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에서 만난 글과 인연. 212
[문단 20년, 그 계기]
이 글을 소개하기 전에 소개드렸던 시 ‘신작로에서’는 350편이 넘는 연작시 중 첫 시집 “붉은 구름
이고 싶다”에 수록된 몇 편인데, 그 시들을 살펴보면 부정적인 내용으로 가득하다. 그 이유는 그 시
절의 내 삶이 그랬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신작로에서’라는 연작시를 나는 아끼고 있는데, 그 것은
그 시들이 등단 초기 작품일 뿐 아니라 당시의 내 삶의 환경과 처지가 그대로 담겨있기 때문이다.
내가 문단에 등단 한 것이 2005년 4월에 작품을 제출하고 5월에 심사를 받고 6월호(월간지)를 통해
등단하였으니 이제 20년의 세월을 시인으로, 작가로 활동해 온 것이다. 참 짧지 않은 세월이었음에도
나름의 흔적을 남기지 못한. 그저 문인이라는 명맥만 유지하고 있는 것이 부끄러운 일인데, 그럼에도
개인적으로는 나름의 뿌듯함을 간직하고 있다.
이제 지난 20년을 돌아보면서, 내가 문인이 되었던 과정과 문단 생활에서 내가 기억하고 있는 일들을
기록하고 소개함으로 나름의 문단 생활의 한 획을 정리해보면서 내게 어떤 방식으로든 영향을 끼친
분들과 모임을 기록하는 것도 글을 쓰는 존재로서의 작은 보람이 되리라 생각하며 이 글을 쓰기 시작
해본다.
한 사람의 인생 전부를 기록한다는 것은 결코 만만치 않은 일이다. 그러므로 나는 이 글의 시작을 ‘왜
글을 쓰게 되었는가?’라는 것에서부터 출발하도록 하겠다.
2천 년대 초까지 나는 직원 몇 사람을 두고 작은 하청 업을 하고 있었다. 소규모의 사업이었지만 그 소
득으로 두 아들을 영국으로 유학까지 보낼 수 있었고(큰 아들은 7년, 작은 아들은 3년), 물론 생활비는
아들들이 아르바이트로 해결하도록 했지만 영국이라는 나라의 교육비는 생각보다 만만치 않았으며, 나
모르게 아내가 보내는 금액도 적지 않았기에 생활은 넉넉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큰 부족을 느끼지 못
했던 생활이었다. 그러다가 1990년대 우리나라에 닥친 IMF사태의 충격과 그 후 소규모 가내수공업들
이 노동력이 싼 중국 등으로 몰려가면서 내가 운영하던 사업체까지 무너지게 했고, 그 결과는 폐업이라
는 것으로 나타난 것이다.
폐업이 내게 준 충격은 생각보다 컸다. 모든 것을 정리하고 남은 것으로는 반 지하 한 칸 방 보증금도
되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지만, 여동생의 도움으로 그나마 겨우 반 지하 한 칸 방을 월세로 구할 수 있
었고, 그렇게 내 일상이 무너지고 말았던 것이다. 그렇게 터를 잡은 것이 의정부의 가능동. 언제라도 개
미가 드나들고 쥐가 드나들어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은, 지금 생각해도 참,
그 때부터 내 삶은 무너지기 시작했다. 얼마나 어려웠는가? 예를 들어 주머니에 천 원짜리 두어 장 있는
데, 어디 가야 할 일이 있으면, 그 돈으로 교통비를 할 것인가? 아니면 걸어가고 그 돈으로 라면이라도 사
야 할 것인가?를 고민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아내가 생활 전선에 뛰어 들었으나, 새로운 삶이 정돈되고
자리 잡기란 하 세월이었다.
며칠을 막걸리로 삶을 지탱했다. 막걸리는 배고픔도 어느 정도 해결해 줄 뿐 아니라, 빈속에 마시니 취
기도 빨리 돌아서 여러 잡생각을 제거해 주고 잠을 잘 수 있도록 도와주기도 했으니, 그저 눈뜨면 막걸
리를 마셔서 내 몸이 취하도록 유도했고, 취기가 돌면 누워서 잠이 들기를 기다리곤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