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 이 계절의 시인

이경렬 시인 (67호) / 히말라야의 넉넉함으로 원효성사의 화쟁을 말하다

작성자嘉南 임애월|작성시간23.09.07|조회수328 목록 댓글 1

■□ 만나고 싶었습니다 - 대담 / 본지 편집주간 임 애 월

 

 

히말라야의 넉넉함으로 원효성사의 화쟁을 말하다

 

이 경 렬  시인

 

 

- 늦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8월 중순 무렵,

수원의 ‘가빈’ 카페에서 이경렬 시인을 만났다.

여전히 등산복 차림의 시인에게서는 산 냄새가 났다.

어느 산의 향기일까. 깊고 단단하고 짙푸른 그 향기는. -

                                             

임애월 : 이경렬 시인님, 안녕하세요?

입추가 지났는데도 가마솥처럼 푹푹 찌는 더운 날, 귀한 시간 내주셔서 고맙습니다.

이경렬 : 제가 더 감사하죠. 이렇게 관심을 갖고 찾아주시니 큰 영광입니다.

임애월 : 자주 못 뵈어 안부가 궁금했는데 그동안 어떻게 지내셨어요? 물론 산 사나이라 산을 따라 산에서 살고 계시리라 짐작은 했습니다만… (웃음)

이경렬 : 공직에서 은퇴한 후로는, 외부 활동을 좀 자제하려고 노력했습니다. 나 자신이나 가족에게 좀 더 충실하려고요. 하고 싶은 공부도 있었고요. 사실은 그러지 못했습니다만(웃음)…

  여러 인연 따라 만들고 가입했던 문학모임이 십여 개가 되더라고요. 일단 이를 줄였죠. 그리고 현직에 있을 때 직장에서 조직되었던 친목회, 협찬단체들을 줄였어요. 대신에, 전국의 여기저기를 많이 다녔지요. 가보지 못했던 산도 찾아가고, 관광지 여행을 하고. 그런데 그 지역 역사 공부도 하게 마련인데, 그것이 도움이 되어서 나중에는 역사 관광 가이드를 하기도 했어요.

임애월 : 역사 관광 가이드요? 어떤 역할을 하나요?

이경렬 : 요즘은 웬만한 곳은 모두 현지의 관광 해설사가 있는데, 그 지역이나 가이드 대상에 대해서는 잘 아는데 전국적이거나 통시적 관점은 잘 모르더라고요. 제가 한 해설은 그거지요.

  예를 들면, 이순신 장군의 한산대첩은 실감나게 설명을 잘해요. 그런데 부산포해전이 더 큰 해전이고 전과가 많았는데도 ‘대첩’이라고 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이지요? 하면 막히는 거예요. 또, 한산대첩 이후 왜국이나 조선의 반응은 더욱 모르지요. 현지 해설사는 현장성이고 저는 통시적 역사성으로 접근한 거지요. 총론과 각론이랄 수 있죠.

임애월 : 아, 전문가 수준이군요. 암기력이 좋아야겠는데 어렵지 않은가요?

이경렬 : 그렇지 않아요. 그곳에 가기 전에 현지 해설사가 모를 법한 부분을 준비하고 공부하면 돼요.(웃음)

임애월 : 그래요? 하고 싶은 공부가 있다고 하셨는데 혹시 역사 쪽인가요?

이경렬 : 퇴직하고 바로 시작한 것이 임진·정유재란사와 정묘·병자호란사였어요. 조선 역사에서 이때가 가장 큰 전환기였기에 평소 관심이 많았었지요. 그리고 독립운동사에 경도되었는데, 불행하고 불공평한 근세사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는 자각에서였지요.

임애월 : 그 지점의 우리 역사를 바로 세우고 싶으신 거로군요.

이경렬: “친일파의 후손은 떵떵거리며 살고 있고 독립운동가 후손은 가난 속에 묻혀 있다”라는 말 들어 보셨죠? 이렇게까지 된 우리 근세사를 들여다보면 참으로 안타까울 따름이죠.

  그 친일파 후손들이 나라의 기득권을 가지고 횡행하니, 역사 공부나 제대로 시키겠습니까? 다 감추고 묻고 왜곡하고…

제가 좀 흥분했나요? 허허허

임애월 : 아, 네… 맞는 말씀입니다. 우리 역사에 큰 관심을 가지고 계시군요.

공직에서 퇴직하신 지는 꽤 되셨지요?

이경렬 : 예, 2014년도에 명예퇴직을 했으니 이제 9년째. 벌써 그렇게 되었군요.

임애월 : 60세 이후는 시간이 더 빨리 간다는 학설(?)이 있어요.(웃음) 지금 살고 계신 화성시 봉담읍 유리가 시인님 고향이신가요?

이경렬: 제 고향은 충남 아산입니다.

초등학교, 중학교를 마치고 가족이 이사 오는 바람에 경기도 화성 사람이 되었죠. 고등학교는 수원수성고등학교를 다녔고요. 여기서 산 지가 50여 년 되었으니 여기가 고향인 셈이지요.

임애월 : 그러시군요. 그래도 유년 시절을 보낸 고향만이 주는 독특하면서도 아련한 어떤 느낌이 있으실 텐데요.

이경렬 : 내 고향 아산시 신창면은 곡교천이라는 강이 있고 너른 들판과 강 건너에 영인산이라는 아름다운 산이 있는 곳이지요. 지금은 삽교방조제에 막혔지만 제가 살 때는 바닷물이 마을 앞까지 들어왔어요.

