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랄다와 거인 - ![]() 토미 웅거러/비룡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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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랄다와 거인 어린 아이를 아침으로 잡아먹는 괴믈. 이 괴물 때문에 도시의 아이들이 모두 사라졌다. 이 괴물의 존재를 알지 못하는 제랄다. 음식만들기를 제일 잘하는 제랄다는 도시와는 조금 떨어진 곳에 농부인 아버지와 살고 있었다. 일년에 한번 읍내에 물건을 팔러가기 전 날 아버지가 아파, 제랄다가 대신 장에 가게된다. 장에 가는 제랄다 앞에 나타난 괴물. 하지만 괴물은 며칠을 굻어서인지 힘없이 제랄다 앞에 미끄러져 떨어진다. 굶주린 괴물이 불쌍해 보인 제랄다는 팔려고 가져온 것들로 여러 가지 음식을 해서 괴물앞에 내놓는다. 제랄다의 멋진 음식솜씨에 반한 괴물은 제랄다를 성으로 데리고가 행복하게 살았다. 그후 괴물은 도시에 나타나 아이들을 잡아먹는 일도 없고, 도시의 아이들은 더 이상 숨어살 필요가 없게 되었다. 결국 제랄다는 괴물과 결혼까지 해 아이를 낳고 행복하게 살았다는 이야기다. 토미 웅거러의 작품에 등장하는 것들은 아이를 잡아먹는 괴물, 고양이와 개의 운명을 동시에 가진 플릭스, 징그럽고 위험하게 느껴지는 뱀.... 공존하는 것이 어려운 존재들이다. 하지만 그림책을 보며 서로 다른 것이 어떻게 서로를 이해하고 돕고 살아가는지에 대해서 늘 고민하게 만드는 것 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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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본성을 탐구한다.
소박한 일상이 아니라 인간 본성과 도덕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단순성의 덕목을 획득하고 있는 토미 웅게러의 <제랄다와 거인>을 암시와 다의성을 중심에 놓고 살펴보도록 하자.
옛날에 사람 잡아먹는 거인이 살았는데 특히 어린아이 요리를 좋아했다. 마을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음식 만들기를 좋아하는 제랄다가 살고 있었는데 어느 날 혼자 장에 가다 거인과 만난다. 굶주린 거인은 허둥대다 다쳐서 정신을 잃고 거인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는 제랄다는 거인을 돌보고 장에 내다 팔 물건으로 음식을 차려 준다. 어린아이 요리보다 훨씬 맛있는 음식을 먹게 된 거인은 사람 잡아먹는 일을 그만두고 제랄다와 함께 살며 동네 아이들에게 사탕을 나눠 주는 마음씨 좋은 아저씨가 된다. 세월이 흘러 잘 먹어 보기 좋아진 거인은 수염도 깎고 처녀가 된 제랄다와 결혼하여 아이도 낳고 죽을 때까지 행복하게 산다.
<제랄다와 거인>은 서스펜스가 있고 유머가 있고 식욕을 자극하며 해피 앤딩이다. 사람을 잡아먹는 무시무시한 거인과 음식 만들기를 아주 좋아하는 천진하고 어린 제랄다라는 대조되는 두 주인공의 설정과 그들이 만들어 내는 사건은 분명하고 단순하다.
본문 첫 장면을 보자.
시커먼 배경에 험상궂은 남자가 칼을 들고 서 있고 앞쪽에 철장을 잡고 있는 사람 손이 보인다.
옛날에 사람을 잡아먹는 거인이 혼자 외로이 살고 있었습니다. 사람 잡아먹는 거인들이 대부분 그렇듯, 이는 날카롭고, 수염은 가시처럼 뾰죽뾰죽, 코는 큼지막했어요. 물론, 기다란 칼도 갖고 있었고요. 괴팍스런 성미에, 먹성은 엄청났답니다.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는 것은요, 아침밥으로 어린아이를 잡아먹는 것이었어요.
그림은 만화적인 선에 가벼운 채색으로 주인공만 부각되어 있어 독자를 두려움에 짓눌리게 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거인의 특징은 그림을 통해 분명히 드러나는 듯하다. 눈의 표정만으로도 그는 나쁜놈으로 보인다. 큰 얼굴에 작은 머리와 짧은 목을 가졌다. 머리가 나쁘고 잔인한 체형이다. 이마는 짧고 코는 큼지막하고 큰 입에 듬성한 이빨이 다 보이고 수염과 눈썹은 기분 나쁜 회색이며 온몸에 털이 거칠게 나 있다. 어두운 배경에 빨간 두건도 거부감을 일으킨다. 전체 줄거리를 생각하며 문장과 함께 다시 보자.
옛날에 - 속표지에 성이 나와 있다. 사람 잡아먹는 거인이 그런 성에 살며 사람들이 그런 옷을 입던 그런 시절을 지칭한다. 그 이상의 시대 배경은 이 이야기에서 필요 없다.
