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에서라도 6
“지금 보시는 책은 어떤 책 이예요?”
여자가 되물었다.
“아! 이 책이요, 육이오 전쟁에 관한 소설인데 참 잘 된 소설이라서 푹 빠져 읽고 있습니다.”
그러자 여자가 내 책을 보면서
“전집인가 보지요?”
하고 묻는다. 그랬다. 여섯 권으로 된 이 소설의 네 번째 책을 내가 보고 있는 중인 것이다.
“예, 여섯 권으로 된 소설인데 지금 사 권 째보고 있습니다.”
“그럼, 다른 책 말고 그 책을 빌려 주시겠어요?”
그거야 말하나 마나지, 지금 내가 보고 있는 책이라도 얼른 빌려줄 판인데,
그까짓 거 못할 것이 뭐 있겠는가?
“그럼요, 내일 빌려 드릴게요.”
“그럼,”
여자가 일어선다. 고개를 까딱 하곤 등을 내게 보이곤 돌아서서 걷는다. 걸음걸이가 예쁘다.
잘록한 허리 밑의 히프가 균형 있게 움직이고 있었다.
벌써 삼 일 째 여자는 보이지 않는다.
나는 지난 삼 일 동안 같은 시간에 놀이터의 이 자리에 앉아서 그 여자를 기다렸다.
물론 내가 보는 소설의 일 권과 내가 보던 사권을 들고서 말이다.
처음 첫 날은 아마 바쁜 일이 있는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다음 날은 어디 여행이라도 갔을 것이라고 생각을 했다.
하긴 며칠 나오지 못한다고 해서 내가 알 길은 없다. 전화번호도 모르고 집도 모른다.
그저 여기서 만난 여자일 뿐이다.
오늘도 나는 예정된 시간에 나와서 계속 책을 읽는 척 하면서 그 여자가 나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지만
이제 어둑해지는 시간이었고,
놀이터에서 놀던 아이들도 하나 둘 집으로 돌아갔으며 걷는 운동을 하는 젊은 사람들이 몇 있었으며
막걸리를 마시던 노인들도 벌써 마시고 돌아간 후였다.
오늘은 기분이 조금 상하려고 한다. 벌써 삼일 째 나는 여자를 기다렸고, 여자는 오지 않았다.
여자는 내게 립 서비스를 한 모양이다.
아니면 나를 골리려는 속셈으로 책을 빌려 달라고 했을 수도 있었다.
그랬다. 내가 보기 좋게 당한 것이다. 여자는 내가 자신을 보고 있다는 것을 알았고,
그래서 나를 골려주려고 그렇게 했던 것이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슈퍼로 가서 포켓용 소주를 하나와 소시지 하나를 사서 들고 놀이터로 왔다.
소주 병 마개를 따고 한 모금 마신 후 소시지 껍질을 벗기려고 고개를 숙이고 손에 힘을 주는데
내 발 앞에 누군가의 발이 와서 선다. 하이힐인 것을 보니 여자다.
소시지를 까던 손을 멈추고 고개를 들자 내 앞에는 그 여자가 서 있었다. 웃고 있었다.
미안해하는 웃음 같기도 하고, 반가운 웃음 같기도 한 그런 웃음을 웃고 있었다.
“어! 왔어요?”
나는 언제 마음이 상했었는지도 잊어버린 채 반가워서 소리를 질렀다.
조금 전까지 속으로 여자를 욕했다는 사실도 잊었다. 여자가 내 옆에 앉더니
“잘 계셨어요?”
하고 물으며 내 주변을 들러본다. 그러더니 내 옆에 놓은 두 권의 책을 본다.
“책을 가지고 나오셨네요. 어떻게 내가 나올 줄 아셨나 보지요?”
이 여자는 내가 삼일씩이나 책을 가지고 나와서 자기를 기다렸다는 것을 생각하지 못하는 모양이다.
나는 모른 척 넘어가기로 했다.
삼일씩이나 같은 시간에 같은 책을 가지고 같은 장소에 와서 당신을 기다렸다는 말은 차마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