  저녁 무렵 마을에서 가장 높은 당집 언덕에서 내려다보면 황금 들판 사이로 밀물 따라서, 굽이굽이 강을 따라서, 새우젓과 생선을 실은 황포돛배가 들어오는 모습이 참으로 장관이었어요. 어린 나이였지만 당집 마루에 서서 한없이 바라보던 기억이 있습니다. 석양을 배경으로 들어오는 황포돛배는 지금 생각해 보아도 환상적이었죠. 제 정서 발달에 한몫을 했을 거예요. 한 시간이면 갈 수 있는 곳이라 지금도 가끔 그곳에 갑니다. 옛 정취는 없지만 대신 추억을 반추하지요. 그 광경이 그립습니다.

동네 이름도 가야. 아름다울 가(佳) 들판 야(野).

임애월 : 아, 정말 서정이 가득한 풍경입니다.

이경렬 : 아픈 추억도 있어요. 그 곡교 천변의 들판은 저희 아버지가 간척사업을 한 곳입니다. 미국 원조 물품인 밀가루를 소작인들에게 나누어 주며 간척을 한 곳이지요. 정치적인, 시대적인 여건으로 결국은 파산 상태에서 수원으로 이사를 하게 된 겁니다.

제가 중학교 1학년 1학기 때인데, 저만 그곳 친척 집에 남겨집니다. 입 하나 던다고요. 중학교를 졸업하고 수원에 왔죠.

임애월 : 그랬군요. 그때가 사춘기인데 힘드셨겠네요.

이경렬 : 그랬어요. 그 나이에 많은 방황과 아픔이 있었지요. 참으로 외로웠고요. 나쁜 길로 빠질 뻔한 때도 많았는데, 다행히 저는 도서관을 찾았어요. 그때부터 중고등학교, 대학까지 많은 책을 읽게 된 동기가 된 것이죠. 어쩌면 그런 환경과 역경이 나를 시인으로 만들었는지 몰라요. 그래서인지 그 시절을 원망하지 않아요. 나를 성숙하게 한 여건이니까요.

임애월 : 어린 나이에 기준을 세운, 그런 긍정적인 자세가 앞으로 어떤 삶을 선택하는 기로에서 매우 중요한 척도가 되었나 봅니다.

  1990년도에 《우리문학》으로 등단하셨는데, 등단하게 된 배경과 그 당시 수원문단에 대한 이야기도 좀 해 주시지요.

이경렬 : 처음에는 몇몇 문학 지망생들과 동인 활동을 했어요. 1987년에 결성했다고 하여 “1987동인”이라 했는데, 지금도 감사하고 고마운 인연이라고 생각해요.

  어느 시낭송회 자리에서 우연히 김우영 시인을 만나게 되었어요. 김우영 시인은 고등학교 1년 후배인데 그때 이미 등단하여 활동하고 있었죠. 그를 통해 임병호 시인을 알게 되고 수원의 여러 시인들과 차차 알게 되는 인연이 있었지요.

임병호 시인께서는 저를 등단하도록 많은 노력을 해주셨고 이 분의 추천으로 1989년에 정식 등단을 하였어요. 개인적으로는 저의 사부라고 할 수 있지요.

  제가 등단하여 수원문인협회에 가입을 하였는데, 이때가 1992년도로 기억합니다. 대단한 분들이 활동하고 계실 때였어요. 임병호 시인님을 비롯하여 유선 시인님, 밝덩굴 수필가님, 윤수천 아동문학가님, 그리고 돌아가신 안익승 수필가님, 정규호 수필가님 등이 활동하셨지요. 이런 분들과 함께 활동을 하면서 많은 발전과 도움을 받았어요. 행운이었지요. 그 후 김현탁 회장 임기 중에는 11년간 사무국장을 하기도 했습니다.

임애월 : 네, 아직도 문단에서 왕성하게 활동 중인 분들이 많으시네요. 첫 시집  『내 강물의 거주지를 위해서』를 1992년에 상재하셨네요.

이경렬 : 예, 지금 보면 좀 부끄럽지만 당시에는 매우 설레는 일이었고 자랑스럽던 기억이 나네요.

 

새끼 게 두 눈을 세우면

머언 수평선 너머로 흐르는 바람

 

따개비 입을 열면

몰아쳐 오는 만조의 물살

 

중천의 해가

게 눈에 고이고

 

조약돌 하나 던짐으로

흔들리는 온 바다

 

- 「인식을 위하여」 전문

 

  첫 시집에서 이 시를 가져와 봤어요. “조약돌 하나 던짐으로/ 흔들리는 온 바다”에서, 나비의 작은 날갯짓으로 어디에서는 폭풍이 일기도 한다는 나비효과를 연상하게 하네요. 아무 생각 없이 행해지는 지구인들의 작은 습관 하나하나가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지 염두에 두고 살아야 할 것 같아서요. 요즘 지구의 기후 위기가 심각한 상황이라잖아요.

이경렬 : 당시에는 어떤 환경 문제에 대해 고려한 것이 아니고요. 개인의 존재에 대한 주관적인 인식, 또는 자아에 대한 주체성을 표현한 것이지요. “모든 현상은 나의 주관적 인식으로부터 나온다”라는 철학적 관념을 써본 것이지요. 좀 불교적이죠?

임애월 : 그렇군요. 30년 전에 쓴 시지만, 지구가 환경 위기에 직면해 있는 이 시대에 읽으니 저에게는 가장 먼저 환경문제와 관련된 장면들이 자연스럽게 연상 되었나봅니다.

아버지에 대한 연작시도 몇 편 들어 있네요. 시인님에게 아버지는 어떤 아버지셨을까요? 맞는 이야기인지 모르지만 시인님이 지금 살고 계시는 집은 아버지가 손수 지으신 집이라는 이야기를 어디서 들었거든요.

