 위로 별들 가득 시가 되어 빛나던
- 「세느 강 시대」 전문
임애월 : “추운 날은 더 행복하여라” ... 참 따뜻한 풍경이네요. 배경인 포장마차는 아마 안동 시인들의 아지트였나 봅니다.
김윤한 : 거의 매일 출근을 했습니다. 우리가 그 실내포장에 가면 주인이 우리한테 믿고 가게를 맡기고 시장을 보러 갈 정도였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막걸리 몇 되를 마셨다고 나중에 이야기하고는 또 외상을 합니다. 그리고는 월급날이 되면 갚고 또 외상을 했지요.
임애월 : 하하하, 지금 들으니 그 “외상”이라는 말이 무척 생경스러우면서도 정감이 갑니다.
김윤한 : 그렇지요. 하루는 그 가게에 술을 마시러 갔는데 그 주인아주머니는 시장을 보러 갔습니다. 우리는 난롯가에 둘러앉아서 술을 마셨습니다. 얼마를 마셨는지 모를 정도로 마셨는데 그 때 주인아주머니가 밀문을 열고 들어오는데 머리 위에 눈이 하얗게 쌓여 있었습니다. 술 마시는 우리만 몰랐는데 밖에는 발이 빠지도록 폭설이 내린 겁니다. 어느 영화 같은 장면이었어요. 제 시의 구절처럼 “연탄난로 위 주전자에는 소란스레 물이 들끓고 있”었고.
임애월 : 시·청각적 심상이 전해주는 따뜻하고 아름다운 서사가 다시 되살아나는 작품입니다.
첫 시집에서 “시는 거대한 종교였고, 도저히 끊을 수 없는 알콜”이었다고 쓰셨는데 20여 년이 흐른 지금도 여전하신가요?
김윤한 : 그러네요. 한동안 과연 내게 시는 무엇인가를 고민하기도 했습니다.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되지도 않고 돈도 안 되는데. 그래서 몇 개월 동안 시와 일부러 멀리 하기도 했지만 결국은 시를 다시 쓰지 않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나도 모르게 시에 의지, 내지는 의존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저는 문학은 ‘결핍’의 산물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충만한 상태에서는 문학이 나오지 않습니다. 가령 이몽룡과 성춘향이 순탄하게 만나서 모자람 없이 잘 살다가 죽었다면 그게 문학이 되겠습니까. 홍길동이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부르며 유복하게 자랐다면 역시 오늘까지 전해지지 못했을 것입니다.
임애월 : 같은 생각입니다. 결핍은 분명 어떤 동력이 되기도 하지요.
김윤한 : 그런 의미에서 시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시는 소설이나 다른 장르보다는 정신적인 ‘결핍’을 비유적인 언어를 통해서 채워주는 그런 장르입니다. 내가 시를 억지로 쓰려고 했던 것 같지만 내가 시를 쓰면서 나도 모르게 내 스스로도 정신적으로 ‘결핍’된 부분을 의지, 내지 의존해왔던 것입니다. 그래서 “시는 거대한 종교였고, 도저히 끊을 수 없는 알콜”이라고 했던 것입니다.
물론 결핍을 채워주는 그런 시들이 독자들도 함께 공감하고 위안을 받을 수 있어야 하는데 평생을 노력해 왔지만 오늘까지도 그것이 가장 어려운 과제입니다.
첫 시집 이후 20여 년이 지났지만 그런 생각은 변함이 없습니다. 시는 나의 정신적인 결핍을 채워주는 위안과도 같은 것입니다. 독자들에게도 그런 존재가 될 수 있도록 더 노력해야겠지만요.
임애월 : 시인님의 시를 좋아하는 독자들이 참 많습니다. 저도 그 중 하나이고요. 사실 시인님의 음주습관과 관련된 ‘119’라는 별명은 이미 전국적으로 소문이 다 났답니다.(웃음)
김윤한 : 저는 직장생활을 하면서 거의 매일 술을 마셨습니다. 그것도 소주로만요. 그러다 보니 나름대로 꾀가 생겼습니다. 퇴근 이후에 매일 밤늦도록 술을 마시면 몸이 남아나지 못하겠더라고요. 그래서 나름대로 규칙을 정했습니다. ‘119’ , 즉 1차에, 한 가지 술만, 9시까지. 그래서 119입니다. 술을 마시게 되면 1차에서 끝나지 않고 꼭 2차 3차 가면 문제가 생겨요. 그리고 저는 소주를 마시는데 맥주나 다른 술과 섞어 마시면 훨씬 더 취해요. 그래서 1가지 술만.
임애월 : 그래서 그 규칙은 잘 지켜지셨나요?
