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華城’을 소재로 쓴 詩, 小考
임 애 월
문화는 ‘한 사회 내에서 우세하게 발현하는 가치, 태도, 신념을 나타내며 국가발전을 좌우하는 요소’라고 정의된다.
선대의 문화는 유형.무형의 문화재를 통해 후대로 전수된다. 그러므로 선조들의 얼이 고스란히 스며있는 문화재는 당대를 살아간 사람들의 전통적인 삶의 모습이나 생각, 풍습 등을 되살려 보고 느낄 수 있어 역사연구 등 학술적인 중요성이 매우 클 뿐만 아니라, 그 자체만으로도 풍부한 관광자원이 된다. 이집트의 피라미드나 캄보디아의 앙코르와트, 터키의 트로이 유적, 중국의 만리장성, 나라 전체가 문화유적이라는 인도 등은 그로 인해 외화를 벌어들이는 관광수입이 어마어마하다고 한다.
근래에 국내에서도 지방마다 문화유적에 대한 관심이 높아져 보존과 홍보를 위한 정책들을 세우느라 여념이 없다. 더하지도 말고 빼지도 말고 원형 그대로 보존하는 방법이 가장 최선일 것이다. 가장 한국적인 모습으로 남아있을 때 그 가치가 빛나기 때문이다. 우리의 전통문화를 온전하게 보존하고 계승하는 일은 국민으로서의 당연한 권리이자 의무이다.
수원을 대표하는 문화유적지인 ‘수원華城’은 주지하다시피 正祖大王의 어명을 받은 정약용이 스스로 고안한 거중기 등을 이용, 1794년 착공하여 1796년에 완공한 성이다. 지형적으로는 평지와 산에 걸쳐쌓은 ‘평산성’의 독특한 형태를 지닌 포곡식 산성으로, 군사적 방어기능과 상업적 기능을 함께 보유하고 있으며 실용적인 구조로 되어 있어 동양 성곽의 백미로 평가 받고 있다. 1997년 유네스코가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하여 화성은 이제 명실 공히 세계의 문화재가 되었다.
2003년 화성행궁이 복원되면서 ‘수원華城’은 관광지로써 더욱 각광을 받고 있다.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과 정조대왕 능행차 재연, 무예24기 공연 등, 볼거리가 풍부해져 수원을 찾는 관광객이 더 많이 늘었다 한다. 작년 가을에 1주일 동안 화성행궁 앞에서 <詩와 사진 전시회>를 한국경기시인협회 주관으로 열었다. 그때 유심히 살펴보았는데 화성행궁 관광객들은 주로 단체로 수학여행 온 학생들이 많았고, 가족 단위로 행궁과 성곽 나들이를 하며 ‘화성행궁’의 역사를 다시금 되새기는 모습들도 눈에 띄었다.
그런데 무엇보다 반가웠던 것은 일본이나 중국 등 외국인 단체관광객들이 많다는 사실이다. 우리의 역사를 찾아 외국인들이 방문하는 것은 우리나라의 국제적인 위상이 높아진 일이란 생각이 들어 매우 기분이 좋다.
‘수원華城’’이 국제적인 관광명소가 되어 관광객들에게 더욱 사랑 받기를 기대해 보면서 ‘수원華城’을 소재로 쓴 詩 몇 편을 살펴보기로 하겠다.
시인들이 詩를 쓰는 이유는 부조리한 세상이나, 어떤 대상에 대한 새로운 생각이나 느낌을 문자로 형상화하여 독자들의 상상력을 자극시키고 감정을 서로 공유하기 위함이다. 특히 그 대상이 비극적일 때 시의 위력은 가일층 빛을 발한다. 사도세자의 비극적인 생애를 끝없이 슬퍼하는, 정조대왕의 효심이 짙게 서려있는 ‘수원 화성’을 시인들이 노래하는 까닭도 같은 맥락이라고 볼 수 있다.
여기에서는 주로 경기.수원 지방에 거주하는 시인들의 쓴 시들을 찾아보는데 그 의의를 두었다. 지역의 문화가 활성화되어야 민족문화가 바로 서고, 주체적인 민족의 문화가 정립될 때 국가의 미래는 밝기 때문이다. 또 한 가지 밝혀둘 것은 명칭이 공식적으로 수정된 관계로 ‘수원성’을 ‘수원화성’으로 고쳐썼다.
