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관계 8
“그래서 천 과장은 지금 미국에?”
“맞아요. 미국에 살고 있어요. 엊그제도 통화했는데 나더러 대리님과 잘 되어가고 있냐고 묻던데…….”
“그건 무슨?”
“아! 선배가 말했어요. 우리는 참 묘한 관계라고, 그러면서 나더러 말하기를 만일 네가 그 남자를 잊지 못하고
있고 그 남자와 같은 흔적이 있는 남자를 찾는다면 자신이 양보하겠다고, 하긴 선배는 이미 미국의 남자를 사귀
고 있었으니까 양보가 아니라 대리님을 차 버리는 것이고 나더러 자신이 차버린 남자와 사귀라고 하는 것이지만
말예요.”
“그래서?”
“그런데요. 사람 마음이라는 것이 생각대로 안 되는 모양이에요. 선배의 말을 듣고 처음에는 얼마나 황당하고
기분 나쁘던지, 이미 한 남자에게 같이 몸을 주었던 사이인데 다시 한 남자에게 몸을 주어야 한다는 설정도 기분
나빴지만, 그 때에는 그 남자가 선배와 관계가 있다는 것을 모르는 상태에서 좋아하고 관계를 맺은 것이지만 지
금은 선배가 대리님과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데 그렇게 말한다는 것이 정말 속상했지요. 하지만,”
“하지만!”
“아까 말씀 드린 것처럼 사람 마음이라는 것이 정말 묘하더라고요. 선배가 대리님과의 관계를 끝낸다는 말을
듣는 순간 이상하게 마음이 놓이더라고요. 이제는 대리님을 나 혼자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는 일말의 안심이라
고나 할까요. 맞아요. 선배와의 관계를 알면서도 내 나름 마음을 졸였어요. 언제나 내가 대리님과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을까를 상상하기도 했고요.”
그는 표 대리의 말을 들으면서 마음이 편치 않았다. 하지만 또 다른 욕구 하나가 그에게서 꿈틀 거리고 있다는
것도 함께 느끼고 있었다.
“저기요. 제가 너무 까졌는지는 모르겠지만요. 우리 한번 시간을 만들어 보지 않을래요? 대리님도 선배와의 관계
에서 이미 깨끗한 자신은 아닐 테고요, 저도 이미 그 남자에게서 깨끗할 수 없는 존재가 되었으니까요. 그냥 이렇
게 해요. 당분간 우리 서로에게서 허무와 상실감을 없애 보기로 해요. 그렇게 지내다가 정말 서로에게 필요한 존재
라고 판단되면 그때 다시 생각하면 되지 않겠어요. 물론 서로에게 필요 하지 않다고 판단되면 또 그렇게 해도 되고
요.”
그는 표 대리의 얼굴을 빤히 쳐다본다. 담담한 표정이다. 그런데 그 담담한 표정 위에 흐르는 눈물이 보인다.
어쩌면 나에게 이렇게 말하는 표 대리의 마음이 얼마나 아플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래! 저 여자가 그렇다면 나를 보면서 지난 삼 년, 아니 적어도 천 과장과 관계를 맺기 시작한 이년 전부터 천 과장
과 나를 바라보며 무척이나 마음이 불편했었겠구나. 그리고 이 말을 나에게 하기까지 얼마나 혼자 마음 졸였을까’
“선배도 결혼하러 미국으로 가기 전에 제게 말했어요. 마음이 많이 아프다고요. 대리님을 사랑하지만 자신이 죽은
그 남자에게 매여 있는 동안은 대리님을 결코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대리 만족일 수 있다고요. 어쩌면 선배의 말이
맞을 거예요. 저도 어쩌면 그래서 대리님을 좋아하고 있는 것일 테니까요. 하지만 지금의 마음을 나도 어쩔 수가
없네요.”
그녀가 잠시 말을 끊고 그를 바라본다. 눈물은 말랐지만 표정은 일그러져있다. 그는 이 여자에게서 물러설 수 없게
될 것이라는 느낌을 받는다.
“그냥, 너무 깊이 생각하지 마시고요. 그냥 생각해 보시고 마음이 결정되면 제게 메일을 주세요, 문자 주셔도 좋고요.”
그 말을 하고 난 후 표 대리는 일어선다. 그리고 그에게 목례를 하더니 꿋꿋하게 서서 흔들리지 않고 또박또박 앞을
보고 걷기 시작한다. 그녀의 모습이 안보일 때까지 그는 그 자리에 앉아 있었고 그는 그녀의 뒷모습만 보았을 뿐
고개를 돌리는 모습을 본 기억은 없다. 하지만 그는 마음의 결정을 내린다. 내일 그녀와 함께 자주 저녁을 먹던
식당과 그녀와 차를 마시던 커피숍과 그녀와 함께 시간을 보냈던 그 방에서 다르면서도 같은 여자와 함께 하게 될
것이라고.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