김윤한 : 다행해 별명이 소문이 나면서 9시만 되면 친구들도 내가 일어나면 붙잡지를 않아요. 제가 꾀를 잘 냈다고 생각이 듭니다. 저와 자주 만나는 강희동 시인도 함께 술 마시다가도 9시만 되면 저더러 갈 시간 되었다고 일러주기까지 하거든요. 특허가 인정이 된 셈이지요.
그런데 하루는 낮부터 술을 마셨거든요. 아홉 시까지 마시려면 아직 멀었지 않냐고 그러기에 낮에는 112라고. 1차에 한 가지 술만 2시간 동안만 마시고 그만 마신다고. (웃음)
임애월 : 하하, 이건 또 다른 규칙인가요.
지금 함께 배석해 주신 강희동 시인님 전언에 의하면 요즘도 날마다 ‘참선’을 하신다던데 첫 시집에도 ‘선’을 모티프로 쓰신 작품들이 꽤 보이던데요.
김윤한 : 습관이 되어서 하루에 한두 시간씩 참선을 하지 않으면 심적으로 불편해요. 중독이 좀 된 것 같습니다. 사람들은 대개가 하루 내내 바쁘게 살아가면서도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어디에 있는지 생각하는 시간은 거의 없습니다. 행복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안에 있다는 생각을 하면서 참선을 합니다. 선을 모티프로 한 시도 더러 있지만 저 같은 사람이 선의 깊이를 제대로 알 수 있겠습니까. 그냥 흉내나 내는 거지요.
임애월 : 그래서 <반승반속>이란 별명을 얻으셨나 봅니다.
우문입니다만... 하루도 거르지 않고 참선을 하시는 이유가 궁금해요. 구도자가 아닌 ‘알코올을 사랑하는 속인’으로 살면서 그러기는 정말 쉽지 않거든요.(웃음)
김윤한 : ‘반승반속’은 지나친 말이고요. 혼자서 예불도 하고 참선도 하고 경전도 읽고 하니까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 같은데 그냥 흉내만 내고 있습니다. 누가 하라고 시키는 것도 아니고 하면 그냥 마음이 편해서 하고 있습니다.
임애월 : 혹시 강박증이 생긴 건 아닐까요?
김윤한 : 습관이 되어서 하루도 참선을 하지 않는 것은 상상이 안 돼요. 어디 여행을 가더라도 그 근처에 있는 절을 알아놓았다가 다음날 새벽에 가서 참선을 하고 옵니다. 참선을 하고 나면 쓸데없는 생각을 하지 않게 되거든요. 생각이 맑아진다고 하죠. 그러면 쓸 데 없는 고민이나 걱정 같은 것은 안 하게 되니까요.
‘알코올’과 ‘참선’은 말씀하신 대로 궁합이 전혀 안 맞아요. 반대되는 속성을 가지고 있거든요. 참선이 잘 되는 날은 술 생각이 덜 나고 술을 마시고 나면 참선이 제대로 안 돼요. 힘들어요. 참선을 제대로 하려면 술을 안 마셔야 되는데 그게 안 되고 아직 술도 무척 좋아하니까 사이비죠.
임애월 : 두 번째 시집 『무용총 벽화를 보며』 서문에서 신세훈 시인님께서는 “김윤한 시인은 전통문화를 지키는 양반 시인”이라고 칭하셨던데, 이렇게 뵙기에도 모범적이고 양반 같으신데 혹시 안동에 살아서 그런가요? (웃음)
김윤한 : ‘양반 시인’이라는 말은 과찬이고요. 아마 안동을 양반도시라고 일컬으니까 그런 말씀을 하신 것 같습니다. 안동에서 나고 자라서 여태까지 살고 있으니까 남들 보기에 양반 이미지가 연상이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하기는 서울의 문학모임에 가보면 안동에서 왔다고 하면 양반 취급을 해 줘요. 모범생은 맞을지도 모르겠네요. 무엇이든 곧이곧대로 해야 되는 그런 성격을 갖고 있어서.
고구려 땅 만주 즙안현 ‘무용총’ 벽화를 본다. 무사들 이랴이랴 말달리고, 사람들 그림 밖으로 걸어 나와 덩실덩실 춤을 춘다. 2천년 어둠이 스르르 걷힌다.
춤을 춘다. 신명나는 북소리, 좋은 술에 얼굴마다 벌겋게 꽃이 피고, 소매끝동 살아서 하늘 높이 너풀거린다. 해지도록 어울려 멋들어지게 어깨춤 춘다.
어둠이 든다. 하나둘 마을에는 불 켜지고, 신명은 끝이 날 줄 모른다. 한 순배 술 들고 사람들 우르르 무대 앞으로 몰린다. 북소리 점점 잦아든다.