이경렬 : 맞아요. 지금 살고 있는 집은 아버님과 제가 같이 지었어요. 저는 보조일 뿐이었지만. 아버님은 목수이면서 농부였어요. 고향에서는 한옥을 20여 채 이상 지었죠. 참 순수하고 착하셨어요. 우리는 사 남매인데 회초리 한 번 안 드신 분이죠.

남의 부탁에 거절을 못 하여 늘 피해만 보시고, 하는 일마다 모두 실패하셔도 다 당신 탓으로만 여기시던 분이셨어요. 경제적으로는 실패하신 삶이지만, 저는 그 순수하고 깨끗한 인간미를 존경합니다. 나이가 들수록 더욱 그래요.

임애월 : 아, 아버지와 직접 지은 집이라니… 정말 감동적이네요. 아버님께서는 사업적인 능력보다는 한옥을 짓는 장인적인 손재주가 더 좋으셨나 봅니다.(웃음)

  2004년에 두 번째 시집을 출간하셨네요.

 

목행대교를 건넜지. 건너며

얼핏, 흐르는 강물 줄기를 보았지

다릿재를 넘으며

또 어디론가 바삐 흐르는 구름을 보았지

박달재 아래 박달터널은 까무락 상념 속에 지났어, 지났어

여기쯤에서 속도를 늦추고

음악을 틀고 볼륨은 낮추고

그런 거야

쉬어가는 것도 아니고

숨 몰아쉬며 가는 것도 아니고, 그냥 가는 거야

얼핏 설핏

스쳐가듯 보면서 지나치면서

진한 색소폰 소리에 마음 흔들리다가

얼핏

길 옆 나리꽃 한 송이도 보면서, 얼핏

 

- 「혼자 여행은 이따금 까닭 모르는 눈물을 흘리게 만든다」 전문

 

이경렬 : 조금은 우울하지만 살아가는 이야기를 쓰고 싶었지요. 아프면서도, 슬프면서도 때로는 분노를 하면서도, 흐르는 강물인 듯 삶을 보고, 길가의 나리꽃을 보는 여유도 만들 수 있는 우리 이웃들의 이야기. 결국 삶의 이야기 아닙니까?

임애월 : 네, 그렇지요. 이 시집 발문에서 임병호 시인은 ‘이경렬 시인은 공황장애라는 희한한 병으로 고생하면서 가끔 죽음을 생각한 모양’이라면서 ‘목행대교, 강물, 다릿재, 구름, 박달터널은 인생의 고비마다 마주치는 시련’이지만 ‘그는 절박한 순간에서도 마치 인생을 달관한 사람처럼 평온을 찾곤 하였다’고 했는데…. 당시 공황장애는 얼마나 심각한 정도였나요? 그래서 시집에서도 “까닭 모르는 눈물을” 흘리셨나요?.

이경렬 : 글쎄요. “까닭 모르는 눈물”은 누구나 갖고 있는 ‘삶의 우울한 일면’이라고 생각해요. 공황장애는 곧 죽을 것처럼 숨이 가쁘고, 온몸이 저려오거나 경련이 일어나기도 하고 정신이 아뜩해집니다. 이를 견디느라 진땀이 속옷을 다 적십니다.

임애월 : 아, 증세가 그 정도인 줄은 몰랐네요. 저는 그저 우울한 정도가 심한 상태라고 생각했었거든요.

이경렬 : 그게 수시로 찾아와요. 그러니 늘 불안하죠. 이런 경험은 출근하다가, 퇴근하다가, 또는 직장에서 수없이 경험하고 응급차를 그만큼 타게 되었죠.

  이런 경험의 누적이 저를 오히려 성숙하게 만든 건 아닌지 생각해 봅니다. 죽음, 허무, 삶의 가치, 뭐, 이런 것들에 대한 사념이 저의 인생관에 영향을 주었지요.

임애월 : 그로 인해 삶에 대한 태도의 방향성이 달라질 만도 하군요. 여행과 산행은 시인님의 인생에서 빼놓고 이야기할 수 없는 비중을 차지한다고 보는데 출발점이 ‘공황장애’였나요?

이경렬 : 그렇진 않아요. 공황장애는 40세 이후에 온 것이니까요. 산행은 대학 시절에 암벽등반에 미쳐서 시작되었어요. 북한산 인수봉 암벽이나 도봉산 선인봉 암벽은 꿈의 도전 장소였지요. 대학 시절 매주 산에 다니다시피 했고 자일을 타고 싶어 대학교 도서관 옥상에다 자일을 걸고 하강 연습하다가 혼나기도 여러 번이었어요.

그 후 나이가 들고 결혼하면서 ‘암벽 등반에서 걷는 등산’으로 변한 것뿐이지요. 여행은 은퇴 후에 더욱 많은 시간이 있어서 가능한 것이고요.

  물론 공황장애가 삶에 큰 영향을 주었지만 여행과 산행은 역마살이 낀 기질 때문이 아닐까요? (웃음)

임애월 : 그러시군요. 타고난 산객이 맞네요.

세 번째 시집 『삶이 사랑이고 사랑이 삶이라고』는 시집 속에 실린 작품 전체가 산행시로 구성되어 있네요.

 

결코 가까워지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저렇듯 멀리 있는 걸 알면서도

 

소백준령 차가운 밤바람을 견디며

 

허우허우 마침내 상월봉에 오르다

 

그렇구나, 그리워하는 마음만 가까이 있구나

 

- 「상월봉의 달은 가까이 가도 다가오지 않고」 전문

 

  소백산 상월봉에서 달을 보셨다면 야간산행이었거나 야영을 하셨을 텐데, 차가운 밤바람 부는 고산준령의 산자락에 오로지 시인과 달, 둘만의 존재하는 것 같은 정물 같이 고요한 이미지가 참 고적해 보네요.

