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하루 제 2회
그는 다시 들 것 같지 않은 잠을 포기하고 한 손을 펼쳐 커튼 한 귀퉁이를 슬며시 들추자
그 틈으로 들어오고 싶어 아등바등 거리던 햇살이 이때다 하는 듯 뭉텅이로 쏟아져 들어왔다.
그는 햇살이 쏟아져 들어온 것을 보고서야 시간이 꽤 되었다는 생각을 하면서 스마트 폰의 액정을
손가락으로 쓱 그었다. 비밀번호가 설정되어 있지 않은 그의 스마트 폰은 곧 자신의 모습을 드러낸다.
파란 바탕에 선풍기를 닮은 민들레에서 씨앗이 바람에 흩날리는 것 같은 그림이 보였고
그 위로 하얀 글씨가 눈에 들어온다. 오전 10시 40분,
그는 시간을 확인하고서야 이제 일어나야한다는 의무감을 머리에 담는다.
그렇다고 오늘 특별한 약속이 있는 것도 아니고 꼭 해야 할 일이 있는 것도 아니지만
그래도 이 정도의 시간이면 충분히 일어날 시간이라고 생각하면서 그는 몸을 일으키며 손으로 이불을
몸으로부터 걷어낸다.
“이제 일어났어요?”
아내는 거실에서 음량을 최대한 줄인 티브이의 채널을 돌리고 있었다. 소리를 죽이는 이유는 분명하다.
그의 잠을 방해하지 않으려는 아내 나름의 배려이다. 지금 채널을 돌리는 것은 어느 방송의 아침 드라마가
끝이 났기 때문일 것이다.
이 시간쯤이면 아내는 드라마를 하루 종일 송출하는 방송을 찾아 채널을 고정할 것이다.
요즘 드라마를 송출하는 방송국에서는 이미 기존 방송에서 방영이 끝난 드라마를 연속방송으로 보내는 곳이
많기 때문이다. 아내는 눈으로 그를 힐끗 쳐다보면서 오른 손으로 채널 돌리는 일을 계속하고 있었다.
‘여자는 남자와 달라서 주방 일을 하면서도 방송을 다 본 다구요.’
언젠가 뉴스를 보고 싶어서 거실의 소파에 앉아 리모컨을 들고 뉴스 전문 방송을 보기 위해
방영되는 드라마의 채널을 바꾸었을 때 아내가 주방에서 큰 소리로 말을 했었다.
자신이 지금 주방에서 일을 하면서도 그 드라마를 보고 있으니 채널을 바꾸지 말라는 말이었다.
그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는 그가 티브이를 볼 때 누가 옆에서 말을 하면 집중 할 수 없어서 짜증을 내곤
했기 때문이었고 사실 그는 무엇을 할 때 누가 곁에서 말을 걸거나 소음이 들리면 집중력에 차질을 빗곤
했기 때문인 것이다.
그가 거실 한쪽에 있는 커피포드에 물을 붓고 전원을 켜는데 티브이의 채널을 드라마 방송하는 곳으로
고정시킨 아내가 입을 연다.
“아! 아침 해야 하는데, 티브이를 켜니 마침 지난 번 보지 못한 연속극이 나오길래”
하며 변명처럼 한 마디 하더니
“오늘 어디 가요?”
하며 묻는다.
그는 언제나 일어나면 우선 블랙커피부터 머그잔으로 한 잔 타서 먹는 습관이 있는 것을 알고 있는 아내는
그에게 아침을 권하지 않았고 그를 위한 아침상 차림을 하지 않았다.
아주 오래 전 결혼 후 그를 위해 정성을 들인 아침상을 차려놓고 식사를 권했지만 그가 거절한 후부터였다.
처음에는 그가 아침을 거절한 것에 대한 서운함을 표현했었고,
그 다음에는 건강을 이유로 공박을 주었지만 이제는 그조차 포기함으로서 그렇게 하는 것이
자신에게 유리하다는 것을 몸으로 깨달았기 때문인 것이다.
하지만 그가 일어나면 두 가지의 말은 꼭 했는데 그 말이 바로
‘이제 일어났어요?’ 하는 말과 ‘오늘 어디 가요?’ 하는 말인 것이다.
아내의 ‘이제 일어났어요?’ 하는 말은 그가 늘 같은 시간에 일어나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며
‘오늘 어디 가요?’ 하는 말은 그가 어떤 모임이나 약속이 없으면 하루 종일 밖에 나가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말이다. 하긴 그의 일상은 늘 분주하면서도 여유 있는 생활이다.
늘 분주하다는 말은 특별한 계획이 없음에도 계획은 늘 잡혀있었고
여유 있는 생활이라는 것은 그런 계획들 중에 꼭 실행해야 하는 계획은 그 모든 계획의 십분의 일이나
이 정도 밖에 되지 않기 때문이다.
다른 계획들은 해도 좋지만 안 해도 괜찮은 일들이었기 때문에
오늘 역시 아내의 질문은 매일의 습관처럼 하는 질문이었던 것이다.
결국 오늘의 일정도 그의 기분이나 생각에 의해 실행되거나 취소되거나 할 것들인데
그는 의례 하는 대답으로 아내의 질문에 응답했다.
“글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