원릉을 호위하는 일
중대하지만
그것을 경영하는데
백성들을 괴롭히지는 않았네.
성은 평지를 따라
둘러있고,
장대(將臺)는 먼 하늘에 기대어
높이 솟았네.
살받이 규모는
웅장도 하고,
삼군(三軍)의 의기는
호탕도 하구나.
대풍가(大風歌)를
한번 연주하니,
붉은 햇빛
인포(鱗袍)에 빛났네.
<화성장대에서 친히 성조(城操)를 둘러보시고 시를 지어 인중방 위에 쓰다>
을묘년(1795) 윤 2월 행행(行幸) 때 성조를 둘러보시고 정조대왕께서 친히 쓰신 글이다.
정조대왕은 수원에 화성을 축조하면서 백성들에게 강제부역을 시키지 않고 일꾼들에게 모두 품삯을 주었다. 오히려 당시 축성에 참여한 인부들은, 어떻게 하면 일을 덜하고 수당을 받을 수 있을까 하는 요령을 피울 정도였다고 한다. 또 축성 때문에 이주하는 백성들에게도 보상을 넉넉하게 해 주었다고 한다. 정조대왕의 애민사상과 위민정책이 돋보이는 부분이다. 위의 시 속에서도 백성을 함부로 대하지 않는 정조대왕의 애민정신을 읽을 수 있다. ‘원릉을 호위하는 일 중대하지만’ 그 일로 ‘백성들을 괴롭히지는 않았’다는 임금이 다스리던 조선, 백성을 위하는 나라 조선을 새로 세우기 위하여 정조대왕은 이상적인 세계를 꿈꾸었다.
21일이 무슨 날인가.
와서 능소를 살피노라.
이 이슬을 밟으니 사모함이 더욱 간절하도다.
돌아가는 길에 화성에 머물러
비에 막혀 떠날까 말까 하다가
앉아서 밝히고 떠나 지지대에 도착하니
가도 가도 굽은 길에
능소의 생각이 맺히어
오래 바라보다가
느낌을 시 한 수로 기록하노라.
아침이나 저녁이나
사모하는 마음 다하지 못하여
이날에 또 화성엘 왔구나.
부실부실 내리는 것은 능원의 비요
배회하는 것은 재실의 정이로다.
만약에 사흘 밤만 잘 수가 있다면
오히려 원이 七分을 이루겠네.
머리를 드니 더디고 더딘 길에
아바마마 생각하는 구름이 바라보는 속에서 생기네.
<정조대왕께서 능에 오시었다가 돌아가시는 길에 매양 여기에 쉬시매 대를 쌓고 지지대라 새기었다. 乙卯年 거둥하실 때 전교하시기를 매양 省陵하는 길에 미륵고개에 와서는 덩을 멈추고 멀리 바라보기를 오래하며 떠나지 못하고 스스로 방황함을 깨닫지 못하시더니 이번 길에 고개 위 앉았던 자리에 대를 쌓고 지지대라고 命名하였으니 이 다음 거둥길에는 미륵고개 아래에도 지지대 3字를 添入하라고 하시었다.
병진년 거둥 때>
‘가도 가도 굽은 길에/능소의 생각이 맺히어/오래 바라보다가’, ‘만약에 사흘 밤만 잘 수가 있다면’ 등의 구절에서 절절한 사부의 情이 눈물겹다. 마지막 행의 ‘아바마마 생각하는 구름이 바라보는 속에서 생기네’라는 표현법은 처음 읽을 때는 좀 낯설었는데 반복해서 읽어보니 오히려 그런 점이 더 매력적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정조대왕은 아버지 사도세자를 화산으로 모셔두고 백리가 넘는 먼 길을 마다않고 정기적으로 능행차를 감행하였다. 현륭원 행차를 13번이나 하였다 하니 군왕의 신분으로서 대단한 효성이라 하겠다. 위의 시에 나타난 바와 같이 정조대왕은 지지대를 넘을 때쯤 몇 번씩 뒤돌아보기를 거듭하셨다고 한다. 거기쯤에서 돌아가는 행차가 늦어졌다고 고개이름도 지지대라고 하였으니 수원은 효원의 도시라는 이름이 참 걸맞다.
