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사진 한 장 -46회-
나는 아직 덜 깬 술 탓을 하는 것처럼 묘하게 보이려고 애쓰면서 그의 질문에 덧 질문을 하고 있다.
그럴 필요는 없는데, 그냥 그녀의 이름을 말하면 되는 것인데 나는 그의 표정을 보면서 차마 본명을
선뜻 말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 말한 여자의 이름말입니다.”
박 시인의 목소리가 차갑게 들린다. 무슨 중요한 결단이나 한 것처럼 결연한 색이 가득 담겨 있는
목소리였다.
“나 선영씨라고”
“나,”
그의 말이 끊기는데 그의 얼굴은 더욱 일그러져 있다.
“선영이라고요?”
“그래요. 나 선영씨”
“정말인가요? 그 소설의 주인공 이름이 나 선영이 확실합니까?”
그는 재차 아주 중요한 사실을 확인이라도 하려는 것처럼 그 이름을 되뇌고 있었다. 그가 내게 묻는
것이 아니라 그 스스로 그 이름을 그의 기억 속에서 꺼내고 있는 것이다.
“맞아요, 나 선영. 그녀의 이름이고 그의 딸 이름이 박 명희라고.”
“아!”
그가 고개를 푹 숙인다. 그리고 내가 느끼기에는 아주 긴 시간을 그렇게 하고 있는데 그가 고개를 들
려고 할 즈음에 그의 어깨가 흔들리고 있었다.
“시인님, 다른 말씀은 나중에 드리기로 하지요, 다만,”
“다만?”
“그 여자가 있는 곳의 주소를 알 수 있을까요?”
“박 시인!”
“맞습니다. 전에 제가 공원에서 말씀드린 그 여자, 그 여자가 바로 그녀였습니다.”
나는 그의 입에서 나오는 그 말을 들으면서 내가 지금 큰 실수를 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
을 한다.
괜히 잊혀진 이야기를, 이제는 아주 잊어 버려야 할 이야기를, 그저 추억이라는 이름으로 마음 깊은
곳에 감추고 있어야 할 이야기를. 내가 그에게 꺼내 버린, 아주 중요한 비밀을 폭로한 것 같은 묘한 기
분이 든다.
사람에게는 누구라도 잊히지는 않지만 누구에게라도 꺼낼 수 없는 비밀스러운 추억 하나는 간직하고
있는 법이다. 어쩌면 나는 지금 나 선영씨와 그의 딸인 박 명희에게 그리고 그의 언니와 그의 형부에게
큰 실수를 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다. 박 시인은 그녀 때문에 결혼도 포기하고 산다지만, 그것
이 나 선영이라는 여자를 잊지 못해서 그러는 것일 수도 있지만 나 선영이라는 여자에게는 이제 잊혀진
추억이거나 기억에서 지워진 이야기 일수도 있는 일이며, 이제는 그녀 나름대로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데 그녀가 원치 않는 방식으로 과거가 들춰지고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아! 나는 지금 엄청난 실수를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적어도 내가 이 이야기를 누구에게라도 꺼낼 때
에는 당사자에게 미리 귀띔이라도 했어야만 했다. 하지만 난 지금 당사자인 나 선영씨와 그의 가족에게
그 어떤 내용이라도 사실을 들어낼 수도 있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나는 그들의 사생활에 어
떤 방식으로든 제한을 두게 되는 실수를 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