무대 한가득 사람들 모이고, 어깨 맞대며 어지럽게 춤춘다. 사이키조명 미치도록 돌아가고, 드럼소리 귀청 때린다. 웨이터 부지런히 술병 나른다.
지금은 부르스타임, 색소폰 소리 낮게 낮게 무대 위를 돌고, 사람들 빙글빙글 따라 돈다. 시간은 자정으로 치닫고, 서둘러 귀가를 한다.
춤추던 사람들 이따금씩 안으로 소매를 접고, 한 사람씩 두 사람씩 벽화 속으로 들어간다. 2천 년 전 어둠이 스르르 막을 내린다.
- 「무용총 벽화를 보며」 전문
임애월 : 현란한 밤무대 춤판을 보면서... 2천년을 거슬러 고구려 역사의 깊숙한 속살 속으로 문득 스며드셨나요?
김윤한 : 그렇네요. 잘 짚어주셨습니다. 예전에 나이트클럽에 갔었는데 거기서 보니까 사람들이 모두가 의식적이든 아니든 춤을 좋아하는 것 같았어요. 음주가무에 능한 민족이라고 하잖아요. 그 때 문득 ‘무용총 벽화’의 춤추는 그림이 연상되는 거예요. 아, 이거다 하고 쉽게 시를 썼습니다. 오늘날의 우리의 모습이 수천 년 전의 벽화에 이미 나와 있는 거예요.
임애월 : 이 시를 읽다보니 갑자기 드는 의문이 있어요. 한민족은 예로부터 신명이 많다고들 하는데, 그 신명이 정말 신이 나서 그러는 걸까요? 아니면 고달픈 현실의 삶을 잠시라도 잊기 위해서 춤을 추는 것일까요?
김윤한 : 두 가지 다가 아닐까요. 고달픈 현실을 잊기 위해서 신명을 내기도 하고 신명이 나니까 고달픈 현실을 잠시 잊기도 하는 것 같기도 해요. 저 같은 경우를 보면 술을 좋아하는데 평소에는 노래를 안 부르지만 술이 한 잔 거나하면 노래를 잘 하거든요. 알코올 기운이 있을 때는 춤판에 가면 나도 모르게 끼어들어 춤을 추기도 하고요. 우리 민족의 핏속에는 ‘무용총 벽화’가 이야기하듯이 그런 신명이 수천 년 동안 핏속으로 이어져 온 것이 아닐까요.
임애월 : 네, 두 가지가 다 혼융되어서 나타나는 우리네 삶의 속성이겠네요. 2013년에는 산문집과 콩트집도 출간하셨지요?
산문집 『6070 이야기』를 읽으면 어린 시절로 돌아간 듯한 기분이 들어요. 조금씩 세월 속으로 잊혀져가던 추억들을 불러내주거든요. 흑백텔레비전 이야기. 콩쿨대회 이야기, 성냥, 교련복, 풍금, 용의검사, 까까머리, 가을운동회... 등등 아득해지는 오래된 것들이 오롯이 다시 되살아 나온답니다.
김윤한 : 안동에서 발간되는 잡지에 몇 년 동안 연재한 글입니다. 60년대와 70년대 이야기를 쓰게 되었는데 발간을 안 하면 그 시대의 이야기가 그대로 잊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겁니다. 그래서 출판을 하게 되었습니다.
임 시인께서 예를 든 것만 해도 요즘 아이들은 생소해서 거의 모르는 것들이거든요. 우리가 떠나고 나면 그런 것들이 모두 잊히고 말 겁니다. 제가 어린 시절을 보냈던 60년대와 70년대 이야기를 기록해서 남기는 것이 지금 시대에는 주목을 받지 못하더라도 언젠가는 기록적 가치가 있을 것으로 기대를 하고 있습니다. 참 아련한 시절의 이야기죠.
임애월 : 나이 들면 추억을 먹고산대요.(웃음) 지나간 추억들이 앞으로 버텨야할 시간들을 지탱해 주기도 하나봅니다.
김윤한 : 참으로 궁핍하고 못살던 시절의 이야기입니다. 그 시간을 건너오는데 모두들 힘들었겠지요. 하지만 추억이라는 것의 속성이 더 아프고 어려운 것일수록 더 아름답게 반추되거든요.
어린 시절에는 추억, 하면 그 뜻이 이해가 잘 안 되었는데 지금은 너무 많은 추억들이 생겨났습니다. 제가 책에서 쓴 것은 아주 극히 작은 일부에도 미치지 못하겠죠. 사람만 그렇겠지요, 추억을 먹고 사는 것은.
임애월 : 콩트집 『3호차 33호석』도 모 잡지에 연재했던 것들이라고 밝히셨는데요, 궁금한 건 그 28꼭지 중에서 더러는 시인님의 실화도 있으신지요? 재미있는 꼭지들이 많아서요.