이경렬 : 맞습니다. 백두대간 종주 산행 중에 소백산 상월봉에서 만난 그리움에 대한 사랑시입니다. 소중한 경험이지요. 사랑의 대상에 대한 그리움, 설렘, 이별의 아픔, 환희, 애증, 등은 본질적으로 모두 “사랑”입니다.

그 시집은 사랑과 관련한 시만 모아서 엮은 시집입니다. 백두대간의 길고 긴 종주길은 험난한 고행이면서 한편으로는 뜨거운 열정의 길이기도 합니다. 이런 경험 속에서는 사랑이 곧 삶이고 삶이 곧 사랑일 수밖에 없음을 경험하게 됩니다.

산행을 하면서 겪는 이런 일들은 저에게는 축복입니다.

임애월 : 저도 한 10년 동안 산에 취해서 살던 때가 있었거든요. 백두, 금강, 설악, 지리, 한라, 성인봉 등 국내의 높은 산들을 두루 다녔는데, 백두대간은 몇 구간만 올랐지 종주는 못해서… 시인님이 많이 부럽네요.(웃음)

  백두대간 산행을 하다보면 산마다 그 느낌이 다를 텐데요. 구간 중에서 가장 기운이 센 느낌을 받은 산은 어느 산이었나요?

이경렬 : 산마다 다 특징이 있어요. 백두대간 36구간 중 가장 힘들었던 구간은 삼척의 두타산 청옥산 26km 구간입니다. 그저 길고 깊은 숲과 오르내림 뿐이었어요.

  가장 편안했던 구간은 대관령에서 진고개 구간입니다. 탁 트인 시야와 고원 평야의 초록 경치. 물론 날씨의 영향을 많이 받아요.

기운이 센 구간은 지리산 천왕봉 구간, 영취산 구간, 속리산 천황봉 구간, 태백산 구간, 등 많이 있으나 그래도 가장 세게 느낀 구간은 설악산 구간이었어요. 한계령에서 대청봉을 거쳐 공룡능선을 타고 마등령, 마산, 진부령에 이르는 1박 2일 구간이었지요.

임애월 : 역시 설악산이 가장 험한가 봅니다. 가장 부드러운, 혹은 포근한 느낌을 주는 산은요?

이경렬 : 딱히, 어느 산이라고 하기에는 그렇지만, 저는 누구에게나 오대산을 추천합니다. 오대산 정상인 비로봉에서 동북쪽 능선을 타고 두로봉 거쳐 진고개로 가는 코스이지요. 6시간 정도 걸리지만 온갖 산풀과 고목, 거목이 즐비한 능선길은 참으로 환상적입니다. 9월이 오면 1년에 한 번 정도는 꼭 가는 산입니다.

 

 

임애월 : 산엔 왜 가시나요? 시인님께서 산에서 받은 가장 큰 은혜는 무엇인가요?

이경렬 : 산은 갈 때마다 그 느낌이 다르고 갈 때마다 좋습니다. 건강에도, 마음에도, 정서에도요. 너무 일반적인 답변인가요?(웃음)

  대한민국의 산은 제 정원입니다. 돈을 들여 울타리치고 정원 만들어 ‘내 정원입네’ 하는 것보다, 룰루랄라 이곳저곳 다니면서 ‘여기는 다 내 정원!’ 하며 보는 게 더 좋은 게 아닐까요?(웃음)

임애월 : 산이 주는 건강을 선물 받았다고 이해할게요.

시인님께서는 시 창작과 산행 중 어느 쪽이 더 힘들다고 생각하세요? 참 어리석은 질문이지요?(웃음)

이경렬 : 허허허, 힘들다기보다는 어렵다는 말이 더 적확할 듯 싶네요. (웃음) 젊을 때에는 “시인이니까 시를 써야지”라는 어떤 의무감이 있지 않았나 싶은데, 지금은 느끼는 대로, 일상이듯 자연스럽게 써야 되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의무처럼 억지로 쓰거나 청탁에 임박하여 쓰면 분명히 표가 나더라고요. 내 생각이나 사상, 정서는 그냥 자연스레 생겨나게 해야 합니다. 그게 공부라는 것이지요.

임애월 : 시 창작과 산행은 어떤 면에서는 많이 닮은 부분도 있을 것 같은데요.

이경렬 : 근데, 점점 더 쓰기 힘들어요. 늙었나 봐요. (웃음)

  산행은 형편대로 하면 돼요. 힘들면 쉬면서 어렵지 않게 말이죠. 제 시집 󰡔산객󰡕에서도 밝혔듯이 산행 중에 화두처럼 등산을 하면서 시적 테마를 얻기도 하고 등산 중에 여러 상황에 따라 모티브를 얻기도 합니다. 산행이 시작(詩作)인 셈이지요. 왜냐하면 산행의 모든 상황은 인생의 모든 모습이니까요.

  무엇보다 ’산행의 환경‘은 제가 추구하는 ’자연‘의 일부인 우리네 삶과 상통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임애월 : ‘산행이 곧 詩作’이라는 말씀이 깊게 와 닿습니다.

백두대간을 종주하고 기념으로 발간하신 수상록 󰡔가야할 길이 많이 남아 있구나󰡕를 읽다가, “인간이 나무 하나보다 나을 게 무엇인가”라는 텍스트에서 많이 부끄러웠어요. 푸른 지구를 끝도 없이 망가뜨리고 있는 게 우리 인간들이니까요.

