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에서 글과 인연을 만나다. 89
[유골에서 느낀 情]
지난 회에 내가 기쁘게 받은 선물에 대한 글을 소개해 드렸으니 이런 글도 소개하는 것이 어떨지 걱정스럽지만
그럼에도 이 사연을 소개해 드리고 싶어서 써본다.
아마 1982년 정도일 것이다. 세월이 너무 흘러서 정확한 년도는 기억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이 사연은 동아일보 사회면에 작은 상자 기사로 소개된 사연인데. 내용인즉 호남 지방에서 명절을
지내고 올라온 삼남매가 연탄가스 중독으로 사망한 사건에 연결된 사연이기 때문이다.
사연인즉, 호남의 시골에서 농사를 짓는 분의 삼남매가 서울로 올라왔다. 작은 딸은 구로 공단의 공장에,
아들은 고등학교를 서울로 유학을 와서 두 남매가 영등포에 월세 방을 얻어 생활하고 있었고 큰 딸은 내가
사는 도시의 공장에 근무하면서 야학을 나오던 학생이었다. 당시 공업도시에 올라와서 직장 생활하는 청소년의
대다수는 초등학교를 졸업한 것이 학력의 끝이기에 야학을 다니고 검정고시를 통해 학력인정을 받으려고
공부하는 학생이 많았다.
그 해 설을 맞이하면서 삼 남매는 시골로 내려갔다. 큰 딸이 시골 가기 전에 내게 말했다.
‘선생님! 엄마에게 떡하고 나물하고 싸 달라 그래서 갖다 드릴게요.’ 그리고 내려갔는데, 명절 끝날 아침에
아버지의 집으로 전화가 왔다. 당시 나는 결혼해서 아버지 집 근처에서 살고 있었기에 쫓아가서 전화를 받았는데,
그 학생의 친구에게서 온 전화였고, 내용은 그녀가 연탄가스로 사망했다는 소식이었다.
놀라서 영등포 시립 병원으로 갔는데 일이 그렇게 된 것이다.
삼남매가 시골에서 올라와 방에 연탄불을 피우고 함께 잠을 잔 것이 생의 마지막 날이 된 것이다.
하긴 그 당시만 해도 연탄가스 중독이라는 소식은 거의 매일 신문이나 티브이에서 단골 소식이 되는 시절이었으니,
그 삼남매가 며칠 불이 꺼진 방을 따뜻하게 하기 위해서 연탄불을 피우고 자는 동안 가스가 방안으로 스며들었던
것이다.
삼일을 어떻게 보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내 기억에 자리하고 있는 것은 그 날,
즉 화장장에서 삼남매의 화장을 마치고 유골을 보내기 위해 뚝섬유원지에 갔고(당시의 뚝섬유원지는 지금 같지
않았다.) 부모가 자식들의 유골상자를 열어 한 주먹씩 집어 강으로 뿌리고 있다가 아버지가 상자 하나를 내게로
가지고 와서 내게 건네주면서 ‘선생님께서 한 줌 뿌려 주세요. 딸이 늘 선생님 이야기를 했고, 올라올 때도
지 에미가 싸주는 떡과 나물을 선생님께 전해 주게 되었다며 무척 좋아했는데,’ 하는 것이다.
얼떨결에 받아 든 상자, 그 안에는 회색이라고 할까? 아니면 쥐색 쪽으로 가깝다고 할까? 가루가 담겨 있었는데,
한 주먹 움켜 집으니 뽀드득 하는 촉감이 나는데, 그 촉감은 어릴 적 학교에서 배급으로 나눠주었던 가루우유를 집는 느낌보다 더 강하고 손바닥을 약하게 찌르는 듯 하며 뽀드득하는 느낌이었다.
그 유골을 강으로 뿌려 주면서 당시에는 조금 조심스러운, 그리고 무서운 그런 기분이었지만 차마 아버지의 부탁을
거절 할 수 없어서 한 주먹 집어 뿌려주었을 뿐인데,
시간이 지난 후, 어쩌면 그 행위는 그 학생이 내게 남겨준 추억중 하나가 되었고,
내 인생에 주어진 선물(?)이 되어버린 일이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내게 그 행위는 아직까지는 처음이자 마지막
유골의 경험이 되었는데, 문득 선물을 생각하다가 이 일이 생각나는 것은 왜일까?
글을 쓰면서도 조금은 조심스러운 추억 하나를 소개해보는 것이다. (2021. 2, 5)
*여행은 1. 시간 있을 때 떠나라. 2. 가용 가능한 돈으로만 하라. 3. 가장 싸고 느리게 하라. 그러면 만 원으로도
가능하고, 어제 갔던 곳에서도 또 다른 글을 만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