김윤한 : 산문집과 콩트집 속의 글들은 나중에 서울에서 나오는 잡지에도 재연재가 되었던 것입니다. 물론 처음에는 안동에서 나오는 잡지에 연재를 했던 글입니다.
시를 쓰는 사람이 짧은 소설인 콩트를 쓰는 게 가당찮은 일이지만 어쩌다 부탁을 받고 쓰기 시작한 게 책이 한 권 되었습니다. 물론 시도 그렇지만 콩트도 자신의 실화가 많이 바탕이 되지요. 비록 각색을 하기는 하지만요. 그러나 대부분은 주변에서 보고 들은 이야기가 더 많습니다 .
안동에서 연재를 할 때는 재미있다고, 독자도 많았습니다. 잡지가 두 달에 한 번 나오는데 한 번 싣고 나면 또 돌아서서 다음 작품을 구상하고 그랬습니다. 요즘도 콩트를 써 달라고 하는데 지금은 힘들어서 못 쓴다고 거절하고 있습니다.
임애월 : 혹시 음주 시간이 줄어들까 봐서 걱정되셔서 거절하신 건 아니시겠지요? (웃음)
2016년에 경북 문예진흥기금으로 발행된 3시집 『무지개 세탁소』를 출판하면서 하신 말씀에 선뜻 공감이 가는 부분이 있더라고요. 시집이 팔리지 않는 작금의 현상을 “현대시의 난해성 때문에 생산자와 소비자가 일치하는 이상한 시대이다” “시를 시인들만의 것으로 고착화” 시킨 건 결국 시인들 자신이라는 그 말씀이요.
김윤한 : 저는 아파트에 사는데, 사람들이 서로 얼굴도 모르고 지내요. 층간소음 때문에 다투기도 하고요. 그렇지만 사람들의 옷들은 그렇지 않아요. 세탁소에 들어가서 빨래통에서 함께 어께동무하고 돌아가기도 하고 낯선 남녀의 옷이 밤새도록 나란히 마주보고 걸려 있어도 전혀 문제가 없거든요. 무지갯빛이 서로 어울리는 것처럼. 물론 시는 비유가 바탕이 되어야 하기 때문에 모호성은 있을 수밖에 없다고는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처음부터 무슨 이야기인지 하나도 모르는 시를 발표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보거든요. 솔직히 이야기해서 신춘문예에 당선했다고 하는 시들 중에서도 어떤 것은 저도 잘 이해를 못해요. 도서관에서 시 창작 강의를 1년 반 정도 했는데 수강생들이 난해한 시를 가지고 와서 질문을 하면 나도 대답하기 힘든 게 참 많았어요.
임애월 : 이해가 됩니다. “시는 독자를 전제로 쓸 수밖에 없다”는 그 말씀에도 백번 공감합니다. 독자를 무시하고 시인의 창작욕구만을 위한 시 쓰기라면 굳이 시집으로 묶어 발표할 필요도 없을 테니까요.
김윤한 : 물론 제 시를 보고 어렵다고 하는 분들도 있지만, 이 시대의 시인들은 시인과 독자의의 그런 난해의 장벽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진지하게 고민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지금은 시의 시대가 갔다고 합니다. 시인은 자신도 잘 모르는 시를 쓰게 되면 독자들은 점점 더 시와 멀어지고 그러다가 보니까 시가 더 외면 받게 되는 것이 아닐까요. 시가 사랑받지 못하는 것, 그것은 일차적으로 시인의 책임입니다.
층간소음 때문에 누군가 또 다투고 있었다
사소한 일들이 때로는 돌이킬 수 없는 사건으로 번질 수도 있으므로
그런 일만 없다면 굳이 이웃들을 알 필요가 없을 터였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게 현명하게 살아가는 동안 계절이 지나가고 있는 세탁소에는
오늘도 낯선 옷들이 조금씩 시간을 두고
갖가지 얼굴로 모여들고 있었다
더러는 심하게 얼룩이 들기도 하였지만
살다가 보면 더러는 그럴 수도 있는 것, 누구도 그것을 탓하지는 않았고
서로의 아픔이나 슬픔 같은 것들 함께 내려놓고
드라이클리닝 약품 냄새를 함께 견디며 빨래통 안에서 서로를 얼싸안고 돌아가기도 하였다
바람난 여자를 오히려 부러워하는 여자들이 시샘하며 소문을 퍼트리고 있는 사이
건조기에서 나온 낯모르는 남녀들은 옷걸이에 걸린 채 밤새도록 마주 안고 있었지만
끝끝내 아무 소문도 나지 않았다
- 「무지개 세탁소」 전문
임애월 : 몇몇 비평가들의 비평요리 용으로 쓰이는 시가 아니라 말씀처럼 독자와 함께 존재할 때 즉, 누군가의 건조한 마음을 촉촉하게 적실 때 시의 가치는 더욱 빛이 나겠지요.