이경렬 : 그렇습니다. 인간이 하나의 주체이듯 나무도 하나의 주체이고 이름 없는 풀 한 포기, 작은 벌레 한 마리도 모두 주체입니다. 주체를 주체로 인정할 때, 세상은 아름다운 것이고 존귀해지는 것이지요. 우리들 모두가 성자처럼 살라는 것이 아닙니다. 천지만물을 존중하자는 것이지요. 존중한다는 것은 따뜻한 사랑이 우선 아닐까요? 인간에 의해 위기가 다가오는 이 세상은 인간만이 풀 수 있습니다. 이런 위기에는 우리 시인들의 역할이 중요하겠죠.

임애월 : 네, 하와이, 캐나다 등의 대형 산불, 중국의 대홍수 등 세계 각국의 자연재해가 사실은 우리 인간들이 저질러놓은 결과물이란 걸,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개개인이 모두 깨닫고 반성해야 할 때가 아닌가 합니다.

이경렬 : 그렇지요. 다 알고 있지만, 문제는 실천이 아닐까요?

제가 며칠 전 목격한 한 이야기를 시적으로 이야기해 볼까요?

 

“고속도로 휴게소, 분리수거함 앞에서

‘유리병’ , ‘플라스틱’ , ‘일반 쓰레기’ 쓰인 통 앞에서

한 아이가 열심히 과자 봉투를 뜯어 나누고 있다.

플라스틱과 종이를.

마구 섞인 분리수거함 앞에서”

 

임애월 : 어린애보다도 못한 어른들의 행태가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얼마 전에는 아드님과 둘이 히말라야 트레킹을 하고 오셨다고요? 언제 다녀오셨죠?

이경렬 : 네, 금년 5월 22일부터 30일까지 8박 10일 다녀왔어요.

임애월 : 그곳은 인간들이 쉽게 범접하지 못하는 신들의 땅이잖아요. 어느 코스로 어디까지 다녀오셨는지 여정을 짧게 소개해 주세요.

이경렬 : 시간이 짧더군요. 네팔 카트만두 공항까지 하루, 다음 날 히말라야 입구라고 할 수 있는 포카라까지 하루, 가는데 이틀 오는데 이틀이지요. 그리고 등산은 3박 4일. 안나푸르나로 향하는 길을 따라 수없이 오르고 내리며 산행을 했습니다.

적어도 보름의 일정을 잡아야 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도 히말라야의 최고 전망대라고 하는 “푼힐”에 가서 좋은 경치를 보고, 그곳의 환경과 네팔인들의 삶을 조금은 엿보고 왔습니다.

임애월 : 네팔에서는 어떤 점이 가장 인상적이었나요?

이경렬 : 사람들의 표정이 다 편해요. 길을 걷는 사람도 느긋하고 상점을 지키는 사람도 다 편안해요. 30대로 보이는 한 사내는 길가에 앉아서 토마토로 보이는 과일 열댓 개, 비름나물처럼 보이는 나물 묶음 3개를 놓고 앉아서 팔고 있는데, 정말 한가한 표정이었어요. 심지어 이런 좁은 골목길에 개도 많아요. 대개 누워있거나 졸고 있어요. 거기 사람들과 비슷합니다.

이 나라가 왜 행복 지수가 높은지 상상해 볼 수 있더라고요.

임애월 : 히말라야가 주는 넉넉함이 그들의 행복지수를 높게 만드나 봅니다. 세계에서 제일 높고 험준한 산맥이니 가고 오는 데도 시간이 꽤 걸리네요. 히말라야는 워낙 성스러운 곳이라서 사진으로 보기만 해도 경외감이 느껴지던데… 저는 그 장엄한 그림 속을 상상 속에서만 걸어봤어요. 직접 걸어서 다녀오셨으니 그 감동이 얼마나 크실까요.

이경렬 : 네, 무엇보다 자연 그대로인 환경과 순수 그대로인 사람들을 보고 만나고 온 것이 행복했어요. 너무 감동하여 가이드인 현지인에게 “파라다이스!”라고 외쳤더니 웃으며 “엄지 척!”을 하더군요.

  아래는 아열대 기후라서 우리나라와 전혀 다른 기후 조건이지만 올라갈수록 온대 기후대라서 우리나라와 비슷한 식생도 보이구요. 더 오르면 냉대기후입니다. 침낭과 파커를 입고 자기도 했어요.

임애월 : 히말라야에서 열대와 냉대기후까지 직접 체험을 하셨군요.

이경렬: 지금 생각해 봐도 가파른 지형과 울창한 수림, 그리고 기습적으로 만난 우박, 설경, 그리고 오를 수 없지만 “다울라기리봉”과 “안나푸르나봉”은 웅장한 꿈의 경관입니다. 무엇보다도 그때 만나는 현지인들의 순박한 모습, 아이들의 천진한 표정이 지금도 아른거립니다. 다시 한 번 꼭 가려고 합니다. 정상은 못 오르더라도 베이스캠프까지는 가능할 것으로 봅니다.

임애월 : 와, 히말라야를 직접 오르셨다니… 정말 부럽네요. 제 꿈이거든요. 관련하여 좋은 시 기대하겠습니다. 무릎은 아직 괜찮으신가요?(웃음)

이경렬 : 네, 다행히 고장은 안 났어요. 이 나이에 정상까지는 불가능한 일이지요. 근데, 거기서 78세 된 분과 72세 된 어르신을 만났어요. 한국인이죠. 물론 푼힐 전망대까지만 오신 것이지만 존경스러웠습니다. 저도 그리해야 할 텐데….

임애월 : 한동안은 히말라야를 품에 안고 사시겠네요.

얼마 전에 네 번째 시집 󰡔산객󰡕을 출간하셨는데 이 시집에도 서정으로 잘 직조된 산행시 82편이 수록되어 있네요. 대단한 산 사랑이고, 진정한 산 사나이십니다.

