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에서라도 8
“아! 전에 하던 일을 접고 다른 일 좀 알아보는 중입니다.”
“그러세요.”
여자는 더 이상 묻지를 않았다. 만일 더 물었다면 내 대답은 궁색해 질 뻔하였다.
나는 속으로 ‘그럼 언제 시간 있으세요?’하고 묻고 싶었다.
이왕 술 한 잔하기로 했으면 가능한 빠른 것이 좋지 않겠는가? 하는 계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물을 수는 없었다. 너무 속이 보이는 질문 같았기 때문이다.
“보통 책 한권 읽는데 얼마나 걸리세요?”
내가 물었다.
그 정도는 알아야 내 나름의 시간 계획을 세울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지만
특별하게 할 일도 없는 내 입장에서야 아무 때라도 좋은 것이다.
오히려 여자의 입에서 ‘지금 어떠세요?’ 하고 물어 주었으면 하는 욕심이 인다.
“한 삼일 정도요. 하지만 이 책의 페이지를 보니 사일 정도는 걸릴 것 같아요.”
“그러세요? 그럼 사일 후에 2권을 빌려 드리면 되겠군요.”
“그래주실래요? 그럼 고맙고요.”
“뭐 고맙기까지야…….”
“댁이 이 근처이신가 봐요?”
“아! 저요? 여기서 멀지 않습니다. 이것저것 생각하다가 머리 식힐 겸 여기로 오곤 하지요.”
“소주를 즐기시나 보지요?”
여자가 내 옆에 놓여있는 포켓용 소주를 보면서 물었다.
하긴 소주를 즐기기는 하지만 오늘 이 소주는 즐겨서 마시려고 한 소주는 아니다.
며칠 이 여자가 나오지 않는 바람에 은근한 짜증이 일어 사왔을 뿐이다.
하지만 그렇게 말 할 수는 없는 것.
“그냥, 오늘은 다른 사업 하나를 알아보다가”
“무슨 사업이신데요?”
여자의 질문에 나는 말을 잘 못 했다는 생각을 했다.
무슨 사업이라니? 겨우 알바 같은 일자리라도 알아보려고 광고지나 뒤지는 형편인데,
“뭐, 특별한 것은 아니고, 나중에 결정이 되면 말씀드릴게요.”
“그러세요. 결정되면 말씀해 주세요.”
여자가 가려는지 엉덩이를 의자에서 뗀다. 그리고 일어서서
“그럼, 사일 후에 여기서 봬요.”
하고는 내 인사를 받을 생각도 없이 돌아서서 또각또각 걷기 시작한다.
여자의 히프가 내 두 눈 가득 담겨온다.
나는 여자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그렇게 여자의 모습을 보고 있었다.
내 평생,
아니 평생이라는 말을 쓰기에는 아직 어린 나이겠지만 이번 사일처럼 지루하게 흘러가는 시간을
만나보지 못했다.
컴퓨터를 해도, 술을 마셔도, 형님 댁에 가서 어머니를 만나도,
하긴 어머니를 만나러 간 것은 자금 조달 문제 때문이었지만
아무래도 그 여자와 데이트를 하려면 어느 정도 남자의 체면을 세울 만큼의 자금이 필요한 것이겠기에,
어머니는 여자를 만난다는 것에 마음이 즐거우셨는지 두말없이 거금을 내어 놓으셨다.
거금이라야 두 사람이 식사하고 영화 한 편 보면 될 정도의 돈이었지만
어머니의 주머니 사정이나 내 형편으로 보면 거금인 것만은 확실하다.
그리고 형님도 어머니께 귀띔을 들으셨는지 ‘너 용돈 궁하지?’ 하면서 하얀 수표 석 장을 건넨다.
아직까지 형님에게 이만한 거금을 받아 본 적이 없었으니 분명 어머니로부터 무슨 말을 들었음이 확실하다.
나는 하릴없이 놀이터 주변을 서성거리기도 했었다.
혹시 그 여자의 눈에 뜨이면 지나가는 길이라고 핑계하면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여자는 지난 삼일 간 그 모습을 들어 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