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에서 글과 인연을 만나다. 21
[베트남 여행기 - 혹시]
인생을 살아가면서, 삶을 긴장시키는 말이 있다. ‘혹시’ ‘만일’ 같은 말인데, 이 말은 예측할 수 없는 어떤
상황에 대한 걱정이기도 하면서, 때로는 헛수고하게 하는 일이기도 하다. 그러나 우리는 늘 그 ‘혹시’ 와
‘만일’ 때문에 긴장하거나 현재 필요하지 않은 것을 준비하는 일들을 셀 수 도 없이 겪으면서 살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 ‘혹시’ ‘만일’ 때문에 준비하는 수고에 비례하여 쓸데없는 걱정이 되고 말 지라도, 그 수고가
헛수고가 된다 해도, 그런 일 때문에 후회하거나 손해를 본 느낌을 받지 않는다. 그 이유는 준비 없이, 쓸데없는
염려라는 말로 호도한 후에 그 일이 실제 벌어진다면, 그 때 받아야 할 대가가 결코 가볍지 않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베트남 여행을 준비하면서 짐을 꾸리는 것 중 하나가 우산 문제였다. 비록 삼단 우산의 부피나 무게가 큰 비중
을 차지하는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여행에서 어쩌면 가장 불필요한 짐일 수도 있기 때문인데, 만일 여행지에서
비를 만난다 하더라도 그곳에서 해결할 방법은 있을 테니 굳이 신경 쓰지 않아도 될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행사의 안내, 그리고 인터넷에서 10월부터는 우기(雨期)라는 내용과 아내의 판단을 따라 우산을 챙기
기로 했다. 하긴 그 짐을 짊어지고 다닐 일정은 아니다. 비행기에 싫으면 되고, 차에 얹으면 되고 숙소에 두면
될 일이기 때문이기도 했고, 나 역시 ‘혹시’에 동의하면서 나는 삼단 우산을, 아내는 양산을 가방에 넣은 것이
다.
베트남을 여행하면서, 한 낮의 볕과 싸우면서, 그리고 가방의 우산을 보면서도 ‘괜히 가지고 왔다’는 생각은 들
었지만 가지고 온 것에 대한 불평은 없었다. 불평하는 것 자체가 내 판단의 부족한 것을 인정하는 모양이 되겠
기 때문이다.
여행을 마치고 인천공항에 내리면서 하늘은 조금 흐려 있었지만 비는 오지 않았다. 다만 태풍 소식을 베트남
에서부터 들었고 아랫녘은 비가 온다는 뉴스도 보았지만, 우리가 집에 도착하고 나서 쯤 되어 비가 올 것이라
는 판단을 내려 본다.
전철로 갈까? 생각은 했지만 여행의 피곤에 환승의 피곤을 더하고 싶은 생각이 없다. 처음 생각을 접고 버스표
를 구매한다.
버스를 기다리는 장소, 안성 평택 오산으로 가는 사람들이 모여 있었고, 그곳에서 주변 여행객들의 말을 들으니
오산에 비가 내리고 있다는 말이었다. 버스가 들어오기 전, 가방에서 우산을 꺼냈다. 그리고 가방을 버스의 화
물칸에 실었는데, 버스가 출발할 때까지 오지 않던 비가 인천대교를 건너오는 중에 한 방울씩 떨어지기 시작
한다.
세교에 도착할 때쯤을 제법 빗방울이 내리기 시작했고, 버스에서 내리면서 우산을 받쳐 들면서 ‘혹시’가 ‘역시’
가 되고, ‘만일’이 현실이 되었다는 것에 만족감을 얻는다. 하긴 입고 있는 옷도 집에 가면 벗어서 세탁을 할 것
인데도 그렇다.
아침을 인천에서 먹을까 하다가 아내의 고집에 집에 오니 12시, 부지런히 아침을 짓는 아내를 보며 가방을
정리한다. 갈 때 보다 늘어난 보따리, 가방 속에는 온통 세탁거리 밖에는 보이지 않는다.
아침식사에 곁들여 딸이 보내준 감홍로를 두어 잔 마신다. 밤 여객기, 그것도 사십 분이나 연착되어 출발한
것이기에 몸의 피곤함을 풀기 위한 행위이기도 하고, 풀어진 마음을 되잡기 위한 술이다. 술기운이 몸을 늘어
지게 한다. 이제 눈 좀 붙여야 하겠다. 여행에 관한 이야기는 내일부터 하나하나 정리하며 사진도 함께 정리
해야겠지.
여행기에 사진을 함께 올릴 것인가를 생각하면서 침대에 몸을 누인다.
(2019년 10월 2일 낮 두시 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