김윤한 : 예 그렇습니다. 요즘 발간되는 시집의 편집 방식도 생각해 볼 일입니다. 시인은 시간이 지나면 자신도 이해하지 못하는 시를 쓰고 또 비평가들도 시를 독자들이 이해하기 쉽게 해설하는 것이 아니라 해설이 시보다 더 어려운 경우가 많거든요. 좀 쉽게 와 닿는 시를 쓴다면 굳이 해설이라는 이름으로 평론가들의 손을 빌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임애월 : 작년 가을에는 경북문화재단의 지원으로 4시집 『지워지지 않는 집』을 출간하셨네요.
김윤한 : 저는 거의 5년 주기로 시집을 내는 것 같습니다. 2016년에 세 번째 시집을 내고 지난해에 네 번째 시집을 냈습니다. 그 동안 숱한 시인들로부터 시집을 증정만 받고 가만히 있으려니까 면목이 안 서는 거예요.
한 5년 만에 시집을 내서 아직 죽지 않고 여전히 시를 쓰며 잘 있다는 안부 삼아서 시집을 발송을 하고 나누어 드렸습니다. 앞으로 또 한 5년쯤 뒤에 시집을 낼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리울 때마다 꺼내 보지만 제대로 재생되지 않고
손에 닿을 듯 닿지 않는 안개 속 저만치서 낡은 시간을 가만가만 불러오는
낡고 오래된 집 한 채 있다
까치들이 아침마다 울어댔지만 뒤란에는 언제나 그늘이 들었고
습지식물들이 자꾸 돋아났다
주기적으로 누군가 아프곤 했다
댓돌 위에는 저마다의 발바닥이 담긴 고무신들이 줄지어 놓여 있었다
그 때문에 모든 것이 조금씩 모자랐다
가난을 말리며 빨래들이 펄럭였다
아침저녁 하늘로 부지런히 연기를 피워 올렸지만
오히려 부엌에는 그을음들만 더 짙어질 뿐이었다
결국 우리는 떠나오고 그 집도 아득한 곳으로 떠나보내고 말았다
지겹도록 많던 시간들은 다 어디로 떠나갔을까
어릴 적에는 그 집 안에서 우리가 살았지만 이제는 내 안에 아련한 집 한 채 살고 있다
아무리 해도 결코 지워지지 않는
- 「지워지지 않는 집」 전문
임애월 : 작품 속 시구처럼 누구나 마음속에 “아련한 집 한 채”를 지어놓고 사는지도 모르겠어요. 심신이 고단할 때 찾아가 쉬고 싶은 그런 집이요.
김윤한 : 특히나 제 고향은 안동댐으로 수몰이 된 곳이라서 어릴 적 살던 집이 더 그립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던 집을 물속에 두고 떠나온 심정이 오죽하겠습니다. 집 안에는 수초나 물고기들이 살고 있겠지요. 아마도.
어릴 적에는 내가 집 안에 들어가 살았지만 그리운 고향집을 생각하면 도저히 잊히지 않는 거예요. 이제는 죽을 때까지 지워지지 않는 집 한 채가 내 마음 속에 들어 있습니다.
임애월 : 김성조 문학평론가는 작품해설에서 “시력 30여 년이 가까워오는 지금까지 시의 호흡을 놓치지 않고 부단히 걸어온” “완전체를 꿈꾸는 발자국”이고 “한 생을 불사르듯 혼신의 걸음으로 산화”한 결과물이며 “잘 연마된 한 시기의 목소리”라고 평하셨어요. 모범생 시인답다고 할게요.
김윤한 : (웃음) 시집 해설하시는 분들은 저자의 청탁에 의하다보니까 과장된 표현을 많이 쓰거든요. 30여 년 동안 시를 꾸준히 써 온 것은 맞지만 나머지 것들은 모두 과찬의 말씀입니다.
임애월 : 겸손하신 말씀이네요.
김윤한 : 김성조 문학평론가는 시인이기도 한데 저와 같은 《자유문학》 출신이어서 친분도 있습니다. 그래서 해설을 부탁을 드렸는데 부끄럽도록 좋게 글을 써 주셨네요. 어렵게 시간 내 주신 평론가께 고맙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제가 말로는 독자에게 다가가는 시를 써야 한다고 늘 이야기하지만 제 시를 독자들이 얼마나 읽고 공감해주는지는 알 수가 없어요. 시인은 살아있는 동안 시를 써야 하는 숙명을 가지고 있고 부족하지만 아마도 그런 노력과 작업은 꾸준히 계속해 나갈 것입니다.
