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글들을 읽다가 눈에 뜨인 두 편의 글을 세 번에 나누어 소개 해 드립니다.
고정현시인의 가방
“낡음” 김창현시인
낡은 이 가방의 주인공은 고 정현 시인이다. 젊은이들과 격의 없이 교류하시는 하얀 백발에 멋진
노년의 중견 시인은 문단의 원로이기도 하지만 자신은 아마도 아직 40대 젊음에서 벗어나지 못하
는 것 같다. 1년 전 불쑥 찾아오신 시인의 가방은 그를 더욱 더 시인이게 했는데 이번에도 또 그
낡음을 들고 진주에 오셨다. 낡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 - 늙음을 그대로 인정하지 못하는 본인
과는 대비되는 듯,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난 늙음을 마치 세상의 어른이라도 된 듯 대접받으려는 많은 늙음을 본다. 늙음은 자연으로 돌아
가는 과정 중 퇴화와 소멸의 과정이다. 낡음을 그대로 들고 다니는 고 정현 시인은 늙음을 그대로 인
정하는 분인 건 자명하다. 늙음으로 젊음 위에 서지 않으며 낡은 모습 그대로 자기를 내어준다. 난 문
단에서도 한참 어른이고 선배인 그분을 그래서 좋아한다. 친구이고 선배이고 어른이다. 존경은 자발
적으로 우러나는 것이지 존경을 받고자 하는 대상의 요구에 부응하는 것이 아니다.
존경은 존경하는 사람의 권리이고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의 권리이다. 우리는 때때로 사랑을 강요
하는 경우가 많다. 내가 너를 사랑하니까 너도 그래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는 선물을 주었으니까 되
받아야 된다는 것과 같다. 물질이 만능이다 보니 무형의 가치인 사랑도 마치 거래하듯 하는 것인데
우리가 학습된 경제관념 때문인 듯싶다. 사랑은 하고 싶은 사람의 권리이고 사랑은 피드백을 원하지
않음이다.
사랑함으로 행복하고 자신의 기쁨 속에 드는 것이다.
자신이 사랑한다고 타인을 해치거나 원하지 않는 행위를 하는 것은 추행이다. 타인의 아픔을 간과
하는 사랑은 집착이다. 진정한 사랑은 스스로가 흐뭇하고 행복해야 한다. 상대에게 바라거나 원함이
없어야 하고 올곧이 자산을 다 주어도 아까움이 없어야 한다. 꽃을 보고 예쁘다고 하면 자신이 좋은
것과 같음인데 우리는 꽃이 기뻐하지 않는다고 꽃에게 화풀이를 하는 형상으로 산다. 존경도 이와
같다. 존경은 고위직에 있다고, 학생을 가르치는 선생님이라고, 나이를 먹었다고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자신을 내려놓고 타인에게 관심을 기울이고 타인의 사람으로 걸어 들어갈 때 타인으로부터
저절로 우러나는 것이다. 특히 선배는 도움을 요청하는 후배에게 자신의 경험과 지식을 지혜의 바탕
에서 후배의 눈높이에 맞춰 이끌어 줄 때 존경심이 생겨난다. 우리는 보통 선배라고 자신의 시각으
로 보고 후배의 입장을 배려하지 않고 마구 지적해대는 선배를 보는데 이는 간섭이거나 강요이다.
반드시 도움을 요청하거나 길을 몰라 허덕이는 후배에게 아버지가 어린 아이를 걱정하듯 돌부리를
치우는 마음으로 대할 때 후배는 선배들을 존경할 것이다.
우리 네 명 중에서 고정현 시인이 소개한, 진주에서 식당을 하며 시를 쓰는 조문정 시인과 광양
포스코에 근무하며 시를 쓰는 강 시인은 초면이다. 고정현 시인의 Sns친구인데 그도 오프라인에서
만나는 건 처음이란다. 글이라는 모티브가 있어서 그런지 낡음과 새로움 속에서 우리 넷은 곧 접점
을 찾았다. 적당한 낡음이 우리를 이끄는 시간, 무뎌진 중년들이 모이면 부딪힘은 적다. 20대에는
새로움과 부딪히면 모서리들이 자주 닿곤 했다. 괜히 싸우고 부딪히기가 일쑤였다. 낡음은 유행가
가사처럼 낡음이 아니라 익어감인 것 같다. 오십 대의 세 사람과 칠십을 바라보는 낡아가는 사람들
이 모여 농익어 간다. 언젠가 떨어져 썩어갈 미래가 아른거리기도 하지만 익을 대로 익어가는 삶,
튼실한 열매로 누군가에게 등대가 되면 좋겠다.
반 백발이 올 백발이 되면 나도 낡음을 즐길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