동녘을 품에 안고 밝아오는 수원 땅
팔달산 기슭 아래 백성들이 모여 살고
온 누리 빛이 모인 광교의 푸른 영봉
십여 리 버들 따라 수원천 흐르는데
격양가 드높다 옥야천리 넓은 들
화홍문 칠간수에 무지개 영롱하면
세월도 쉬어가는 방화수류 팔각정
만석거 맑은 호심 희고 붉은 연꽃이여
공심돈 소라각에 명월이 떠오르고
봉화대 힘찬 횃불 나라 앞날 밝힌다
속세를 씻어주는 광교산 계곡 옥수
낙락장송 팔달산에 백화천조 어울리면
어버이 향한 마음 두견으로 울어 예고
현륭 송충 깨문 아픔 비단잔디로 꽃피는데
가이없는 효도의 길 거룩한 발자취여
뒤주 속 슬픈 생애 사도세자 그 통한
애달프다 임의 호곡 따라 울던 강산이여
배봉산 외로움을 마침내 불사르고
하늘 우러러 화산에 모신 어버이 혼 앞에서
극락왕생 길 밝히는 용주사의 목탁소리
백성사랑 어진 뜻 삼천리에 펼치시며
어버이 위한 수원 화성 겨레 얼로 이룩하고
현륭원 오고 가신 능행차 백리 길
지지대 고개 마루 피눈물에 젖을 때
초목들도 목이 메어 고개 숙여 흐느꼈다
돌 하나 기와 한 장 풀꽃에도 서린 효심
동서남북 사대문 깊은 역사 오고 가고
민족의 정기 성곽 따라 화성장대 오르면
연무대 천군만마 함성소리 드높은데
꿈인 듯 생시인 듯 구름 속의 수원팔경
수원천도 크신 뜻 이승에서 못 이루고
불효자 죽거든 부왕 곁에 묻으라
오늘도 가슴 적시는 높고 깊은 임의 말씀
만백성 통곡소리 하늘가에 울렸는데
무릎 꿇어 숨죽인 청산이여 강물이여
머리 풀어 옷감 짜고 뼈 깎아 만든 바늘
살가죽 신을 삼아 어버이께 드리리라
천지의 햇살처럼 임의 숨결 영원한데
청솔 숲 바람소리 부모은중 일깨우는
찬연하다 이 땅의 빛, 아아 수원 화성!
임병호 <아, 수원華城> 전문
임병호 시인이 쓴 ‘수원화성’을 읽으면 통한의 삶을 살다간 정조대왕의 한 생애가 가슴 아프게 다가온다. 시인은 효심이 깊은 그를 작품 속에서 다시금 되살리며 독자들의 불효를 질타한다. ‘살가죽 신을 삼아 어버이께 드리’겠다는 정조대왕의 피맺힌 恨의 절규가, 지금의 나는 내 부모에게 얼마나 불효를 저지르고 있는지 새삼 돌아보고 반성하게 한다.
어린 세손시절 아버지의 불행한 삶과 죽음을 목도한 정조대왕은 부모에 대한 효심이 남달랐다. 당시 복잡하고 미묘한 정치상황 속에서 당쟁에 희생되는 아비를 살려달라고 열한 살의 어린 세손은 석고대죄를 하며 할아버지께 간청하지만, 결국 사도세자는 좁고 어두운 뒤주 속에서 죽어갔다. 그 어두운 정치 현실을 딛고 어렵사리 군왕의 자리에 오른 그는 부친에게 최선의 효를 행하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옛날을 떠올리듯
휘돌아 앉은 모습
달빛에 젖은 가슴
속살로만 삭히는데
한가론
풍경소리가
새록새록 피는 밤
빈 하늘 이는 구름
서리소리 맺힌 이슬
긴 세월 부는 바람
쉬어가던 추녀 끝에
치렁한
정(情)이 되살아
실눈 뜨는 새역사
유 선 <수원화성> 전문
옛일을 노래하는 데는 왠지 시조가 더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든다. 아마 우리 고유의 정형적인 가락에 익숙한 탓이리라.
유 선 시조시인은 위의 시에서 ‘속살로만 삭히는’ 옛정이 ‘서리서리 맺힌 이슬’로 맑게 되살아나 ‘새로운 역사가 실눈을 뜨’기를 담담한 어조로 노래하고 있다.
역사는 우리의 미래와 맞물린다. 과거 없는 현재가 없고 현재를 거치지 않는 미래가 없기 때문이다. 아픈 과거를 거울삼아 앞으로의 새로운 역사가 밝게 펼쳐지기를 소망하는 시인의 염원이 엿보인다.