임애월 : 앞에서도 말씀드렸지만 김 시인님을 좋아하는 독자들이 많습니다. 이 시집에 들어있는 「50원」이라는 시를 인터넷신문을 통해 읽었어요.
마트에서 거스름돈을 받다가
동전 하나를 떨어뜨렸다
벼이삭에 붙은 낱알들이 흔들렸다
여태껏 먹은 밥알들도 흩어졌다
아버지는 끼니를 위해 늘 저물었고
어머니는 숟가락들을 챙기며
아궁이에 불을 지펴 밥을 지었다
연기 때문에 눈물이 났다
밥을 벌기 위해서는
억지로라도 밥을 먹어야 했고
온갖 비굴을 억눌러가며
눈물과 땀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50원짜리 동전 한 닢
아무 것도 살 수 있는 것은 없지만
힘들어도 참고 또 참으며
부지런히 먹고 또 살아야 한다며
오늘도 벼이삭을 흔들어가며
온갖 세상 사람들 주머니 속을
짤랑거리며 돌아다니고 있다
- 「50원」 전문
김윤한 : 요즘 어린아이들은 이 시를 이해하기 어렵겠지요. ‘먹고 살기’ 위해서 그 시대 사람들은 얼마나 힘들게 살아왔는지를 아마 모를 것입니다. 마트에서 거스름돈을 받다가 동전을 보고 문득 생각한 시입니다. 50원짜리 동전에 있는 그림이 벼이삭이거든요. 조폐공사에서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동전에 벼이삭이 그려져 있는 것은 돈과 먹고 사는 문제가 묘하게도 겹치거든요.
임애월 : 맞아요. 먹고사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했던 시절이 있었지요. 이 시 「50원」을 읽으며 저도 눈물이 났어요. 우리시대의 부모님들은 생각만 해도 왜 항상 눈물이 나는지... 어려운 시대를 살아내신 그분들의 삶이 늘 고단했기 때문이겠지요. 특히 “아버지는 끼니를 위해 늘 저물었”다는 시구에서 왈칵 눈물이 납디다.
김윤한 : 어릴 적 아버지는 늘 저물었습니다. 집안의 가장인 아버지가 오셔야 함께 저녁을 먹거든요. 배가 고팠지만 늦게 오시는 아버지를 기다리며 참 많은 생각을 했던 것 같습니다. 아버지는 하늘나라로 가셨지만 그 시절을 생각하면 마음이 짠합니다.
시 내용에 있는 것은 오래 전의 이야기이지만 사람이 먹고 사는 데는 방식만 다르지 지금도 치열하고 힘들기는 더하면 더했지 여전하다고 생각합니다.
임애월 : 그렇기도 하겠네요. 먹고사는 일은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욕구를 해결해야 하는 문제이니까요. 시인님의 작품 중에서 가장 애착이 가는 시 한 편 소개해 주세요.
김윤한 : 제 시는 한편 한편 모두가 제 정신적인 자식 같아서 어느 것이 더 애착이 간다는 말은 하기 어렵습니다. 그런대로 좀 덜 부끄러운 시 한 편을 소개합니다. 「가족사진」이라는 시입니다. 어느 날 아주 순간의 시간에 가족들이 함께 사진을 찍습니다. 그 사진은 남아 있지만 누군가는 아프고 누군가는 또 떠나갔습니다. 결국은 가족사진만 “쓰리고 아프”게 남아 있습니다.
셔터를 누르는 순간
시간은 빠르게 과거로 도망친다
액자 속에는
흘러간 시간의 한 토막이 들어있다
사진은 어둠을 찍지 못한다
아련한 사연들은
빛에 가려 보이지 않고
사진 속에서는 모두들
어색하게 웃고 있다
시간은 재재거리며 흘러가지만
액자 속 시간은 멈춰 있다
오히려 세월이 흐를수록
아득한 과거로 남는다
사진은 나이를 먹지 않지만
가족들은 나이가 들수록 자주 아프다
마침내 누군가는 모든 것 남기고
먼저 떠나가리라
사람은 떠나고 그림자만
빛바랜 채 액자 속에 남아서
더욱 쓰리고 아프리라
- 「가족사진」 전문
임애월 : 정지된 시간 속에만 살아있는 기억들은 아프고도 아름답지요. 공직에 오래 계셨었는데 얼마 전에 명퇴하셨다고 들었어요. 혹시 다시 출근하고 싶지는 않으세요? 일을 그만 두고 나면 가끔씩 그냥 멍해진다는 그런 분들도 계시대요.(웃음)
김윤한 : 얼마 전에 퇴직을 한 게 아니고 2014년에 했으니까 벌써 8년째가 다 되어 가네요. 저는 공무원으로 34년 6개월을 근무했습니다. 밥벌이를 위해서 시작을 했는데 어느 날 생각하니 어떤 의식도 없이 왜 사느냐에 대한 의문도 없이 너무 습관적이 되어 있는 거예요. 기계처럼 출근을 하고 퇴근을 하고를 그 오랫동안 의식 없이 반복한 거지요. 너무 바쁘게 살아왔고 제 자신에 대해서는 생각할 시간도 없이. 그래서 5년 일찍 퇴직을 했습니다.
