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순(八旬)
― 수원화성과 강과 세월, 그리고 詩學
팔순은 단순한 나이가 아니다. 그것은 한 편의 시가 완성되어 가는 시간이다. 젊은 날의 인생이 흩어진 단어들이었다면, 팔순은 그 단어들이 비로소 하나의 운율을 이루는 경지에 가깝다. 여든 해를 살아낸 사람은 세월이라는 시집을 몸에 품고 있는 존재다.
수원화성을 바라보면 문득 한 편의 서사시가 떠오른다. 성벽을 이루는 돌들은 마치 시의 행(行)과 같다. 돌 하나는 한 해의 기억이고, 돌 하나는 한 번의 눈물이며, 돌 하나는 한 번의 사랑이다. 그렇게 수많은 돌들이 모여 성곽을 이루듯, 수많은 날들이 모여 한 사람의 생애를 이룬다. 시가 언어로 지은 집이라면, 화성은 돌로 지은 시다.
강 또한 시를 닮았다. 시가 한 행에서 다음 행으로 흘러가듯 강물은 상류에서 하류로 흐른다. 젊음은 급류와 같아 소리를 내며 달리지만, 노년은 넓은 강폭처럼 깊고 고요하다. 팔순에 이른 사람의 말수가 적은 것은 왜일까. 이미 너무 많은 개울과 강을 건너왔기 때문이다. 강이 바다 가까이 갈수록 느려지듯, 인간도 삶의 끝자락에 이를수록 사색은 깊어지고 말은 절제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에서 시가 역사를 넘어 보편적인 진실을 탐구한다고 말했다. 역사란 "무엇이 있었는가"를 기록하지만, 시는 "무엇이 있을 수 있는가"를 노래한다. 그런 의미에서 팔순은 한 인간의 역사인 동시에 한 편의 시다. 지나온 사실들보다 그 사실들 속에서 길어 올린 의미가 더 중요해지는 나이이기 때문이다.
젊은 날에는 성공이 한 편의 시인 줄 알았다. 그러나 팔순에 이르면 실패 또한 시의 한 연(聯)이었음을 알게 된다. 상실은 은유가 되고, 눈물은 운율이 되며, 기다림은 여백이 된다. 시인은 언어의 여백을 사랑하듯, 노인은 삶의 여백을 사랑하게 된다. 비어 있는 시간이 더 이상 공허가 아니라 깊이가 되는 것이다.
수원화성의 성곽길을 걸으며 생각한다. 성벽 위를 스쳐 간 바람들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 강물 위에 비쳤던 수많은 달빛들은 어디에 남아 있을까. 아마도 그것들은 사라진 것이 아니라 기억이라는 시어(詩語)가 되어 인간의 영혼 속에 머물고 있을 것이다. 시가 순간을 영원으로 바꾸듯, 삶 또한 기억을 통해 시간을 초월한다.
팔순은 그래서 완결이 아니라 퇴고(推敲)다. 시인이 마지막 행을 다듬듯, 노인은 자신의 생애를 천천히 되읽는다. 무엇을 사랑했고 무엇을 놓쳤는지, 무엇을 얻었고 무엇을 잃었는지를 돌아본다. 그 과정에서 인생은 점점 더 간결해지고, 더욱 아름다워진다.
결국 팔순의 형이상학은 한 편의 시에 대한 이야기다. 수원화성은 그 시의 구조이고, 강은 그 시의 운율이며, 세월은 그 시의 잉크다. 그리고 팔순의 인간은 오랜 세월에 걸쳐 자신을 써 내려온 시인이다. 여든 해의 삶이란 한 권의 시집이 아니라, 한 편의 대하 서사다. 아직도 바람은 성곽 위를 지나고 강물은 흐른다. 그 흐름 속에서 노인은 조용히 미소 짓는다. 마침내 자신의 삶이 한 편의 시였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임병호 이사장님의 경외로운 팔순을 축하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