내 어쩌다 흙이 되고 돌이 되어
이 비 오고 눈 오는 어질머리 천둥번개 다 막아서서
그대의 가슴 한복판에 박힌
칼이 됐나 창이 됐나
오, 어쩌다 나 해와 달 구름이 되어
이 낯선 하늘과 땅 흙먼지 떼 다 말아먹고
그대의 심장 한가운델 흐르는
피가 됐나
맥박이 됐나
하고 많은 날들이 과녁이 되고 표적이 되고
하고 많은 말들이 총성이 되고 화살이 되고
함성은 봇물로 터진다
뛰는 산맥
거친 황야
정운엽 <화성성벽을 오르며> 전문
위의 시는 지금은 故人이 된 정운엽 시인의 <화성성벽을 오르며> 전문이다. 시인은 城과 동일시 된 화자를 불러내어 역사의 한가운데서 느껴지는 감각들을 거칠고 숨 가쁘게 노래하고 있다. 천둥번개, 창, 심장, 칼, 과녁, 총성, 화살, 봇물 등의 시어들은 독자로 하여금 잠시도 생각의 한눈을 팔 수 없도록 긴장감을 조성한다. 스스로 성이 된 듯한 중압감을 맛보게도 한다.
城은 주로 외침에 대비한 방어와 공격을 위해 만들어진다. 인류의 역사는 전쟁의 역사이므로 성은 그 나라 역사의 증표로 남는다. 거기에 사용된 돌이 되고 흙이 된 詩 속의 화자인 나는 ‘칼이 되고 창이 되’어 천둥번개, 역사의 흙먼지 떼를 다 받아 안은 성의 ‘심장’과 ‘맥박’으로 과녁이, 표적이 된다. 아니 그 안의 역사를 지키는 방패가 된다. 심장이 뛰고 맥박이 힘찬 성곽, 모든 城은 살아 숨 쉬는 역사다.
해 뜨는 蒼龍門 앞
연무대 弓士보며
風月 방화수류정
한 잔 술 어떠한가
시 한 수
끊어내어서
華虹水에 띌거나
숭례문보다 더 큰
長安門 얼뜻 돌아
시민공원 마음 담아
공심돈 우러르니
안심도
하늘 끝으로 솟아
단풍으로 붉는다
밝덩굴 <華城을 밟으며> 부분
밝덩굴 시인은 화성을 순례하는 순서로 창룡문, 연무대, 방화수류정을 돌아들면서 수원의 북쪽 문인 장안문 앞에 이르면 ‘숭례문보다 더 큰’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장안문은 조선 최고의 웅장함과 아름다움을 자랑한다. 2층 누각으로 세워졌는데 지붕은 우진각으로 조선시대 국왕이 거처하는 곳 아니면 만들 수 없는 형태이다. 우진각 지붕은 네 면에 모두 지붕면이 만들어진 형태로 용마루와 추녀마루만 있고 내림마루가 없는 지붕인데, 팔작지붕과 비슷하지만 팔작지붕보다 더 높다.
처마 끝에 있는 잡상은 성안으로 들어오는 모든 잡귀들을 물리치는 역할을 한다.
1950년 한국전쟁으로 파괴되었다가 1975년 화성 복원사업으로 <화성성역의궤>에 따라 그 위용을 되찾았다. 지금도 장안문 앞에 서면 그 웅장함에 숙연해진다.
수원華城에는 공심돈이 세 개가 있는데 공심돈은 그 이름도 생소하거니와 조선 축성사에는 없는 낯선 시설물이다. 그 이름처럼 속이 비어있는 돈대란 뜻으로 공격과 방어가 동시에 가능한 곳이다. 정조대왕이 축성과정을 둘러보시다가 직접 지시를 내려 만들어진 것이라 하는데 새로운 개혁을 추진하려면 아마 좀 더 튼튼한 성이 필요했을 것이다.
시인이 이곳에서 ‘안심도 하늘 끝으로 솟’는다고 표현한 이유도 같은 맥락이라는 생각이 든다.
저 우주 사시사철 받쳐 들고 서있네
그 아래 지구별 눈이 부시네.