임애월 : 벌써 7년이 지났다고요? 얼마 전인 것 같은데...
김윤한 : 퇴직 직후에는 좀 힘들기도 했습니다. 수십 년 동안 습관처럼 출근하던 직장을 어느 날 아침부터 가지 않고 집에 있으려니까 불안하기까지 한 거예요. 또 처음에는 왜 벌써 퇴직했느냐고 만나는 사람마다 다 이야기해서 대답하기가 곤란했었는데 지금은 제 동년배들도 모두 퇴직한 지 몇 년이 지나서 이제는 괜찮습니다. 앞에서 이야기한 대로 나름대로 시간표를 짜서 잘 지내고 있습니다. 그 덕분에 잘 쓰지는 못하지만 꾸준히 시를 생각하고 쓰며 살고 있습니다.
임애월 : 앞으로 꼭 해보고 싶은 일이나 특별한 계획이라도 있으신지요?
김윤한 : 퇴직을 하면서 생각이 아무 것도 하지 말자였습니다. 특별히 욕심 내지 않고 풀처럼 살려고 하고 있습니다. 가장 든든한 위안군이 시와 참선입니다. 그리고 언젠가는 줄이고 끊어야겠지만 술도 있네요. (웃음)
임애월 : 지금은 100세 시대라는데 앞으로 삼십 몇 년은 더 살아야 하잖아요? 제가 주제 넘는 한 말씀 드리자면 혹시 농사를 지어보실 생각은 없으신가요? 제가 해보니까 농사라는 게 정말 시 창작 못지않은 창조(?)가 있고 때로는 위로를 주거든요. 거기엔 ‘참선’과도 같은 오묘한 정신적인 사고도 포함되어 있답니다. (웃음)
김윤한 : 무엇이든지 정신 집중을 하면 그것이 바로 참선과 같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말씀에 전적으로 공감합니다.
저도 어찌하다가 보니까 땅이 좀 생겨서 어떻게 할까 하다가 가장 손쉽게 할 수 있다는 호두나무를 한 40주 심었습니다. 고추도 조금 심었고요. 근데 말이 쉬운 농사지 보통 힘든 게 아니었습니다. 적어도 매주 밭에 가야하고 잡초는 얼마나 끈질기게 올라오는지 풀 베느라 혼이 났습니다. 하지만 풀을 베어서 퇴비로 주면서 나무 하나 하나마다 잘 있는지 대화를 하기도 했습니다. 그런 일 할 때는 무념무상이지요. 참선도 그런 것과 통합니다.
임애월 : 사람들은 안 믿겠지만 저는 농사일을 할 때가 가장 즐겁답니다.
김윤한 : 임애월 시인님이 농사짓는 이야기를 들어보니까 선은 일상에서 하는 것이다. 즉 행주좌와, 가거나 머물거나 앉거나 눕거나 언제나 하는 것이라는 말이 문득 떠오릅니다. 저도 임 시인님처럼 나무들을 돌볼 때 그런 생각으로 하려고 합니다.
임애월 : 바쁘실 텐데 귀한 시간 흔쾌히 내주시고, 재미있는 말씀 들려주셔서 대단히 고맙습니다.
김윤한 : 예. 만나서 반가웠습니다. 귀한 지면을 부족한 저에게 할애해 주셔서 송구하고 감사합니다. 늘 건강하고 행복하십시오.
임애월 : 함께 자리해 주신 강희동 시인님, 김여선 시인님도 고맙습니다. 이 주막집 술맛이 괜찮네요. ㅎㅎ
- 유유히 흐르는 낙동강변의 소박한 주막집
오랜만에 술 한 사발 앞에 놓고
시인이 들려주는 진솔한 이야기를 들어보는 시간
詩와 참선과 그리고 알코올...
그에게는 결핍을 채우기 위한 붉은 몸부림이었으리라.
