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관계 5
“그러세요! 그럼 볼일 보시고 언제 시간나면 말씀 주세요. 제가 드릴 말씀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마시고요.”
표 대리가 그렇게 말하곤 일어서서 사무실로 들어간다.
그는 내일 저녁에라도 표 대리가 하고 싶다는 말이 무엇인지 들어볼까? 하는 생각이 잠깐 들었지만 그녀의
문제가 그에게는 더 급한 문제였기에 표 대리의 뒷모습만 바라 볼 뿐이다.
3
지난 삼 개월, 그는 그녀의 흔적이라도 찾을 수 있을까 싶어서 거의 매일 그녀와 다녔던 장소를 돌아다녔지만
그녀에 대한 흔적은 찾을 수 없었다. 세상에 이런 일이 있을까 싶다. 아무리 그렇더라도 사람이란 동물이 자신의
생활 반경을 이렇게 깨끗하게 지워버릴 수도 있는가 하는 생각도 들고, 어쩌면 이민을 갔거나 아니면 죽었을 수도
있을 것이라는 생각도 해 보지만 딱히 그런 생각은 그의 마음이 조급함에 따른 생각이지 상황을 살펴보면 그럴
수는 없는 일이었다. 이민을 가려면 어느 정도의 준비기간도 필요하고 그런 낌새를 그가 느끼지 못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고, 죽으려면 그 전 날 저녁까지 그와 함께 그동안 했었던 모든 행위를 다 하면서 다음 날 죽을 것이라고
사표를 내지는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사람의 삶에는 전혀 생각하지 못한 일들이 일어나기도 하지만 말이다.
회사 식당에서 점심을 먹은 그는 휴게실에서 커피를 한 잔 뽑아 마시면서 이제는 그녀에 대한 기억을 지워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아니 어쩌면 그가 그녀에 대한 기억을 지워야겠다는 생각을 하기 전에 그의 생활은 그녀를 잊어가고
있었다는 말이 맞는 말이다.
그가 커피를 마시고 빈 종이컵을 휴지통에 버리려고 일어서는데 표 대리가 그의 곁으로 가까이 다가온다. 그러고
보니 표 대리는 지난 삼 개월 동안에 그에게 시간이 있느냐는 질문을 여러 번 했었다. 할 말이 있다면서, 오늘도
보나마나 그 말을 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잠시 그는 고민에 빠진다. 어떻게 할까? 차라리 그녀에 대한 기억을
지우려고 마음먹었다면 가능한 빨리 그녀를 잊을 수 있는 다른 방식의 일상이 필요할 것이다.
그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표 대리의 모습을 본다. 그동안 그에게 보이지 않았던 표 대리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저만하면 괜찮은 몸매이고, 얼굴도 저만하면 되었고. 표 대리의 업무 처리를 보아서는 한 가정의 가정주부로서 한
남자의 여자로서 모자라는 여자는 아니라는 생각이 처음으로 그의 가슴에 내려앉는다. 만일 오늘 표 대리가 그에게
시간이 있느냐고 묻는다면 그는 서슴없이 그렇다고 대답할 생각이다. 하지만 그의 생각은 여지없이 무너진다.
“강 대리님, 오늘 오후에 출장을 가셔야 한 다네요.”
“출장이요? 어디?”
“과장님이 저와 함께 오라는데, 출장이라기보다는 협력업체에 가서 업무를 볼 일이 있다더군요.”
그는 일어서서 표대리와 함께 과장에게로 간다. 그가 근무하는 부서에서 특별히 출장이라는 명분으로 밖에 나갈
일은 없는 부서이다. 그저 외출은 하지만 말이다. 어쨌든 과장이 찾으니 가야하고 과장이 일을 시키면 해야 한다.
“아! 강 대리. 오늘 케이 기획사 알지? 거기 좀 다녀오지”
“케이 기획사요?”
“그래! 특별한 일은 아니고 지난 번 찍은 광고 영상이 잘못 되었다는데, 다시 찍어야 한다는군.”
그는 생각한다. 광고 영상을 다시 찍는데 자신이 할 일이 무엇이란 말인가? 그런 그의 의중을 알았다는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