丁成秀 <수원화성 기와지붕> 전문
기와지붕은 실용성은 물론이고 그 곡선미가 일품이다. 날아갈 듯 날렵한 맵시며 그 가지런한 결이며 넉넉한 품새가 지붕 중에서도 품격이 높다. 그 흔한 흙에서 아름다운 기와가 나오는 것도 경이롭다.
장안문을 비롯한 수원화성의 건축물들은 지붕이 모두 기와이다. 시인의 말처럼 수원화성 기와지붕들이 ‘저 우주 사시사철’ 꿋꿋하게 ‘받쳐 들고 서 있’어서 이 ‘지구별이 눈이 부시’나 보다.
파아란 하늘에
용마루 드리우고
가슴을 활짝 열어
도타운 정 품어주며
겨레의
맥을 이어준
수원화성의 얼굴이여
이홍구 <八達門> 부분
조선의 태조인 이성계가 교통이 사통팔달하는 곳이라고 해서 ‘팔달산’이라는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팔달문은 ‘華城’의 남쪽 대문으로, 남도 쪽에서 한양으로 올라오는 상인들이나 과거보러 오는 선비들 모두 이곳을 거쳐 지나는 곳이었다. 한국전쟁 중에도 다행스럽게 화를 피해 원형 그대로 남아있는 보물이다.
시인은 이곳 팔달문 용마루에서 겨레의 힘찬 맥박 소리를 듣는다. 팔달문은 ‘파아란 하늘’을 이고 ‘도타운 정’으로 수원을 꿋꿋하게 지켜주는 ‘수원화성의 얼굴이’다. 수원의 자랑스런 유산이다. 아니 대한민국의 자랑스런 얼굴이다.
수원화성은 城이 아니다
正祖임금이 쌓은 醒이요 盛이다.
적을 막기 위한 성이 아니다.
적을 공격하기 위한 성이 아니다.
뒤주 속에서 억울하게
돌아가신
아버지 사도세자를
누가 죽게 했는가를
깨닫게 하고자 만든
성이다, 醒이다.
동서남북 사방을 둘러싼
수원화성은
그 길이만큼이나
2백년 삶의 문화를 일궈온 聲이다.
시민의 소리다.
김훈동 <수원화성> 부분
시인은 수원 화성이 ‘城’이 아니라 ‘醒’이라고 한다. 아니 ‘盛’이고 ‘聲’이라고 한다. 시인의 눈으로 보면 화성은 무지를 깨닫게 하는 길이요, 백성들의 아픈 소리이다. 그로인해 더욱 융성한 새 역사를 창조해야할 ‘盛’이다.
정치는 일부 정치인들을 위한 놀음이 아니라, 이 나라 백성들을 위한 사명이기 때문에 늘 각성해야 된다는 당부를 하고 있다.
역사는 지나간 과거가 아니라 앞으로 살아가야할 길을 안내하는 나침반이다. <수원화성> 그 안에 녹아있는 200년의 역사를 소중히 지키고 보존하여 후손들에게 온전히 남겨줘야 한다.
거기서 사람들이
걸어 나와 손을 잡는다
성을 쌓는다 마을을 이루고
삶이 시작된다.
거기서 소리가 흘러나온다
어깨를 끌어안고 노래 부른다
경계가 사라진다
여기에서 그 소리 다시 듣는다
너
나
우리
너 나 우리 있음으로
그 소리 우리에게 다시 온다
오늘 새로운 성이 쌓인다
경계 허물어지고
자유의 자유의 자유의 성이 쌓인다
김우영 <오늘 새로운 성이 쌓인다> 전문
‘수원華城’은 자유의 城이다. 서로의 ‘경계를 허물’고 ‘어깨를 끌어안고’ 다독이며 작은 감동으로 살아가는 행복한 사람들이 사는 ‘마을’이길 시인은 노래한다. 그렇다. ‘수원화성’은 무엇으로부터 무엇을 격리시키기 위한 성이 아니고 모든 부자유스러운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해 쌓은 성, 어쩌면 이산 정조의 이상적인 삶을 꿈꾸었던,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위해 초석을 놓은 유토피아였을 것이다.
거기에 새로운 역사를 심고 가꾸는 일은 현대를 살고 있는 우리들의 몫이다.