 

한 번 망설임도 없이 구름은 참 잘도 흐른다

 

바람이야 제 기분대로 힘없이 허정거리며 지나가고

 

궁싯거리다가 마지못해 흐르는 저 물도 마찬가지

 

저렇게 다 흘러간 뒷자리도 모두가 그대로이듯

 

안개 속에서 나타났다가 안개 속으로 사라지는 산객

 

- 「곰배령에 이르러 홀로 가는 산객을 만나다」 전문

 

  이 시를 읽으면 시집 『산객』 한 권이 그냥 다 읽힙니다. “구름”처럼, “바람”처럼, “물”처럼 그렇게 홀연히 나타났다가 “안개 속으로 사라지는” 산에서 만나는 나그네들의 뒷모습이 아득합니다.

이경렬 : 우리네 삶이죠. 저의 일관된 산행관, 또는 인생관이라 할 수 있고요. 이렇듯 삶이란 허망하지만, 집착하거나 과욕으로 인해 고통 받는 삶이 아니기를 바라는 생각을 표현해 본 거죠.

임애월 : 과욕을 내려놓으면 고통 없는 삶을 살 수 있다는 말씀이군요. 공감합니다. 모든 마음의 고통은 욕심에서 시작이 되니까요.

 

의상이 원효를 부를 때는 참으로 단순하였으리라

원효가 의상을 부를 때도 참으로 단순하였으리라

 

그 단순함을 깨우친 후

1340년을 건너오며

지금도 마주 보고 앉았느니

 

그렇다, 백운대에 서서

나는 저 도시의 엉클어진 그물망을

탈출한 줄 알았구나

 

- 「원효봉과 의상봉 사이를 지나 백운대에 올랐다」 전문

 

  원효와 의상은 당나라로 함께 유학 가다가 원효는 도중에 깨달은 바가 있어서 돌아왔다는 설화로 유명한데 두 분은 서로에게 좋은 도반이었나 봅니다.

이경렬 : 그렇습니다. 의상은 진골 신분이었고 원효는 육두품이었어요. 그리고 원효가 8살 정도 나이가 많았는데, 지금으로 보면 호형호제하는 사이였다고 봅니다. 당시에는 삼국이 나라의 운명을 놓고 크게 싸우던 혼란기였는데, 둘은 당나라로 불교의 유식학을 배우러 당나라로 가고 싶었어요. 서유기에 나오는 삼장 법사의 모델이 사실은 인도에서 공부하고 온 현장법사인데 인도에서 많은 책을 가져와 번역하고 가르치고 있었지요.

  처음에는 고구려를 통해 가려다 실패하고 십 년 후 바닷길로 유학하려 했어요. 당나라로 가는 뱃길이 바로 화성의 당성 인근입니다. 이때가 서기 661년입니다. 백제는 660년에, 고구려는 668년에 멸망하는 시기입니다.

원효는 유학을 포기하고 신라로 돌아와 민중 불교를 크게 일으키게 되고 백성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스님이었지요. 의상은 유학하여 공부한 후 돌아와 화엄종을 크게 부흥시키게 됩니다.

  북한산성 입구에서 보면 왼쪽은 원효봉, 오른쪽은 의상봉이 있는데, 전국적으로 이런 곳이 많이 있습니다. 그만큼 가까운 사이였고 서로 영향을 주고 받았지요. 이 시는 “단순함”을 잃고 “그물망” 속에서 허덕이는 나, 세상 사람들을 표현한 것입니다.

임애월 : 참, 그러고 보니 요즘 시인님께서 원효대사를 추적하고 있다는 소문을 들었어요. 어떤 계기로 무슨 작업을 하시는지요?

이경렬 : 화성시 서신면의 당성이 원효가 유학하려고 머물던 곳이고 그 인근의 백곡리 고분군이 득도한 곳이라는 걸 추정할 수 있어요. 화성시에 사는 제가 관심을 가질 수밖에요. “화성지역학 연구소”를 조직하여 회원들과 함께 8년째 연구하고 조사하며 활동하고 있지요. 제가 조사한 바로는 전국에 107개의 원효 성사 관련 사찰이 있습니다. 물론 이 모두가 원효가 세운 것은 아니지요. 그만큼 지명도나 신통력, 위력이 있어서 나름대로 원효를 빌어서 자기네 절의 위상을 높이려고 한 것이지요.

원효가 해골물을 마시고 득도했다는 설화는 많이 들었지요?

임애월 : 물론이죠. 원효의 사상이나 행적에 대해서는 잘 몰라도 ‘해골물’은 너무 유명한 설화니까요.

이경렬 : 화성시 서신면의 당성 인근에는 이를 뒷받침할 만한 자료와 흔적이 많습니다. 당성, 은수포, 백곡리 고분군, 등. 그리고 문헌 기록도 있고요.

임애월 : 그 이야기가 실화일 가능성이 있다는 거군요?

이경렬 : 화성시 당성 인근이 원효가 득도한 곳이라는 것이지요. 잘 아시는 원효대사의 해골물 득도 일화는 물론 과장되고 극적 효과를 위한 이야기이지요. 이와 관련하여 원효에 대한 연구를 하게 되고 그의 행로를 추적하게 되었어요. 전국 107개 사찰을 일일이 탐방하면서, 필요하면 두 번 세 번 다시 가서 조사하고 사진 찍고 하였죠. 그의 행적을 따라다니면서 그의 사상과 흔적을 찾아다닌 거지요. 지금까지 약 5년여의 사찰 탐방과 원효 사상 연구를 정리하여 책으로 출판할 예정입니다.

