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에서 글과 인연을 만나다. 63
[남해 여행기 1]
16일 오후 12시 30분, 아내와 손자를 태운 차가 조치원을 출발했다.
출발하면서 단골로 가는 마트에 들러서 고기와 술을 산다.
진주의 후배 시인과의 저녁 식사 때문이었는데,
몇 번의 방문에서 받은 대접과 나의 네 번째 시집 “기역과 리을 사이”에 실린 그의 글 “낡음” 때문에
저녁 대접을 하고 싶은 생각 때문이었다.
쉽게는 시내로 나오라 하여 식당에서 대접해도 되겠지만
그러면 오히려 그에게 더 큰 부담이 될 것이라는 판단도 있었고,
편안하게 그의 집 마당에서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식사를 하는 것이 더 좋으리라는 판단이 앞섰기 때문이다.
처음 생각은 삼겹살이었다. 하지만 아내의 생각은 달랐다.
이왕 고기를 살 것이면 꽃 등심으로 사자는 의견이었고, 나는 반대하지 않았다.
주머니가 아내에게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고기와 술(고기는 꽃 등심으로 2키로, 소주 6병 묶음, 양을 넉넉하게 준비한 것은, 나중에 그들
부부의 오붓한 시간을 만들게 하려는 의도)그리고 조금의 야채를 구입하고 길을 떠났다.
아! 아내가 된장에 청양고추를 넣어 볶은 것이 매콤하고 맛이 있어서 그것도 준비했다.
집에 있는 묵은 김치도 몇 포기, 그에게는 밥이나 해 놓으라고 부탁을 했다.
네비는 조치원에서 무주까지를 찾았는데,
무주까지는 고속도로를 이용하고 무주부터 진주까지는 일반도로를 이용할 생각이기 때문이다.
나는 차를 이용하여 여행을 할 때는 가능한 일반도로를 즐긴다.
하지만 조치원에서 금산을 다녀오려면 대전 시내를 통과해야 하는데
그 지루함과 답답함이 보통이 아니기 때문이었고,
차라리 무주에서부터 일반 도로를 이용하기로 한 것이다.
무주에서부터 일반도로를 이용해서 내려가는데,
아쉬운 것은 일반 도로도 거의 고속도로 수준으로 개발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하긴 외국의 몇 나라를 다녀본 경험으로 보아도 우리나라의 도로 수준은 세계적으로 잘 되어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정도이니, 교통이 편리한 것은 자랑할 만 한 일이다.
그러나 나처럼 여행을 즐기는 사람에게는 그것이 오히려 불편이 되어 준다.
그럼에도 틈틈이 옛 신작로 같은 분위기가 드러나는 도로를 달릴 때면 스스로 속도를 늦춘다.
그 풍경이 너무 사랑스럽고 아름답기 때문이기도 했고, 추억을 되살리기에도 적당하기 때문이다.
6- 70년대 새마을 운동이 한창일 때 지은 건물들,
낡아서 곧 무너질 것 같이 보이는 스레트 지붕과 허름한 여닫이 문, 담을 덮을 듯 자리 잡은 잡초들,
양철 지붕을 보면서는 양철지붕을 두드리는 빗소리를 기억했고, 그런 길을 만나면 나는 행복하기만 하다.
덕유산을 넘는데, 나는 여행을 하면서도 덕유산을 넘어보기는 처음이다.
그 굽이굽이가 정겹고, 산 중턱에 자리 잡은 한 채의 가옥이 반갑고, 흐르는 냇가의 물이 사랑스럽기만 했다.
이런 분위기를, 느낌을 어느 곳에서 만날 수 있을 것인가? 눈에 가득 담으면서 천천히 그렇게 길을 간다.
고속도로로 가면 세 시간도 안 걸릴 길을 나는 거의 다섯 시간이 걸려서 저녁 6시가 넘어서야 그의 집에
도착할 수 있었다.
저녁, 그의 마당에 놓여있는 원형식탁,
그의 식탁은 오래 된 주점에서 볼 수 있는 것인데 그 위에 상차림을 한다.
그리고 편안하게 음식을 나누며 대화를 한다.
여인들과 손자는 식사 후 자리를 떠나고 우리 둘은 밤 열두시가 되도록 대화를 나눈다.
삶과 문학과 문단에 대한 서로의 생각을 꺼내놓고 안주를 삼는다.
시골은 새벽에 일을 나가서 해가 뜨겁기 전에 들어온다는데, 우리는 그조차 무시한 시간을 붙들고 있다.
일어설 때 빈 소주병 네 개가 곁에 놓여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