아는가, 하늘과 땅은 막막한 이 서러움
대답 없는 허공에 소리치면 소리칠수록
육신은 멍에 족쇄다 예감마저 단절이다
뒤주 속 갇힌 슬픔 차디찬 희망으로 안고
밤이면 초췌한 죽음의 혼 눕다 일어서다
간절히 살고 싶어라 끈끈히 살고 싶어라
그 하늘에 편지를 쓴다 그 땅에 편지 쓴다
칸칸이 고이는 눈물, 삶은 푸르른 형벌
돌벼랑 다 깎인 뼈마디 절규마다 균열이다
진순분 <사도세자가 쓰는 편지>
조선 500년 역사에서 가장 비극적인 삶을 살았던 사도세자는 당쟁으로 점철된 조선역사의 희생물이 되었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3세 때〈효경〉을 읽고, 〈소학>의 예를 실천했다고 한다. 또한 일찍이 높은 정치적 안목을 가지고 있어 부왕인 영조와 함께 정치를 논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천성이 어질고 너그러웠던 사도세자는 대리청정을 하면서 노론과의 정치적 관계가 악화되고 열병에다 홧병, 정신병까지 앓게 된다. 결국 부왕인 영조의 명으로 그는 세상과 단절된 뒤주 속에서 생을 마감한다.
한 나라의 왕자를 뒤주 속에서 굶겨 죽이는 역사, 정치적 손익계산을 해야 하는 정치모리배들이나 하는 짓이다.
언제부터인가 내 마음 속엔
꽃상여 하나 늘 문을 열고 있다
장마전선 눅눅한 시간들이
나를 일으켜 세워
어둔 하늘 어둔 시간 속으로
등을 떠밀면
하릴없이 그를 찾아 나선다
어둠 속에 환상이듯 떠오른 그를
이윽히 바라보다가
잡초 무성한 천변川邊을 서성이다가
내 맘의 꽃상여에 오를 때
기다렸던 듯 쏟아지는 빗줄기
서장대 젖은 불빛 아득한 밤
빗속으로 먼 길 떠나는 내 뒷모습
어 허 어 허
꽃상여 떠나는 소리
천지를 뒤덮는 빗소리 속에
들려오는 레퀴엠
김애자 <방화수류정> 전문
이승에 남은 자들은 망자의 恨이 혹시라도 이승에 남을까봐 꽃으로 상여를 치장하고 마지막 가는 길에 최고의 정성을 기울인다. 그리고 자신들의 만든 완벽한 면죄부에 안도의 한숨을 내려놓는다. 모두 산 자들의 이기심일 뿐이다.
이 시의 화자는 아름다운 방화수류정에서 왜 꽃상여를 보았을까. 비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캄캄한 어둠이 사도세자의 한 서린 뒤주의 환상을 불러내게 했을까.
어쩌면 아름다움의 이면은 쓸쓸하고 외로운 것일 수도 있으리.
그는
오랫동안
꽃을 열망하고 있다
햇빛 쏟아지는
다리 아래
일곱 개의 문을 열고
물보라를 일으키며
몸 안쪽이 환해지는
그녀를 가슴에 품고 있다
김영자 <화홍문> 전문
화홍문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수문이라고 한다. 수문 위에 누각이 있는 유일한 시설물이다. 수원천변에 늘어선 버드나무는 당시에 주위의 경관을 고려해서 심었다고 하니 그 시절 우리 선조들의 풍류를 새삼 느끼고도 남는다.
일곱 수문의 물보라 영롱하고, 물 흐르는 소리와 함께 지저귀는 새소리, 연인들의 속삭임, 거기에 달이 떠오른다면 그야말로 금상첨화, 시인묵객들이라면 누구나 한번쯤은 그 풍광을 노래하지 않을 수 없을 정도이다. 특히 장마철 화홍문 아래로 흐르는 물소리는 답답하던 가슴 속을 시원하게 뚫어주어 ‘몸 안쪽이 환해지’리라.
버린다, 버린다 하면서
정작 네가 버린 게 무엇이냐.
무엇을 버릴지 몰라
배낭 추스르며 헐떡이느냐.
어떻게 버려야 하는지 몰라
이리 온 도회를 헤매다 왔느냐.
용주사 뜨락 저리 굽은 고목을 보니
네 잘난 가슴에도 바람은 불더냐.