임애월 : 아, 책으로 출판하실 계획이시군요. 기대하겠습니다.

한국불교에서 원효가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크잖아요? 일심, 무애, 화쟁 등 그의 사상에서 특히 더 천착하고 싶은 부분이 있나요?

이경렬 : 원효성사는 우리나라 사상사에서 가장 독보적인 존재입니다. 불교를 종교로 보든 철학으로 보든 가장 지대한 영향을 끼친 분이지요. 저는 철학적 관점에서 봅니다만.

  우리 시대에 극좌 극우의 정치적인 문제, 풍요와 빈곤의 문제, 사상의 부재, 등 갈등이 양산되는 이 환경에서 원효의 사상은 가장 큰 대안이 된다고 봅니다. 특히 원효성사 당대에 대두되었던 삼국통일기의 여러 문제, 말하자면 신분의 대립, 빈곤의 악순환, 백제와 고구려 유민의 불평등, 등의 갈등 해소에 화쟁 사상이 두루 기여를 하게 됩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에도 다를 바가 없지요.

임애월 : 네, 그때나 지금이나 사람살이는 똑같다고 생각됩니다. 어느 시대나 갈등은 생기게 마련인데, ‘돈이 곧 종교’라는 농담도 있지만 지금은 경제적인 불평등이 여러 가지 사회문제들을 키우고 있다고 보입니다. 다양한 생각들이 넘쳐나는 이 시대의 우리들에게, 원효의 사상 ‘화쟁’을 어떤 방법으로 어떻게 받아들이게 하면 좋을지 궁금해집니다.

이경렬 : 경제적 불평등보다도 더 본질적인 문제가 있습니다. 비유하자면, 원효의 일심 사상은 바다 그 자체이고요, 화쟁은 바다 표면에 이는 각기 다른 파도라고 봅니다. 이렇게 다른 것도 결국은 바다라는 하나의 뿌리라는 것이지요. 서로 다르다고 싸울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근래에 유명한 법륜 스님은 이렇게 비유했어요.

  춘천에서 서울로 가려면 서쪽으로 가야지요? 인천에서 서울로 가려면 동쪽이지요? 서로 반대입니다. 수원에서 서울로 가려면 북쪽이고 개성에서 서울로 가려면 남쪽이듯이 방향이 다릅니다. 그런 겁니다. 목표는 하나인데, 방법, 즉 방편이 다를 뿐인데 서로 자기가 말한 방향이 옳다고, 자기주장만 하는 고집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이지요. 우리 사회 또는 각 개인의 일도 이와 다를 바 없다는 것입니다. ‘내 생각, 내 방법만이 절대적이고 나머지는 모두 아니다, 옳지 않다’라는 아집적 편협주의를 경계한 것이지요. 그래서, 절대 긍정이나 절대 부정은 배제되어야 하겠지요. 화쟁이란 이런 위험성에서 서로 이해하고 통하자는 논리입니다. 불교식으로 말하면 화엄세계라고 말할 수 있겠네요.

임애월 : 한국 정치에서 더욱 극심하게 나타나는 현상이지요. 1차적 본능인 먹고사는 일, 즉 경제적으로 핍박해지면 상대를 배려하고 이해하려는 이타적인 의식수준을 키울 수 있는 여력이 없어서 그런 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일부 정치인들은 그런 사람들을 정치적으로 이용하고 있기도 하고요.

이경렬 : 이 시대에 가장 위험한 영역은 정치 세계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우리나라 정치 현실에 대해 식상해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바로 이분법적 극단 논리, 자기중심적 편협주의로 상대방을 비방하고 자기를 합리화하는 일, 등의 충돌이 우리를 피로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그래서 1,400년 전 원효성사의 말씀은 지금도 유효합니다. 어이구, 이런 말도 극단주의라고 하지 않을까? 그만하지요. (웃음)

임애월: 아니요, 맞는 말씀이십니다. 저도 모임에서나 단톡방 등에서 편협한 논리로 정치 얘기하는 사람을 만나면 참 피곤하다는 생각이 들거든요.(웃음) 이 시대에 ‘화쟁’은 꼭 필요한 사상이구나… 생각합니다.

  산행을 하면서, 시를 쓰면서 행복했을 때도 있었겠지요?

이경렬 : 물론이지요. 산행 중에 화두처럼 시제를 안고 가기도 하고 문득 문득 얻어지기도 하고요. 다녀와서 만들어지는 시도 많지요. 그러나 ‘산행은 곧 시작(詩作)이다’라고 나를 얽매어 놓지는 않습니다.

임애월 : 혹시 그로 인해 절망적일 때도 있으셨나요?

이경렬 : 절망은 아니고요. 허전할 때는 가끔 있어요. 잔뜩 기대를 하거나 무언가 만들어야지 하다가 안 될 때. 과욕이지요.(웃음)

임애월 : 시인님에게 문학과 산행을 빼고 앞으로 꼭 해보고 싶은 게 있을까요?

이경렬 : 나이 들면서, 가장 보람되고 행복한 일은 “창조적 활동”이라고 어느 심리학자가 말했는데, 저는 이에 크게 동감합니다. 우리 문인들이 가장 창조적인 활동을 하고 계시잖아요?

  저는 아버님 유전자를 받아서인지 어릴 때부터 목수 일을 좋아했어요. 초등학교 때부터, 아버지가 집의 설계도면을 그릴 때 저는 옆에서 토끼장 설계도를 그렸으니까요.

임애월 : 오, 초등학교 시절에 설계도를 그리고… 토끼장을 만드셨나요?