이제 여름은
절정을 향해
그 푸른 발걸음을 내딛고 있다. -
■□ 시인의 자선시
반창고 외 4편
김 윤 한
예정된 아픔들이 질서 있게 감겨 있었다
커 간다는 것은 그만큼 상처와 익숙해져 간다는 것이다
상처 난 손가락을 위한 조그만 위안에 불과할 지도 모르지만 붙이고 나서야 비로소 울음을 그치곤 했다
새살이 돋고 잊어버릴 만하면 또 다시 예기치 못한 상처를 입곤 했다 왜 입는다고 했을까 크고 작은 아픔들이 옷을 바꾸어 입듯이 주기적으로 따라왔다
쓰린 크기만큼 잘라 붙이기도 하지만 보이지 않는 부위는 어쩔 것인가 말 한 마디에도 쉽게 긁혀 피가 맺히기도 했고 감당할 수 없는 상처는 눈물로 씻어낼 수밖에 없었다
복사용지에 손을 베었다 얼마나 더 상처를 입고 새살이 돋기를 반복해야 할까 서랍을 뒤져 반창고를 찾는다
감겨 있는 아픔들이 아직 많이 남아 있다
딸기 맛 웨하스
참 오랫동안 잊고 지냈다 그 동안 소실되었던 아련한 풍경들이 입 안 가득 다시 소환되기 시작했다
올드 팝송이 귓속으로 스며들고 있었다 떨리는 손으로 붉은 띠를 걷어내며 달콤한 향기에 취하고 젖은 입술에 서서히 빠져들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중독이 되어 있었다
흩날리는 벚꽃을 함께 맞으며 영원히 그 길이 끝나지 않기를 기도했지만 풋사랑은 잘 부서지기 쉽다는 것을 홀로 남은 뒤에야 깨달았다
떠나간 시간들은 다시는 돌아오지 않지만 어쩌다 오늘 우연히 만나 바스락거리며 녹아드는 기억에 다시 젖는다
빈 소주병
골목 끝 모퉁이에
빈 소주병 하나 뒹굴고 있다
역할이 끝나버린 것들의 뒷모습은
언제나 쓸쓸하고 건조하다
누가 마시고 버린 것일까
비틀거리며 떠나간 사람
분실되어 사라진 이름 하나가
병 속에서 다시 불려 나온다
속절없이 비가 내리면
그리운 것들은 더 그리워지고
긁힌 상처는 더욱 쓰렸다
외로움 도저히 견딜 수 없어
술병을 기울이고 또 기울이고 나면
절망이나 아픔 같은 것들
말갛게 비워질 줄 알았다
하지만 발걸음만 술에 젖고
마시고 난 빈 병 속에는
웅크리고 있는 사내의 그림자와
갈길 잃은 남루한 바람들만
넘치도록 들어차 있다
빨래
흘러가는 시간만큼
냄새나고 찌든 일들이
자꾸만 바구니 위에 쌓인다
독한 비누를 문지르고
잘 풀리지 않는 일상의 목을 비튼다
죄 없는 옷가지들 빨래판 위에서
아우성을 내지른다
스위치를 넣는다
평소 자주 만나지 못하는 가족들이
서로 어깨걸이를 하고
힘차게 껴안고 돌아간다
빨랫줄 위에 일렬로 줄지어
쳐진 어깨 모처럼 반듯이 펴고
비어 있는 사타구니와 겨드랑이를 말리며
묵언으로 서로를 확인한다
가장 맑고 소박한 평화는
젖은 아픔들이 마르기까지의 시간
빨래 위에 걸린 구름이
한가하게 졸고 있다
첫 경험
첫눈이 풀풀 흩날리기 시작했다
사실은 좀 긴장이 되었다 그렇지만 용기를 냈다 어른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 가야 할 순간이라고 생각했다 긴장을 풀고 가만가만 입술을 적시기 시작했다 달콤한 기운이 입 속으로 스며들어왔다 짜릿함이 온 몸으로 번져들었다 남아 있는 힘이 모두 어디론가 빠져 나가고 있었다 구름 위로 붕붕 떠다니다가 아득한 늪으로 몽롱하게 빠져들기도 하였다 그리고는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나는 누구인지 어디에 있는지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것들이 낮부터 해롱거리느냐고 아버지가 꾸지람을 했다 친구와 몰래 찬장에서 꺼내 마시던 막걸리 주전자가 비워져 있었다
발목이 빠지도록 눈이 쌓이던 날이었다
김윤한 시인
1959년 안동 출생
2001년 안동대학교 국문학과 석사과정 수료
1995년 《자유문학》으로 등단.
시집 『세느 강 시대』, 『무용총 벽화를 보며』,
『무지개 세탁소』, 『지워지지 않는 집』 등
산문집 『6070 이야기』, 콩트집 『3호차 33호석』
2011년 자유문학상, 2018년 한국시학상 본상
한국현대시인협회 이사, 글밭 동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