사람을 잡아먹는 거인이 - 이걸 그림으로 표현했다면 혹은 칼을 들고 서 있는 거인 앞에 공포에 떠는 사람이 나왔더라도 훨씬 무서웠을 것이다. 이야기의 결말에 거인은 좋은 사람으로 변한다. 용서하기 힘들 정도로 잔인성을 각인 시키면 곤란하니 그림은 갇힌 사람의 손만으로 충분하다.
혼자 외로이 살고 있었습니다. - 외로움은 사람을 훨씬 잔인하게 만드니까 강조의 의미도 있지만 결말에 가서 더 중요한 의미가 있다. 외로움도 풀어야할 숙제 중의 하나로 제시된 것이다. 작가는 거인을 결혼시켜 아이를 낳아 가족을 꾸리는 결말로 이 숙제를 푼다.
사람 잡아먹는 거인들이 대부분 그렇듯 - 사람 잡아먹는 거인이 혼자가 아니란 이야기다. 이렇게 쓴 이상 다른 거인들의 문제도 이야기 속에 언급되어야 한다. 어딘가에 또 있을지도 모르는 거인에 대한 공포까지 다 없애줄 자신이 없다면 이런 문장을 써서는 안된다. 이렇게 써 놓고 다른 거인을 언급하지 않으면 아이들은 내심 불안할 수 있다.
이는 날카롭고, 수염은 가시처럼 뾰죽뾰죽, 코는 큼지막했어요. - 거인은 잔인성에 걸맞는 외모를 가졌다. 여기서 이 외모는 고정 불변인 것처럼 보이지만 결말에 가면 이 흉측한 외모가 잘 먹어 보기 좋아진다. 뾰죽뾰죽한 수염은 깎고 두건도 벗는다. 선량하게 웃으니 동일 인물인데도 인상이 달라진다. 해결되기 어려운 문제도 처음에 제기한 이상 결말에서 꼭 풀어줘야 한다.
물론, 기다란 칼도 갖고 있었고요. - 그림에도 칼을 들고 있는데 문장으로 반복한 것 같지만 마지막 장면에 자기 아들이 등뒤로 숨긴 칼을 보면 거인들의 폭력성의 상징으로 사용하기 위해 강조해 둔 것을 알 수 있다.
괴팍스런 성미에, - 글이나 그림으로 이런 성격을 자세히 표현하면 사건의 긴장감이 떨어진다. 괴팍한 성격이 사건을 일으키는 핵심은 아니기 때문에 재미있는 생각이 떠올라도 길게 언급할 순 없다. 그래도 성미에 관해서 덧붙여 두어야 나중에 사탕을 나눠주는 친절함이 부각된다.
먹성은 엄청났답니다. - 식욕은 아이들의 본능이다. 아이들은 이 잔인한 인간에게서 무의식적으로 자신과 동일한 부분을 발견할지도 모른다. 이야기의 맥락에서도, 음식 만들기를 아주 좋아하는 처녀와 짝이 되기 위해서도 엄청난 먹성은 필요하다.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는 것은요, 아침밥으로 어린아이를 잡아먹는 것이었어요. - 제랄다와의 만남을 더 극적으로 만들면서 아이들에게 자신이 연관되어 있다고 느끼게 한다. 위협의 직접적인 대상이 자신인 것이다.
이 정도면 뒤의 사건이 궁금하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렇게 <제랄다와 거인>은 마치 옛이야기처럼 간결하고 힘있게 사건을 밀고 가면서 그림책에서 갖추어야 할 글과 그림의 조건을 갖추고 있다. 좋은 그림책의 문장은 위의 글처럼 그림과는 다른 역할을 담당해야 하고 읽기 편해야 하며 추상적이 아니라 구체적이고 전체의 의미망을 구축하는 데 기여하고 있어 한 단어도 삭제하기 어렵다.
제랄다를 소개하는 장면을 보자.
멀리 떨어진 어느 골짜기, 숲 속 한가운데서
한 농부가 외동딸 제랄다와 함께 살고 있었어요.
두 사람은 사람 잡아먹는 거인 이야기를 전혀 듣지 못했습니다.
“멀리 떨어진”이란 배경을 설명하기 위해 원경으로 잡은 풍경 그림을 쓴다면 재미없는 장면이 된다. 나무들 뒤의 어둠이 이곳이 고립되어 있다는 걸 느끼게 하고 설명은 글로 대신한다. 아빠와 동물들과 제랄다는 평화롭게 사는 것으로 보인다. 거인이 사는 공간이 어둡고 아수라장이라면 이곳은 평화롭고 따뜻하게 대비되어 보이는 게 중요하다. 제랄다에게 엄마가 없다는 직접적인 언급은 없다. 그러나 제랄다는 부엌의 주인이어야 하기 때문에 엄마가 없어야 한다. 모든 아이들이 요리를 좋아하지만 그건 엄마의 일이다. 엄마가 없는 제랄다는 요리를 좋아하는 것만이 아니라 요리를 척척 할 수 있다. 필요 없는 인물은 아예 언급도 하지 않는다. 중요한 건 세상 물정 모르고 천진하고 기특한 제랄다다.