이경렬 : 그럼요. 서당개 삼년이지요. 아버지의 망치, 펜치, 톱 등으로 토끼장을 만들었지요. 토끼도 40여 마리까지 키워 봤어요.(웃음)

  창조적인 일 첫 번째는 시를 쓰는 일이지만, 틈틈이 목공예 창작품 만들기를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나름대로 디자인한 책꽂이, 약장, 장식대, 등 이 세상에 하나뿐인 제 작품을 만들어 여러 사람들에게 드리지요. 원하시는 것 있으면 말씀하세요. 만들어 드리죠. 물론 공짜입니다.(웃음)

임애월 : 재주가 참 많으시네요. 세상에 없던 것을 창조해 내는 일은 조물주만이 갖는 특권인데… 뿌듯하시겠어요. 저도 하나 부탁드려 볼까요? 제작 원가는 막걸리 한 잔으로 올리겠습니다.(웃음)

이경렬 : 하하, 네. 지금은 “원효성사 깨달음의 길” 책 출판이 우선이고요.

임애월 : 여러 가지로 많이 바쁘실 텐데 귀한 시간 내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이경렬 : 감사합니다.

 

 

- 山行 詩로, 원효의 ‘화쟁 사상’으로

우리 사회의 갈등을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되고 싶다는

큰 포부를 지닌 이경렬 시인,

히말라야처럼 품이 너른 그의 생각을 들여다보면서

넉넉하고 편안한 늦여름 하루를 보냈다. -

 

 

 

 

 

■□ 시인의 자선시

 

山行觀 - 1 외 4편

 

이 경 렬

 

 

삶이란 운명처럼 우수(憂愁)를 메고 간다

 

그렇게 가는 거야 아무렇지 않은 일상처럼 그렇게 가는 거야

우리에겐 슬픈 일이 있어도 동정의 눈빛으로 마음 몇 번 보내면 되고

그리움이나 애절함도 무심한 듯 하늘 한 번 쳐다보고

참지만 참기 어려운 아픔도 몇 번 견디는 거야

피할 수 없는 미련도 몇 개 지니고 가는 거야

그런 듯 아닌 듯, 그렇게 가는 거야

 

삶이란 견뎌낼 우수 그 운명의 이야기

 

 

 

 

 

 

山行觀 - 12

 

 

 

숨 가쁜 산행길을 오르다 돌아본다

 

물같이 흘러가는 물처럼 내려가는 길이다

나 홀로 꿈꾸며 살아가는 길이다

꺾이고 무너졌던 무심한 저 세월들

그 아픔이나 그 슬픔이 저렇듯 놓인 것을

결국은 아무것도 이루지 못했고 결국은 아무것도 남기지 않은 날들

 

보인다 세월의 모습 아름다운 저 허무

 

 

 

 

 

가을 숲이 비우는 만큼 청명해지는 하늘

 

 

 

이 숲도 살 내리듯 헐렁하여

하늘을 푸르게 합니다

 

젊은 날 땀 흥건한 열정은

무언가 남겨야 한다는 믿음이었지만

믿음 속에 청춘은 감금되었지요

 

청춘이듯 가을은 지나가면서

아무것도 남기지 않았습니다.

아무것도 남기지 않는 것을 남겼을 뿐입니다

 

몇 장 남은 잎

마저 떨어져

하늘을 더 푸르게 합니다

 

아무것도 남기지 않는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일인지

깨닫고 있는 지금입니다

 

 

 

 

 

상봉에 서서 폭설로 덮인 미시령을 보다

 

 

 

그래, 아는가

이 찬바람을 맞는 뜨거움

 

뼛속을 후빌수록 칼날로 일어서는 적의처럼

적의로 번뜩이는 칼날처럼

차고 추울수록

깊은 속, 속에서 일어서는 불꽃의 심지

그리고 아는가

생애는 늘 한 짐 가득 비애를 담고 있어도

추울수록 가슴 가득 들어차는 뜨거움

 

이 뜨거움 굽이굽이 움켜쥐고

적의처럼, 꿈틀거리는 미시령

 

 

 

 

 

제 빛깔 제 자리에 있는 대덕산에 오른다

 

 

 

제 빛깔로 제 자리에 있는 낙엽을 밟으며

제 빛깔로 제 자리에 있는 나무를 지나

다시 보아도 제 빛깔로 제 자리에 있는 냇물을 따라

산마루에 오르면

보인다, 제 빛깔로 제 자리에 있는

두루 두루 산마루의 정좌

 

산자락에 달라붙어 산의 품에 안길 줄 아는

제 빛깔로 제 자리에 있는 마을들이 보인다

벌레처럼 산만 파먹고 살 줄 아는

제 빛깔로 제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살 거다

이제 겨울이 깊어져도

도담도담 아이들도 산 빛깔을 닮으며 살 거다

 

 

 

 

이경렬 시인 약력

 

1957년 충남 아산 출생, 수원대 교육대학원 졸업.

1990년 《우리문학》으로 등단.

시집 󰡔내 강물의 거주지를 위하여󰡕

󰡔혼자 여행은 이따금 까닭 모르는 눈물을 흘리게 만든다󰡕

󰡔삶이 사랑이고 사랑이 삶이라고󰡕

백두대간 완주 수상록 󰡔아직도 가야할 길이 남아있구나󰡕

원효 관련 저서 󰡔원효성사, 그 마음을 찾아서󰡕등 다수.

2003년 경기문학인상, 2011년 수원문학 작품상,

2022년 수원시인상 수상. 현재 한국문인협회,

한국현대시인협회, 한국문인협회 화성지부,

수원시인협회 회원. 경기시조시인협회 회장.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차리염 | 작성시간 23.09.11 잘 감상하구 갑니다
    댓글 이모티콘
댓글 전체보기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