셔츠 14회
“술 안 드세요?”
여자가 석 잔째 비우고 다시 한 잔을 주문하면서 그에게 한 말이었다. 그러고 보니 그는 이제 두
잔째를 앞에 놓고 반이나 남은 상태였다. 그는 여자의 말을 들으면서 남은 잔을 들어 마신 후 한
잔을 주문한다.
“술이 저보다 약하신가 봐요?”
그는 여자의 얼굴을 본다. 얼굴에는 술기운이 발가스레 올라와 있었다. 여기서 더 마시면 여자는
취할 것이다. 하지만 그는 그녀에게 술을 그만 마시는 것이 좋겠다는 속내를 끄집어 내지 못한다.
이상하게 그녀가 아직도 그에게 할 말이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있기 때문이었다.
“아! 참! 선생님 명함 있으시죠?”
그는 왜 그러냐고 묻지도 않고 지갑에서 명함 한 장을 꺼내서 그녀 앞에 놓는다. 그녀는 그의 명
함을 보더니 고개를 끄덕인다. 하지만 그는 그녀가 왜 고개를 끄덕이는지를 모른다. 그저 생각나면
전화나 하겠지.
“제가요. 왜 선생님 명함을 달라 그랬는가 하면요. 새 상품이 나오면 문자를 넣어 드리려고 그런
거예요. 아!”
여자가 무릎을 친다. 무엇인가 잊었던 것이 있었다는 표정이다.
“아까 제가 왜 선생님께 날개를 드렸는지 아세요?”
그는 다시 그녀의 얼굴을 본다. 약간은 짓궂은 표정이다. 아니 짓궂 다기 보다는 조금 슬퍼 보이는
표정이다. 아니 그것도 저것도 아닌 표정이다. 그녀는 조금 취하고 있었다.
“선생님. 제가 그래도 여기 매장에서 벌써 구 년째 근무 중이지요. 그래서 그런지 손님들을 보면 어
떤 때에는 대충 생각한 것이 맞는 경우가 있거든요. 그래서 말인데, 선생님! 사별하셨어요?”
그가 그녀의 말을 들으면서 조금 놀란다. 하지만 곧 그녀는 자신이 말을 잘못했다는 듯 고개를 좌우
로 흔들더니
“제가 너무 주제넘었나요?”
그는 무엇을 숨기다가 들킨 어린 아이처럼 고개를 바짝 들어 그녀를 똑바로 쳐다본다. 꼭 시비를 거
는 그런 표정으로
“미안해요. 하지만 그렇게 느꼈거든요.”
“무슨 근거로?”
“있잖아요. 남성복 매장에는 남자 혼자 오는 경우가 거의 없거든요. 아니 젊은 청년 같으면 혼자 와서
셔츠를 사 가는 경우도 있지만, 보통은 부부가 함께 오거나 부인이 혼자 와서 사 가는 경우가 많거든요.
돌아가신 사모님 처럼요.”
그녀는 벌써 그의 아내가 죽었다는 것이 기정 사실인양 말하고 있었다.
그의 얼굴이 붉어진다. 그는 그의 앞에 놓은 맥주를 한 번에 다 들이킨다. 문득 아내의 모습이 떠올랐다.
아내에게 큰 잘못을 저지르는 것 같은 기분이다.
“선생님께서 혼자 올라오셨을 때 그런 것을 조금 느꼈고 선생님 셔츠의 이니셜을 보면서 확신이 들었
어요. 선생님의 부인은 이혼이 아니라 사별이라는 것을요. 제가 아는 부인은 결코 선생님을 떠나실 분
이 아니었거든요. 아까도 말씀 드린 것처럼 지하 매장에서 자반고등어를 사 드린 것도 사별이라는 확신
이 들었기 때문이었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