이경렬 <용주사에 들렀더니 또 大聲一喝 하신다> 전문
용주사는 정조가 부왕을 화산에 모시고 명복을 빌기 위해 건립된 사찰이다. 당시 왕실, 관료, 백성들이 불사 모금에 동참하였다고 한다. 보경이라는 승려가 <불설대보부모은중경>을 정조에게 바쳤는데 그것을 읽은 정조가 크게 감동해 보경에게 용주사를 창건하게 하였다. 정조대왕은 수원 화산으로 부친 사도세자의 묘소를 천장한 날 밤, 용이 여의주를 물고 승천하는 꿈을 꾸었다. 사찰이름이 용주사가 된 내력이다.
詩의 화자는 버린다고 하면서 끝내 버리지 못하는 미망을 안고 어둠 속을 헤매는 중생들을 질책하고 있다. 불가의 스님들도 다 못 비우는 것을 속가의 사람으로 살면서 비운다는 일은 사실 거의 불가능하다고 본다. 인간의 속성은 원래 끝없는 욕심에 근저를 두고 있다. 그로 인해서 세상은 발전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더 많은 것들을 갖기 위해, 더 나은 것을 얻기 위해, 더 편하게 살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존재가 인간이다. 물론 그래서 종교도 존재하는 것이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욕심을 버린다면 종교도 그 존재가치가 없어지리라. 제 마음 속의 욕심을 비우려 노력하는 일도 사는 일 중의 하나일 것이다.
젊은 알렉산더는 인도를 정복했다. 그 혼자서 ?
- 어느 책 읽는 노동자의 의문, Bertolt Brecht-
주모 치맛자락이
아무리 곱다한들
각시님 눈매보다
고울 리가 있겠소
해송 곱디고운
살결 위에 먹줄을 튕기고
톱날을 대기 전에
다시 빌어 보오
큰 나라 세우시려
큰 재[城] 갈고 다듬으시는
나라님 큰 뜻이야
무지렁이 당신과 내가 어찌 알겠소
다만 빌고 비옵나니
쥐치꽃 가득한 산자락
우리 각시님 젖가슴에
나를 묻어 주소서
김준기 <축성일기(築城日記)> 전문
‘큰 나라 세우시려는 나라님의 뜻’은 잘 모르지만 그 일을 하는 서민들은 하루일이 끝나는 저녁, 주막집 주모의 간드러진 웃음소리보다 고향에 두고 온 각시 생각이 간절하기도 하겠다. 詩 속에 등장하는 화자의 선량하고 순박한 마음이 이상하게도 가슴 가득 다가온다.
과거 역사 속의 축성은 대부분 백성들의 강제부역으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수원 화성 축성은 일꾼들에게 일일이 일당을 주어 완공을 하였다고 한다. 공사과정에서는 오히려 백성들이 품삯을 받고도 땡땡이(?)를 치거나, 다친 척 병원에 입원해 있으면서 수당을 받아내기도 했다고 한다. 요즘도 공사현장은 안전사고가 많은 편인데, 수원 화성은 3년 가까이 진행된 축성과정에서 사고사를 당한 사람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도 놀랍다. 아마도 정조대왕의 백성을 사랑하는 굳은 신념이 하늘에 닿았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금강송 상수리 온갖 들꽃 속에서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절
둥글레 등불 안고 순례객 맞이하네.
조선 팔도 제일가는 吉地 화산
융륭 · 건릉 성스러운 능침에서
종친들 봉향제 산천을 울리면
오늘도 신성한 용주사 범종 여운,
정조대왕 恨 서린 부모은중경 독경소리
고요하게 만인의 가슴 밝혀주고
못다한 부모공경 한되어 돌고 돌아
思父의 情 밀물처럼 스며드는데
오, 해와 달 품은 융릉이여, 건릉이여.
지현숙 <융.건릉> 전문
효심이 깊었던 정조대왕은 사후에도 부친의 능이 있는 지금의 화산 기슭에 묻혔다. 수원시 교외 약 8km쯤에 자리 잡은 융.건릉은 부친 사도세자(장조)와 그의 비 혜경궁 홍씨(헌경왕후)를 모신 융릉(隆陵)과 정조대왕과 그의 비 효의왕후 김씨를 모신 건릉(健陵)을 말한다.
숲이 울창하게 우거져 있어 온갖 새들과 나비들, 벌레들의 보금자리이기도 하다. 정조대왕은 ‘조선 팔도 제일가는 吉地’ 인 화산 현륭원에서 우리나라의 앞길을 밝혀주시리라 믿는다.
