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에서 글과 인연을 만나다. 53
[열차를 타며]
조치원으로 이사 온 후 열차를 타는 일이 잦아졌다. 서울의 행사나 모임, 그리고 대전 대구 등에서 있는 행사,
그리고 개인적인 일들이 열차를 자주 이용하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더구나 열차를 이용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는데
우선 역이 집에서 도보로 오 분 거리라는 것,(버스 터미널은 십 분이 더 걸릴 것이다.), 그리고 경부선, 호남선
이 대전을 정점으로 갈라지기 때문에 그 두 방향의 열차들이 조치원에는 정차를 하고 있고, 그만큼 열자의
운행 횟수가 많다는 것이다. 더구나 버스보다 수도권의 접근성이 좋다. 평택, 수원, 영등 포, 용산, 서울 역,
등은 지하철과 연계가 되어주니, 이처럼 편리한 교통수단이 없는 것이다. 더불어 나는 국가의 지원으로 무궁
화 호는 50% 혜택을 보고, 전철은 무임이다. 따라서 서울로 가는 길이 불편하지 않다.
시간으로도 그렇다. 오산에 살 때에는 집에서 나와 버스로 오 분 거리의 전철역이 있지만 버스가 20여 분에
한 대씩 지나가기 때문에 그 시간까지 계산해야 하고, 전철을 타고 서울까지는 한 시간 이상 걸리기 때문에
종로 3가 등의 모임을 가려면 두 시간을 계산해야 한다. 그런데 조치원에서 서울 역까지 한 시간 반, 결국 같
은 시간대의 거리가 되어버린 것이다.
열차를 자주 이용하게 되면서 떠오르는 것은 열차의 추억이다. 완행열차, 급행열차가 있던 시절 좌석 표가
없이 먼저 앉는 사람이 임자였던 시절, 창문은 위로 올려 거치시키는 방식, 겨울이면 열차 안에 석탄 난로가
있던 시절, 좌석 옆에 재떨이가 있던 시절, 삶은 계란과 사이다가 있던 시절, 판매원이 카트를 끌고 목청 돋우
어 오징어와 맥주, 소주를 팔던 시절,
그 유명한 대전 발, 영시 오십분을 위하여 서둘러 가락국수 한 그릇을 우걱우걱 먹었고, 열차 출발 전의 몇
분 동안 김밥 파는 아주머니들이 열차 창문을 두드리던 시절, 철로가 단선이었기에 교차하기 위해 열차가 대
기하는 시간에 열차에서 내려서 담배를 급하게 피우던 어른들의 모습. 여객 승무원이 차내를 지나가면서 열
차 표를 검색하며 펀치로 구멍을 뚫어 주던 시절, 헌병들이 절도 있는 걸음으로 지나가면서 군인들의 휴가증
을 검색하던 시절,
학생들은 역 조금 떨어진 곳에 숨어 있다가, 열차가 출발하고 속도를 내기 전에 후다닥 무임승차를 하고, 내
려야 할 역이 가까워 오면서 열차 속도가 줄면 서둘러 뛰어 내리던 시절, 수학여행을 가기 위해 새벽부터 서
둘러 김밥 싸서 역으로 달음질 하던 시절, 하긴 그 시절의 수학여행은 거의 열차 이용이었고 가장 우선순위
에 드는 곳이 경주였으니, 요즘 학생들은 반 별로 버스를 이용하지만,
오늘도 나는 서울을 가기 위해 열차에 오른다. 늘 예정 된 일정이기에 왕복표를 미리 예매하기 때문에 입석
에 대한 염려는 없다. 객실은 덥다는 느낌이 들 정도의 훈기로 겉옷을 벗게 하고, 옆 자리의 젊은이가 스마트
폰으로 무엇인가 열심히 보고 있는데, 나는 신문을 펴 든다. 그러고 보니 신문에서 훈훈한 소식을 읽어 본 적
이 언제인지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보도 내용이 복잡하고 시끄럽다. 제발, 맛있게 읽을 만한 소식을 보고 싶다.
열차는 정확하게 시간을 맞춰 도착한다. 그러고 보니, 어릴 적 열차를 타기 위해 표를 끊으면, 승차장으로
들어가는 곳 입구에 역원이 서서 볼펜으로 차표에 체크를 했었는데, 열차에서 내려 대합실로 나가는 길목에
는 표를 회수하는 역무원이 있었고, 배웅하려면 입장권을 끊어서 승강장으로 들어가곤 했는데,
이제는 열차 표를 확인하지 않는다. 배웅 객이 입장권을 끊어 승차장에 들어가는 일도 없어졌다. 어쩌면 무
임승차를 하기는 그 시절보다 지금이 더 유리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면서 지하철 쪽으로 걸음을 옮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