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에서 글과 인연을 만나다. 47
[비옷에 대한 추억]
이 글을 쓰는 날이 1월 10일 오전, 지난 화요일부터 내리는 비는 목요일까지, 그러니까 어제까지 쉬지 않고
내렸다. 한 겨울, 신년 초인 1월에 비가 내리다니, 하긴 그럴 경우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이번에 내리는
비는 과히 봄이나 가을에 내리는 비라고 해도 괜찮을 만큼 열심히 내려준 비였다.
문득, 지구 온난화의 문제는 우리 피부에 닿아 있고, 계절의 나뉨도 사라질 것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더불어
겨울의 눈을 만나려면 태백산 줄기를 중심으로 미시령, 한계령, 대관령이거나 지리산으로 가야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어제 통화를 했던 진주의 문우가 떠오른다. 눈꽃 열차를 타러 간다는 말인데, 이런 날씨라
면 눈꽃을 만날 수 있을까?
외출을 하기 위해 엘리베이터를 탔다. 내가 사는 층은 16층, 14층에서 한 남자가 탄다. 그런데 그가 입은 옷
이 묘했다. 아니 묘하다기 보다는 외출복 같기도 하고, 작업복 같기도 한데, 천이 부드럽다는 생각이 들이
않는 옷을 입고 있었던 것이다. 다시 그 남자의 옷을 보면서 ‘아! 비옷이구나.’
내가 물었다 “이 옷이 비옷인가요?” 그러자 남자가 대답한다. “예, 요새는 비옷도 참 잘 나와요.” 내가 말
했다. “나는 운동복인줄 알았어요,” 그렇게 말하고 보니 운동복 같아 보이기도 했다. 땀이 잘 흡수되는 그런
운동복 말이다. 1층에서 남자가 먼저 내린다. 그러고 보니 그 남자의 직업이 택배 배달을 하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나는 속으로 ‘일하는데 상당히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어릴 적, 내가 처음 기억하는 비옷은 짚으로 이엉 엮듯 엮어서 어깨에 걸치는 것이었다. 비옷이라고 할 수
없는, 어른들은 그것을 어께에 걸치고 들에 나갔고, 논두렁을 살폈으며, 피를 뽑았고, 억센 풀을 뽑아 밖으로
던지곤 했던 것이다. 그러고 보니 그 옷(?)은 비를 맞지 않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옷은 비에 젖을 수밖에 없지
만, 추위를 견딜 수 있는 보호막이었던 것이다.
그 후에 나도 입어 본 비옷은 요소비료 봉지에 구멍을 세 개(머리와 양 팔)를 뚫어서 입는 것이었다. 지금의
소매 없는 메리야스같이, 그것을 몸이 걸치면 몸을 마음대로 움직이기는 불편했지만, 비를 맞지는 않았다.
비료 포대가 두꺼운 비닐이었기 때문이다. 여자 분들은 그 포대를 가로로 잘라 허리를 감싸기도 했다.
비료 포대 비옷, 그것을 입고 걸치고 김을 맨다. 호미자루에 붙는 흙과 손바닥에 달라붙는 흙더미를 한 번씩
손으로 밀어 내면서, 그렇게 김을 맸고, 고무신에도 얼마나 흙이 잘 달라붙는지, 그럼에도 어른들은 비올 때
김을 매는 것이 한결 쉽다고 했고, 그 때 매두어야 풀뿌리까지 뽑을 수 있다고 했는데,
그 후에 만난 것이 비닐우산이다. 대나무로 살과 대를 만들고 비닐로 씌운 우산, 바람만 조금 불면 휙 뒤집어
지는, 그나마 그 우산은 귀한 것이었다. 한 집에 두 개있으면 잘 사는 집(?)이라고 인정받을 수 있었던, 잊어
버리거나 망가뜨리면 부모님께 혼이 나곤 했던 그 시절이었다.
아들의 학원에 가 보면 우산이 산더미(!)이다. 학생들이 비 올 때 쓰고 왔다가 잊고 간 것을 모아두는 것인데,
몇 달이 지나도 찾아가지 않는다. 덕분에 우리 집은 두 식구인데도 우산은 십여 개가 넘는다. 그만큼 흔해진
것이다.
그러고 보니 요즘 학생들, 잘 버린다. 학원 쓰레기통을 보면 빵도 뜯지 않은 것을 버리고, 음료수도 한 모금이
나 마셨을까? 싶은 것을 버리고, 하여튼 버린다. 문득 ‘쌀 한 톨 버리는 것은 하늘에 죄를 짓는 것’이라고 하
셨던 아버지의 말씀이 기억난다. 비는 그칠 생각이 없는지, 부지런히 내리고, 택배 남자도 다음을 향해 부지
런히 걷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