발걸음 소리를 삼키는 아스팔트를 걸으며
정조대왕 묵도를 올리는 화산능행차 발소리를 듣는다
구중궁궐에서 화산까지 무슨 생각에 잠겼는가
당파의 화살이 꽂히던
그 아버지의 지치고 한이 맺힌
설움의 소리를 들었는가
능행차 발걸음 소리를 거슬러
당쟁으로 점철된 역사가 흐른다
당쟁의 피로 물들인 강산을 넘는다
지치고 지친 걸음 조선왕조 400년
반도여 이제는, 굴욕보다 아픈 오랏줄
누구의 죄를 물어 동여매고 앉았는가
수기치인 起重架設, 효행과 선각으로 다져 빚은 수원 城
움틀거리며 기다리던 華城의 기운이여
동서남북 천지를 흘러
今昔江山 마디마디에 맺힌 뒤주의 恨을 씻으라
김광기 <華城行宮 200年> 전문
뒤주 속에 갇혀 억울하게 숨져 간 비운의 왕세자 사도세자의 원혼을 달래기 위한 진혼제가 2007년 7월, 인간문화재 김금화 씨의 작두거리 등으로 굿판이 펼쳐졌다. 245년을 구천에서 떠돌던 사도세자의 혼을 왕생극락으로 인도하는 진혼굿이 열린 것이다.
恨 많은 시대를 살았던 사도세자는 이제 ‘당쟁의 피로 물들인 강산을 넘’어 ‘금석강산 마디마디에 맺힌 뒤주의 恨’을 풀고 저승에서 편히 쉬고 계실 터이다.
9월의 하늘을 이고 옥잠화 피었네
하늘의 무게만큼 내려앉아 젖은 오후
누군가 문득 문을 열고 돌아오는 발소리
신풍루 넓은 뜰에 울리는 북소리
아비 잃은 어린 세손 성군이 되셨구나
통한의 思父曲으로 한평생이 흘렀네
만백성 섬기면 그 또한 부모거늘
굽은 등 곧게 펴고 꼭 한번 우러러 뵌
나라님 크신 어깨에 오색 빛 찬란하다
임애월 <화령전 옛뜰에서> 전문
화성행궁 뜰을 거닐다가 화령전 운학각에 이르렀을 때 환청이었을까, 발소리가 들리고 북소리가 울렸다. 행궁 어디쯤 대왕께서 쉬고 계실 것만 같은 착각에 빠지기도 했다. 화령전에 모셔져 있는 정조대왕 어진을 함부로 올려다 뵙기가 왠지 두려워 망설이다가 꼭 한 번 용기를 내어 올려다 뵈었는데 선입감 때문에 환상이 겹쳤는지 몰라도 참말로 오색 빛이 영롱해 보였다.
문화유적을 소재로 쓴 詩들은 시인의 시각을 통해 당대 역사의 중심으로 깊숙이 들어가는 느낌이 들기도 하고, 그 시대를 같이 사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지게 한다. 그런 시들은 은연중에 우리 문화유산들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도록 유도하고 또 사랑하는 마음을 갖게 만들기도 한다. 그런 면에서 지금 살고 있는 고장의 문화적 유산들을 작품으로 형상화하는 일은 어쩌면 시인들의 당연한 사명이기도 하다.
조선조 최고의 성군이며, 개혁군주로 추앙받는 正祖大王은 아버지인 사도세자를 화산에 모시고, 은퇴 후에는 어지러운 당쟁의 소용돌이에서 벗어나 수원에 머물러 살기를 원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안타깝게도 1800년(48세) 승하하셨다.
정조의 죽음을 두고 정약용 등은 ‘독살’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당일, 환후 중에는 한 번 들여다보지도 않았던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가 뜬금없이 나타나 사관들마저 물리치고 회복기에 접어든 정조의 침전으로 약을 들고 혼자 들어간 후 정조가 승하하셨기 때문이다.
시대를 앞서 가던 혁신적인 군주 정조대왕이 더 오래 살아서 신분제도 혁파 등 추진하려던 개혁적 정책들을 수행했더라면 우리의 현실은 지금과는 많이 달라져 있을 것이다.
* 참고문헌
「水原文集」 / 1996. 수원문인협회. 도서출판 同信
「이산 정조, 꿈의 도시 화성을 세우다」/ 2008. 김준혁. 여유당
「한국시학」15집 / 2009. 경기시인협회. 도서출판 AJ