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에서 글과 인연을 만나다. 17
[첫 자유 여행 - 속초]
내가 여행을 좋아하게 된 것은 학창시절 문득 다녀온 속초 여행이었다. 그리고 이 여행을 통해
나는 여행은 어떻게 하는 것이 진정한 여행인가 하는 것을 깨우치게 되었기에 소개해 드리려고
한다.
80낸 대 초, 사회는 어수선했고, 학교는 몸살을 앓았고, 학생들이 거리를 뒤덮고 최류탄 가스
냄새가 도시의 골목을 점령하고 있던 시절, 그 날 아침 나는 학교를 가려고 집을 나섰다. 당시
성남 상대원에 살았던 나는 750번 버스로 을지로 5가에 내렸고, 그런데 버스에서 내리면서 내
마음에 어디론가 훌쩍 다녀오고 싶다는 욕구가 치밀었다.
멀지 않은 고속버스 정류장(동대문)으로 갔다. 그리고 주머니를 털어 점심, 커피와 음료 값과
약간의 비상금을 제외한 돈을 반으로 나누어 보니 속초까지 다녀올 돈이 되었다. 주저 없이
속초행 동양고속버스 표를 구입했다.
당시의 고속버스는 동대문에서 장충동 언덕, 한남동, 제3한강교(한남대교)를 지나 신갈에서
동해선을 따라 가는 경로였다. 승무원이 있었는데, 항공 승무원 다음으로 인기가 있었던
여성들의 직장이었고, 학력, 미모까지를 합격해야 하는 선망의 직장이기도 했다. 차내에는
커피, 물, 그리고 소화제, 검은 비닐이 구비되어있었고, 영화를 틀어 주었으며 자리마다 이어
폰이 설치되어 있었다.
속초를 처음 가본, 아니 바다를 처음 보는 날이었는데, 속초에서 내리니 속초해수욕장이 오
분 거리, 나는 그곳으로 가서 캔 맥주 두 개를 사서 모래밭에 앉아 바다를 바라보며(요즘 말
로 멍 때리는 것) 맥주를 마시고, 그리고 돌아온 것이 전부였던 그 여행, 그것이 내 삶의 중
요한 방식으로 자리하게 된 것이다.
이 때 속초 바닷가의 캔 맥주 마신 장면은 ‘소설 인계 동’에서 박 양이 속초 해수욕장에서 늦
은 밤 소주를 마신 후 약을 먹고 죽으려고 하다가 언니를 만나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된다는
내용으로 변화되어 소개하고 있다.
그 후에 동대문시장에서 산 가방이(진주의 후배 김 시인이 소개한 ‘낡음’ 4집 ‘기억과 리을
사이’에 게제) 40년 가까이 내 어깨에 함께 한 가방이다. 낡았지만 추하지 않고, 오래 되었
지만 한 번도 고장 나거나 속을 썩인 일이 없는, 지금도 여행을 준비할 때 제일 먼저 내 곁
을 지켜주는 가방으로 존재하고 있다.
그 때 내 안에 자리한 여행의 기준은 이렇다.
1. 시간 있을 때 떠나라.
여행은 일정을 짜고, 그 일정에 맞는 과정을 계획하는 것 보다는 아무 때고 시간이 있고 떠
나고 싶을 때 떠나라는 것이다.
2. 주머니 것으로 해결하라.
일정에 따른 비용을 계산하거나 준비하는 것이 아니라, 길을 떠나면서 주머니에 가용 가능
한 돈으로 식대와 기타 비용, 그리고 그 나머지 돈이 왕복 교통비로 허용하는 지역을 가되 가
능한 가 보지 못한 곳으로 떠나라.
3. 최대한 느림으로 다녀라.
가용 가능한 교통비로 목적지를 정하되, 대중교통, 그것도 상대적으로 싼 교통을 이용하라
는 것이다. 여행은 느림에서야 만나는 것들이 있으며 느낌을 얻게 되는 것이며, 그것이 글의
소재가 되기 때문이다.
4. 음식은 될 수 있는 대로 그 지역에서 맛 볼 수 있는, 또는 그 지역이 자랑하는 음식을 먹어
보는 것이 좋다.
이런 방식으로 여행을 다니기 시작했다. 그리고 한 동안은 그런 여행이 가능했었다. 그러나 그
후, 문단의 활동에서 함께하는 여행이 많아지면서, 또한 지역에 거주하는 지인들의 초대역시
내 여행의 한 부분이 되어있어서, 이제는 일 년에 한두 번 정도 밖에 하지 못하는 아쉬움은
있지만, 그래도 나는 그런 여행을 꿈꾸며, 그런 여행을 다니려고 욕심 부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