주인공이 둘 다 소개되었으니 두 사람이 만나야 한다. 제랄다를 혼자 장에 보내어 거인과 마주치게 하기 위해 작가가 아버지를 병이 나게 한다. 그런데 그 병이 난 이유가 제랄다가 만들어 준 사과 만두를 너무 많이 먹었기 때문이다. 독자는 사과 만두란 건 먹어본 적이 없으니 제랄다가 개발한 새로운 음식이라고 생각할 것이고 너무 맛이 있어 많이 먹었을 것으로 짐작하게 된다. 이것은 아무리 맛있는 음식도 엄청난 식성으로 먹어 주지 않으면 탈이 될 수 있다는 얘기고, 어쩌면 음식 만들기를 아주 좋아하는 사람 곁에는 먹기를 아주 즐기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는 암시로 볼 수 있다.
둘이 만나는 장면이 긴장감을 고조시키는 듯하더니 그 다음 장면부터 긴장감이 아니라 유머로 독자를 끌고 간다.
굶주림에 지친 거인은 허둥대다가 바위에서 미끄러 떨어져 발목을 삐고, 코피를 흘리며 정신을 잃고 쓰러진다. 제랄다가 불쌍하다며 거인을 보살펴 주는데도 거인은 끙끙거리며 어린아이 요리 타령만 하고 있다. 당나귀와 돼지도 무슨 일인가 싶어 거인을 내려다보고 따라오던 도마뱀도 거인 발에 붙어 구경한다.
거인이 뭐라고 지껄이든 상관없이 천진한 제랄다는 굶주린 사람을 보자 동정심과 실력을 발휘하여 요리를 시작한다. 거인은 하체 일부를 제외하면 화면 밖으로 밀려나 있고 앞 화면에서 거인을 바라보던 돼지는 바베큐가 되었다. 무섭던 거인이 어처구니없이 바보스럽게 구는 것도 재미있지만 사건과는 상관없이 그림의 세부에 표현된 유머도 재미있다. 제랄다는 요리를 하면서 신이 나서 거인 쪽을 바라보는데 당나귀와 새는 뜨악한 표정으로 제랄다와 바베큐가 된 돼지를 바라보고 있다. 동물들의 입장에서는 사람보다 돼지가 가까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다음 화면에도 비슷한 암시가 있다. 달팽이 요리 밑으로 살아남은 달팽이 한 마리가 기어서 도망가고 쥐가 놀란 표정으로 풀잎 사이에서 두 사람을 보고 있다. 먹고 먹히는 관계를 다시 생각하라는 건가? 아니면 뭐든 잡아먹는 인간이 자기 종을 잡아먹는 일에 느끼는 공포를 비웃는 건가? 아니면 난데없이 나타난 메뉴처럼 그저 웃자고 그러는 건가? 어쨌든 중심 이야기가 재미있기 때문에 처음에는 눈치채기 어려운 장치인데 이걸 발견하고 나면 토미 웅게러가 혼자 얼마나 키득거렸을지 짐작이 간다.
낙천적인 꼬마 제랄다가 거인의 제의를 받아들여 성에 가서 요리를 하고 또 하더니 진귀한 요리가 양쪽 화면에 쫙 펼쳐진다. 어른들은 이 장면을 되풀이해서 읽고 싶지 않지만 아이들은 다르다. 매번 빠짐없이 읽고 확인하고 싶어한다. 아무리 먹을 것이 넘쳐나는 시절이라도 아이들에게 먹을 것은 가장 중요한 관심사다.
이웃에 사람 잡아먹는 거인들까지 모두 변화시킨 후에 마을의 위험은 사라지고 거인은 이제 마을 아이들에게 사탕을 나눠주는 친절한 아저씨가 되었다.
그런데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제랄다와 거인이 서로 사랑하여 결혼해 버린다. 더 만족스러우면서 더 많은 해석의 여지를 열어두는 결말이다. 작가는 자기가 창조한 비극적 인물인 거인을 행복하게 만들기 위해 많은 계산을 해 왔고 읽는 사람도 이 결말이 만족스럽긴 하다. 그러나 우리는 묻게 된다. 그렇다면 죄라는 건 상황 변수에 의한 것인가? 처음에 거인은 용서받을 수 없는 식인귀 같은 존재였다. 거인이 죄를 씻기 위해 제랄다를 만난 것도 아니다. 그리고 여성의 입장에서 제랄다가 성 역할에서 보수적 여성의 미덕을 두루 갖추고 있다는 것도 찝찝한 대목이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재미있는 요소를 또 발견한다. 두 사람이 낳은 아이 중에 오른쪽 앞에 등을 보이고 있는 아이는 칼과 포크를 등쪽으로 숨기고 태어난 지 얼마 안되는 어린 동생을 올려다보고 있는 것이다. 아이고 참......

